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0104. 묵상글 (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 속지 말고 믿어라!. 등 )
----------------------------------------------------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속지 말고 믿어라!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오늘 요한의 서간은 속지 말라고 합니다.
속는다고 함은 무엇이 사실이 아닌데 사실로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속는다는 것이 실은 믿는 것입니다.
믿지 말아야 할 것을 믿는 것이고 믿기 때문에 속는 것이고,
그렇기에 속는다는 것은 무조건 좋지 않거나 나쁜 뜻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좀 더 좋은 방법을 찾는 것이 낫겠습니다.
속지 말자는 것은 탁 느끼기에도 수세적이고 부정적이지요.
아무에게도 속지 않기 위해서 모두를 의심하게 되겠지요.
좋은 것인데도 나쁜 것이 아닐까 의심하게도 되고요.
그래서 좀처럼 그리고 점차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고요.
의심이 심해져 불신까지 하게 되면 문제는
의처증이 중증이 되듯이 더 중증이 되고요.
그러므로 이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을 찾음이 좋겠습니다.
그것은 속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제대로 믿는 것?
첫째는 믿을 분을 믿는 것입니다.
아무에게도 속지 말라는 것은, 아무나 믿지 말라는 것이고,
더 나아가 아무도 믿지 말라는 것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하느님 외에는 아무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불신을 조장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제 말은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 말라는 것이요,
사람은 아무도 하느님처럼 믿어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사람으로만 믿어야 합니다.
그 정도의 사람을 그 이상의 사람으로 믿었다가는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신앙인은 하느님을 믿기에
사람을 하느님처럼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 사람들입니다.
제대로 믿는다는 것은 또 하느님을 믿더라도 제대로 믿는 것입니다.
언젠가 웃기는 얘기할 때 많이 하던 얘기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같이 목욕탕에 갔는데
아버지가 먼저 탕 안으로 들어가 ‘아, 시원하다.’했고,
그래서 아들이 들어갔다가 너무 뜨겁자 ‘믿을 놈 하나도 없네’라고 했다지요.
주님께서 고생하고 무거운 짐 진 사람은 다 당신에게 오라고,
당신에게 오면 안식을 주겠다고 또 짐을 가볍게 해주겠다고 하신 말씀을
짐을 안 지게 해주시고 고생이 없게 해주시겠다는 말씀으로 믿었다가는
믿을 놈 하나도 없다고 한 자식처럼 주님도 믿을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들 때문에 넌덜머리가 나 주님께 왔는데 주님께도 속았다 할 것입니다.
사실 많은 신자가 하느님을 믿으면 고통을 없애주실 거라고 믿음 때문에
믿기 시작하는데 주님은 고통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그럴 마음도 없으십니다.
오히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지요.
주님은 짐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고,
주님의 길은 꽃길도 아닙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짐을 지지 않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짐을 잘 지게 해주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꽃길 걷게 해주겠다고 귀를 간질이는 인간에게는 속지 말고,
반대로 자기 십자가를 매고 당신을 따라가면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귀에 거슬리는 말씀을 하시는 주님을 오히려 믿고 따라야겠습니다
----------------------------------------------------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
오늘 <복음> 말씀은 참으로 아름다운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예수님에 대한 두 개의 증언입니다. 이는 마치 소개장처럼 우리를 끌어당깁니다.
하나는 세례자 요한이 두 명의 자기 제자들에게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36)라고 증언하는 소개장이요, 또 하나는 예수님을 만난 안드레아가 형 베드로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라고 증언하는 소개장입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응답은 곧 우리에게 ‘제자 됨의 길’을 깨우쳐줍니다.
