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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모르는 나, 시인도 모르는 시
- 주영란이 시를 대하는 품격
이동희
시인, 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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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란 시인의 ‘체험적 시론’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현재의 내 위치가 바뀌더라도 이중의 소외를 느낀대도 스스로 약자가 되어 살아가고 싶다. 내가 나를 잘 모르고 살 듯 시도 모르면서 시라고 할 만한 시도 없으면서 시라고 읽고 시를 쓰고 있다.”(주영란 ‘체험적 시론’ 「허공은 언제나 낯설음을 불러일으킨다」에서)
주영란 시인은 ‘체험적 시론’에서 자신이 견지하고 있을 시의 지향성과 시인의 위상에 대해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런 진술을 통해서 주 시인이 지향하는 시세계를 엿볼 수 있는 세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런 발견과 단서는 그가 고른 ‘대표 시’와 그가 선보인 ‘최신작’을 통해서 조응하는 단계를 거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한 시인이 견지하고 있을 내밀한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창문을 발견한 것만큼이나 의미 있는 자기피력이 아닐 수 없다.
첫째는 시인 스스로 약자가 되어 살고 싶다는 것
둘째는 시인 스스로 내가 나를 모르고 산다는 것
셋째는 시도 모르면서 시를 읽고 쓰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세 가지 진술은 비록 주 시인이 아닐지라도 창작을 염두에 둔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공감을 넘어 시인의 위상에 대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으며, 나아가 시의 궁극적인 지향성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읽힐 만하다.
시는 승자를 위한 찬가가 아니라, 패자를 위한 노래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자면 주영란 시인이 말했듯 ‘스스로 약자’가 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시인은 무관의 제왕이어야지, 세속적 권력과 물질적 금력을 양손에 거머쥔 빅브라더 (big brother)가 될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타고르(Rabindranata Tagor. 1861~1941.인도)의 시 ‘삶-패자의 노래’는 이런 시의 지향성, 시인의 위상에 대하여 노래한 걸작으로 음미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퇴각의 길목을 지키면서 패자의 노래를 부르라고 / 선생은 나에게 요구하나니, / 패자란 남몰래 선생이 사랑하는 약혼녀이기 때문이어라. / 어두운 빛 너울을 그녀가 쓰고서 여느 사람에게 얼굴을 가리우나, / 가슴 안에서는 어두움 속에 빛나는 보배를 간직하였도다. / 그녀는 밝은 햇빛에 버림당했거니와 밤에는 반짝이는 눈물 흘리며 / 이슬에 젖은 꽃 손에 들고 바라고 있네 ./ 신에게 광명을 가져다주기를 말없이 눈을 내리 감은 채로/ 바람과 함께 불평의 소리 나도는 그의 집을 그녀는 뒤로하였네. / 그러나, 별들은 고욕을 나타내는 사랑스런 얼굴을 지닌 / 그녀의 영원한 사랑의 노래에 억양을 준다. / 고독의 방문이 열렸구나, 부름이 왔네. / 그래서 가슴을 두근거리네, 어두운 가운데서, / 뜻 있는 시각의 불안 가운데서> - (타골 「삶-패자의 노래」 전문)
비록 이 시가 일제강점기 식민노예 상태에서 허덕이고 있는 조선인들을 향한 타골의 측은지심의 발로이거나, 혹은 동병상련의 시심이 발동했겠지만, 시가 지향할 바가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을 부추기거나, 강탈자의 노획물을 찬양할 수 없는 게 아니겠는가. 더구나 시인이 비록 식민 지배를 받는 같은 처지라 할지라도 ‘스스로 약자’의 편에 서야 비로소 약자의 고통과 한숨을 노래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 뜻에서 시인은 ‘퇴각의 길목을 지키면서 패자의 노래’를 부르는 스스로 약자요, 스스로 패배자가 되지 않고서는 부당한 승리를 질책할 수 없는 게 아니겠는가.
‘시인은 나를 버리고 타자가 되어야 한다.’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하고 서른일곱 살의 짧은 생을 마감했으나, 오히려 사후에 더욱 진가를 찾은 평자들이 그를 일컬어 ‘견자(見者)의 시인’이라는 랭보(Arthur Rimbaud. 1854~1991.프랑스)는 한결같이 의도적으로 [나를 버리고] 국외자가 되는 것이 견자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고 보았다.
