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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영혼없는 로봇같은 신앙을 극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야트막하지만 산상에서 행하신 설교를 요약하면 세 가지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거짓 예언자들을 조심하십시오. 가르침을 들었으면 실행하십시오.
당대 거짓 예언자들의 만행을 목격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저지르고 있던 악행을 날카롭게 지적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당시 거짓 예언자들은 ‘주님, 주님!’ 하며 입으로는 늘 그분을 찾았지만, 언행이 조금도 일치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마귀를 쫓아내고 기적을 일으킨다 할지라도, 그분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거짓 예언자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혹시라도 우리 가운데 어떤 목자나 지도자가 아무리 그럴듯하게 주님의 가르침을 선포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결실과 성공을 주님께로 돌리지 않는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자신의 이름, 자신의 얼굴, 자신의 성공만을 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가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개인적인 사리사욕을 찾는다면, 그것은 주님을 철저하게 이용하는 것이며, 주님을 모욕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거나 행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삶을 산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교회는 실행 쪽으로만 과도하게 지우치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기도와 영적 생활과 사랑의 실천 사이의 적절한 균형과 조화를 강조합니다.
따라서 행동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극단적 선택은 늘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이 없는 업적은 속 빈 강정과도 같습니다. 연료가 없는 멋진 자동차와 같습니다. 최첨단 기술이 장착되어 있으나 영혼 없는 로봇과도 같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분석해보면 순서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입니다. 그분 말씀을 듣는 것이 우선입니다. 실행은 그 다음입니다. 진지한 자세로 그분 말씀을 경청하는 것이 우리가 하느님께 드려야 할 본질적인 전제 조건입니다. 다음 순서가 실행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그냥 흘려보내도 되는 말이 아닙니다. 반드시 인간 측의 응답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인간 측에 의무와 과제를 지우는 강제소집령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단순한 말이 아니라 실행 자체였습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시니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우리 인간 측의 응답도 책임감이 있으려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당신 사랑으로부터 분출되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인간 측의 응답은 사랑 안에 실행되어야 합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2024년 나해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왜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마음이 평화로울까?>
복음: 마태오 7,21-29
미국의 첫 번째 수도회 창설자요,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에 첫 번째로 시성이 된 분이 엘리자베스 앤 시튼입니다. 그녀는 19세에 부유한 사업가 윌리엄과 결혼하여 다섯 자녀를 두고 잘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남편의 사업 실패와 병마의 어려움이 그 집에 들이닥쳤습니다.
남편의 사업 파트너이자 친구인 필리치는 아탈리아에 살고 있었습니다. 남편은 이탈리아 좋은 날씨에서 병도 고칠 겸 사업의 도움도 받을 겸 이탈리아로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병자를 바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검역소에서 몇 달을 머물러야 했습니다. 그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이때 느꼈던 평화를 남편이 검역소에서 나오자마자 죽었어도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필리치의 집안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특별히 성모 마리아와 성체에 대한 열망이 깊어졌습니다. 그렇게 미국으로 돌아와서 개종에 대한 갈등에 시달렸습니다. 마음에 성체를 모시고 살아가면 평화로울 것 같았지만, 그러면 독실한 성공회 집안인 가족들과는 멀어져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사회적, 재정적 위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805년 3월 14일 가톨릭교회에 입교합니다.
개종 후 엘리자베스는 사회적 배척과 재정적 어려움을 포함한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했습니다. 그녀는 자녀를 부양해야 했고 자신의 신앙과 필요한 수입을 결합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볼티모어의 존 캐롤 대주교를 비롯한 여러 영향력 있는 성직자들의 격려를 받아 그녀는 학교를 열기로 했습니다.
