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91
8월23일[연중 제20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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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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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Qqm16o4t4Jw
(이상진 아모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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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주님의 셈법과 우리의 셈법은 철저하게 다릅니다!>
포도밭 일꾼’ 비유에 대한 교부들의 해석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이른 아침에 불린 일꾼들은 아담과 에녹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아홉 시에 불린 일꾼들은 노아와 셈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열두 시에 불려간 일꾼들은 할례의 법이 세워진 아브라함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세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모세와 다윗의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불려간 사람들은 이민족 사람들이었습니다.
저같이 게으름뱅이며 늑장부리기의 대가에게는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사람이든 이방인이든, 빨리 온 사람이든 늦게 온 사람이든 상관하지 않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공평하게 한 데나리온, 곧 성령의 은총을 선물하심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느님과 온전히 일치되게 하십니다. 우리 각자의 영혼에 하느님의 인장을 찍으시며 불멸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맨 먼저 포도밭에 와서 하루 온 종일 일한 사람들의 불평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 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오 복음 20장 12절)
이 사람들의 투덜거림에서 또 다른 한 얼굴이 떠오릅니다.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 등장하는 첫째 아들의 얼굴이지요.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복음 15장 29~30절)
이 대목에서 우리는 주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철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은총의 햇빛과 단비를 선물로 주시는 크신 하느님이십니다. 아무리 죽을죄를 저지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끝끝내 회개하기를 인내롭게 기다리십니다.
주님께서 내게 베푸신 크신 은총과 축복에 깊이 감사하고 찬미 드리면 그만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받은 더 큰 은총과 축복을 보고 시기질투 하거나 배 아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주님으로부터 관대한 사랑을 받았다면 함께 기뻐해 주고 축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 역시 맨 먼저 포도밭에 온 사람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큽니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어쩌면, 하느님으로부터 가장 먼저 선택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그저 감지덕지하면서 겸손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먼저 불림 받았다는 것에 대한 우월감, 자만심으로 가득했고, 그 결과 주님으로부터 큰 질타를 받은 것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 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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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lnSGu6wKl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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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더 사랑을 받고 어떤 사람들이 덜 사랑 받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품삯은 한 데나리온, 곧 구원이라는 같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같은 은총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높고 낮음이 결정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은 더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그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결국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들어가는 하늘나라라면 첫째를 노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의 값인 한 데나리온에 어떻게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리스도의 피 값입니다. 그것에 충분한 감사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을 바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바랄 때 이것에 대한 감사가 적어집니다. 우리의 바람이 오로지 구원, 하나로 모아질 때 하늘에서 그만큼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 먼저 하루 종일 일한 종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자신들이 구원을 당연히 받을 만하다고 여긴 이들입니다. 일찌감치 구원의 길로 들어선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문제점은 더는 목표가 없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십일조를 내고 한 가지 죄로라도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심한 신자들 대부분은 그런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는 목표가 없습니다. 이유는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늦게서야 부름을 받고 일하러 온 종들은 ‘이렇게 적게 일했는데도 과연 한 데나리온을 다 주실까?’라며 불안해 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일해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보다 열심히 합니다. 결국 그들이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보다 더 인정받게 됩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핵심은 하늘 나라에 들어가더라도 끝까지 정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축구계에서는 호날두, 네이마르, 벤제마 등 유명 선수들이 사우디 리그로 발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엄청난 연봉 때문입니다. 메시도 호날두 연봉의 두 배에 달하는 연봉 6,000억에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연봉 700억에 미국을 택했습니다. 그에게 축구를 잘하는 능력이 곧 돈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능력을 돈으로 바꾸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메시는 현재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메시 덕분으로 미국 리그가 세계적 조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는 미국으로 건너가 꼴찌팀 인터 마이애미를 일곱 경기만에 전승으로 창단 이래 최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몇 번의 은퇴를 번복하며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축구의 길로 들어서게 한 할머니께, 그리고 성호경을 그으며 하느님께 쉬지 않고 가고 있습니다. 그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돈을 바라고 안주하는 삶이 행복할까요?
만약 어떤 아이가 ‘나는 이미 자녀인데 뭐!’라며 더 좋은 자녀가 되기를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이제 집에서 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불평’입니다. 자녀인데 왜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마음에 드시기 위해 영원으로부터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우리가 정진을 멈추어야 하겠습니까?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는데 생각보다 보상이 적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그 보상을 채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 신부님은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말고 ‘성인 사제가 돼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 목적이라면 결혼하기까지 고생한 것을 누리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만이 생기고 그 탓을 상대에게 하거나 아니면 밖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 합니다. 혹은 배우자보다는 자녀에게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편한 것 같지만 여러모로 우리 삶을 피폐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는 편해 보여도 사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정진하지 않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성자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거나(“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요한 1,1.2) 아버지와 가까이 계신다고 말할 때(“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요한 1,18)라고 말할 때 전치사 ‘프로스’(pros)를 쓰거나 ‘에이스’(eis)를 씁니다. 이것은 사실 ‘함께’나 ‘가까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입니다. 이는 움직이는 사물이 어디를 향하고 있음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전치사들입니다. 요한은 결코 아드님과 아버지를 이미 고정되어버린 관계로 여기지 않습니다. 계속 움직이는 역동적인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멈추지 않고 서로를 향하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마치 당연히 구원된 사람들처럼 이제 누리려고만 해서는 되겠습니까?