“저는 지금 최대한 타락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왜냐고요? 저는 시인이고 싶고, 또 견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전혀 이해할 수 없을 것이고, 제가 설명해드릴 수도 없을 것입니다. [중략] ‘나’는 하나의 타자입니다. 나무가 자신을 바이올린으로 여기더라도 어쩔 수 없고 또 자기도 모르는 것에 궤변을 늘어놓은 분별없는 자들 따위는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오정국『현대시 창작시론』) 랭보가 중학교 재학 시절 담임교사였던 조르주 이장바르에게 보내는 편지글이다.
그러고 보면 타고르가 말한 ‘패자의 노래’를 부르는 시인이나, 랭보가 편지에서 밝힌 ‘견자가 되기 위해 먼저 타자’가 되려는 것은 일맥상통하는 경지에 있다. 시인이 서야 할 자리에 대하여, 혹은 시인이 가져야 할 의식에 대하여, 시인의 자기 인식에 대하여 두 시인은 분명한 포인트를 설정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서 주영란 시인이 밝힌 ‘스스로 약자가 되어 살고 싶다’는 바람 또한 패자를 위한 노래를 부르는 시인이나, 스스로 타자가 되려는 시인의 경지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는 점이 대견하다, 아니 마땅하다. 시인이 서야 할 자리는 고대광실 풍요의 자리가 아니다. 시인이 지녀야 할 의식은 고관대작 채찍을 휘두르는 존재일 수 없다. 무뢰한의 폭력에 울고 있을 패자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 고통스럽더라도 누군가의 타자가 되어 나를 ‘바이올린’으로 여기는 자들의 궤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그게 바로 ‘약자’의 의지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다. 바로 시인의 이름에 값하는 존재인 것이다.
주영란 시인은 ‘스스로 약자 - 패자’가 되겠다는 선택을 어떻게 시로 형상화하고 있는가,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의 시에 이런 작품이 있다.
9월 어느 강가를 걷는다 발자국 말할 수 있다 말할 수 없는 물 속 깊은 당신 속, 비가 오지 않아 물이 마르고 가재, 다슬기 바닥까지 드러날 때쯤 알까, 모르면서 그냥 스쳐 지나가고 아는 척, 눈인사도 아직 말도, 강물에 띄우지 않았는데 강물이 손 한 번 흔들어 주지 않았는데, 지나칠 때 슬쩍 손끝이 닿는다 갈대밭 지나 댐, 이분음표 숨, 수문에 붙어 발목까지 시리다 까치발 들고 고개 내밀다 길게 쓴 문장, 아무 말 던지지 못한 그림자 떨고 있다 갈대는 마른 몸, 씻어내고 다시 말린다 저 건너 날아오는 눈멀고 귀먹은 새, 내민 입을 삼키고 숨죽이고 선 채로 잠든다 갑자기 다가오는 먹구름, 비바람 휘몰아치자 솟구치는 강물, 튀어 오른 물고기 그 누구 위해 잔(盞) 넘치는가
- 주영란 「즐거운 몰락」 전문
문학의 진실성은 사람에 대한 새로운 안목과 세계의 감추어진 진면목을 찾는데 있다. 그 어떤 포즈[형식]를 취하거나, 그 어떤 어조[장르]로 말하건 그것은 결과적으로 인간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요 해석일 수밖에 없다.
9월의 강가에서 시적 자아는 스스로 몰락하는 갈대가 된다. ‘즐거운 몰락’을 감내할 수 있는 의식적 존재는 시인 말고 달리 있을 수 없다. 반어로 함축해 내는 의미망의 지평에는 ‘스스로 몰락’하는 현대문명의 어두운 그림자와 이를 통해서 ‘스스로 몰락’하는, 약자로서의 시인의 자아를 동시적으로 함축해 내는 시인의 영상이 어른거린다.
생태적 삶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 설령 자연보호네, 친환경이네 하면서 인간의 삶에 절대불가결한 자연-환경을 입에 올리면서도 우리는 환경-자연의 몰락을 외면하거나 태평하게 바라만 보고 있다. 마치 스스로 세계와 인간의 ‘몰락’을 헤아리는 카운트다운(countdown)이라도 하는 모양새다. 남의 이야기로 흘려듣고 만다. 그런 인간의 무의식-태평스런 문제의식을 한 마디로 규정하라면, ‘즐거운 몰락’ 말고 마땅한 언사를 생각하기 쉽지 않다. 시인은 그것을 포착해 내고 있다.