그것은 ‘행위’를 나타내는 ‘일곱 개의 동사’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의 두 가지 행위요, 만나서 함께 있는 중의 세 가지 행위요, 그리고 만난 후 그 결과로 발생하는 두 가지 행위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 이전에는 증언을 “듣는” 행위와 들은 그분을 “뒤따르는” 행위요, 예수님과의 만남에서는 말씀을 주고받으며 “함께 가는” 행위와 그분이 묵으시는 곳을 “보는” 행위와 본 그곳에서 “함께 머무는(묵는)” 행위요, 그리고 만남 이후에는 메시아를 만났다고 “증언하는(말하는)” 행위와 그들을 예수님께 “데려가는” 행위로 표현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증언을 “듣는다.”는 것은 단지 그 것에 동의하고 받아들인다는 수동적인 측면을 너머서 자발적으로 응답하는 순명의 자세를 포함합니다. 그리고 “뒤따라간다.”는 것, 역시 단지 추종한다는 것을 너머서 운명을 같이한다는 것,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곧 제자가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당신을 찾아 나서면,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시어”, “무엇을 찾느냐?”(요한 1,38), “무엇을 원하느냐?”하시며, 진정 찾아야 할 것을 찾게 해주고,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도록 일깨워주십니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대체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아니, ‘진정 원해야 할 것을 원하고 있는지’, ‘참된 것’, 곧 ‘하느님이 원하시는 바를 원하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당신께서는 묵는 곳을 “와서 보라”는 초대는 원하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약속과 보장입니다. 또한 “함께 가” 주시며, 동행하여 당신께서 묵는 곳으로 인도하고 이끌어주십니다. 손수 동반자가 되어 주시고, 반려자가 되어 주십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이 묵으시는 곳을 “보여주십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보여주시며, “함께 묵으십니다.” 사랑을 속삭여 주시며 흠뻑 적셔주십니다. 이렇게 사랑을 먹은 이들은 이제 다른 이들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 1,41)하고 “증언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예수님께로 “데려갑니다.”
이처럼, 이 ‘일곱 가지의 행위’가 바로 오늘 우리가 제자로서 걷는 길이요 사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을 나에게로 데려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로 데려가는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함께 아버지께 가는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가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수 있음은 주님께서 우리의 동반자요 반려자이시며, 우리와 함께 계시고 우리를 향하여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도 서로에게 구원의 동반자요 반려자로서의 삶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기 모인 우리 모두는 함께 아버지께 가는, 이토록 아름다운 구원의 동반자들이요, 반려자들인 것입니다.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것을 보고 그분과 함께 묵었다.”(요한 1,39)
주님!
말씀을 듣고 단지 동의하지만 말고, 받아들여 따르게 하소서.
따르지만 말고, 전적인 헌신으로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오늘도 무엇을 찾고, 무엇을 원해야 할지를 일깨워주시고
저를 향해 계시는 당신을 향해 달려가게 하소서.
당신 사랑에 흠뻑 젖게 하시어,
당신 사랑을 전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하소서. 아멘.
----------------------------------------------------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와서 보아라
새해 정초부터 안타까운 소식들을 접하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평화로운 세상을 갈망하지만, 전쟁과 이념 갈등이 커지고 우리 정치판도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인의 피습사건은 증오와 양극화가 가져온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잘난 사람은 많은데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진정한 스승은 없고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는 이들이 넘쳐 나서 문제의 해결은 보이지 않습니다. 참된 가르침은 입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삶은 없고 입술만 살아 움직이니 앞날이 밝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놈이 그놈’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쇄신을 부르짖으면서도 밥그릇 싸움이 여전한 것을 보면 희망이 절벽입니다. 그래도 주님을 믿는 이들은 더 좋은 세상을 희망합니다. 주님과 함께하는 세상을 희망하면서 자기 몫을 다해야 합니다.
