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50세 때
45-50세에 이르는 시기는 퇴계에게서 학문으로 빠져든 중요한 시기이다.
이때의 반은 관직에 있었고, 반은 토계로 내려가서 고향 시골에서 보냈다.
서울에 머물 때 ‘주자대전’을 구하여, 평생을 신주모시 듯하면서 주자 연구에 빠져들었다.
이후에는 주자 연구에 중국을 뛰어넘는 업적을 남긴다.
주자가 학문을 가르치고 연구한 무이구곡을 방문하였을 때 주자학의 대가 16명을 모신 기념관이 있었다. 15명은 중국인이었고, 유일한 외국인이 퇴계 선생이었다.
“이때 그는 중앙정부에서 벌써 인품이나, 학문이 잘 알려져 탄탄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지만 고향에서도 상당한 경제적 기반을 구축하고, 가족들과 모여서 함께 생활할 수 있는 공간, 혼자서 독서하고 사색할 수 있는 공간 같은 것 등등을 고려하고 몇 차례에 걸쳐서 땅을 옮겨가면서 큰 기와집과 조그만 초가집을 지었다.”
이때 지은 시를 보자
望湖堂尋梅 丙午 仲春 將歸嶺南
방호당의 매화를 찾아서 병오년 2월에 영남으로 돌아가려 하다.
望湖堂下 一株梅 망호당하 일주매
幾度尋春 走馬來 기도심춘 주마래
千里歸程 難汝負 천리귀정 난여부
鼓門更作 玉山頹 고문갱작 옥산퇴
맹호당 아래 한 그루 매화를
몇 차례나 봄을 찾아 말을 달려와 보았든가.
천리 돌아가는 노정에도 나를 저버리기 어려워
문두드리고 다시 지었네 옥산이 무너지는 꼴을.
玉山頹 - 옛날 남조 양나라 유의경이 혜강을 평한 말에
‘그는 사람됨이 외로운 소나무처럼 우뚝하나 술이 취하면 옥산이 무너지듯 하네’
따라서 술이 취한 것을 의미한다.
퇴계 문집 주석서에는
‘이때 조정에서는 정치적인 변화가 심하게 일어났는데, 선생이 물러나기로 결심하고 지금 여기 매화를 찾아와서 자기의 뜻을 매화에 붙여서 읊은 것이다. 아마 풍자도 담고 있는 것 같다.’
이때는 인종이 즉위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죽고, 정국이 매우 어수선한 때였다.
정미사화(명종 2년) -- 양재역 벽서 사건으로 이언적, 권벌 등이 축출 당하고, 퇴계의 친구인 임형수가 죽임을 당하였다.
첫댓글 퇴계시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