마침 스웨덴의 <글로벌챌린지재단 - GCF>은 세 번째로 낸 2018년 보고서에서 전 지구적 재앙을 부를 수 있는, 종말적 재앙의 후보 10가지를 발표했다. 핵전쟁, 생화학전, 기후변화, 생태계 붕괴, 전염병, 소행성의 지구충돌, 화산 폭발, 태양 지구공학, 인공지능 그리고 아직 등장하지 않은 위험 등을 꼽고 있다.(경향신문, 2018.12.24.자)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소행성 충돌과 화산폭발을 제외한 8가지가 인간의 활동-즉 인간이 자초하여, 세계 인구의 10% 이상을 죽음에 이르게 할 위험이 초래될 수 있다는 것이다.
주영란 시인이 구사하고 있는 시적 어조로 말한다면 ‘즐거운 몰락’을 자초하는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가재, 다슬기 등 강의 바닥까지 드러나 말라가며 생명체가 살 수 없으면 인간도 살 수 없다. ‘강물이 손 한 번 흔들어주지 않았는데…’ ‘이분음표 숨’을 할딱거리며 숨가빠하는 생명체들의 신음과 아우성도 못들은 체한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오히려 그런 참상을 신나는 발전이요, 신문명이라며 설레발을 치는 격이다. 마치 침몰하는 타이타닉 위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실내악을 연주하던[죽음에도 굴하지 않던 초연한 음악가들의 장인정신과는 언감생심 비교할 수도 없지만…, 형국으로만 보자면] 그 모습과 닮은꼴이 아니겠는가.
[아직은] 우주의 유일한 푸른 별이 침몰하고 있는데, 눈멀고 귀먹은 새들은 지구호의 선상 위에서 실내악을 연주하는 꼴은 아닐는지. 그러므로 ‘저 건너 날아오는 눈멀고 귀먹은 새’는 다름 아닌 바로 그런 참상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른 문맹의 인간임과 동시에 그런 재앙에 버금가는 파괴와 환경오염으로 인하여 ‘눈멀고 귀먹은’ 시적 자아라는 이중적 의미망을 형성하게 된다. ‘스스로 약자’가 되지 않고서는 다다를 수 없는 시적 정서의 결집이다.
생명의 바다가 주는 생명의 양식 - ‘튀어 오른 물고기’는 ‘그 누구 위해 잔 넘치는가’ 두 번 물을 것도 없다. 자신이 디디고 선 생명의 터전이 망가지고 있음에도, 몰락하는 전 지구적 재앙이 시시각각 몰려오고 있음에도, 자신만의 행복의 잔에 그 메말라가는 강에서 튀어 오른 수확물만 탐닉하는 인간과 문명의 빈약한 세계 인식이 시적 화자를 아프게 한다. 현대의 ‘약자’들을 힘들게 한다.
그런 현대문명의 위기를 모르쇠로 일관하는 한 우리는 누구나 ‘눈멀고 귀먹은’ 병든 새일 수밖에 없음을 주영란 시인은 ‘스스로 약자’가 되어 관망하며 노래하고 있다. 비록 패자의 노래일망정, 그래도 견자見者가 되어 시대의 문맹을 기록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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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란 시인은 스스로 ‘내가 나를 모르고 산다’ 고 했다. 어찌 주 시인뿐이겠는가? 석존 이래 동양의 모든 의문은 여기에 모아져 있고, 그리스 이래 서양의 철학적 질문도 여기에 기울어져 있다. 나는 나를 모른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고 소크라테스는 그리스의 오랜 격언을 빌어서 ‘모름의 모름’에 대하여 ‘답변 아닌 답변’을 하고 있다. 내가 누구인지 묻는데, ‘너 자신을 알라’고 대답한다면, 결국은 모른다는 것이나 진배가 없다. 모른다는 것을 철학적(?)으로 대답한 격이라 할 수밖에 없다.