요한은 사람들이 메시아로 생각할 정도로 권위가 있었고 인기가 있었습니다. 따르는 제자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를 내세우지 않고 뒤에 오실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었는데 마침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37)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두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께 “라삐(스승님),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하시고 그날 그들과 함께 묵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삶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본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자기 기득권을 지키려 발버둥 치는 세상이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소위 자기 줄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더 크신 분에게 제자들을 떠나보내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세상은 자기가 최고라고 부르짖는데 요한은 “주님의 신발 끈을 풀어드릴 자격조차 없다”고 하였고, 결국 그분에게 스승의 자리를 기꺼이 내어드렸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3,30) 는 것이 요한의 진심이었습니다. 요한은 자기의 몫, 자기의 자리를 확실히 알고 행동했습니다. 요한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도 살아났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준비된 삶이 아니라면 그렇게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언제 어느 때라도 “와서 보아라”할 수 있는 준비된 삶이 요구됩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저의 삶이 이러니 여러분도 제 삶을 통하여 예수님을 보십시오.’하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비뚤어지고 뒤틀린 이 세대에서 허물없는 사람, 순결한 사람, 하느님의 흠 없는 자녀가 되어, 이 세상에서 별처럼 빛날 수 있도록 하십시오”(필리피2,15).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셨습니다. 삶이 뒷받침되지 않는 믿음은 허상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안드레아는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친절하게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라고 설명해 줍니다. 안드레아가 생각했던 메시아, 그리스도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생각합니다. 구약성경은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사무엘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무엘에게 ‘왕’을 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그 왕이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할 수도 있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통을 줄 수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민족들처럼 ‘왕’을 청하였습니다. 사무엘은 하느님께 기도하였고, 사울에게 기름을 발라 주었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도 기름을 부어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사랑하는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을 통일한 왕이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왕이었습니다. 안드레아는 예수님에게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사랑했던 다윗 왕, 이스라엘을 통일했던 다윗 왕, 하느님께서 선택하셨던 다윗 왕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시몬 바르요나야, 너는 행복하다! 살과 피가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것을 너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이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베드로가 생각했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이 가지는 권한과 능력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교회를 세우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천국의 열쇠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를 ‘그리스도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천국의 열쇠를 주시는 예수님을 ‘구원자’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무엇으로부터 구원하는 것입니까?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권한이 있음을 보여주셨습니다. ‘악’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셨고, 악령을 쫓아내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셨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면 우리는 ‘죄, 악,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을 수 있습니다.
음식을 만드는 과정을 모두 보여주는 식당이 있었습니다. 요리하는 분들의 정성을 볼 수 있었고, 음식을 만드는 과정이 청결하기 때문에 믿음이 가는 식당입니다. 마치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이 ‘와서 보세요.’라고 자신 있게 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감출 것이 없다면, 자신이 있다면, 부끄러움이 없다면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성체를 모시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오늘 나의 말과 행동이 이웃에게 따뜻한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요한의 제자였던 두 사람이 요한의 한마디로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그렇게 따라오는 두 사람을 보고 주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십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렇게 물으시자, 그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디에 묵으십니까?’라고 말입니다.
사실 질문과 답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질문은 ‘찾느냐?’라고 물었는데 대답은 ‘어디 묵으십니까?’입니다.
만약 제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셨다면 저는 ‘000을 찾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 사람에게 ‘와서 보아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은 주님을 따라나섰고 그곳에서 주님을 보았습니다. 단순히 눈으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함께 대화하고, 먹고, 마시고, 듣고, 잠을 청했습니다.
‘와서 보아라.’의 의미는 ‘나와 함께 하자’라는 뜻입니다.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앙생활을 문자로 하려 합니다. 여러 가지 책을 보고 그곳에서 얻은 지식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또한 지식의 축적된 양으로 믿음의 깊이를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신앙생활은 우리 주님이 사시는 곳에 가서 보는 것입니다. 즉 함께 듣고, 마시고, 먹고, 잠을 청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계십시오. 그분을 보고 듣고 느끼십시오. 예전 제자들이 그러하였듯이 우리도 주님과 함께하는 신앙의 길을 가기를 바랍니다.
---------------------
꼬막꼬막
겨울은 꼬막의 계절입니다.
꼬막 다들 좋아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무지무지 좋아합니다.
저는 어릴 적 바닷가 근처에 살았습니다.
그래서 간식으로 해산물을 먹을 때가 많았습니다.
그중 생각나는 간식이 바로 꼬막입니다.
학교 다녀오면 잘 삶아진 꼬막에
조선장을 얹어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비싸서 그럴 수 없지만
어릴 적만 해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먹었던 기억이 납니다.
꼬막 비빔밥도 좋습니다.