이런 일들을 예상하지는 못했으나 그녀의 마음은 평화로웠습니다. 마치 자기 행동이 반석 위에 집을 지은 것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두 딸의 죽음과 지속적인 재정적 어려움이 있었으나 그녀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임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1809년에 미국 최초의 종교 단체인 성 요셉 사랑의 수녀회를 설립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시튼 수녀회로 교육 사업을 하고 있고 전 세계적으로는 수천 명의 수녀들이 마더 시튼의 뜻을 이어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미국 가톨릭 교구 학교 시스템의 토대를 마련하고 여러 세대의 교육자와 수녀들에게 영감을 준 공로를 인정받아 1975년 9월 14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최초의 미국 원주민 성인으로 시성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 이야기는 개인적인 비극에도 신앙에 관한 깊은 탐구가 어떻게 자신과 수많은 다른 사람들에게 오랜 평화와 도움을 남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복음은 행동에 관한 내용이 아닙니다. 두 사람이 집을 짓는데 하나는 반석 위에, 하나는 모래 위에 짓습니다. 집이 행동입니다. 나무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그 집은 뜻에 따라 좌지우지 됩니다. 여기서 뜻은 두 종류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뜻은 내가 스스로 창조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를 나의 창조자로 인정할 것인지 두 선택밖에는 없습니다. 나의 행동의 의도가 나의 뜻인지, 내 창조자의 뜻인지에 따라 모래가 될 수도 있고 반석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 죽음은 당신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 때문에 반석이 된 것입니다. 반석은 나의 죽음 뒤에도 지속되지만, 모래는 나의 죽음과 함께 끝납니다. 그런 행동은 아무것도 남길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나의 뜻에 행동의 기초를 삼는다면 벌써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의 뜻에 기초한 행동은 내가 죽으면 끝장납니다. 그러나 더 오래가는 무엇의 뜻을 따른다면 나의 행동은 그 무언가가 지속되는 동안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평화롭습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전설의 박치기왕, 김일은 당시 먹고살기 힘들었던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주었습니다. 자기 머리가 깨져 더는 박치기를 할 수 없을 때도 그는 국민을 위해 박치기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사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평화로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참 어리석게도 그때 알았습니다. ‘온 국민이 내 박치기 한 방에 이렇게 통쾌함을 느끼는데 내가 감히 박치기를 멈출 수 있을까. 이 한 몸 아프다고, 조금 힘들다고 어찌 못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내 박치기로 인해 많은 이들이 웃고 기뻐하고 행복했었다면 나 역시도 행복한 사람이었다는 걸, 그때 알았습니다.”
김일의 처음 박치기는 돈을 벌기 위한 것이었고 나중 박치기는 사랑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어떤 의도와 뜻을 가지고 하느냐가 행위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그 박치기가 국민의 뜻으로 이뤄진 다음에는 국민이 다 사라지기 전에는 그 의미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면 먼저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합니다. 그러다 부모의 뜻을 따라줍니다. 자신이 받은 사랑에 보답해야 하는 양심 시스템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게 될 때 자녀의 어리광과 마음은 부모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고 부모가 살아있는 동안 그 행동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뜻을 따름이 반석처럼 오래가는 것입니다.
만약 그 부모가 하느님이라면 당신을 위해 행한 뜻은 영원히 지속합니다. 그분은 영원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의 뜻에 따라 물 한 잔 준 행위도 영원한 보상을 받는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내가 하는 행동보다는 나는 나를 나 자신을 창조한 창조자로 여기는지, 아니면 나의 창조자가 분명히 있을 것이고 그가 나에게 바라는 뜻이 있을 것인지 정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 매일, 아니 매 순간 그분이 나에게 원하는 뜻을 찾게 될 것입니다.