이 지상의 삶에서, 그리고 영원한 삶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영원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뒤처지지 않는 방법입니다.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은 불만과 죄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멈추지 않는 목표를 세웁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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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0,1-16: 포도밭의 일꾼들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교부들은 이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저녁에,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준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그들은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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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노사연의 노래 중에 ‘만남’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 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어도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 만남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아무런 느낌이나 영향이 없는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애증의 만남도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노사연의 노래는 그런 만남 모두가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바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저에게도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사나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편했고, 가르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성당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구교우 집안에서 자란 영향도 있었고, 친구들의 영향도 있어서 저는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사나 군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느 조직보다 견고한 조직에 속해있고,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는 갈릴래아의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되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도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리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정은 구원받았다.” 하혈하던 여인은 감히 말은 못 하고 예수님이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간절한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박해했던 ‘사울’입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이었고, 바리사이였습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계명의 수호자를 자처하였습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신비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처음부터 함께 했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제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마지막을 함께 했던 죄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만났던 그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례받은 신앙인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서열과 나이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하루를 살았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높은 직책과 연륜을 지녔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없다면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 업적, 직책을 기준으로 하느님과 셈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 연민, 자비를 기준으로 셈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놓은 곳에 우리가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어서도 안 됩니다. 늦었다고 후회할 것도 없고, 먼저 왔다고 교만할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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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 20,10-16)
이 이야기에서 ‘영성체’가 바로 연상됩니다. 미사 때 보면, 전례 봉사자들이나 성가대원들은 남들보다 일찍 와서 여러 가지 준비를 합니다. 그런 직책을 맡지 않았더라도 일찍 와서 묵상하거나 기도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반면에 미사 시간이 다 되어서 오거나 미사가 시작된 뒤에 늦게 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어떻든, 남들보다 일찍 왔든지 늦게 왔든지 간에 받아먹는 성체는 똑같습니다. 일찍 와서 여러 가지 일을 했다고 해서 성체를 두 개씩 주거나, 늦게 왔다고 해서 성체를 절반만 주는 경우는 없습니다. 만일에 “저 사람은 아주 늦게 왔는데도 일찍 와서 많은 일을 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라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물론 실제로 그렇게 항의하는 사람은 없지만, 상습적으로 늦게 오는 사람들을, 또는 아무 직책도 안 맡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마음속으로 안 좋게 생각하는 경우는 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빵의 기적 이야기’도 비슷합니다. 예수님께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 이상의 군중을 먹이셨을 때, 그 빵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똑같이’ 배부름을 체험했고, ‘똑같이’ 행복해졌습니다. 만일에 “처음부터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과 방금 전에 온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면 안 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모든 사람이 똑같이 배부르고 똑같이 행복한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이 있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의 불만 때문에 행복하지 못했을 것이고, 차별의 대상으로 지목된 사람들도 행복하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은총과 자비를 베풀어 주시는 분인데, 그 ‘똑같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주님의 은총과 자비를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사람마다 먹는 양이 다른데,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양의 빵과 물고기를 주셨을까? 아마도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기적의 빵과 물고기’이니까, 사람마다 먹는 양이 달라도, 똑같이 배부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탈출기의 ‘만나 이야기’를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더러는 더 많이, 더러는 더 적게 거두어들였다. 