꼬막전도 좋습니다.
맛난 것으로 우리 하루 한쪽이 행복하기를 빌어봅니다.
----------------------------------------------------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에픽테토스의 ‘담론’을 보면, 이런 구절을 읽을 수 있습니다.
“행복과 자유를 얻으려면 한 가지 원칙을 명확하게 이해해야 한다. 그건 바로 세상에는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있고, 통제 불가능한 것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 중에 어디에 집중해야 할까요? 에픽테토스는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게 된다면 비참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과거에 연연하시는 분을 종종 봅니다. ‘그때 그것을 했더라면. 그때 그것을 하지 않았다면….’ 등의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나 타임머신이 없는 한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습니다. 즉, 과거는 통제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통제할 수 없는 것에 집착하면 어떨까요? 후회로 인해 지금이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하면 온 힘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나 통제할 수 있음에도 ‘할 수 없다’라면서 시도조차 하지 않으며, 남이 대신해 주길 바랍니다. 이 역시 비참해지는 삶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신학자 라인홀트 니부어는 ‘평온을 비는 기도’에서 다음과 같이 기도합니다.
“하느님, 제 힘으로 바꿀 수 없는 것들을 받아들이는 평정심과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바꾸는 용기.
그리고 그 차이를 아는 지혜를 주소서.”
우리도 이 평정심과 용기 그리고 지혜를 주님께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금의 삶이 비참한 삶이 아닌 행복한 삶으로 변화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뒤따라오는 요한의 제자들에게 “무엇을 찾느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묵고 계신 곳을 묻지요.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수님께서 어디에 사시고 어떤 음식을 드시며 어떤 일상을 보내고 계신지 알고 싶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스승이었던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어린양”이라고 말씀하신 분, 그분을 알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노력을 모두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시지 않습니다. 어떤 일상을 살고 있는지도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그저 이렇게 말씀하실 뿐이었습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이 직접 해주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우리가 직접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직접 주님을 찾아가고, 주님과 함께 살면서 봐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스스로 해야 합니다. 남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
오늘의 명언: 리더는 자기가 가는 길을 알고, 그 길을 가고, 또한 그 길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다(존 맥스웰).
----------------------------------------------------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누가 참 아름답고 멋진 스승인가?”
-참 스승이신 주 예수님께 인도(引導)하는 자들-
아마도 우리 요셉수도원에서 가장 특징적인 상징물은 수도원의 십자로 중앙의 예수성심상일 것입니다. 늘 거기 그 자리에서 가슴 활짝 열고 주님을 찾아오는 모든 이를 환대하는 예수님의 모습이 참 좋습니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위로와 격려와 더불어 치유의 구원을 선사하는 주님을 상징합니다. 주님 평화의 빛이 두려움의 어둠을 몰아냅니다.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는 주님의 빛입니다. 더불어 연상되는 복음 말씀입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새삼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는, 영원한 참 스승이신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예전 예수성심상을 배경한 단풍나무가 사라지니 친히 하늘과 불암산이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전 써놓은 ‘참된 겸손’이란 글을 나누고 싶습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
예수성심상
배경의 단풍나무 사라지니
친히 하늘과 불암산이 배경이 되어 주신다
단풍나무 배경이
전부인줄 알았다
아, 하늘과 불암산을 가린
단풍나무였구나!
소스라친 깨달음
배경이신 주님을 가리지 말자
끝없이 낮아지고 작아져, 한없이 비워지고 겸손해져
주님만이 환히 드러나는 공(空)의 사랑이 되어야 한다”-2023.12.30
참으로 끝없이 낮아지고 작아져, 한없이 비워지고 겸손해져 우리의 영원함 참 스승이자 배경이신 주님을 가리지 말고 환히 드러나게 하는 공(空)의 사랑의 사람이 멋지고 아름다운 스승입니다. 이런 이들이 참된 영적 지도자들입니다. 영적지도의 두 목표는 하느님을 사랑하도록 안내해 주는 일, 또 하나는 자기를 알도록 안내해 주는 일이라 합니다. 둘인 듯 하나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더불어 자기를 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런 스승의 모범이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입니다. 정말 형제들을 사랑한다면 최고의 사랑은 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요한1서는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해야 함을 강조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들이기에 죄를 짓지 않습니다. 요한은 이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것은 바로 자기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라 결론을 내립니다.