어찌 소크라테스뿐이겠는가? 동양의 지혜가 결집된 불가(佛家)에서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참나(眞我)는 어디에 있는가?’란 물음에 ‘진공묘유(眞空妙有)’일 뿐이라고 대답한다. 텅 빔 속에 내가 있다는 것이니, 소크라테스 식으로 보면 결국 ‘모름의 모름’에 대하여 ‘답변 아닌 답변’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이 불가의 사유는 그래도 사색의 끈을 제공하고 있어 다행이다. 사람이 사람일 수 있는 것이 바로 오온(五蘊)이 있음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이 바로 오온의 정체다. 색(色) - 몸, 수(受) - 감정, 상(想) - 생각, 행(行) - 의지, 식(識) - 앎이 곧 사람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아침저녁으로 변한다(人心朝夕變)’고 하듯이 이 다섯 가지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온전히 그대로 유지되는 것이 없다. 모두가 변하고 변하여 그대로 있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오온이 ‘나’라고 하는 실체인데, 그 실체가 아침에 변하고, 저녁에도 변하고 있으니 실체인 나는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인간의 몸은 활발한 세포활동으로 1년 전에 먹은 음식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1년 전의 나는 나에게 없는 셈이다. 몸(色)이 이정도이니 다른 것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다. 감정(受)만큼 자주 변하는 카멜레온이 또 어디 있겠는가? 뜬 구름 잡는 격인 생각(想_의 분출이야말로 참으로 변화무쌍하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웅변해 주듯이 의지(行)만큼 믿을 수 없는 ‘사람됨’이 또 무엇이겠는가? 앎(識)이야말로 시간이 지난만큼 가치가 떨어지는 요소다. 묵은 지식은 위험한 시한폭탄이다. 그만큼 나를 형성하고 모든 요소들이 변하여 나다운 나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공묘유일 뿐이다. 실체가 없는 듯하면서도, 실은 현실의 나를 의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삶을 사유하는 것은 철학의 사명이다. 그 철학적 사유에 옷을 입히고 구체성의 피가 흐르게 하는 것이 바로 문학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철학자 다음으로 ‘내가 누구인가?’ 궁금해 하는 사람을 들라면 ‘시인’을 빼놓을 수 없다. 시인이 쓴 시를 아주 쉽게 정의한다면, “나는 바로 이런 사람이다”를 밝힌 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주영란 시인이 스스로 ‘내가 나를 모르고 산다’고 고백하는 것은 시인다운 시인이라면 당연한 고백일 수 있다. 그러므로 주영란 시인의 시는 ‘내가 모르는 나를 찾아 헤맨 기록’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런 기록[시적 진술] 중에 다음 작품에 주목해 봤다.
방바닥에 뒹구는 마른 얼굴 위로
걸어 놓은 꽃무늬 원피스 떨어진다
방안이 환하다 꽃이 천 조각인지 모르고
화단을 만들고 나비를 유혹한다
더듬이가 한 장 한 장 꽃잎을 넘긴다
입 언저리에 묻은 꽃가루 달고
하루치의 단어를 끌어 모은다 꽃길 맴돌다
촘촘히 짜인 거미줄에 왼쪽 날개가 낀다
동면의 시절 배고픈 필생의 이야기가 줄을 탄다
시를 포기하고 허공에 떠도는 문장을
오른쪽 날개에 구겨 넣고 꽁무니 흔든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 마지막 언어가 이슬처럼
줄 끝에 맺힌다 낙하하는 나비의 눈물을 본다
잠 덜 깬 몸이 둥글게 말린다
외줄 타다 멈춘 듯 지워지지 않는 한 낮의 이탈,
- 주영란 「툭, 떨어지는 원피스」 전문
앞에서 언급했던 오온을 시로 풀어낸 느낌이 강하다. 시인 스스로 고백한 ‘내가 나를 모르고 산다’고 했듯이, 이 시의 화자는 그런 나를 다음과 같이 탐색하는 중이다.
나는 방바닥에 뒹구는 마른 얼굴이다. 이를 축약하면 ‘나는 (마른) 얼굴’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분별되는 것은 바로 ‘얼굴’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른’ 얼굴이다. 마른 얼굴에 투영되는 ‘나’의 모습이 오버랩 된다. 사람은 얼굴만 가리면 분별할 수 없다. 목소리로 먹고사는 사람 - 가수에게 가면을 씌워 벌이는 ‘복면가왕’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지 않은가? 패널들이 가면 속의 정체를 밝혀보려 하지만, 얼굴이 가려 있어 곤란하기만 하다. 이 시의 화자는 ‘마른 얼굴’의 누구이다. 그러므로 복면한, 알 수 없는 누구일 따름이다. 시적 화자 = 시인이라는 가설을 두고 볼지라도 난감하기만 하다. ‘내가 나를 모른다.’