그러나 오메르로 되어 보자, 더 많이 거둔 이도 남지 않고, 더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 저마다 먹을 만큼 거두어들인 것이다.”(탈출 16,17-18) 예수님의 ‘빵의 기적’도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사람들 사이에 어떤 차별이 없는 나라, 계급이나 신분도 없는 나라, 모든 사람이 완전히 평등한 나라, 모두가 똑같이 행복한 나라입니다. 태어나자마자 유아세례를 받고 평생 신앙생활을 한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된 사람이 들어가는 하느님 나라는 ‘다른 나라’가 아니라 ‘같은 나라’이고, 누구든지 그 나라에 들어가기만 하면 똑같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죽어서 간 나라가 아무리 아름답고 좋은 곳이라고 해도 그 나라에 계급이나 신분이나 여러 가지 이유로 차별과 불평등이 존재한다면, 그 나라는 하느님 나라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구원과 영원한 생명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얻어 누리게 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사람마다 다른 구원과 다른 생명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불만을 품고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꼴찌’ 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만일에, “왜 하느님 나라에서는 모든 사람이 똑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는가? 적어도 성인 성녀들과 일반인들 사이에는 차이와 차별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성인 성녀가 아닙니다. 성인 성녀들은 그런 비판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비판하기는커녕 일반인들도 똑같이 행복해지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또 만일에, “나는 그렇게 모두가 똑같아지는 나라에는 들어가기 싫다. 특별한 신앙인은 특별대우를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면서, 정말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을 못 들어오게 막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안 들어가려고 해서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이미 받은 은총도 잃게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의 기쁨을 얻게 된 것을 진심으로 함께 기뻐하고, 함께 감사드리는 것, 그것은 신앙인의 기본자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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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 부의 위험성을 깊이 생각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전합니다. 부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려는 이에게 언제나 큰 걸림돌이 됩니다. 돈은, 우리가 바라는 것을 거의 대부분 부가 가져다준다고 믿게 합니다. 부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보장하고 그것이 실현되도록 결정적 도움을 주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한 가장 올바른 풀이는 ‘불가능성’입니다. 부자도 심지어 가난한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이 많건 적건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형제들에게 내놓기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예수님을 따르려면 포기하여야 하는 일곱 가지 목록이 나옵니다(29절 참조). 거기에는 부모, 형제자매, 자녀, 곧 가족도 있습니다. 우리는 부모와 자녀,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많은 희생을 감수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은 분명히 옳고 좋은 일입니다. 그럼에도 이 모든 일도 궁극적으로는 주님을 향한 온전한 사랑 안에 자기 자리를 찾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 앞에서 우리가 꼭 붙든 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좋은 것이 많지만 그 가운데 참으로 좋은 것은 주님의 말씀처럼 하나뿐입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마르 10,21, 오늘 복음의 병행 구절). 그 하나를 얻고자,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받고자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무엇일까요? 그 좋은 것들 안에서 가장 좋은 것을 잃지 말고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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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우리에게 <임금이 어떤 존재>인지 물으십니다. "그 무렵 스켐의 모든 지주와 벳 밀로의 온 주민이 모여 ... 아비멜렉을 임금으로 세웠다."(판관기 역사서 9장 6절)
어제 제1독서에서 만난 기드온은 판관으로 하느님을 섬기고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하며 마흔(40년) 해를 평온히 다스립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임금이 되어 달라고 했지만 "여러분을 다스릴 분은 주님이십니다."(판관기 역사서 8장 23절) 하며 백성 위에 군림하는 임금이 아닌, 봉사하는 판관의 자리를 지켰지요.
하지만 그 역시 나약한 인간으로 자기 집안에 올가미가 될 죄를 짓게 되니(판관기 8장 27절 참조) 일흔 명의 아들들 사이에 살육이 일어나고 맙니다.
기드온의 아내 중 스켐 출신 소실이 낳은 아비멜렉이 권력욕에 사로잡혀, 스켐 지역 지주들을 등에 업고 건달들과 함께 자기 형제들을 모조리 살해한 것입니다. 막내 요탐만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져서, 오늘 제1독서 대목에 나오는 '임금의 비유'로 스켐의 지주들의 양심을 일깨우려 합니다.
"다른 나무들 위로 가서 흔들거리란 말인가?"(판관기 역사서 9장 9절.11절.13절)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등 인간에게 이로운 열매를 내는 나무들은 한결같이 임금 되기를 거부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정체성과 가치를 잘 알고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며 그것으로 세상을 풍요롭게 하려 하지요.
그들에게 임금이란 고작 타인 위에서 거들먹거리며 무게중심(줏대) 없이 흔들거리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께서 다스리는 신정에서 사람이 임금으로 등극하는 왕정으로 넘어가는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판관기 역사서 9장 15절)
그런데 가시나무의 반응은 상당히 다릅니다. 언급된 나무들 중 가장 그늘이 빈약하고 쓸모도 적은 식물이면서 당장 허세와 위협으로 으름장부터 놓습니다.
고문 도구나 땔감 외에는 별 쓸모가 없던 가시나무가 기다렸다는 듯 제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그 첫 마디가 파괴와 죽음의 겁박입니다.
인간 역사 내내 곳곳에서 출현한 불의하고 무자비한 임금들의 행태가 고스란히 들어 있이지요.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이야기입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오 복음 20장 14절)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오후 다섯 시 이렇게 다섯 차례나 장터에 일꾼을 구하러 나섭니다.
그리고 삯을 치를 때, 하루종일 고생한 일꾼이나, 짧은 시간 일한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지요. 사실 이 값은 일꾼들과 처음부터 합의한 금액입니다.
