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가 올 겨울을 나기 위한 추가 자금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지난해 2월 러시아가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개시한 이후 20개월을 넘긴 지금까지,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진영의 아낌없는 군사및 재정 지원하에 러시아군에 맞서고, 경제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완전히 달라진 미 하원 분위기와 슬로바키아의 정권 교체 등으로 미국과 EU로부터 이전과 같은 전폭적인 지원을 낙관하기 어렵게 됐다. 러시아군이 올 겨울에도 우크라이나의 에너지 인프라 시설 집중 타격에 나선다면, 지난 겨울보다 더 힘든 겨울나기를 각오해야 할 판이다.
이같은 예상은 지난 25일(현지시간) 미 하원의 새 의장에 친(親) 트럼프 성향의 마이크 존슨 의원이 당선됨으로써 뚜렷해지는 분위기다. 이를 의식한 듯, 미 국방부는 이튿날(26일) 우크라이나에 대한 1억5,000만 달러(약 2037억원) 규모의 추가 군사 안보 지원안을 발표했다. "미국의 변함없는 대(對) 우크라 지원 약속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설명도 뒤따랐다.
언뜻 보기에는, 미 하원의 동향과는 상관없이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에 문제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속사정은 보기와 다르다.
◇미국, 대 우크라 추가 지원안을 발표했지만...
26일 발표된 대 우크라 군사 지원(49번째)은 지난 회계연도(2022년 10월~2023년 9월) 예산 중 남은 자금으로 이뤄졌다. 지난 10월부터 시작된 새 회계연도의 새 예산은 아직 의회에 계류중이다. 우크라이나 지원 규모가 어떻게 결론날지 아무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미국의 지원 열기가 점차 식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잘루즈니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가운데)가 지난 8월 라다킨 영국 합참의장, 카볼리 나토 유럽주둔군 사령관과 만난 모습/사진출처:스트라나.ua
같은 날, 발레리 잘루즈니 우크라이나 총참모장(합참의장 격)은 크리스토퍼 카볼리 유럽 주둔 나토 합동군 사령관과 토니 라다킨 영국군 합참의장과 우크라이나군의 공격과 방어작전, 가장 힘든 전선 상황, 적(러시아군)의 동향 등에 대해 두루 논의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가을-겨울철에 주요 인프라 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방공망을 강화하는 문제를 협의했다"고 강조했다. 방공망 시스템을 추가로 지원해달라는 요청으로 들린다.
관건은 돈이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계속 우크라이나를 지원해주고 싶겠지만, 의회의 승인을 받지 못하면 '돈 확보'는 불가능하다. 확대 국면의 하마스-이스라엘 충돌이 우선 걸리고, 친 트럼프의 성향의 마이크 존슨 신임 의장이 의회 승인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이미 의회에 제출한 1,060억 달러 규모의 긴급 보안 예산안 통과가 급선무다. 하지만, 존슨 신임 의장은 26일 폭스 TV와의 인터뷰에서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분리할 것"을 촉구했다. 러시아 매체 rbc와 외신들에 따르면 그는 “공화당 하원의원들간의 일치된 의견은 현안들(우크리아나와 이스라엘 문제)을 분리해야 한다는 것”이라며 "바이든 대통령과 백악관 참모진들에게도 이같은 뜻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1.060억 달러의 긴급 보안 지원 예산에는 우크라이나 지원을 위한 614억 달러와 이스라엘 지원 예산 143억 달러 외에도 대만 등 인도·태평양 국가 지원금과 불법 이민자 유입을 막기 위한 남부 국경 관리 강화 비용, 마약류인 펜타닐 밀반입 단속 비용 등이 담겨 있다. 로이터 통신은 “존슨 의장이 예산안 분리를 요구한 것은 바이든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지원안을 지지하지 않을 것임을 시사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미 상원 분위기도 만만치 않다. 로저 마샬(캔자스주) 상원의원 등 미 공화당 상원의원들은 26일 대통령 예산안에서 이스라엘 지원금 143억 달러를 떼낸 별도 법안을 발의했다. 미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상원이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에 대한 대통령의 지원 요청을 거부하거나, 근본적으로 변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 존슨 신임 미 하원의장의 몽니?
바이든 대통령이 의회로부터 예산을 타내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존슨 하원 의장이 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 워싱턴 포스트(WP)는 "존슨 의장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398억 달러 규모의 지원안에 이미 반대표를 던진 적이 있다"며 "그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단 한 번 지지했을 뿐 여섯 번이나 반대했다"고 지적했다.