그 얼굴 위로 ‘꽃무늬 원피스’가 떨어진다. 얼굴 다음으로 ‘옷이 날개다.’ 의관을 정제한다고 한다. 몸에 걸친 그 옷(衣)과 머리에 쓴 갓([冠)을 보고 그가 누구인지 안다. 그러나 그 옷과 관(벼슬 - 신분)이 그 사람의 실체는 아니다. 그 사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어찌 보면 한 사람의 허상일 뿐이다. 그런데도 그 ‘얼굴’에 떨어진 꽃무늬 원피스가 화단을 만들고, 나비를 유혹한다. ‘나도 모르는 내가 소망하는 세계’일 수도 있다. 어찌 보면 그렇게 소망하는 존재가 바로 나(화자 - 시인)일 수도 있겠다고 진술한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잠시 그렇게 흔들릴 수 있으나, 시인은 그럴 수 없다. 나비로 변용된 시적 화자는 ‘하루치의 단어를 끌어 모아 꽃길을 맴돌다’ 실체하는 내가 아니다. 진공묘유 하는 나의 한 형상을 담아낸다.
결국 ‘하루치의 단어’ 속에 내가 있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 내가 이룬 물질의 빌딩 속이나 예금통장의 잔고 속에 내가 있지 않다. 그것은 잠시 머물다 흘러가는 모래언덕일 뿐이다. 빛나는 명찰과 높은 벼슬로 빛나는 이름 속에도 나는 없다. 그것 역시 시간의 여울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허명일 뿐이다. 그것도 아니면 짜릿한 육체의 쾌감 속에 내가 있는 것일까? 앞에서 오온으로 보여주지 않았는가? 아침 이슬처럼, 혹은 흘러가는 구름처럼 잠시 머물다 떠나는 쾌락에도 나는 없다.
나는 결국 ‘내가 풀어내는 나의 이야기 속에 내가 있음’을 주시인은 알고 있었던 것일까. 주 시인이 풀어낸 confabulation에 그가 담겨 있어서 하는 말이다. 작화{ 作話)라고 하거나, 이야기하기라고 해도 무방하다. 혹은 자전적 이야기하기라거나, 문자화한 나라고 해도 상관없다. 물질에도, 명예에도, 쾌락에도 참 나는 없고, ‘내가 풀어낸 나의 이야기 - confabulation’ 속에 내가 존재할 뿐이다.
주영란 시인은 그것을 이야기하면서 ‘나도 모르는 나’를 풀어내고 있다. ‘거미줄에 걸린 왼쪽 날개’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동면의 시절 배고픈 필생’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나[시인]도 모르는 나[자아]를, 시적 화자가 말하게 하는 것이다. confabulation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줄을 타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다. 시는 시인이 풀어내는 나도 모르는 나의 이야기다. ‘툭, 떨어지는 원피스’를 통해서 새삼스럽게 자신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다다르고 보니 내가 나를 안다고 왜장치는 사람치고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런 얼치기를 일러 교만이라 하고, 그런 허풍쟁이를 일러 정치 모리배라고 한다. 시인은 끝내 자기를 모르는 존재다. 모른 채로 당연한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이 불편한 사람이다. 끝내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를 허물어 자기를 들어내는 사람이다. 그를 일러 시인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장 나다운 나로 여겼던, ‘시를 포기하고 허공에 떠도는 문장을/ 오른쪽 날개에 구겨 넣고 꽁무니를 흔들어’ 본다. 왜 그랬을까? 나를 이야기하고 보니, 내가 입은 상처에 깊이 난 흉터가 바로 ‘왼쪽 날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왼쪽다운 무기인 ‘시’마저 포기한다면, 오른쪽 날개에서 잃은 힘을 보안할 수 있을까, 헛된 희망이지만 꽁무니를 흔들어 보는 것이다. 몸부림쳐 보는 것이다. 가장 왼쪽다운 시를 포기하고 말이다.
