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退溪)와 거의 때를 같이하여 조선 왕조 성리학(性理學)의 쌍벽을 이루었던 율곡(栗谷 1536~1584)은 퇴계를 가리켜, "선생은 세상의 유종(儒宗)으로서, 조정암 뒤로는 서로 비견할 사람이 없다. 그 재주와 기국(器局)은 혹 정암에 못 미칠지 모르겠으나, 의리(義理)를 탐구하여 정미한 것까지 드러내는 데서는 정암이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 하였다. 일찍이 중종 당시 "지치주의"(至治主義), 즉 왕도정치의 이상을 누구보다도 갈구하고, 그 실현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침으로써 조선조 "사림(士林)정치"의 대표자로 손꼽히는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1482~1519)도 경세(經世)의 측면에서는 몰라도 학문의 측면은 퇴계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월천(月川) 조목(趙穆)의 『언행록』(言行總錄),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실기「(實記)」, 문봉(文峯) 정유일(鄭惟一)의 「언행통술(言行通述)」등에서도 한결같이 퇴계를 가리켜 “동방의 일인(一人)"이라했다. 물론 이들의 평가는 제자로서 스승의 학덕을 기리려는 뜻이 첨가된 것이라는 비판을 벗어나기 어려운 만큼 그 객관적 신빙성이 약할 수도 있으나, 퇴계와 그의 학문을 이와 같이 칭송하고 평가한 기록은 이 밖에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한말 개화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은 처음으로 한국의 유학사를 정리하는 자리에서 퇴계에 대하여 "그 정학(正學)을 천명하고 후생을 개도(開導)함으로써 '공맹 정주(孔孟程朱)의 도'를 환히 우리 동방에 다시 밝힌 사람은 오직 선생 한 분뿐이라"고 했고,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 1888~1939) 역시 비슷한 견해를 표명하여 "불교 사상에 원효가 대표자라면 유교 사상에 퇴계가 대표자일 것은 거의 이의가 없는 바이다. 말하자면 퇴계 이전까지는 유교가 오히려 정치나 사장(詞章)의 여습(餘習)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것이, 퇴계의 출현을 기다려 완전한 철학의 성립을 보게 되었으며, 예론(禮論)의 발달도 또한 퇴계 이후에 있었은 즉 퇴계로써 반도 유종(儒宗)을 삼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라 하여 한국 유학에서 퇴계가 차지하는 위치를 불교에서 원효가 차지하는 위치에 비교하고 있다.
퇴계 및 그의 학문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한국인의 것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이 점은 많은 일본 학자들의 견해 속에서도 발견된다. 일찍이 수고산(藪孤山)은 “공자의 도는...... 송의 정주(程朱) 두 분에 이르러 깊이 탐구됨에 따라 비로소 찾아졌다. 그 학은 조선의 이퇴계에게 전하여진 다음, 다시 (퇴계로부터) 일본의 산기암재(山崎闇齋)에게 전하여졌다."고 퇴계를 정주에 이어 유학의 정통을 잇는 한국 유학의 대표적 인물로 평가하면서, 일본의 유학(性理學)이 이러한 퇴계에 의하여 발달하였음을 밝힌 일이 있다. 도변예재(渡邊豫齋)는 "퇴계의 학식의 조예야말로 원(元)·명(明)의 제유(諸儒)와도 비교되지 않는 것"이라 하여, 평가의 범위를 한·중·일 3국으로 확대하더라도 당시로서는 퇴계가 제1인자임을 역설하였다.
이렇듯 이제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퇴계와 그의 학문이 한국 유학,특히 성리학을 대표하는 것이라 믿어 왔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 그렇게 인정하게 되었을까? 그 이유에 대한 소상한 설명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12-13세기부터 수입되기 시작한 성리학이 16세기 퇴계에 이르러 심성설을 중심으로 한 좀더 깊은 형이상학화의 작업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수용됨으로써 한국화하여 갔다. 그 시기로 말하면 고려말 조선초에 행하였던 주자가례라든지 「삼강행실도」등의 보급 장려만으로는 이제 사회 질서를 유지하고 체제를 공고히 할 수 없는 시점에 이르렀던 것이다. 초기의 단계를 벗어나 중기에 접어드는 조선 사회로서는 그 질서·체제에 대한 깊은 근거로서의 이론을 필요로 하던 때였다. 퇴계의 이론은 이러한 시대적 요청에 독자적으로 부응한 사상이라 풀이할 수 있다. 그 점은 퇴계 사상의 특색이 그대로 한국 사상의 특색으로 굳어진 사실로도 확인된다.