그런데 먼저 와서 일한 일꾼들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들은 주인과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를 했음에도, 짧게 일한 이들이 그 금액을 받는 걸 보자 자기들은 응당 더 받으려니 기대했다가 결국 김이 새고 말지요.
하늘 나라의 임금님은 이 선한 포도밭 주인처럼 모두를 행복하게 해 주고 싶어하는 분십니다. 그분은 받는 만큼 주려고, 눈에 불을 켜고 계산하는 분이 아니라 아낌없이, 목숨까지 내어주는 분이십니다. 오히려 줄을 세우고 자격을 정해 순위를 매기고 더 탐하는 이는 받는 쪽이지요.
그리고 하느님이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다 싶으면 불편해서 못 견딥니다. 세상이 정한 질서에 하늘나라가 맞춰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이런 태도는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늘 임금님께 군림하고 지배하고 줄 세우는 인간 임금의 모습을 강요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질서에서 벗어나면 시기와 질투로 자기와 타인을 해치기까지 하지요.
그런데 시기와 질투는 겉으로는 혜택을 받는 이에게 불쾌감을 쏟아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은 하느님의 선하심이 못마땅해서 그분께 대적하는 것이니 정말 조심해야 합니다. 선하고 공정하시며 의로우신 하느님을 믿지 않을 뿐더러 그분을 반하는 처사이기 때문이지요.
"주님, 임금이 당신 힘으로 기뻐하나이다."(화답송)
인간의 임금은 사실 이런 모습이어야 합니다. 온 세상과 하늘 나라의 주인께서 이루시는 업적의 지상 협력자로 충실히 일하면서, 그분께서 이루시는 업적에 경탄하고 감사하며 기뻐하라고 뽑혔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기 힘으로 백성에게 군림하고 다스리려 하면 세상이 몸살을 앓지만, 인간이 하느님과 함께 백성에게 봉사하고 섬기면 하늘 나라는 성큼 다가옵니다.
지도자는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시는 하늘 임금의 마음을 헤아려 백성에게 봉사하고 섬기는 종들의 종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지요.
사랑하는 벗님!
하느님은 당신을 바라는 이들에게 약속한 상급을 반드시 주시는 의로운 분이시며, 자격과 가치를 따져 홀대하거나 외면하는 분이 아니십니다.
우리의 하늘 임금님께서 이처럼 자비롭고 관대하며 선한 분이시니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주인과 함께하기에 우리는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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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저 감사하라>
어려서는 삼촌이나 누나에게 용돈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서울의 일터로 떠난 누나와 삼촌을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습니다. 누나와 삼촌을 기다렸다기보다 용돈을 기다렸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용돈을 기대하게 되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용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 날 그 기쁨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삼촌과 누님이 용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관한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아홉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열두 시, 오후 3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꾼들은 계약을 맺을 때는 그저 일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품삯을 받게 되는 시간이 되자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은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는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 기대를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투덜대며 급기야 따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상대와 비교하는 순간 자기의 첫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는 계약한 만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누가 용돈을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받을 것이지 투덜댈 자격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계약대로 받았으면 족해야지, 왜 따집니까? 주인은 분명 정의를 지켰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로마 11,32) 주님께서는 언제나 후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선을 베풀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주님께서 자유로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품삯을 받기 위해 일을 한 사람과 일 자체를 고마워하며 일을 한 사람과는 분명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 나라에서는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은 인간이 노력해서 이룬 업적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은 감사히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성 아우구스띠노)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음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일을 해도 해야 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마태 20,16) 하느님 아버지는 너그러우시고, 나는 쩨쩨하고 시기 질투하며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임을 뉘우칩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가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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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교통사고 영상을 10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보여준 후, “추돌사고에서 자동차의 속도는 얼마였던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략 50km/h 정도였던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같은 영상을 또 다른 실험 참가자 10명에게 보여주고는 “운전자가 사망한 이 추돌사고에서 자동차의 속도는 얼마였던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략 60km/h 정도였던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즉, 운전자가 사망했다는 정보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본 영상 속의 차량 속도를 더 높은 것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 정보를 통해 관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족에게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가가고 있으며,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으면 아무리 올바른 행동을 해도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자기의 판단이 무조건 맞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맞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믿고 있는데, 다른 모든 이는 내가 틀렸고 상대방이 맞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억울하고 저렇게 모를 수 있냐면서 화를 내지요. 