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松江)의 마지막 시
旅遊孤島歲崢嶸(여유고도세쟁영)-외로운 섬에서 나그네 되어 세월은 츠름츠름 쌓여 가는데
南徼兵塵賊未平(남요병진적미평)-남쪽에선 아직도 왜적을 물리치지 못했다네
千里音書何日到(천리음서하일도)-천리 밖에선 서신이 언제나 오려는지
五更燈火爲誰明(오경등화위수명)-새벽4시(五更)의 등잔불은 누굴 위해 밝았는고.
交情似水流難定(교정사수류난정)-사귄 정은 물과 같아 머물러 있기 어렵고
愁緖如絲亂更縈(수서여사란갱영)-시름은 실오리 같아 어지러이 더욱 얽히네
賴有使君眞一酒(뢰유사군진일주)-원님이 보내온 진일주(眞一酒)에 힘입어
雪深窮巷擁爐傾(설심궁항옹로경)-눈 쌓인 궁촌에서 화로 끼고 마시노라.
송강(松江) 정철(鄭澈)
강화도에서 굶어죽은 송강, 영혼은 진천 환희산에 노닐다 !
그냥 생각나기에 훌쩍 떠났다 !
충북 진천군 문백면에 있는 환희산(歡喜山)에 묻힌 송강 정철 묘를 답사하기 위해서---
원주에 접어드니 강원도라서인지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녹지 않아 온 산이 하얗다.
조용한 겨울 눈 풍경에 문득
月白雪白天地白(월백설백천지백)-달도 희고 눈도 희고 천지가 새하얀데
暖雪被中洞安睡(난설피중동안수)-따뜻한 눈(雪)이불 속에 마을은 잠이 들고
란 시귀(詩句)가 떠오른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산가지 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이 몸 죽은 후면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서 매어가냐
구슬끈 비단 상여에 만인이 울며 따르거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나무 그 숲에 가기만 가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쓸쓸히 바람 불 제
뉘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야
뉘우친들 무엇하리
이 시조는 그 유명한 송강(松江)의 장진주사(將進酒辭) 권주가로 유명한 시조다.
초장부터 술 마시는 것으로 시작하여 술로 끝나는 시조지만,
전체적으로 인생의 허무함을 곳곳에 암시한 시조다.
특히 뒷부분은 쓸쓸한 분위기마저 돈다.
필자가 지금 오르고 있는 환희산(歡喜山)은 송강의 구슬픈 장진주사(將進酒辭)
권주가와는 다르게 송강(松江)의 묘(墓)가 있는 산세도 아름다울 뿐 아니라
때마침 하얀 눈으로 덮혀있어 생전에도 아름다운 노래 속에 산 인생이
사후에도 자연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멋있게 영혼을 위로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송강(松江) 정철(鄭澈) !
중고등학교 역사에서 이미 배운 낯익은 이름이기 때문에
“송강 정철은 어떤 사람일까?”
를 설명한다는 것은 너무나 진부(陳腐)하다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강화도에서 굶어 죽었다는 장소와 그 영혼이 묻힌
묘(墓)를 답사하면서 “송강(松江)은 이런 사람이었는데--”하는 글 한줄 정도는
써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송강(松江)은 우리 역사 속에 가사문학(歌辭文學)의 일인자로
시조(時調)의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한국시가사상(韓國詩歌史上) 쌍벽으로 일컬어지며,
노계가사(蘆溪歌辭)의 박인노(朴仁老)와 더불어 삼가(三家)로 불리고 있다.
다 아는 사실이지만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관동별곡(關東別曲), 사미인곡(思美人曲), 속미인곡(續美人曲), 성산별곡(星山別曲)등 4편의 가사(歌辭)와 사설시조인 장진주사(將進酒辭), 연시조(聯時調)인 훈민가(訓民歌)16수 시조(時調) 107수가 전하며, 유고(遺稿)로 송강가사(松江歌辭), 송강집(松江集), 송강별추록유사(松江別追錄遺詞)등이 있다.
조선후기(朝鮮後期) 한글소설 “구운몽(九雲夢)” 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었고 서포만필(西浦漫畢)로 유명한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은 송강가사(松江歌辭)에 대하여 말하기를
“송강가사(松江歌辭)는 우리나라의 이소(離騷)”라고 하면서
“진정한 우리글은 관동별곡과 사미인곡, 속사미인곡 이 세편뿐이다”고
송강 정철의 송강가사(松江歌辭)를 극찬하였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란 무엇이기에 김만중(金萬重)은 송강가사를
이소(離騷)에 비유하는가?