퇴계 사상의 특색은 (1) 양명학(陽明學)을 배척하고 정주학(程朱學)의 입장을 취하며, (2) 정주계 중에서도 주리적 이기(理氣) 이원론의 철학을 견지하면서, (3) 사칠설(四七說)과 같은 심성론(心性論)의 이론적 탐구를 병행하는 주지주의적 경향이 강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대로 한국 성리학의 특색이기도 하다. 퇴계이후 양명학은 한국에서 별로 발전하지 못하였다. 중국의 경우와 비교한다면 한국의 양명학은 거의 전무에 가까운 편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기에 치중하는 철학은 이미 화담(花潭)에서부터 두드러지는 반면, 이에 치중하는 철학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에서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하지만, 이러한 경향들이 각기 주기론 · 주리론이라는 명칭을 얻게 된 것은 오로지 퇴계의 사칠론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그 중의 주리론은 퇴계로 말미암아 완전히 “사림파(士林派)”의 철학이 되어, 정통철학으로 군림하게 되었다. 퇴계의 사칠설은 당시에 학계의 관심을 집중시켰음은 물론, 후대 학자들의 관심의 표적이 되어, 마침내 조선 왕조 성리학자들의 필수적인 문제로 되었고, 이러한 문제 의식이 결국 조선조 성리학 풍토위에 처음으로 학파의 형성을 가져 왔다. 또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등의 논쟁으로 연결하게 되어, 조선조 성리학은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달리 심성의 주조를 띤 정주계 성리학으로서 내향적 이론 추구의 경향으로 발전하였다.
도대체 사칠론을 둘러싸고 퇴계학파 율곡학파니 주리파 주기파니 또는 영남학파 · 기호학파라는 학파의 형성을 가져온 사실 자체가 조선조의 성리학이 퇴계의 사상을 계기로 하여 본격적인 한국화의 길로 접어들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의 사상으로 인하여 한국 성리학이 더욱더 강한 독자성을 지니게 되었으며, 그러한 의미의 “한국화의 발전”이 본격화하였다는 점에서, 퇴계의 사상은 한국 성리학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받는다고 하겠다.
그 위에 관리의 상으로 부각되거나 교육자 혹은 학자의 상으로 부각되거나 간에 그가 성실하고 진지한 "인간의 참모습"을 끊임없이 보여주는 그 점이 또한 남보다 뛰어났음을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한국 성리학사에 끼친 그의 영향 이외에 그의 "참다운 인간상"이 위기지학(爲己之學)으로서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여 고매한 인격의 승화된 기품을 한국 유학자 중 누구보다 뚜렷이 보여 줌으로써 뒷사람들을 끝없이 매료시키는 까닭에 우리는 그를 한국 성리학자 중에서 첫 번째로 손꼽게 된다고 하겠다.
그밖에 외국의 학자들이 퇴계와 그의 학문을 찬탄한 사실은 바로 그가 지닌 학문의 깊이와 인격의 진가가 결코 국내 성리학의 영역에서만 평가될 성질에서 그치는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사실로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의 근대 유학(儒學)이란 임란(壬亂)을 통하여 수은(睡隱) 강항(姜沆 1567~1618)과 같이 퇴계를 사숙(私淑)한 우계(牛溪) 성혼(成軍 1635~1698)의 문인 등의 영향을 받고 발달된 만큼, 일본 유학에 대한 퇴계의 영향이란 실로 막대하다. 예를 들면 근세 일본 유학의 대표자 중의 하나인 산기암재(山崎闇齋)는 퇴계 저서 중의 중요한 것을 다 보고 퇴계를 존중하여 퇴계 학문을 강론하면서 자신의 학문을 이루었던 것이다.
참고: 윤사순 역주 『퇴계선집』 1982년 현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