왼쪽다운 것은 따로 있다. 아닌 것에 대한 저항과 세속적인 것에 대한 거부 반응, 허접한 권력에 대한 반발과 반생명적 문맹에 대한 본능적 분노 등이다. 왼쪽다운 것은 결국 물질문명의 노예 되기를 거부하는 몸부림이거나, 관념과 개념의 범주에서 놓여나고자 하는 본질적 자기 지향성일 수 있다. 그렇다면 오른쪽다운 것은 무엇일까? 왼쪽다운 것에 대한 역발상을 하다보면 만나게 된다. 오른쪽다운 것을 한 마디로 귀결한다면 바로 ‘시詩답지 않은 것들’이다. 왼쪽다운 시를 추구하다 입은 날개의 상처를 오른쪽다운 것들을 보완한다고 삶이 비상飛翔할 수 있을까, 시는 묻고 있다.
그러나 왼쪽 날개에 치중하다보면 날 수가 없거나, 굶주림으로 동면의 세월을 보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왼쪽다운 길을 포기하지 않는다. 포기하는 커녕 오히려 왼쪽다움에 충실하고자 이 시의 화자는 ‘한낮의 이탈’로 ‘내 모르고 있는 참 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기까지 한다.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 마지막 언어’여야 한다고, 그렇게 시인이 쓰는 한 편 한 편의 시는 결국 마지막 언어여야 한다고, 그리고 온 생명력을 다하여 진술해내는 생명의 언어여야 한다고, 그것이 ‘이슬처럼 줄 끝에 맺힐지라도’ 여력을 남겨둔 미련의 언어는 시가 될 수 없다고 규정한다.
이 마지막 언어가 결국 ‘나비의 눈물[가장 연약한 것의 아름다움]’일지라도 시인이 쓰는 시는, 시인이 진술한 자신에 관한 confabulation은 생명의 피를 마지막 한 방울까지도 다 흘려서 써야 한다. 그런 진술은 ‘기록’에 연연하는 역사의 미래가 아니라, 당장의 생명을 살려내는 ‘현재’의 호흡이기 때문이다. 역사는 ‘어제’를 말하고, 종교는 ‘내일’을 이야기한다면, 시문학은 바로 ‘오늘’을 진술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시는 눈물의 기록이다. 시는 승리의 환호성을 담아내는 기록이 아니다. 처절하게 흘린 눈물자국이어야 한다. 그럴 때 ‘내가 나를 모르고 사는 삶’에 한 줄기 빛이 될 수 있다. 끝내 내가 나를 모를지라도, 내가 풀어낸 나의 이야기 속에 나는 온전하게 빛을 내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시의 운명이며, 그런 길을 가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이런 뜻에서 본다면 주영란 시인 스스로 내가 나를 모르고 산다는 고백이야말로 이 시를 존재하게 한 원동력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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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란 시인은 스스로 ‘시도 모르면서 시를 읽고 쓴다’고 했다. 주 시인뿐만이 아니다. 이미 다녀간 시인묵객들도 그렇게 밝히고 있다.
네루다(Pablo Neruda. 1904~1973. 칠레)는 그의 작품「시(詩)」에서 이렇게 진술하고 있다. “그래 그 무렵이었다…… 시가 / 날 찾아왔다, 난 모른다. 어디서 왔는지 / 모른다. 겨울에선지 강에선지 / 언제 어떻게 왔는지도 모른다 / 아니다, 목소리는 아니었다, 말도 / 침묵도 아니었다 / 하지만 어느 거리에선가 날 부르고 있었다 / 밤의 가지들로부터 / 느닷없이 타인들 틈에서 / 격렬한 불길 속에서/ 혹은 내가 홀로 돌아올 때 / 얼굴도 없이 저만치 지키고 섰다가 / 나를 건드리곤 했다”(P. Neruda 「시」 전체 3연 중 1연)
시가 어디서 오는지, 시가 무엇이야 하는지 모르면서도 시를 쓰는 사람이 바로 시인이다. “시는 이래야 한다거나, 이게 바로 시다”라고 왜장치는 시-시인치고 제대로 된 시 없으며, 시인다운 시인 아님을 네루다는 웅변하는 셈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시가 찾아오자 입술은 얼어붙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고 한다. 이게 바로 시의 출생 모습이며, 이게 바로 시인의 본모습이다. 그러므로 ‘시를 모르면서 시를 쓴다’는 사람들이 바로 시인이다.
