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장 구속사 강해
아브라함의 보호 가운데 있는 세속 국가
롯과는 달리 가나안에서 살고 있는 아브라함의 생활은 날마다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이었다. 가나안을 침공한 그돌라오멜의 동맹군들을 무찌른 사건(창 14:1-17)을 필두로 살렘 왕 멜기세덱의 축복과 쪼갠 고기 사이로 하나님께서 지나가시는 언약 체결식(창 15:12-21), 사라의 몸종이던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이 탄생한 사건(창 16:1-16), 새언약의 체결식이라고 할 수 있는 할례의 제도를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건(창 17:14)과 새언약의 대상으로 이삭이 출생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창 17:15-22) 등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새로운 신개념(神槪念)을 세워나가고 그에 근거하여 창조적인 삶을 경영하게 하는 중대한 경험들이었다.
하나님은 아직 자식도 없는 아브라함에게 마치 자식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다(창 18:18-19).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택한 것은 그의 자손들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주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내실 때부터 매우 구체적으로 아브라함에게 계시된 바 있다.
창세기 12:1-3의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홍수 이후 인류는 하나님을 떠나 독자적인 인생을 향해 치닫다가 마침내 바벨탑 사건으로 반신국적인 경향의 절정을 드러내었는데 그러한 인간들의 나라와는 달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제 이삭을 통해 성취될 시점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삭의 탄생은 이처럼 새 나라를 건설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뿐만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에게 있어서도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역사의 분기점에 이르러 나타난 사건이 바로 창세기 20장에 등장하는 아비멜렉 사건이다.
1. 하나님의 나라와 세속 왕국과의 관계
소돔과 고모라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되는 장면(창 19:28)을 지켜본 아브라함은 무슨 연고인지는 알 수 없으나 가나안의 남방으로 이주하여 그랄 땅에 머무르게 되었다. 지금까지 주로 가나안 주민들과 상대하던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사건 이후 갑자기 그랄 땅으로 옮겨간 이유는 잘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 15:18)라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장차 자신의 후손들이 누리고 살 땅을 고루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에서 그랄 땅에까지 내려간 것으로 추측된다. 후에 이 땅은 유다 지파에게 주어졌는데, 이곳은 이스라엘 국가에서 정치 및 신앙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곳이다.
당시 이 땅은 블레셋 사람들이 거하는 곳으로 아비멜렉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함의 후예로서 주로 지중해의 북쪽 소아시아 지방에 살다가 가나안 서쪽 지방으로 이주하여 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들은 주로 배를 잘 다루고 항해술이 뛰어난 관계로 당시 지중해를 주름잡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블레셋 사람들은 이미 가나안에 거주하고 있던 사람들보다도 용맹하고 상당히 문화적으로 앞서 있었다. 그들은 다곤이라는 신을 수호신으로 섬겼는데 이 신은 바다의 신이었다.
때문에 그 땅을 살펴보기 위해 들어간 아브라함은 그 곳 사람들에게 상당한 경계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랄 사람들을 특별히 경계한 것은 “이곳에서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으니 내 아내를 인해 사람이 나를 죽일까 생각하였음이요”(창 20:11)라고 한 말을 보아서도 그랄 사람들이 가나안 사람들에 비교하여 상당히 전투적이고 다곤 신을 중심으로 강인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이유로 아브라함은 사라를 누이처럼 취급하고 그 땅을 두루 살펴보고자 계획한 것이다.
사라를 본 그랄 왕 아비멜렉은 사라의 아름다움을 보고 반하여 아내로 취하고자 하였다. 이미 사라는 이삭을 수태한 상태였지만 아비멜렉의 권력 앞에 아브라함은 사라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 밤에 아비멜렉에게 꿈에 나타나시어 경고하심으로(창 20:3)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도록 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매우 특별한 사람인 것을 밝혀 주셨다(창 20:7). 이에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심히 두려워하게 되었고 아브라함은 그랄 왕 아비멜렉의 보호 아래 마음놓고 그 땅에 거할 수 있는 특권을 얻기에 이르렀다(창 20:14-15).
2. 그랄 땅에 터전을 잡은 의미
이 사건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이삭의 탄생에 대하여 얼마나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제 머지않아 사라에게서 이삭이 출생할 것인데 만일 아비멜렉이 사라를 아내로 취하여 버린다면 그동안 아브라함이 아들을 기다려 왔던 오랜 소망은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되고 마는 것이다. 더욱이 이삭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으로 받은 새 나라를 건설하는 주인공으로서 모든 언약의 중심을 차지하는 중요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아브라함으로서는 상당한 위기감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한 위기에서 하나님은 아비멜렉을 권고하시어 사라를 아브라함에게 돌려주게 하신 것은 그만큼 이삭의 출생에 대하여 큰 관심을 나타내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아비멜렉 앞에 매우 특별한 인물로 부각시켜 주심으로서 아브라함의 신변을 막강하게 만들어 주셨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기도하자 아비멜렉 집안의 태를 다시 여시고 자식을 얻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가나안의 남방 그랄에서 안심하고 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더욱 강하게 하심으로서 아무도 아브라함을 넘보지 못하게 하셨다(창 21:22-34). 이처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강하게 하신 목적은 좀 더 다른 곳에 있었다. 그것은 이삭이 출생하여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 생존에 대한 아무런 위협을 당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미연의 조처였던 것이다. 아브라함이 그곳에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아브라함을 시험한 이후까지 그 땅에 거주한 것(창 22:19)으로 보아 이삭이 성년이 될 때까지 오랫동안 가나안의 남방에 거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처음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남방으로 간 것은 장차 태어날 후손들이 새 나라를 건설할 땅을 미리 살펴보기 위한 것이었지만, 아비멜렉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그곳을 이삭이 마음놓고 장성할 수 있는 요람으로 바꾸어 주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그 땅에서 막강한 실력자가 되게 하여 주셨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든든한 배후자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나타내 주신 것이다(창 21:22). 이처럼 이삭의 출생을 위해 하나님은 매우 세세한 부분까지 준비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자상한 배려 아래 그랄 땅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가나안 원주민들보다 막강하고 고도한 문명을 지니고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보호하고 무서워함으로서 당시 사회적 정세가 아무리 어둡고 혼란하더라도 아브라함은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고 그 땅에서 견고하게 터를 잡고 인생을 경영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아브라함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은 장차 태어날 아들 이삭에게 있어서는 그곳이 천혜의 요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아브라함을 막강한 실력자로 세우신 것은 가나안의 실질적인 주인이 누구인가를 나타내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나안은 아브라함이 거주한다는 이유만으로도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음을 역사적으로 증거한 셈이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주하여 살아가는 동안에 그 지역의 정세가 상당히 안정된 상태로 커다란 전쟁이 없었다는 점을 보아서도 그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돌라오멜의 동맹군이 소돔과 고모라를 침략하고 약탈하였다가 아브라함에 의해 퇴각 당한 사건 이후 가나안은 외부의 침략을 받지 않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국제 정세가 안정되고 아브라함이 막강한 실력자로 부상된 상태에서 이삭이 탄생하게 된다. 이처럼 이삭이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 가운데 이 세상에 출생하게 된 것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신령한 백성은 하나님의 전적인 보호 아래 그 인생이 시작되는 것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원래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에 두실 때에도 온 세상에 평화가 가득하게 하신 것처럼 이삭이 태어날 때의 상황 역시 매우 평온하고 안정된 상태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나라의 백성들을 얼마나 자상하게 보살피시는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