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속 그때 그는 왜?>
<35> 1685년 국왕 루이 14세는 왜 낭트 칙령 폐지했을까?(下)
종교도 하나…태양왕,
절대권력 집착 결국 ‘독’ 됐다
루이14세, 관용의 ‘낭트칙령’ 폐지, 佛 산업 이끌던 신교도 탄압·추방
전문기술·노하우 주변국가로 이전, 경제 발목 잡은 ‘치명적 실수’ 평가

루이 14세의 초상화

낭트 칙령 |
결단의 동기와 그 결과
프랑스 역사상 최장기간(72년) 재위하면서 베르사유 궁전과 화려한 의식으로 자신을 한껏 뽐내고, 끝없는 전쟁으로 영토 팽창을 추구하면서 스스로 ‘태양왕’이라 칭했던 루이 14세!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재위 초기는 이러한 수식어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겨우 만 4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왕위를 이어받았다. 수차례 유산 끝에 어렵사리 아들을 얻은 부왕 루이 13세가 1643년 마흔을 갓 넘긴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었기 때문이다.
어린 루이 14세가 물려받은 왕국은 매우 불안정한 상황에 있었다. 30년 전쟁(1618~1648)의 막바지였던 당시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 및 스페인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긴 전쟁이 종결됐으나 귀족들이 일으킨 일명 ‘프롱드의 난’이 프랑스 전국을 휩쓸었다. 약 5년 동안 프랑스는 거의 무정부 상태나 진배없었다. 가까스로 프롱드의 난을 평정하고 나서야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1659년 한 세대 이상 끌어온 스페인과의 전쟁이 종식되고, 루이 14세와 스페인 공주 마리 테레즈의 정략결혼까지 성사되면서 평화체제는 강화됐다.
1661년 22살의 성년이 된 루이 14세는 드디어 친정을 선언했다. 선왕 때부터 국정을 총괄해 오면서 그동안 자신의 후견인 역할을 해온 재상 마자랭의 죽음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유년기 이래 자신을 그림자처럼 뒤덮고 있던 마자랭의 영향에서 벗어난 루이 14세는 이제 왕권 강화를 향한 야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우선 자신에게 도전할 만한 위험인물들을 제거하고 충성을 다할 새로운 인재들을 등용했다. 국가 재정을 총괄하면서 막대한 부를 축재한 푸케를 숙청하고 그 대신 콜베르를 신임 재무장관으로 등용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였다. 실제로 콜베르는 프랑스의 중상주의 정책을 이끌면서 죽을 때까지 루이 14세를 보좌해 국부를 늘리는 데 헌신했다.
루이 14세는 국왕으로서 자신의 권위를 한껏 드러낼 공간을 창출하는 작업도 추진했다. 바로 1661년 파리 근교의 베르사유에 거대한 궁전을 건설하라고 명령했다. 이곳은 부친 루이 13세가 사냥을 위해 간혹 방문한 작은 시골 마을이었다. 사실 이곳은 늪지대인지라 생활환경이 좋지 않았기에 신하들 대부분은 파리를 떠나 이곳으로 이주하길 꺼렸다. 하지만 이제 국왕의 눈에 들어 관직을 얻기 위해서는 베르사유 궁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중요 귀족들은 일 년 중 일정 기간을 베르사유 궁에서 기거하면서 끊임없이 국왕에게 눈도장을 찍어야만 했다.
사실상 누구든지 베르사유에 들어서는 순간 치밀하게 설계된 궁전의 전체 공간 구도가 뿜어내는 국왕의 절대권력 궤도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대칭으로 구성된 거대한 궁의 가장 중심축에 국왕을 상징하는 ‘태양신’ 아폴론의 동상과 분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르사유 궁은 루이 14세가 자신의 권력을 공개적으로 과시하는 일종의 연출공간으로 작동했다.
