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0> 풍양조씨
세계일보 기사 입력 : 2013-06-10 20:41:30
김성회 한국다문화센터 운영위원장 kshky@naver.com
다른 조씨와 달리 토착 성씨… 조선말 세도정치로 위세 떨쳐
조운흘, 고려말 문신… 3도 안렴사 지내
홍건적 침입 때 피난한 왕 시종
조엄, 영조 도와 산업발전에 큰 업적
日 통신사 갔다 고구마 들여와
풍양조씨(豊壤趙氏)는 조선 말기 후안동김씨(안동김씨에는 같은 본관을 쓰는 선안동김씨와 후안동김씨가 있다)와 함께 대표적인 세도명문가로 알려져 있다. 특히 대원군의 집권과정에서 후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몰아내기 위해 조대비로 지칭되는 풍양조씨 세력을 이용한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렇듯 풍양조씨는 조선 말기에 세도정치의 한 축을 담당할 정도로 가문이 크게 번창했다. 또한 대부분의 시조가 중국에서 건너온 다른 조씨들과는 달리 우리나라의 토착 성씨이다. 그래서 함안조씨와 함께 조씨 가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본관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풍양조씨의 시조는 고려 초에 문하시중 평장사를 지낸 조맹(趙孟)이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워 벼슬과 함께 조맹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고 전해진다.
그와 왕건에 얽힌 일화는 다음과 같다.
“그는 풍양현(지금의 남양주시)에서 태어나 천마산 기슭에서 농사를 지으며 바위동굴에 은거해 도를 닦고 있었다. 원래 이름도 바위(岩)였다. 당시 신라를 정벌하던 왕건이 영해지방 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후퇴하는 중이었다. 그때, 휘하의 장군들이 풍양현에 숨어 사는 바우도인의 지략을 빌리자는 의견을 내었다. 이에 왕건이 그를 찾으니 당시 나이가 70세였다. 그 후 왕건을 도와 신라정벌의 길에 올라 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왕건이 큰 벼슬을 내리고 조맹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의 벼슬은 문하시중(門下侍中) 평장사(平章事)에 이르렀고, 지금도 천마산에는 왕건을 만났다는 전설이 깃든 바위굴이 있다. 그래서 풍양조씨 문중에서는 이 바위굴에 현성암(見聖庵)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다. 하지만 풍양조씨 가문은 시조 이후 세계가 실전되어 천화사전직(天和寺殿直)을 지낸 조지란(趙之藺)을 중조로 하는 전직공파(殿直公派)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조신혁(趙臣赫)을 중조로 하는 평장공파(平章公派)로 분류되어 세계가 이어지고 있다.
그 후 전직공파에서는 조사충(趙思忠)을 파조로 하는 호군공파(護軍公派), 조신(趙愼)을 파조로 하는 회양공파(淮陽公派), 조임(趙?)을 파조로 하는 금주공파(錦州公派)로 나뉘어졌고, 강진을 본관으로 쓰다가 환관(還貫)한 조보(趙寶)를 시조로 하는 상장군공파(上將軍公派)가 있다.
풍양조씨는 명문세도가답게 조선시대에는 과거급제자 181명·상신 7명·대제학 4명·호당 2명이 나왔으며, 홍문록에도 39명이 올랐고 성균관과 문묘를 관리하는 대사성에도 54명이 배출되었다. 현재 풍양조씨는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의하면 3만5009가구에 총 11만379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풍양조씨의 연혁과 인물
풍양조씨는 시조인 조맹 이후 전직공 조지란까지 6대가 실전되었다. 그 후 전직공 조지란의 7세 손인 대언공 조염휘(趙炎暉)의 아들 대에서 호군공·회양공·금주공 등 3갈래로 나뉘고, 선계를 알 수 없는 평장공 조신혁과 강진을 본관으로 하다가 풍양으로 환관한 상장군공파가 있다. 이중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회양공파이다.