저는 성경이 제일 좋겠지만, 아직은 『하.사.시.』를 매일 읽으며 그 뜻 안에 머물려고 합니다. 매일 “한 말씀만 하소서!”라고 청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의 모든 삶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삶입니다. 이렇게 살면 그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마음의 평화를 지니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나의 행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임을 내가 느끼기 때문입니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마태 7,21-29: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이라야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21절)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우리가 착하게 참 열매를 맺지 못하면 아무것도 얻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22-23절) 예수님은 하느님의 이름과 능력을 빙자하여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치유나 기적을 행하는 것이 하느님과 가까이 있고,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자들에게 경고하신다. 처음에는 제대로 믿고 덕을 쌓으며 기적을 일으키고 마귀도 내쫓을 수 있었을지 모르나, 나중에는 자기를 내세우는 거짓 모습과 욕망으로 기우는 모습이다.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하면서도 진실한 믿음의 행실이 따르지 않는 삶이란 얼마나 어리석은 삶인가를 모래 위에 집짓기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님은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23절) 하신다. 이 말씀은 현세의 삶과 그것이 맺는 열매와 그 안에서 덕이 얼마나 큰 힘을 미치는가를 가르치신다. 덕의 힘은 삶의 어려움에 쉽게 무너지지 않으며, 온전한 마음의 평화를 지닌다. 그는 사람에게 닥칠 수 있는 어떤 재앙도 그를 무너뜨리지 못한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가 반석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반석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강물은 유혹과 박해의 형태로, 꿋꿋이 서 있는 듯 보이는 사람에게까지 들이친다. 만일 그가 그리스도를 바닥과 기초로 모시고 있지 못하면 무너지고 만다. 지혜로운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세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세우시는 방식이다.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져 모든 박해를 이겨낼 수 있다.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사람들은 주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어리석은 사람에 비유되며, 스스로 어리석은 자가 되고 만다. 유혹이 불어 닥치면 그 집은 무너진다. 사악한 바람이 불어 닥치면 그 집은 모래 먼지로 가득하고 성난 물이 그 마음속으로 밀려들어 온다. 이 혼탁한 죄의 강물은 그 집의 주춧돌까지 뒤흔든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모두 놀라게 하였다. 그리고 그분의 가르침에서 권위를 느꼈다고 한다. 그 권위는 그분의 말씀에서 드러난 사랑 때문이었다. 참사랑에서 참된 권위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을 잘 따르는 우리가 되자.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운동도 열심히 하시고, 시간 날 때마다 책 읽고 또 글도 많이 쓰시는 형제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은퇴 후의 삶이 너무나 좋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하실 수 있다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서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셨습니다. 은퇴하셨지만 전혀 늙어 보이지 않았습니다. 늘 바쁘게 움직이며 생활하는 이 형제님은 삶이 너무 재미있고 신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날, 형제님께서는 거실에서 미끄러져서 고관절 골절이 되었습니다. 수술은 잘 되었지만 거동이 불편해졌고, 누워 있는 시간이 길어졌습니다. 운동도 또 독서도 또 밖으로 외출 나가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아는 지인이 이 형제님을 만나고서는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1년 만에 몰라볼 정도로 폭삭 늙었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사업가이자 시인으로 잘 알려진 사무엘 울만의 시 ‘Youth’(청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라 마음가짐을 뜻하나니
장밋빛 볼, 붉은 입술, 부드러운 무릎이 아니라 풍부한 상상력과 왕성한 감수성과 의지력
그리고 인생의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신선함을 뜻하나니….
나이를 더해가는 것으로는 사람은 늙지 않습니다. 그보다 이상과 열정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게 됩니다. 스스로 생각해 보십시오.
‘이상과 열정을 가지고 있는가?’
무기력하게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꿈도 없고 또 열정도 없다면 나이가 얼마 안 되어도 늙은이로 살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나 청춘으로 살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꿈꾸고 그 나라를 위해 하느님 뜻에 맞게 열정적으로 사는 사람은 늘 청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이상과 또 지금 삶에 대한 열정이 있어야 하느님의 뜻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람이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자기 집을 약하고 불안정한 모래 위에 짓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들은 이상도 열정도 없습니다. 그저 편하고 쉬운 길만을 가려고 합니다. 조금의 시련에도 완전히 무너지고 맙니다.
청춘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니면 노인의 삶을 살겠습니까?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이상과 열정만 넘쳐난다면 충분히 청춘으로 삽니다. 이렇게 청춘을 사는 사람만이 힘차게 하느님 나라를 향해 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인간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간다(사르트르).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마태 7,25)
역경의 바람이
거세게 불어오고
고난이
비처럼 쏟아지며
슬픔이
눈물처럼 흘러내려도
우리가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것은
말씀으로 무장된
영혼의 집이
지혜로 가득 차
필요할 때마다
그 지혜가
쓸모 있게 빛나기 때문이라네.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단톡방)
진국을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시간과 노력 인내가 필요하듯
우리의 신앙도 진국이 되려면 마찬가지입니다.