그래서 시인은 항상 ‘모른다, 모른다, 모른다’고 베드로처럼 세 번 부정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결국 베드로는 이렇게 세 번이나 부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으며, 그 깨달음의 시가 바로 ‘닭울음소리’가 아니었던가! 이렇게 본다면 베드로에게 닭울음소리는 바로 시가 아닐까? 그를 두려움 속에서도 잊어버린 자신을 찾게 해 주었으니, 닭울음소리야말로 베드로의 뛰어난 시일 수 있겠다.
어찌 베드로뿐이겠는가? 성철스님이 즐겨 드신 화두가 바로 ‘이뭐꼬 - 시심마(是甚磨)’다. 성철스님은 ‘백일법문’에서 이렇게 설법하신다. “마음을 닦는 것이 불교다. 화두참선은 마음을 닦기 위해서 하는 것이다. ‘이뭐꼬’는 화두 중에서 유명한 것이다. ‘이뭐꼬’란 질문을 계속해서 하다보면 깨치게 되고 마음의 본래 모습을 알 수 있다. 법문을 들을 때나 책을 볼 때나 무엇을 하든지 언제나 이렇게 물어보라.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은 무엇인가?’”(성철『이뭐꼬』) 네루다도 시 - 이게 뭐꼬? 베드로도 예수 - 이게 뭐꼬? 하는 질문을 계속하다 보니 성인의 반열에 베드로는 입성했고, 네루다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것은 아닌지.
그런데 그런가? 속세에는 아는 사람 천지고, 잘난 사람 부지기수며, 남보다 더 잘 알고 뛰어난 사람으로 넘쳐난다. 그러니 시인만이라도 시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시를 찾는 사람이 되어 나쁠 것이 없다. 주영란 시인도 그런 길을 이미 천착하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시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시를 쓴다고, 체험적 시론에서 당당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가 예수를 모른다고 부정했듯이, 네루다가 시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했듯이, 성철스님이 ‘이뭐꼬’를 자꾸 되묻다 보니 살아있는 부처가 되었듯이……
이렇게 시를 탐색한 주영란 시인의 작품이 눈길을 끈다.
구석에 코 박고 앉아 이렇게 쓴다 시라면 온 몸으로 싹을 키워야 하는데 백지에 손 놓고 연필 돌리다 씨앗을 말리고 있다 화살을 쏘며 백지를 채우는 일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다 시로 비를 내리게, 눈을 내리게, 불을 지피게 할 뿐이다 커피나 담배를 얻을 수 없다 수십 개의 시구(詩句)로 밥을 얻을 수는 없다 한 남자를 한 여자를 얻지 못 해도 넝쿨 말아 올리는 글 속으로 기어들어가 한 줄 시를 위해 껴안는다 발끝에서 뿌리가 뻗어 나올 때까지 구석에 코 박고 앉아 이렇게 쓴다
- 주영란 「시(詩) 만들기」전문
네루다가 그렇게도 찾아 헤매던 시가 찾아오자 입술은 얼어붙고 눈먼 사람처럼 앞이 캄캄했다고 한 것처럼, 베드로가 로마병정이 묻자 세 번이나 모른다고 잡아뗐으나 닭울음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듯이, ‘이뭐꼬’라고 자꾸 물으라고 했던 성철스님의 법문을 따라, ‘시가 뭐꼬’라고 주영란 시인은 묻고 또 물었음을 이 시가 말해주고 있다.
시는 이런 것이라고 ‘시 만들기’라는 표제가 말해주듯이, 시로 쓴 시론이자, 시로 밝힌 시의 형성과정을 엿보게 한다. 이에 따르면 시는 온몸으로 발아시키는 생명 탄생의 어떤 작용이어야 하며, 시는 전인격적 발로의 어떤 결실이어야 하며, 시는 한 사람이 우주적 생명체로 거듭나는 경지에서 겨우 만날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 ‘구석에 코 박고 앉아 이렇게 쓴다’는 진술에서 ‘시도 모르면서 시를 읽고 시를 쓴’ 시인이 담아낸 세월의 페이지가 만만치 않은 볼륨을 간직하고 있음을 짐작케 한다.