풍양조씨는 조맹 이후 고려 후기까지 뚜렷한 인물이 없다. 그만큼 가문이 번창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가 고려말에 조운흘(趙云?)이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그는 고려말 문신으로 홍건적의 침입으로 피난하는 왕을 시종하여 2등 공신에 올랐고, 그 후 전라도·서해도·양광도 등 3도의 안렴사(按廉使·관찰사)를 지냈다. 늙어서는 벼슬을 버리고 상주에 은거하였다. 그는 나들이할 때 반드시 소를 타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며, 그가 강릉부사로 재직할 때 경포대에서 강원관찰사였던 박신과 기생 홍장을 엮어주고 지었다는 한시가 유명하다.
조혼수(趙混修)는 고려말∼조선초의 승려로 명필이었으며 목은 이색과 친분이 두터웠다. 충주 청룡사에 부도가 있다. 호군공파의 파조인 조사충(趙思忠)은 6위의 하나인 천우위 중령 호군(千牛衛 中領 護軍)으로 정4품 무관직이다.
회양공파조 조신(趙愼)은 회양(강원 내금강 일대) 부사를 지냈다. 조선에 들어와 태종의 잠저시(潛邸時)의 사부(師傅) 역할을 했으며 임천(충남 부여 일대)에서 은거하다 죽었는데, 무학대사가 묏자리를 잡아줬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는 풍양조씨 문중에서 회양공파가 가장 번성하였기에 전해진 일화로 생각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 풍양조씨 문중에서는 점점 더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조익정은 한성부 좌윤을 거쳐 공조와 이조참판을 지냈으며, 조종경은 중종 때 사섬시정을 지냈다. 또 명종 때 부총관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조안국, 훈련대장을 역임한 조경은 풍양조씨를 중흥시킨 인물로 평가된다. 특히 조경은 임진왜란 당시 추풍령 싸움에선 졌지만, 금산전투에서 승리해 선무삼등공신으로 풍양군에 봉해졌다.
풍양조씨 가문이 세도의 기반을 이룬 것은 조선 숙종 이후. 상신 7명·대제학 4명·공신 7명을 배출했기 때문이다. 숙종 때 조도보는 조상경·조상강·조상기 등 아들 3형제와 손자 8명을 두었는데, 이들 중에 5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이들이 영조·정조시대에 풍양조씨의 세력 기반을 다진 주역들이다.
조상경(趙商絅)은 영조 때 이조판서를 10여년이나 지내며 인사를 좌우했으며, 그의 아들이 일본에서 고구마를 들여온 조엄(趙?)이다. 조엄은 영조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언이 되었다. 그 후 동래부사를 거쳐 충청도 암행어사로 나갔다. 조창(漕倉) 3개의 증설을 건의하여, 공물의 수납을 공정하게 하고 국고를 안정시켰다. 대사헌·부제학·예조참의를 지내고, 통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고구마 종자를 가지고 와서 동래와 제주도에서 재배하게 하였다. 이어 의금부지사(義禁府知事)·이조판서·대제학 등을 거쳐 평안도관찰사로 갔으나, 무고를 받아 파직되었다가 혐의가 풀려 재차 대사간과 이조판서를 지냈다. 다시 홍국영의 무고로 평안북도에 유배되어 있다가 김해로 이배되어가는 중 병사했다. 영조를 도와 산업의 발전과 건전한 재정을 위해 많은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되고 있으며, 저서로는 ‘해사일기(海?日記)’와 ‘해행총재(海行摠載)’ 등이 있다.
이 조엄의 아들이 조진관이며, 조엄의 손자가 풍양조씨 세도정치를 연 조만영·조인영 형제이다. 풍양조씨의 세도정치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이 순조의 아들인 익종(추존, 효명세자)의 비가 되면서부터이다(이때까진 (후)안동김씨와 풍양조씨의 관계가 좋았다). 그녀가 바로 헌종의 어머니인 신정왕후(神貞王后) 조대비이다.
그녀는 12세 때 세자빈이 되었고, 아들을 낳았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왕위를 계승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왕비가 못되어 살다가, 순조에 뒤를 이어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왕대비가 되었다.