천상계와 인간계를 매개하는 신성한 존재의 위상에 오른 루이 14세에게 이제 남은 문제는 왕국의 종교를 단일화하는 것이었다.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종교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으리라. 왕권신수설을 권위의 기반으로 삼고 있던 루이 14세에게 왕국의 종교적 통일은 어찌 보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었다. 백성의 복종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심중으로부터 복종심을 끌어내야만 했고, 이를 위해서는 신민들 모두가 하나의 종교를 믿어야만 했다. 대대로 가톨릭국가인 프랑스에서 국왕인 자신과 다른 종교를 가진 자들이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16세기 초 종교개혁 이래 프랑스에서 종교문제는 골치 아픈 일종의 ‘판도라 상자’였다. 루이 14세가 종교문제에 관심을 기울일 즈음 프랑스에는 85만 명 정도의 ‘위그노’라 불린 칼뱅주의 신교도가 있었다. 숫자상 이들은 당시 프랑스 전체인구(약 2200만 명)의 4%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들에게 종교의 자유를 부여한 법적 근거가 바로 1598년 공포된 낭트 칙령이었다. 이는 16세기 후반 극심한 정치 및 종교적 갈등으로 프랑스가 치열한 내전에 휩싸였을 때, 원래 신교도로서 왕위에 오른 앙리 4세(재위 1589~1610)가 자신은 왕실의 종교인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신 신교도에게 종교의 자유를 인정해준 조치였다. 한마디로 종교적 관용의 모범 사례였다.
그런데 이처럼 힘들게 탄생한 낭트 칙령마저 루이 14세가 폐지하고 말았다. 신의 지상 대리인인 자신이 통치하는 프랑스에서는 하나의 왕국, 하나의 군주, 하나의 종교만이 존재해야 했다. 신교도에게 부여됐던 정치 및 종교적 특권을 하나씩 박탈하기 시작한 루이 14세는 급기야 1685년 퐁텐블로 칙령을 내려 낭트 칙령을 휴지장으로 만들고 말았다. 끈질긴 박해 속에서도 잔존한 신교도 예배당을 파괴하고 예배를 금지했다. 급기야 루이 14세의 가혹한 탄압을 견디다 못한 약 20만 명의 신교도가 네덜란드·잉글랜드·프로이센 등 외국으로 망명했다. 이들은 전 재산을 몰수당한 채 무일푼으로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는 득보다 실이 더 많은 실책이었다. 물론 이러한 조치를 통해 왕국의 종교는 가톨릭으로 통일됐을는지 모르나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손실을 초래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비록 국가의 전체인구 중 극소수였으나 당시 신교도들은 주로 상공업 분야에 종사하면서 프랑스의 산업을 이끌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맨몸으로 추방당했으나, 이들의 손과 머리에 녹아있던 전문기술과 경제 관련 노하우 등 무형자산은 이들과 함께 망명지인 주변 국가로 이전됐다. 이들의 유입 덕분에 17세기 중엽 이래 암스테르담과 런던이 유럽 상공업의 중심지로 부상했다. 이러한 신교도 탄압의 후유증은 경제 측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신교 국가들의 반발을 초래함으로써 군사·외교적으로 프랑스는 매우 불리한 상황으로 내몰리고 말았다.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 |
사건의 역사적 영향
긴 세월 동안 절대권력을 누리면서 치세 내내 영토 확장이라는 명목하에 전쟁을 일삼아온 루이 14세의 말년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우선 그는 건강 상태가 엉망이었다. 1701년 화가 리고가 그린 초상화(당시 나이 63세) 속에서 국왕은 온갖 상징물로 치장한 채 건강과 권위를 과시하고 있으나, 실상은 몸 전체적으로 멀쩡한 곳이 없을 정도로 각종 병마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귀족과 지방에 대한 통제도 실제로는 그렇게 강력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있다. 이러한 측면에 주목해 수년 전 국내의 한 역사학자는 심지어 『루이 14세는 없다』는 제목의 책을 선보인 바도 있다. 장기간 유럽의 절대왕정 시대를 풍미한 그였으나 끝내는 후계자로 아들이 아니라 루이 15세로 즉위하는 증손자만을 남긴 채 1715년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통치기간 동안 루이 14세는 무수한 일을 시도했고 상당 부분 이루었다. 그가 절대왕권의 실행을 위해 체계화해 놓은 관료제도·조세제도·군사제도 등 여러 업적을 통해 프랑스는 이후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 관용의 상징이던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신교도인 위그노를 국외로 추방한 조치는 이후 특히 경제 면에서 프랑스의 발목을 잡은 치명적 실책으로 평가되고 있다. 어려서부터 왕권의 절대성에 대한 집착이 강했던 루이 14세로서는 당연한 조치였는지 모르겠으나, 절대권력을 맘껏 누린 그 역시 인생사 무엇이든 너무 과하면 반드시 탈이 난다는 격언을 비켜 가지 못한 것 같다. 그가 사망한 지 100년도 지나지 않아 터진 프랑스혁명으로 부르봉 왕조가 무너지고 그의 후손인 루이 16세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의 행복지수는 공평한 것일까?
<이내주 육사 명예교수>
추억의 영화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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