그러나 우리는 틀릴 수 있으며, 그래야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만 맞다는 이기심 가득한 고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음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포도밭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얼핏 보면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해 보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사람 모두 같은 품삯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틀렸다고 말할까요? 아닙니다. 오후에 나와 잠깐 일을 하고서 똑같은 품삯을 받은 사람은 어떨까요? 주인이 틀렸다면서 자신이 받은 품삯을 돌려줄까요? 아닙니다. 그는 틀렸다는 생각보다는 감사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틀렸다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이는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처사에 대해 이렇게 우리는 세상의 관점으로 맞고 틀렸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너무나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감사 속에 있어야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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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선한 포도밭 주인>
마태오 20,1-16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선한 포도밭 주인>
맨 나중에
부름 받은 일꾼들이
생각지도 못한
한 데나리온을 받고
기쁨에 겨워 돌아간 후에
맨 처음에
부름 받은 일꾼들이
정당한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았음에도
서운한 마음으로 돌아간 후에
일꾼들과 가족들이
하루의 고운 땀의 결실로
오늘 하루 삶의 이야기 곁들여
맛난 저녁 식사를 즐기며
내일의 꿈으로 가득할 시간에
이미 칠흑 같은 어둠이 내려
아무도 없을 듯한 장터이지만
여태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아무도 사지 않은 일꾼들이 있을까
선한 포도밭 주인이 홀로 애타게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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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1)가시나무의 교훈>
오늘 독서 판관기는 판관 시대에서 왕정 시대로 넘어가는 시점에서 어떤 사람이 임금이 되려고 하는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왕을 세웠다는 얘기를 듣고 동요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제는 판관 대신 임금이 이스라엘을 다스리기를 원하는 백성들에게, 임금은 보통 훌륭한 사람은 되려고 하지 않고 가시나무처럼 못된 자, 그러니까 남을 풍요롭게 하지 않고 가시처럼 콕콕 찌르는 자가 외려 임금이 되려고 한다는 것을 가시나무를 예로 얘기하고 있지요.
저는 이 가시나무를 보면서 작정하고 한 말씀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우리 대통령에 대해서 한 말씀 드리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정치적인 소견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인간이 인간을 적대시하지 않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것이 복음의 가르침이니 제가 남북 간에 화해와 일치를 촉구하는 것은 복음의 가르침과 일치하고, 화해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라는 우리 교회의 일관된 가르침과도 일치하지요.
그런데 우리 대통령은 북한을 주적으로 천명하고 대결 정책을 펴고 있음에 저는 지난번에 이미 이것이 비 복음적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 광복절 기념사에서는 더 극우적이고 분열적이며 냉전적인 사고를 여과 없이 드러내며 분열을 조장하였습니다.
광복절에 빈 인륜적 범죄를 국가적으로 저지르고도 사과하지 않고 보상치 않는 일본에 대해서는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는 파트너라고 하면서 자기를 반대하는 우리 국민에게는 반국가적인 세력이라고, 통일과 종전을 얘기하면 공산 전체주의라고 매도하였습니다.
동족을 적으로 몬 데 이어 우리 국민까지 적으로 몬 것인데 우리가 일본 압제에서 해방된 것이 이렇게 사분오열되기 위해서입니까? 그래서 통합을 얘기해야 할 광복절에 분열의 기념사를 한 것입니까?
한 마디로 이번 광복절 기념사는 오늘 가시나무의 으름장과 같습니다. “너희가 진실로 나에게 기름을 부어 나를 너희 임금으로 세우려 한다면 와서 내 그늘 아래에 몸을 피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이 가시나무에서 불이 터져 나가 레바논의 향백나무들을 삼켜 버리리라.”
자기를 반대하면 국가를 반대하는 것이라니! 이런 반국가적인 세력은 없어져야 한다니! 이런 제왕적인 사고를 가진 분이 지금 우리 대통령입니다.
가시나무와 같은 대통령은 안 되고, 자기의 잘못을 볼 줄 모르고 반성할 줄 모르는 대통령은 안 됩니다.
대통령의 인기가 높고 국회 의석을 180석 차지하자 자기 잘못을 보지도 반성하지도 않은 것 때문에 전 정권이 권력을 잃었는데 지금 우리의 대통령과 권력자들은 전 정부보다 더 지지받지 못하면서도 모든 탓을 전 정부에게 돌리기에 잘못을 볼 줄도 반성할 줄도 모릅니다.
그럼으로써 무능에다가 무책임하기까지 하고 권력에 취해 교만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저는 우리 교회를 위해 우리 교황을 위해 기도하듯 우리나라를 위해 우리 대통령을 위해 기도하며 여러분도 이 기도에 초대합니다. 우리나라를 이끌어갈 우리 대통령이잖아요?
우리 국민을 향해 내부적으로 하는 잘못은 우리 안에서 어떻게든지 해결합니다. 그런데 외부적으로 그리고 외교적으로 잘못하면 우리나라가 정말 위태로워집니다. 이런 면에서 지금 우리는 전례 없는 위험한 길을 가고 그래서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오늘 가시나무 얘기를 교훈 삼아 현재와 미래의 우리 대통령들을 뽑고 판단하고 죽비를 내리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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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누구를 어떻게 뽑을 것인가?>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비유로서 주님 포도밭, 곧 하느님 나라에서는 일찍 일한 사람이나 늦게 일한 사람이나 똑같이 상급을 주신다는 가르침입니다.
