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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의 갈암종택 사랑채와 오른쪽의 재실. 옆면을 나무로 만들어 여름에는 정자처럼 이용하고 겨울에는 바람을 막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나랏골에 위치한 갈암종택은 조선 후기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 선생의 후손 이원흥씨가 살고있는 곳이다.
퇴계 이황 선생의 학문적 전통을 이어받아 17세기에 영남 지역을 대표했던 대학자 갈암 이현일.
문과에 급제한 분은 아니었지만 이조판서에까지 이른 데는 그의 인품과 학자적 위상이 얼마나 높았는지 알 수 있다.
▲ 종손 이원흥씨 |
갈암이 당쟁에 휘말려 학문적 업적이 폄하되고 정치적 핍박을 받았지만 그 종가의 위상은 오랫동안 실로 당당했다.
갈암선생은 조선 숙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고 영남학파의 거두로 퇴계 이황의 학통을 이어 받아 '이기호발설'을 지지했다가 서인의 탄핵을 받아 귀양을 가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갈암집'과 '홍범연의'가 있다.
갈암종택은 경북 북부지역의 전통적인 ㅁ자 형태다.
갈암선생은 원래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에서 출생하고 자랐으나 선생이 40세 되던 해에 영양군 입암면 병옥리로 옮겼다. 선생의 10대손이 청송군 진보면 광덕리로 옮기면서 1910년 종가를 세웠으나 임하댐 건설로 지금 있는 자리인 창수면 인량리로 옮겼다.
나랏골은 8종가로 유명한 곳이다. 재령 이씨, 선산 김씨, 영양 남씨, 함양 박씨, 안동 권씨 등 8개 종가가 새거하는 반가 마을이다.
갈암종택에는 많은 문집과 서적을 소장하고 있으며 영남 유학을 대표하는 명성높은 가문 중 하나다. 하지만 퇴락한 갈암의 종택을 두고도 중건이나 이건 모두 엄두를 내지 못하였다. 당시의 종손은 이원흥 씨의 부친인 이병주(李秉周, 1922-2001) 씨였다.
재령 이씨가 갈암종택에 세거한지는 500년이 됐다고 한다. 마을 가장 위쪽에 재령 이씨 종가인 충효당이 있고 그 아래에 우계종택, 갈암종택이 있고 , 마을 뒷산에 갈암의 태실인 자운정과의 갈암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다.
인량리는 옛부터 풍속이 순후하며 예의와 겸양이 있고 효행과 학문이 높은 선비가 많아 벼슬이 끊어지지 않으니 으뜸가는 동네라 했다. 특히 영해의 재령 이씨는 이시명(1580~1675)에서 이 재(1657~1730)등 3대에 이르는 7현자(賢者), 7사림(士林)을 배출한 손꼽히는 명문가였다.
갈암종택의 종손은 이원흥씨(사진)다. 이씨는 선친의 좌익활동으로 매우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종손의 외가는 경북 선산에 대대로 살아온 파평 윤씨, 진외가(陳外家: 아버지의 외가)는 영양 남씨로 속칭 영해 '호지마을 남씨'라는 집이다.그리고 외외가(外外家: 어머니의 외가)는 명문 인동 장씨 남산파(南山派)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선생 집이다.
종부 김호진(金鎬珍, 1948년생) 여사는 의성 김씨 봉화 해저리 팔오헌(八吾軒) 종가에서 왔다. 팔오헌 김성구(金聲九)는 봉화 해저리(속칭 바래미)를 대표하는 인물로 조선 후기 정치가이며 학자다. 김 여사는 종가에서 자라 더 큰 종가로 시집와 종부가 된 셈이다.
종손이 걸어온 삶은 갈암 선생이 겪었을 고초를 생각나게 한다. 당당했던 갈암 종가는 한국전쟁을 전후해 조부의 사거(死去)와 부친의 월북으로 급격히 가세가 기울었다. 월북한 부친과 생이별한 종손의 당시 나이는 당시 여섯 살.