5분이면 어디에 넣어도
감칠맛을 깜쪽같이 내 주는
라면 스프 같은 효율적인 신앙도 있지만
그런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큰 폭풍우와 비바람이 내리치면 곧 쓸려 갑니다.
결과나 효율만 중시하고
내실을 다지지 못한 부실시공은
반드시 화근을 부르게 됩니다.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갑니다.
외양만 중시해서 뿌리를 깊게 내리지 못하고
대충 세워놓은 탓입니다.
나는 오랜 시간 끓여낸 진국 같은 사람인지
인스턴트 라면스프 같은 사람인지
돌아볼 일입니다.
나는 반석 위에 서 있는 지혜로운 사람인지
모래 위에 서 있는 어리석은 사람인지
돌아볼 일입니다.
그건 비바람과 폭풍우처럼
인생의 고난을 당하면 드러나게 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6.27.목."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마태 7, 25)
하늘을 나는
새들도
아무 데나
그들의
둥지를 짓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디에 집을
지어야할지를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말씀을
살리는 곳에
집을 지어야
합니다.
말씀이
되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모래 위에
지은 집처럼
어리석음을
닮았습니다.
말씀을 곡해하고
말씀을 저버린 삶은
언제나 불안합니다.
하느님께
데려다주는
말씀에 너무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말씀이 없는 삶은
언제나
지혜가 없고
가장 중요한
실행을 놓치며
살게됩니다.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행복할 수 없습니다.
말씀과 실행이
새로 태어날 수
있는 삶의
기초가 됩니다.
말씀이 기본이고
우리의
실행이 삶을
만듭니다.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실행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말씀을 만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삽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실행을 통하여
여물어 갑니다.
우리의 집은
반석 위에
지어지고
사람은 올바른
실행으로
무너지지 않을
지혜를 얻습니다.
말씀과 실행으로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기쁨입니다.
※이병우 루카 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과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 열왕기 하권의 말씀입니다.24,8-17
8 여호야킨은 열여덟 살에 임금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석 달 동안 다스렸다.
그의 어머니 이름은 느후스타인데 예루살렘 출신 엘나탄의 딸이었다.
9 여호야킨은 자기 아버지가 하던 그대로
주님의 눈에 거슬리는 악한 짓을 저질렀다.
10 그때에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와서 도성을 포위하였다.
11 이렇게 그의 부하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는 동안,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이 도성에 이르렀다.
12 그러자 유다 임금 여호야킨은 자기 어머니와 신하들,
대신들과 내시들과 함께 바빌론 임금에게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바빌론 임금은 그의 통치 제팔년에 여호야킨을 사로잡았다.
13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네부카드네자르는 주님의 집에 있는 모든 보물과
왕궁에 있는 모든 보물을 내가고, 이스라엘 임금 솔로몬이
주님의 집에 만들어 놓은 금 기물들을 모조리 떼어 냈다.
14 또한 온 예루살렘 주민과 모든 대신과 모든 용사 등 포로 일만 명과
모든 장인들과 대장장이들을 끌고 갔다.
그리하여 나라 백성 가운데 가난한 이들 말고는 아무도 남지 않았다.
15 네부카드네자르는 여호야킨을 모후와 왕비들,
내시들과 나라의 고관들과 함께 바빌론으로 끌고 갔다.
그들을 끌고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데려간 것이다.
16 바빌론 임금은 또 훌륭한 사람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 명 등,
전투할 수 있는 건장한 모든 사람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17 그런 다음에 바빌론 임금은 여호야킨의 삼촌인 마탄야를
그 뒤를 이어 임금으로 세우고, 이름을 치드키야로 바꾸게 하였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7,21-29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1 “나에게 ‘주님, 주님!’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
22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에게,
‘주님, 주님! 저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23 그때에 나는 그들에게,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내게서 물러들 가라, 불법을 일삼는 자들아!’ 하고 선언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
25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들이쳤지만 무너지지 않았다.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26 그러나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지 않는 자는 모두
자기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27 비가 내려 강물이 밀려오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휘몰아치자 무너져 버렸다.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28 예수님께서 이 말씀들을 마치시자 군중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29 그분께서 자기들의 율법 학자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