이렇게 차이가 나게 일했음에도 똑같은 상급을 주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는 것이 인간의 공정인 데 비해 하느님의 공정은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주시는 사랑의 공정이기에 옛날에도 이것은 문제고 지금은 더더욱 예민한 문제입니다.
특히 요즘 젊은이들은 정의나 평화나 사랑보다도 공정에 더 예민하기에 이 문제를 가지고 복음 나누기를 하고 싶은 마음도 있으나 지금까지 오늘 독서에 대한 강론은 한 적이 없기에 오늘은 판관기의 말씀을 가지고 나눔을 하고자 합니다.
오늘 얘기는 왕이 다스리지 않고 판관들이 다스리던 이스라엘이 왕이 있는 주변 나라들과 비교하며 왕을 세우려는 것에 대한 비유입니다.
어느 집단이든지 안정과 질서를 위한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필요하기는 한데 문제는 그 필요한 지도자가 악인 경우가 많지요.
가끔 아버지가 없는 사람과 아버지가 폭군인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더 불행한지 비교하는 얘기를 하곤 합니다.
아버지가 없어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기가 더 불행하다고 하고, 아버지 때문에 불행하다고 생각한 사람은 자기가 더 불행하다고, 차라리 아버지가 없는 것이 낫다고 하지요.
제 생각에도 아버지가 필요하긴 하지만 폭군인 경우에는 없는 것이 차라리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많은 경우 왕들도 마찬가지로 필요악입니다.
그래서 오늘 판관기는 아주 재미있는 비유를 듭니다. 사람을 이롭게 하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나무, 포도나무는 왕이 되기를 거부하는데 가시나무만 자기가 왕이 되기에 합당하다고 하며 수락합니다.
그런데 재미있지 않습니까? 가시나무는 남을 찌르고 아프게하는 나무잖습니까? 우리의 현실에서도 남을 이롭게 할 것같은 사람은 장의 자리를 피하고, 남을 아프게 할 사람들이 장이 되고자 하며, 사람들은 속아서 그런 사람을 자기들의 장으로 뽑는 경우가 많습니다.
요즘 대선 후보들이 출마를 하고 누가 적합한지 많은 분이 저에게 묻습니다. 제가 대답할 리 없지만 신자들이라면 신앙의 눈과 복음의 눈으로 식별해야 한다는 정도는 얘기합니다.
신앙의 눈으로 식별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정파성에 따라 보지 않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겁니다.
구약에서 왕도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판관도 이스라엘을 다스리지만 그 차이점이 판관은 하느님을 대신하여 다스리는 데 비해 왕은 자신이 바로 왕들의 왕인 하느님인 양, 다시 말해서 하느님 밑이 아니라 사람들 위에 군림하며 다스리는 자이지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고 말씀하시며 제자들에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셨고 Servant Leadership, 곧 섬김의 다스림에 대해서 말씀하셨지요.
그러므로 복음적인 시각이란 정파와 나의 이익을 떠나서 이 복음 말씀에 비추어 현재의 지도자들도 판단하고 미래의 지도자도 식별하는 것입니다.
부디 어느 정치가의 똘마니가 되지 마시고 하느님의 자녀로서 복음을 가지고 정치가들을 판단하고 식별하는 우리가 되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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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정주 삶의 축복>
-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 -
쉴 사이 없이 침묵중에 끊임없이, 한결같이 일하시는 참 부지런한 하느님입니다. 배밭사이 길을 걷다가 이마를 부딛쳤고 위를 쳐다 봤습니다. 흰별들처럼 주렁주렁 달린 흰 배봉지 열매들중 하나에 부딪쳤던 것입니다. 그동안 참 놀랍게 많이 컸습니다. 작은 배꼭지에 찰싹 붙어 무럭무럭 자라나는 열매를 보며 믿음의 배꼭지를 연상했고 이 또한 저에겐 잔잔한 감동이었습니다.
가을 열매 익어 수확될 까지는 믿음의 배꼭지는 꼭 나무에 붙어있을 것입니다. 언제나 늘 거기 그 자리의 중심에 계신 정주의 하느님은 쉴 사이 없이 일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정주 삶의 축복에 제자리에서 제분수에 맞는 삶이 참 지혜로운 삶입니다. 참으로 무식하고 용감하면 괴물이요 답이 없습니다. 현 시국을 대할 때 통감하는 진리입니다. 아침식사후 부지런히 불암산 계곡길을 걷는 것도 기쁨이요 얼마전 써놓고 재미있어 한 글을 나눕니다.
