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혼상제 때 부조를 하는 관습은 향약에서 출발했다. 일향약속(一鄕約束)을 줄인 말이다. 조선시대 향촌 사회의 자치 규약이지만 마을마다 이름도 달랐고 규약 내용도 달랐다. 그러나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내용은 공통으로 들어 있었다.
본래 향약은 중국 송나라 때 여대충이란 형제에 의해 시행됐다. 후세 사람들은 이를 ‘여씨 향약’이라 부른다. 향약은 주자학이 전파되면서 ‘주자대전’과 ‘소학’에 게재되자 일찍부터 우리나라 사족들 사이에 널리 행해졌다. 이의 원래 목적은 하층민인 농민들을 토지로부터의 이탈을 막고 공동체에 단단히 결속시키는 족쇄 역할을 하는 것이었다.
쓴 약을 감추기 위해 당의(糖衣)를 입히듯 규약 속에 들어 있는 달콤한 수사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왜냐하면 하층민들의 향약 가입은 개인 의사에 맡겨진 것처럼 포장되어 있지만 힘없는 백성에게는 그것 또한 강권이었다. 소작농이 지주의 부탁을 거역할 수 없고 하늘 같은 원님의 뜻에 하찮은 민초들이 어찌 거부의 몸짓을 보일 수 있었겠는가.
향약은 세월이 흐르면서 주민자치 쪽으로 기울기도 했으나 여전히 사족들이 유교의 법도를 배경으로 알게 모르게 백성을 교화하고 통치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그러한 향약 속에는 회원들의 상과 벌에 대한 심판권, 농업용 수로의 이용권, 산림 개간의 허가권 등 여러 가지가 들어 있었다.
그러자 통치수단으로서의 향약이 향촌사회에 대한 수탈과 비리로 연결되어 온갖 부작용이 불거졌다. 중종 때 사림파인 조광조 등에 의해 향약의 철폐가 주장되었다가 선조 대에 와서 서원이 중심이 된 새로운 향약이 마을 단위로 제정됐다.
이 시기에 퇴계와 율곡 등에 의해 중국의 여씨 향약 강령이 네 개의 규약으로 간추려졌다. ‘좋은 일을 서로 권장한다, 잘못을 서로 고쳐준다, 서로 사귐에 있어 예의를 지킨다, 환난을 당하면 서로 구제한다’는 새로운 향약이 마련되어 정착된 것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학 3학년 때 큰누님이 시집을 갔다. 잔칫날, 마당에 차일을 치고 집에서 키우던 돼지도 잡았다. 어머니는 문종이를 접어 만든 공책을 건네주시며 “어느 집에서 무엇을 가져 왔는지 똑바로 적어라”고 말씀하셨다.
옆집 성근이네 단술 한 독, 뒷집 본동댁 콩나물 횟집 한 옹가지, 앞집 부면장댁 막걸리 한 말, 금융조합 김서기네 돈 얼마 등을 적긴 했는데 세월이 너무 오래되어 아무래도 단술과 콩나물이 바뀐 것 같다. 크리스천인 어머니가 막걸리는 거절하셨지만 ‘좋은 날은 술 한 잔씩 마셔도 죄가 안 된다’는 부면장님의 권위에 눌려 연필에 침 묻혀 가며 꾹꾹 눌러썼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5월 하순, 안동 길안 대곡1리 한실마을이란 한갓진 두메산골에 김연대라는 시인이 개인 문학관을 지어 개관식을 한다는 소식을 보내왔다. 문학관이라면 도회지 번화가에 앉아 있어도 기웃거릴 사람이 많지 않을 터인데 웬 시골 골짜기에 ‘시(詩)의 집’을 지었담 하고 어리둥절해했다.
오랜만에 보리 필 무렵에 운다는 뻐꾸기 소리와 제주 올레길에서 들어본 종달이 소리라도 만나면 더 이상 행운이 없을 것 같은 기쁜 마음을 앞세워 달려갔다. ‘뻐꾹! 뻐버꾹!’이란 쉰 가락을 이 산 저 산 옮겨 다니며 녹음이란 푸른 물에 삶아 빨아 널어둔 듯한 뻐꾸기 울음소리는 철이 일러 들리지 않았다. 산천은 첩첩 초록이 새소리를 대신하여 푸르게 푸르게 색칠해 두고 있었다.
이날 문학관에서 좋은 시 한 편을 읽었다. 평생 읽어도 못다 읽을 그런 시였다. 큰누님 시집가는 날 부조기를 들고 삽짝 문 앞에 서 있던 나를 되돌아보게 하는 눈물 나는 시였다. 문학관 주인의 ‘대근엽채일급’이란 시다.
“이순 지나 고향으로 돌아온 사촌 아우가/ 버려두었던 옛집을 털고 중수하는데/ 육십 년 전 백부님이 쓰신 부조기가 나왔다/ 이태 간격으로/ 조모님과 조부님이 돌아가셨을 때의 일이다/ 추강댁 죽 한 동이/ 지례 큰 집 양동댁 보리 한 말/ 자암댁 무 열 개/ 포현댁 간장 한 그릇/ 손달댁 홍시 여섯 개/ 대강 이렇게 이어져가고 있었는데/ 거동댁 대근엽채일급(大根葉菜一級)이 나왔다/ 대근엽채일급을 유심히 들여다보다가/ 나는 그만 핑 눈물이 났다/ 보지 않아도 눈에 선한/ 내 아버지, 할아버지와/ 이웃들 모두의 처절한 삶의 흔적/ 그건 거동댁에서/ 무 시래기 한 타래를 보내왔다는 게 아닌가”
할 말이 없다. 더 이상 무엇을 쓸 것인가. 아!
(구활 님의 수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