중국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은 견문이 넓고 지식이 깊어 회왕(懷王)의 신임이 두터웠다.
언제나 그러듯이 간신 늑상(勒尚)이 회왕(懷王)에게 다음과 같이 참소하였다.
“굴원은 학식을 빙자하여 대왕을 업신여기며 딴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현명치 못한 회왕(懷王)은 늑상의 말을 믿고 굴원을 멀리하였다.
(최순실 말만 믿는 박대통령을 떠올린다)
밑에 있는 묘는 송강의 아들 묘다
굴원은 왕의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않고, 참소와 아첨이 왕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비통해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그의 울분을 토로하니 이 시가 그 유명한
굴원의 “이소(離騷)”다.
굴원(屈原)의 이소(離騷) 시(詩)는
총 373구(句)에 2490자로 된 고대 중국의 시가(詩歌) 중에서도 가장 긴 서정시(抒情詩)다.
필자에게 이소(離騷)의 시(詩)가 있어 장편(長篇)이기 때문에 중요부분 몇 구만 소개한다.
이소(離騷)
-앞은 생략하고-
忽奔走以先後(홀분주이선후)-앞으로 뛰고 뒤로 달리며
及前王之踵武(급전왕지종무)-선왕(先王)의 뒤를 잇게 하렸더니,
荃不察余之中情(전부찰여지중정)-이 내 충정은 몰라주고
反信讒而齌怒(반신참이제노)-참소만 믿고 벌컥 성내시네.
余固知謇謇之爲患(여고지건건지위환)-바른 내 말이 이 몸에 화(禍) 될 줄을
忍而不能舍也(인이부능사야)-알고도 차마 바른 말을 못 그치는 것은
指九天以爲正(지구천이위정)-하늘이 아시리! 이 내 충정(忠正)을
夫唯靈脩之故也(부유령수지고야)-오직 알뜰한 임금님만 위하는 마음 때문일세.
-뒤에도 생략하고-
송강(松江)은 한글로 송강가사(松江歌辭)를 창작하여 우리 국문학을 꽃피운 조선시대 최고의 시인으로 추앙되고 있다. 한문학(漢文學)만이 숭상되던 당시의 사회 계층 간 벽을 허물고 우리 한글로 주옥(珠玉)같은 가사(歌辭)작품을 남김으로써 국문학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위대한 민족시인(民族詩人)이었다.
송강 정철(松江 鄭澈 1536-1593)의 고향을 대부분 사람들은
전라북도 옛 창평현(昌平縣)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송강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10세대에 을사사화로 온 집안이 몰락하여 아버지를 따라 유배지를 전전하다가
16살이 되던 해에 귀양이 풀린 아버지를 따라 전라북도 창평(지금의 담양가사문화권)으로 내려갔다.
송강은 이곳에서(담양 광주호 부근) 면앙 송순(勉仰 宋純),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고봉 기대승(高峯 奇大升),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 등 기라성 같은 학자 문인들을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하였다.
그리고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제봉 고경명(霽峰 高敬命) 등을 벗으로 만났으며 율곡 이이(栗谷 李珥), 우계 성혼(牛溪 成渾)등과 평생을 교유(交遊)하는 학문의 길을 걸었다.
2015년에 필자는 송강가사(松江歌辭) 문화권인 담양 광주호 지역을 답사(踏査)하였다.
환벽당(環碧堂), 식영정(息影亭), 소쇄원(瀟灑園), 송강정(松江亭), 죽록천(竹綠川또는松江), 송강(松江)의 호(號)도 죽록천(竹綠川)에서 따서 지었다.
모두 송강가사문학(松江歌辭文學)의 산실이지만 그 자연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지면부족으로 여기서 다 소개 할 수 없다.
송강(松江)은 임진왜란중 1593년 명(明)나라에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왔다.
그러나 귀국 후 명(明)나라에서 조선에 군사를 파병할 뜻이 없는 것처럼
거짓 보고된 동인(東人)의 모함을 받자 사직을 청하고
강화도 송정촌(松亭村-지금의 숭뢰리)으로 물러나 임시로 거처(寓居)하다가,
1593년 12월 18일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미스터리 의문은 송강이 왜 늙은 몸에 강화도로 갔는가 이다.