정말 형제를 사랑한다면 그를 주님께로 인도합니다. 오늘 복음의 세례자 요한이 참 멋지고 아름다운 스승의 모범입니다. 한 눈에 참스승이신 예수님을 알아챈 세례자 요한이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외치자, 그의 두 제자는 요한의 말을 듣고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결국은 자기 제자를 예수님께 인도하는 요한입니다.
자기를 두고 떠나는 제자들이 서운하고 예수님께 질투심이 일어날 듯 한데 요한의 마음은 지극히 순수하고 고요합니다. 정말 비워지고 겸손해져 자기가 없이 주님만 환히 드러내는, 흡사 주님을 가리키는 손가락 같은 존재가 세례자 요한입니다. 참스승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은 대세의 순리이자 자연스런일입니다. 정말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은 이웃을 참 스승인 주 예수님께 인도하는 일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이제 주 예수님의 제자들이 되고 세례자 요한도 참으로 기뻣을 것입니다. 이들 제자들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신 주님의 물음은 시공을 초월하여 그대로 오늘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무엇을 찾느냐?”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찾는 이들이 참된 구도자들입니다. 누구나의 근원적 갈망이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주님의 첫 제자들이 된 이들의 물음은 정확했습니다.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주님을 모시고 함께 살며 배우고 싶은 갈망의 표현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대답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와서 보아라.”
와서 보고 듣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분이야말로 영원한 참스승이신 주 예수님뿐입니다. 여기서 ‘어디에 머물고 계시냐?’는 단어인 그리스어는 ‘메네인(menein)’은 ‘살다(abide)’ 또는 '계속 남다(remain)’라는 뜻으로 복음에서는 항구한 관계를 뜻합니다. 주님곁에 머물면서 주님과 항구한 우정관계를 맺음을 뜻합니다.
그대로 우리의 평생 정주 삶과 일치합니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초대에 응해 자랑스럽고 영예롭게도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면서 평생 주님 안에서 보고 듣고 배우며 정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의 수도형제들입니다.
무엇을 배웁니까? 사랑을, 믿음을, 희망을, 기도를, 섬김을, 순종을, 겸손을, 침묵을, 경청을, 가난을, 정결을 배우며 이외에도 참 배울 것이 많으며 배움에 있어서는 영원한 초보자임을 인정하게 됩니다. 말그대로 배움의 여정입니다. 사부 성 베네딕도는 주님을 섬기는 것을 배우는 배움터라 우리 수도공동체를 정의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루밤을 묵은 제자들은 깊은 감화를 받았음이 분명합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예수님과 함께 묵었던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는 자기 형 시몬에게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며 주님께 형을 인도하니, 바로 이것이 진짜 형제 사랑이요, 시몬 베드로에게는 운명적 사건이 되었으니 늘 갈망하던 참스승이신 주 예수님을 만난 것이지요.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번역하면 베드로입니다. 비로소 영혼의 참 스승이자 말씀이신 주님을 만남으로 영적갈망은 해소되어 내적안정과 평화를 누렸을 시몬 베드로입니다.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인 주님안에 정주의 머무름은 평생과제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날로 새로워지고 깊어지는 주님과 사랑의 우정 관계인지 살펴보게 됩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주님과 사랑의 관계를 날로 깊이해 주십니다. 끝으로 26년 전 주님과 날로 깊어가는 우정관계를 염원(念願)하며 써놨던 ‘사랑’이란 시를 나눕니다.
“당신 언제나
거기 있음에서 오는 행복, 평화
세월 지나면서
색깔은 바랜다지만
당신향한 내 사랑 날로 더 짙어만 갑니다
안으로 안으로
끊임없이 한결같이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세월 지나면서 계속
놀랍고
좋아지고
깊어지고
새로워지는 당신이면 좋겠습니다”(1997.3.)- 아멘.