“산에 가고 싶을 때
산을 바라보며
산이 되네
바다에 가고 싶을 때
바다를 바라보듯 하늘을 바라보며
바다가 되네
강에 가고 싶을 때
강물처럼 걸어서
강이 되네
누가 알리?
이 행복, 정주의 축복
아마 하느님은 아실 거다”
늘 거기 그 자리, 제자리, 꽃자리에서 산이 되어, 바다가 되어, 강이 되어 살아가는 정주 삶의 축복입니다. 언젠가 써놨던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라는 글도 생각납니다.
“자리 찾지 않는다
자리 탓하지 않는다
야생화 청초한 달맞이꽃처럼
그 어디든
제자리에 뿌리내려
하늘 사랑
활짝 꽃피어 내면
거기가 꽃자리 하늘 나라다
절망은 없다
하루하루가 축제인생이다”
이 또한 정주의 축복을 의미합니다. 저는 제 집무실을 수도생활 잘 하라고 하늘이 숨겨둔 천장암天藏庵이라, 또 제분수를 알아 만족한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에서
지족암知足庵이라 부르곤 합니다. 천장암은 불교의 대선사 경허스님이 머물던 충남 서산 개심사에 위친한 암자이고 지족암은 흔히 일컫는 암자 이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집니다.
오늘 복음인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하늘 나라의 비유입니다. 하늘 나라 삶의 신비를 엿볼수 있는 예화입니다. 하느님의 계산법과 인간의 계산법은 확연히 차이가 납니다. 아침 일찍 와서 일한 이나 오후 가장 늦게 와서 일한 이가 똑같은 급료를 받자 항의하는 일꾼, 일견 타당하고 합리적인 듯 보이지만 하느님의 권리에 대한 도전이요 월권입니다. 제 분수를 잃은 무례하고 무지한 이의 반응입니다.
새삼 예수님의 비유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은 요즘 세계적으로 활발히 논의되는 기본소득제도의 원조임을 봅니다. 일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이들, 일하고 싶어도 심신의 허약이나 장애나 연로함으로 일할 수 없는 이들을 포함해 국민이라면 모두가 인간의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매달 국가가 전국민에게 기본적 급료를 지급하는 것이며 이것이 실현될 때 복지국가의 완성이요 이런 방향으로 가리라 봅니다. 바로 이런 복지사회의 완전한 실현의 모델이 우리 요셉 수도원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입니다. 공동체가 소임에 무관하게 모든 이가 기본적 품위를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너그럽게 배려하기 때문입니다.
포도원 주인의 깊은 배려의 사랑은 늦게 온 사람의 속사정을 통찰했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식솔이 딸린 무거운 짐을 진 가장이라면 일 시간에 개의치 않고 기본적 하루 생활비 한 데나리온을 지급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고 당연한 상식일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를 겸한 포도밭 주인을 통해 예수님 마음, 하느님 마음을 만납니다. 포도원 주인의 이런 깊은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제분수를 벗어난 무지한 이의 항의를 깨끗이 매듭짓는 포도밭 주인입니다.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시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네가 뭔데?”, “너나 잘해!” 꾸짖는 말투처럼 들립니다. 네 분수를 알아 네 자리에서 네 일에 충실하라는 말씀이겠습니다. 하루가 끝날 때까지 완전 고용을 위해, 모든 이들의 완전 구원을 위해 흡사 천국문을 활짝 열어놓고 끝까지 기다리는 주님을 연상케 하는 복음입니다. 참으로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역할에 충실하며 제대로 살았던 정주의 사람이었다면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것이나 이 짧은 생각의 사람은 후에 자신의 생각을 바로 잡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마음을 배우라는 말씀처럼 들립니다.
오늘 판관기의 요탐의 우화가 깊은 가르침과 깨달음을 줍니다. 역시 악순환의 반복의 인간 역사를 보여줍니다. 어제 기드온 판관의 등장으로 좋았던 분위기가 아비멜렉 임금 독재자의 등장으로 급전직하急轉直下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이 또한 어리석은 백성이 자초한 재앙으로 우리의 현실을 연상케 합니다.
요탐의 우화에 등장하는 올리브 나무, 무화과 나무, 포도 나무로 상징되는 이들은 자기 분수를 알았기에 절대 임금이 됨을 사양합니다. 이래야 맞는 것입니다. 반면 가시나무로 상징되는 무지하고 무식하고 무례한 대책 불가능한 아비멜렉은 제자리를, 제역할을, 긍극적으로 자기를 몰랐습니다. 절대로 지도자가 될 사람이 아니라 혼자 떨어져 살았어야 할 백해무익한 사람입니다.