조선문학의 최고봉이요, 한때는 서인의 거두(巨頭)로서 좌의정까지 지낸
서슬 푸른 권력을 휘둘렀던 송강(松江)이 대체 어쩌다가 늘그막에 강화 섬으로
흘러 들어와서 겨울의 해지는 풍경처럼 스산한 말년을 보내다가
홀로 쓸쓸히 죽어갔단 말인가?
한 기록에는 송강(松江)이 강화도로 간 이유는 당시 강화에 살던 송강의 제자이며
당대 최고의 시인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강화도에 있었고,
혹시 조정에서 다시 송강을 부를 때 가까운 강화도에 있어야 빨리 달려 갈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짐작뿐이다.
석주(石洲) 권필(權韠)이 송강(松江)과 가깝다는 것은 권필이 송강의 묘를 찾아 지은
“송강의 묘를 지나면서(過鄭松江墓 有感)”라는 아래의 시(詩)를 보면
알 수 있다.
송강(松江)의 묘를 지나면서(過鄭松江墓 有感)
空山木落雨蕭蕭(공산목락우소소)-텅 빈 산 나뭇잎 지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는데
相國風流此寂寥(상국풍류차적요)-재상(宰相)의 풍류 또한 이같이 쓸쓸하네!
惆悵一杯難更進(추창일배난갱진)-슬프다, 한 잔 술 다시 올리기 어려우니
昔年歌曲卽今朝(석년가곡즉금조)-예전의 그 노래는 오늘을 말함인가
권필(權韠)
서울신문의 한 기사에서는
송강이 강화군 송해면 숭뢰리에서 굶어 죽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그 기사 내용에는
【강화에서 송강의 생활은 비참했다. 당장 생계를 꾸리기도 버거운 형편이었다.
비록 현직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여전히 정승 직책을 지니고 있던 송강이었지만,
워낙 청렴한 성품이라 무엇 하나 챙겨둔 것이 없었던 터이다.
그가 얼마나 궁핍에 시달렸나 하는 것은 친구에게 보낸 편지로도 알 수 있다.
《내가 강화로 물러나온 후 사면을 둘러보아도 입에 풀칠할 계책이 없으니 형이
조금 도와줄 수 없겠습니까?
평일에 여러 고을에서 보내온 것도 여태껏 감히 받지 않았는데,
장차 계율을 깨뜨리게 되니, 늘그막에 대책 없이 이러는 게 못내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형처럼 절친한 이에게서도 약간의 것인즉 마음 편하겠지만,
많은 것은 감히 받을 수 없습니다.》】
송강 정철이 굶어 죽었다고 추측되는곳 강화군 송화면 숭뢰리
필자가 2016년 12월 26일 강화군 송해면 숭뢰리
송강(松江) 정철(鄭澈)이 굶어 죽었다는 마을을 찾아갔다.
위에 있는 사진이다.
이곳은 북한의 대남방송 확성기 소리가 매우 뚜렷하게 들리는 곳이다.
그런데 동네 사람들에게 “송강 정철이 굶어 죽은 곳”을 물어봐도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강화군문화박물관을 찾았다.
박물관 측에서도 “숭뢰리”어디에서 굶어 죽었다는 말은 들어도 확실한 위치를 모른다고 한다.
나중에 알게 되면 연락하겠다고 하여 전화번호보만 주고 왔다.
송강 정철의 전기(傳記)에는 성격이 좀 까다로워서지 청렴결백의 인물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서인(西人)의 영수(領袖)이며 좌의정(左議政)은 지금의 부총리 급이다.
지금 정치인으로 생각하면 어떤 식이든 밥 먹을 정도야 적당히 빼돌려 놓지 않았겠느냐 생각할 수 있다.
위의 기사를 보면 “남이 적선(積善)으로 주는 적은 것도 받을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 정렴함을 알 수 있다.
요즘 정치권이 시끄러운 사건의 마지막에는 권력과 직책을 이용하여
부정으로 “돈”을 빼 돌려놓은 결과이다.
송강(松江)의 묘에서 지금 정치인들을 생각해 본다.
농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