= [시는 일관성의 산물임과 동시에 자기부정의 반작용이어야 한다. 세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구석자리일망정 그것을 반석으로 생각하며, 자기에 몰두할 때 겨우 만날까말까 난감한 대상이다. 속세에 한 발을 담그고, 시에 또 한 발을 담근 채, 평균적으로 가장 안온한 상태에서 설레발치는 경솔은 사유의 깊이를 얻을 수 없으며, 따라서 문학적 진실에 닿을 수 없음을 알았다.]
㉡ - 온몸으로 싹을 틔워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백지에 손 놓고 연필 돌리다 씨앗을 말리고 있다고 자책한다. (더구나)화살을 쏘며 백지를 채우는 일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자명한 시의 길을 제시한다. (이런 행위들은)시를 쓰는 게 아니라고 선언한다. 스스로 시를 쓰는 행위를 부정한다. 그렇게 해서는 시가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 [시는 관념의 파노라마가 아니며, 개념의 백과사전이어서는 안 된다. 바로 삶이 담긴 구체성의 산물이어야 한다. 시인이 온몸으로 땀과 눈물과 피를 닦아내고 담아낸 결과적 산물이어야 한다. 책상머리 백지 위에서 그려내는 낙서의 파편이 아니어야 하고, 타인을 상처 내는 공격의 무기여서는 겨우 싹튼 시의 씨앗마저 말려버릴 위험이 있다.]
- [‘시로 비를 내리게’ 하거나, ‘눈을 내리게’ 하거나, ‘불을 지피게 할 뿐이다’ 감상적 센티멘털리즘에 부합하는 정도에서, 감성적 자기만족으로는 시의 이름을 달 수 없다. 더구나 거미줄 친 목구멍에 밥을 넣어줄 수도 없는 것이 시일진대(그래도 시를 읽고 쓸 것인가?) 시가 (한 여자가 시로는) 한 남자를 얻지도 못하는 것, (한 남자가 시로는)한 여자를 얻지도 못하는 게 바로 시다. (그러면 시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 넝쿨 말아 올리는 굴속으로 들어가…… 발끝에서 뿌리가 뻗어 나올 때까지 구석에 코 박고 앉아 쓴다: 시가 생산되는 현장성의 가혹함이 어떤 경지인가, 시인의 시인다운 결연함이 어떠해야 하는지, 이 시는 한 자 한 자 또박또박 명토박이를 하고 있다. 시의 엄결성(嚴潔性)과 시인의 치열성(熾熱性)이 어느 경지에서 꽃을 피우거나, 빛이 될 수 있는지를 진술하고 있다. 이런 시적 진술을 시인이 되려는 사람마다, 시를 찾아 헤매는 발길마다 명패처럼 달아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런 결의와 단호한 자기 엄숙성이 없다면 섣불리 시에 다가설 일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 세상에는 시의 독자보다 시인이 많으며, 읽히는 시보다 쓰여 지는 시가 많게 되었다. 시 - 시인이 스스로 고뇌의 어둠 속을 헤매야 하는 숙명의 ‘멍에[車衡]’가 아니라, 시 - 시인이 세상을 건너가는 유용한 ‘명예(名譽)’로 착각하는 부산물이 아닌가, 짐작해 볼 뿐이다.
주영란 시인이 ‘시도 모르면서 시를 읽고 써 왔다’는 탐구의 세월이 결국은, 정신 가치가 피폐해진 세상에 동화되거나 기웃거리지 않고, [㉠+㉡+㉢ = 넝쿨 말아 올리는 굴속으로 들어가… 온몸으로 싹을 틔워… 발끝에서 뿌리가 뻗어 나올 때까지 구석에 코 박고 앉아 쓴] 결과적 산물임을 실감하겠다.
그리고 이런 결의를 삶의 구체성 속에서 끌어올린 원동력은 주영란 시인이 스스로 천명한 진술 속에 담겨 있다. 약자가 되어 살고 싶다고 스스로 설정한 시인의 자리, 스스로 내가 나를 모르고 산다는 철학적 사유, 그리고 시도 모르면서 시를 읽고 쓰려는 탐구의 열정이 빚은 시세계임을 살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