닭백숙을 먹은 저녁
유승도
뱃속에서 닭이 걸어 다니나 추적추적
추적추적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이제 겨울이야 세상을 꽁꽁 얼리며 바람이 오고 갈 거야
떠나야겠지?
추적추적 닭이 뱃속에서 걸음을 멈추지 않아도, 그래 그래도
준비된 자의 죽음
북풍이 몰아온 얼음의 밤이 지났다
햇살이 비치자 노오란 잎이 녹으며 가지에서 땅으로 스윽슥 떨어진다
환하다
파고드는 추위를 받아들이며 너는 잠에 들었었구나 햇살이 닿기 전 너는 이미 모든 준비를 끝낸 잎 아닌 잎
툭, 가지에서 땅으로의 여정 끝에서 침묵의 소리가 반짝인다
산에 사니 산이요
등성이의 털을 곧추세운 산들이 맥을 일으켜 달리는 12월,
바람 일어 눈과 햇살이 흩날리는 문 밖으로 나선다
가자, 나도 산이다
허깨비
십여 년 전에 나를 욕하며 화를 내던 놈
오년 전에 죽었는데
에이 자식, 성질이 그렇게 더러우니 그리 빨리 죽었지
눈 덮인 산길을 걸으며, 서산 너머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며 욕을 하는 나를 보았다
옆을 스치는 바람인지도 모르고 발에 밟히는 눈일 수도 있는 사람을
허허 참
허깨비와 살아가는 허깨비를 보았다
봄, 초록의 아가들이 부른다
까르르르르르르르 까르르 르르르 까르르르 까르르
까까까까 라라라라 까라라 라라라라 까라라라까라라
—계간 『시에』 2013년 여름호
유승도
충남 서천 출생. 1995년 『문예중앙』으로 등단. 시집 『작은 침묵들을 위하여』, 『차가운 웃음』, 『일방적 사랑』. 산문집 『고향은 있다』, 『수염 기르기』 등.
첫댓글 잘 읽었습니다.
산에 사니 산, 우리 모두 하늘이요. 산이요. 바다며, 강입니다.
영월 김삿갓면 산골에 유승도 시인과 함께 사는 닭들은 참 불쌍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