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글링Juggling처럼 (외 2편)
박재화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을 바라보며, 고창증* 걸린 황소의 눈망울이 그렁그렁하다 가발 쓴 아이에게 자전거타기 가르치는 젊은 아버지, 안간힘으로 햇살 감기는 뒷바퀴를 잡아당긴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젊은 날의 꿈이여** 누가 입대라도 하는지 가로등이 골목을 그러안고 끔벅거린다
저 함박꽃 언제 화엄세계를 이루었나 엊그제도 가지 끝에 찬 바람만 비틀댔는데 시드볼트***에선 언젠가인지 모를 언젠가를 기다리며 거처 잃은 씨앗들이 가면假眠의 밤을 보내고 있다
죽음이 일상이고 삶은 비정상이라고 TV에서 안경을 손에 쥔 법의학자가 일갈하는 밤
그래 이제 다시 시작이다 이 한 몸 안길 수 있는 곳이라면 그 깊은 속으로 무장무장 걸어 들어가는 거다 새벽이 새 떼를 날릴 때까지
⸻⸻⸻⸻⸻⸻ * 鼓脹症Bloat, 반추동물이 걸리는 헛배 부른 병 ** 김광석의 노래 〈이등병의 편지〉 *** Seed Vault, 경북 봉화에선 야생식물 종자를, 노르웨이 스발바르에선 작물종자를 보관. 등소평鄧小平이 내게 간밤 비몽사몽 간 웬일로 등소평이 찾아와서는 갑자기 어깨를 툭 친다 젊은 사상가들은 명민하고 전투적이지만 희생이 없어 믿을 게 못된다며 이어선 이념만큼 중요한 게 현실이니 네 곁의 적들부터 잘 살펴봐야 한다고 신신당부한다 도대체 내게 왜 그런 말을 하느냐고 정치라곤 몇 번 투표한 게 전부인 내게 그나마 내가 찍은 후보는 대개 떨어졌는데 무슨 소릴 하느냐고 귀재며 물었다 그러자 싱긋 웃으며 그는 작은 키를 곧추 세우곤 내 혁대를 두세 번 잡아 흔들더니 슬며시 돌아선다
먹고 마시고 춤출 줄 알아야 사는 거지 맨날 인상 쓰며 살 거냐고 아직은 여자의 치마 안을 기웃대도 좋은데 왜 그리 움츠러들었냐고
하, 참, 이 무슨 조화인가 무덤도 없이 황해를 떠도는 그가 이웃나라 맹문이 내게까지 와서?
현수막 거는 사람 • 1 매주 전단지 4,000장을 돌렸다 현수막은 달마다 300개를 걸었고 주말이면 서울은 물론 전국을 돌았다 실종된 송혜희 좀 찾아주세요 서울대를 가고 싶어 하던 소녀가 감쪽같이 사라진 1999년 2월 13일 밤 모든 것이 멈춰서고 사라졌다 여고생이 평택 도일동 막차에서 내렸을 때 남은 승객 30대 남성도 따라 내렸다는데 단순가출이라며 경찰은 사흘 뒤에야 움직였다 수사는 미궁에 빠졌고 어디서도 혜희 소식은 날아오지 않았다 ‘키 163cm 얼굴 둥글고 검은 피부 흰 블라우스 빨간 조끼 파란 코트, 가족이 애타게 찾고 있습니다’ 헛 제보 장난 전화에 수백 번 헛걸음 쳤고 빚만 늘어 어느 새 신용불량자가 되었다 기초생활수급자로 받는 60만 원 중 40만 원이 현수막 게시와 전단지 배포에 들어갔다 주위에선 포기하라지만 걸고 뿌리지 않으면 잠을 못 잤다 절망과 질병 속에 가라앉던 아내는 2006년 농약을 마셨다 전단지를 끌어안은 채 따라 죽으려니 맏딸이 같이 죽겠다고 나서 죽지도 못했다 폐지 주워 팔면서 현수막 걸고 전단을 돌리니 어언 플래카드 일만 개, 전단지 일천만 장이다 현수막 바꿔 걸다 낙상사고에 다시 뇌경색까지 불편한 몸으로 제보자에겐 신장이라도 떼어드리겠다 했건만 2024년 8월 26일 현수막 싣고 나선 길이 마지막이 되고 말았다 덤프 트럭에 치여 일흔한 살 송길용 씨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속에 스러졌다 애오라지 딸 찾아 헤매던 4반세기가 260장 현수막으로 남아 비바람 속에 찢겨갔다 —시집 『새벽이 세 떼를 날릴 때까지』 2025.3 ----------------------- 박재화 / 1951년 충북 보은에서 출생, 대전고와 성균관대 경영학과 및 대학원 졸업. 1984년 《현대문학》 2회 추천 완료로 등단. 시집 『도시의 말』 『우리 깊은 세상』 『전갈의 노래』 『먼지가 아름답다』 『비밀번호를 잊다』 『새벽이 새 떼를 날릴 때까지』 등. 두원공과대학 교수 역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