종손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인 경북 선산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4학년 때 서울 성북동 삼선교 부근으로 이사해 돈암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웃한 동성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런데 동성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아버지가 북에서 내려와 체포됐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들었고 마침내 그것은 현실로 나타났다. 부친의 재판과 이후 15년 동안 계속된 옥바라지로 모친은 하루도 편안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종손은 서울에서 영어(囹圄)의 몸으로 있는 부친을 대신해 불천위는 물론 선대 기제사에 울음을 삼키며 잔을 올렸다. 제사는 당시 경북 청송 진보에 있던 종택까지 가지 못해 부득이 지방을 써서 모셨다.
하늘 같이 의지했던 모친마저 종손이 22세 때 4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어려운 도회 생활에 종가의 많은 제사와 남편의 옥바라지까지 감내해야 했던 모친의 삶이 어떠했을까는 종손의 말을 듣지 않아도 눈에 선하다. 한복을 단아하게 입는 종손의 속내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운명적으로 소년 시절부터 종손의 역할을 대행했던 이원흥 씨의 부친도 남북분단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인 2001년 종가 보존의 중책을 맏아들에 맡긴 채 세상을 떠났다.
제사 때 지방과 축문을 쓰면서 붓을 잡기 시작한 종손의 붓글씨는 이제는 조상의 문집을 필사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일견 달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범상치 않은 것이다. '가학(家學)의 전통'은 허명이 아님을 생각케 한다.
그는 동성중학교를 졸업한 뒤 선린상고에 진학했다. 당시 인문계 고교에 가지 못할 정도로 집안 형편은 어려웠다. 상고를 졸업한 후에는 군대에 입대했다. 그는 1사단에 복무하던 중 월남전 파견을 자원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자칫하면 종통이 끊길 수도 있는 아찔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종손은 무사히 제대했고 갈암 종가의 맥은 이어졌다.
이원흥 종손은 낙향해 청송군청에서 일하다 도중에 퇴직한 뒤 서울로 올라가서 사업을 했고 38세 때 삼보컴퓨터에 입사했다. 과장과 부장, 관리본부장을 거쳐 나래이동통신으로 옮겼고 관리 이사와 농구단 단장을 역임했다. 1999년 TG삼보계열사인 나래DNC 사장과 삼보물류 사장 등을 역임한 뒤 퇴직했다고 한다.
자신도 형제이면서 후손으로 아들만 둘 둔 종손은 어릴 적 몸이 유난히도 약했던 자신을 떠올려 아들의 이름을 튼튼하라는 의미로 '대견(大堅, 1973년 생)'이라고 지었다.
갈암 선생의 글씨는 독특하다고 한다. 특히 유배기에 쓴 편지나 시고(詩稿)는 종이마저 좋지 않지만 눈에 쉽게 들어온다.
갈암 후손들은 사랑방에서 우스개로 "글씨를 못쓴 것을 보니 우리 할배 글씨가 맞네"라고 말할 정도라고 했다. 그러나 유배지에서 주역 고경(古經)을 손수 베껴 썼고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는 등 수많은 서사(書寫)와 저술을 남겼던 분이라 글씨 역시 격조가 있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만 도둑을 일곱 번이나 맞았던 종가에 남은 자료가 부족한 것이 못내 아쉽다.
종손부부는 요즘 서울과 영덕을 오가며 생활한다.
종손은 영덕에 내려오면 친구들도 만나고 한가로이 종택에서 책을 읽으며 지낸다. 이들 부부는 "노후를 보내게될 종가가 잘 보존돼 전통문화의 자산"이 되기를 바란다. 종손은 영덕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고 이웃 사람들이 귀띔한다. 영덕의 종가문화가 잘 보존돼 정신교육의 장이 되길 소망한다는 것이다.
전통을 소중하게 생각하며 종가문화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종손과 종부, 이들의 이야기에는 상대를 배려하는 따뜻한 마음과 조상의 올곧은 정신과 의지를 이어가고자 하는 절제와 존중감이 무거운 책임을 생각키우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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