이 시기 잠깐 동안 풍양조씨(조만영·조인영 형제)의 세도정치가 진행된다. 그러나 헌종이 요절하고, (후)안동김씨 측에서 강화도령 철종을 옹립하고, (후)안동김씨가 세도정치를 이어갔다. 그 사이 (후)안동김씨였던 시어머니 순원왕후(純元王后·순조비)가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철종이 13년 만에 후사가 없이 세상을 뜨자 조대비가 다시 권력을 쥐게 되었으며, 대원군과 손을 잡고 고종을 양아들로 삼아 (후)안동김씨 세도정치를 종식시켰다. 이때 조대비의 조카인 조성하와 대원군의 결탁이 주효했다. 처음엔 고종의 뒤에서 수렴청정을 했으나, 흥선대원군에게 권력을 내주었다. 하지만, 조성하(조만영의 양손자)와 대원군의 결탁도 오래가지 못했다. 조성하는 일찍 죽었고, 이후 조성하의 4촌 형제인 조영하(조인영의 양손자)와 민씨 일문이 대원군을 몰아내는 데 힘을 합치게 된다.
이렇게 풍양조씨는 조대비를 정점으로 하여 (후)안동김씨, 대원군, 명성황후 등과 잇단 결탁으로 세도정치를 이어왔지만,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을 거치며 몰락하였다. 임오군란으로 2개월간 집권한 대원군이 조씨·민씨 일족을 모아 처형하였고, 이어 조영하가 반격을 시도해 대원군을 청나라에 넘기며 사대당을 만들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또다시 갑신정변에 의해 김옥균(후안동김씨)의 개혁당에게 피살되고 만다.
풍양조씨에는 세도정치를 이끈 조상경 가문 외에도 영조 때 좌의정 영의정을 지낸 조문명·조현명 형제가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영조 말년에 정치적으로 몰락해, 이후 고위직 벼슬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 밖에도 풍양조씨 문중에서는 조선시대 성리학의 대가로 효종 때 좌의정에 올랐던 조익(趙翼)이 있으며,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조상우(趙相愚), 영조 때 우의정을 지낸 조재호(趙載浩), 현종 때 대제학을 지낸 조복양(趙復陽)이 있다.
근·현대 풍양조씨 인물들
풍양조씨 문중에서는 근·현대에 들어와서도 여러 인물을 많이 배출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상주에서 궐기하여 싸우다 일본 군경에 체포되어 순국한 조동범이 있으며, 현재 활약 중인 바둑계의 천재기사 조치훈과 조순 전 부총리도 풍양조씨 문중이다.
조치훈은 1962년 형 조상연(바둑기사, 일본기원 4단)과 함께 6세의 나이로 도일, 일본 바둑계의 거성들을 물리치고 명인(名人)과 본인방(本因坊), 10단, 기성(棋聖)의 4대 타이틀을 모두 거머쥐었다. 또 한국바둑계의 대부 격인 조남철(9단)씨는 조치훈의 숙부이다.
경제학자인 조순씨는 한국은행 총재와 부총리를 역임하고 서울시장을 지냈다. 그는 흰 눈썹으로 인해 서울시장을 역임하면서 많은 별명을 얻었으며, 거시경제학의 거두로 평가받고 있다.
그 외 정관계에서 활동하는 풍양조씨 문중 인물들은 조남조(전 국회의원, 전 전북지사), 조광희·조남철·조남수·조중연(전 국회의원), 조대연(전 충북지사), 조남풍(예비역 소장)씨가 있다. 학계에는 조경희(법학, 전 영남대 총장), 조동수(연세대 교수, 유한학원 이사장), 조황하(전 충북대 학장), 조동필(경제학, 고려대 명예교수), 조구연(고려대 교수), 조동호(의학박사), 조준구(의학박사), 조태순(의학박사), 조동삼(충북대 교수), 조성효(인천대 교수)씨 등이 있고, 법조계에서는 조인구·조준희·조용환(변호사)씨가 있다. 그 외 문화예술계에서는 조용진(동양화가), 조남사(극작가), 조풍연(수필가) 등이 있다.
또 재계에서는 조동식(동원전자 대표이사 회장), 조정구(삼부토건 총회장, 11대 국회의원), 조창구(삼부토건 회장), 조영구(전 경성방직 사장), 조남욱(삼부토건 대표이사), 조용경(전 포스코엔지니어링 대표이사), 조덕영(한독 대표이사), 조권순(고려서적 회장)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