----------------------------------------------------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첫 만남 그리고 늘>
“와서 보아라.”(요한 1, 39)
사랑하는
사람아
나
있으니
나에게
와서
나를
보고
나와
함께하게나
사랑하는
주님
당신
계시니
당신께
가서
당신을
보고
당신과
함께하렵니다
----------------------------------------------------
240104.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요한 1,37)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본받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의 제자들 가운데서 두 사람을 불러 당신을 따르게 하셨는데, 그 가운데 하나인 안드레아는 자신의 형 베드로도 그분께 데려왔습니다. 영적인 의미로 볼 때,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인지 여기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 여러분이 그분을 본받는다면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록 여러분이 인간적으로 나약하더라도,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인간으로서 보여 주신 겸손의 본보기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주님의 고난의 동반자임을 보여 주며 그분의 부활과 승천에 참여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분을 따르는 것입니다.
-존자 베다-
✝️ 성인 / 영적 글 묵상✝️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1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말씀이다
아버지는 온 힘을 다해 아들을 드러내고, 만물 속에서 아들을 드러내십니다. 모든 피조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나의 입만이 하느님을 말하고 드러내는 게 아닙니다. 돌맹이도 똑같이 합니다. 종종 사람들은 말보다 행위로 더 많은 것을 알아냅니다. 최고의 본성이 최고의 능력으로 하는 일을, 더 낮은 본성이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후자가 전자와 똑같이 할 수 있다면, 그것은 전자보다 열등한 것이 아니라, 전자와 동등한 것입니다.
모든 피조물은 행위로 하느님을 드러냅니다. 하지만 아주 조금밖에 드러내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치품천사보다 더 높이 올라가 하느님을 건드릴지라도, 그는 하느님과 같을 수 없습니다. 이는 흰색을 검은색과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만물이 제아무리 모든 것을 받았다고 해도, 그들이 최선을 다해 하느님을 드러내고 있다고 해도, 그들은 하느님 안에 있는 것과 같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나, 나는 둘로 들었으니”(시편 62,12)라고 예언자는 말합니다. 하느님이 영혼 안에서 말씀하실 때, 영혼과 하느님은 하나가 됩니다. 하지만 영혼의 중심에서 밖으로 나와 오감을 통해 피조물로 나아감으로써 이 하나 됨은 차츰 떨어져 둘로 나뉘고 맙니다. 우리가 인식 능력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우리는 아들 안에서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하나 안에서 영원히 아들을 드러내시고, 아들 안에서 만물을 쏟아 내십니다. 그러면 만물은 자신들이 흘러나왔던 곳으로 되돌아가겠다고 아우성을 칩니다. 그들은 일생 동안 살아 가면서 자신들이 나왔던 근원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외치고 분주하게 서두릅니다.(94)
----------------------------------
✝️ 목요일 성모님의 날✝️
당신은 하루에 얼마나 오랫동안 당신의 몸에 사랑을 줍니까?
사람의 몸과 마음은 굉장히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만일 몸이 강하고, 건강하고, 부지런하고, 활동적이면 마음 또한 건강할 수 있다. 병든 몸을 지닌 사람은 쉽게 다른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에너지를 보내게 되어있다. 그러므로 특히 공적인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잘 관리하여야 한다. 격언 중에 건강한 몸에 건강한 마음이 깃든다는 말이 있듯이 건강한 몸은 마음을 건강하게 하고, 힘차게 영적수련도 잘 해나갈 수 있게 된다. 사도 바오로는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라고 정의 했다. 하느님이 사시는 하느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건강하게 관리하고 사랑을 주어야 한다. 몸은 어린아이와 같다고 생각하라. 그래서 배고프면 먹을 것을 주고, 피곤하다면 잠을 자주고, 아프다고 소리치거나 투덜대면 약을 주고, 달래주고, 적당히 운동을 시켜주어야 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점은 몸에 애착을 갖지도 말고, 몸을 미워하지도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엄마가 어린아이를 키우듯이 적당하게 돌보아주어야 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