존슨 미 하원의장의 폭스 뉴스 인터뷰/사진출처:SNS X 영상 캡처
존슨 의장은 원래 우크라이나 지지를 선언했던 인물이다. 지난해 2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직후, 그는 트위터(현재는 X)에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하고, 국제 기구에서도 축출해야 한다"며 우크라이나에 대한 연대를 표명했다. 그해 4월에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대여법(The Ukraine Democracy Defense Lend-Lease Act)에도 찬성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에 회의적인 입장을 돌아선 그는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에 반대표를 던지기 시작했다. 398억 달러 규모의 대 우크라 추가 지원안에 반대표를 던진 57명(모두 공화당) 중 한 명이다. 그는 당시 "(미국) 국경은 혼란에 빠지고, 미국 엄마들은 분유를 구하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으며, 가스 가격은 사상 최고치를 찍는 상황에서 400억 달러를 해외로 보낸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반대 이유를 설명했다.
지난 2월에는 미국이 이미 지원한 600억 달러 이상의 지원 자금에도 철저한 감독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 납세자들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쓴 자신들의 돈에 대해 완전히 알 자격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헝가리, 슬로바키아, 그리스의 반대에 직면한 EU 지원안
유럽연합(EU)도 친러 성향의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반대에 부딪혀, 앞으로 4년간 500억 유로를 지원한다는 대우크라 장기 지원 프로그램(2024~2027년 예산안)에 대한 합의에 실패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샤를 미셸 EU 상임의장은 27일 이틀간의 정상회담이 끝난 뒤 "합의에 실패했다"면서 그러나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이 여전히 EU의 우선순위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친러 성향의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와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신임 총리가 일찌감치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의 장기 지원안에 반대한다고 밝혀 합의 실패는 예정된 수순이었다. 이 제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모두 찬성해야 하기 때문이다.
EU/사진출처:페이스북 @eucouncil
EU 집행위원회는 친러 성향의 오르반 총리를 설득하기 위해, 동결된 자금 130억 유로를 전격적으로 풀어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지만, 슬로바키아마저 헝가리를 지원하고 나서는 바람에 합의까지 가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지난달 말 총선을 통해 권력을 탈환한 로베르트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인도적 지원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해왔다.
우크라이나에게는 슬로바키아의 정권 교체가 '등에 칼을 꼽는' 악재가 될 지도 모른다. EU의 군사및 재정적 지원은 우크라이나가 지난 20개월간 러시아 공격에 맞서는 데 큰 도움이 됐는데, 결정적인 우군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EU·나토 회원국인 슬로바키아는 우크라이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어 군수물자 지원이나 우크라이나 난민 수용의 통로가 돼 왔다. 또 우크라이나에 제일 먼저 구소련 전투기를 지원하는 등 군사적 지원에도 앞장섰다.
그러나 친러 성향의 피초 신임 총리는 선거 유세에서 "우크라이나에 단 한 발의 탄약도 보내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고, 취임후 참석한 첫 EU 정상회담에서 자신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냈다.
2016년 푸틴 대통령과 회담하는 피초 슬로바키아 총리/사진출처:크렘린.ru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그의 시각은 의외로 단순하다. “10년 동안 서로를 죽이는 것보다 10년 동안 평화를 협상하는 것이 더 낫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전쟁 종식 계획은 '비현실적'이다". "미국과 러시아는 전쟁 종식을 위한 합의에 도달해야 하고, EU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무기 공급자에서 평화 구축자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우크라이나의 군사적 충돌이 "러시아계 주민들에 대한 우크라이나 파시스트들(украинских фашистов, 강경 민족주의자, 즉 푸틴 대통령이 주장한 나치/편집자)의 공격으로 시작됐으며, 1년 이상 싸운 결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보다 더 넓은 영토를 점령했다"면서 "앞으로 1년 후에 어떤 결과가 나올 것인지 먼저 설명해 달라"고 요구했다.
스트라나.ua는 "피초 총리의 이같은 발언은 (우크라이나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헝가리외에 EU 내부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올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공급하는 프로젝트에 참여 중인 한 EU 고위 당국자도 "이는(피초 총리의 등장) 매우 우려스러운 상황 전개"라면서 "실질적인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사진출처:atlanticcouncil.org
그리스도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을 반대하는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러시아 국영 통신사 타스에 따르면 키리아코스 미초타키스 그리스 총리는 27일 정상회의가 끝난 뒤 "우리는 유럽으로 들어오는 난민들의 첫 도착지로, 난민 대책에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며 "난민 대책과 자연 재해에 대처할 수 있는 예산 지원이 없는 한, 키예프(키이우)에만 집중한 EU 예산 수정을 거부하겠다"고 발표했다. 그는 "(차기 정상회담이 예정된) 12월 이전에 해결책이 보이기를 희망한다"며 여차하면 계속 반대할 뜻을 분명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