결국 하느님의 개입으로 아비멜렉은 불행한 죽음을 맞이하지만 참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잘못된 선택으로 자초한 재앙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참 유익한 공부가 되는 예화입니다. 제발 이런 악순환의 반복은, 이런 공부는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포학하고 무지한 지도자 잘못 뽑으면 지옥문이 활짝 열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견고한 배도 바다의 풍랑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이 하느님을 이길 수 없는 이치와 똑같습니다.
민심이 천심입니다. 민중이 바다라면 지도자는 일엽편주(一葉片舟) 배와 같습니다. 민중의 바다가 노호하여 태풍처럼 휩쓸면 배는 흔적없이 사라짐은 역사의 교훈입니다. 참된 지도자라면 겸손히 공동체의 의견을 경청하여 공동체의 뜻에 따라, 민심에 따라 자비롭게, 지혜롭게 공동체를, 공동체의 성원들을 섬겨야 할 것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회개와 더불어 각자 제자리, 꽃자리에서 제분수에 충실하며 제정신으로 제대로 섬김의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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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마태20,16)
오늘 복음(마태20,1-16)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주인이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고용하는 내용과 고용된 일꾼들에게 품삯을 나누어 주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한 데나리온의 일당으로 고용합니다. 이른 아침에 고용된 사람이 있고, 아홉 시와 열두 시, 그리고 오후 세 시와 다섯 시에 고용된 사람이 있습니다.
일을 마치고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일꾼들에게 품삯을 내 줍니다. 맨 마지막에 고용된 일꾼들부터 시작해서 첫째로 고용된 일꾼들에게 합의한 대로 한 데나리온 씩 내 줍니다.
그런데 맨 먼저 온 이들이 불만을 드러냅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그러자 주인이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20,15)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20,16)
오늘 비유를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구원은 순서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다. 먼저 부르심을 받았다고 구원에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구원은 꼴찌도 첫째가 될 수 있는 구원입니다. 지금 꼴찌지만 지금 회개하면, 지금 깨어 있으면, 언제나 첫째가 될 수 있는 구원입니다. 그러니 오래 전에 세례 받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하더라도 지금 깨어 있지 않으면 꼴찌가 됩니다.
모든 움직임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것이 신앙인의 시각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하여 불평불만과 시기질투를 드러내지 말고, 언제나 지금 깨어 있으려고 애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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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fmSvJ6gi6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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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마태 20, 15)
감사를 잊어버린
우리들 삶입니다.
새날이
밝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새날입니다.
자기만의
역사를 통해
주님을
만날 것입니다.
저마다의
여정안에서
주님을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렇듯 만남을
가능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삶의 목적은
주님의 자비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의 진실입니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를
알게됩니다.
모든 여정의
기준점이 되시는
사랑의 주님이
계십니다.
한쪽 끝에도
반대쪽에도
그 가운데도
여정을 사랑하시는
주님이 함께 하십니다.
우리모두를
똑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살게하시고
움직이게 하시는
주님을 믿고
주님의 새날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만들어낸
삶의 공식이 아닌
주님께서 주시는
성숙의 시간입니다.
이 모든 시간이
분명 은총이
되게하시는
주님께서
우리의 여정을
끌어안으십니다.
이 모든 것이
은총이 되기 위해
주님께서는
저마다 오늘도
가장 알맞은 때를
위해 기다려주십니다.
은총과 기다림에
무관한 삶은
없습니다.
사람에 머무는
여정이 아니라
주님의 초대에
감사하는
여정입니다.
주님께서
지니신 은총의
그 힘을 믿습니다.
한 데나리온의
은총을 가지고
믿음의 길을
충실히
걸어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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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마태오 복음 20장 15절)
가장 비참 했던 그 때를 기억해본다. 하느님의 도움과 위로가 간절했던 그때를 떠올려본다. 그럴만한 사연과 사정이 있는 우리들 아픔이다. 아픈 모든 이들에게 후하게 구원의 문을 열어젖히시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지나치는 모든 시간이 은총이고 선물이었다. 후하신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아름다운 세상이다.
하느님께서는 어느 누구 하나도 버리지 않으신다. 인간은 가혹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끝내 후하시다. 연민의 길을 걸어가신다.
조건과 무조건 사이에 하느님과 우리가 있다. 우리에게 삶을 가르쳐주시는 주님이시다. 삶에 가장 중요한 순간은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다.
우리를 찾기 위해 직접 길을 나서시는 주님의 조건없는 사랑이시다. 우리가 찾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갈 곳 없는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다.
욕심과 시기를 내려놓고 감사와 찬미를 배워야 할 우리들 삶이다. 허망한 삶이 아니라 보시니 참 좋은 하느님의 은총이다.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하느님의 자비이다. 하느님께서는 거두어들이시고 우리는 내려놓아야 한다.
한순간도 은총 아닌 것이 없었다. 한없이 주시는 하느님 앞에 시기와 원망을 내려놓는다. 가장 좋은 하느님의 때를 가로막아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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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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