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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 9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사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 섰습니다.
그는 여전히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여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빛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그 때 그는 눈이 멀고 사흘 동안 먹지도 마시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그렇게 죽은 것입니다.
이전에 예수를 부정하고 박해하던 그의 삶이 죽은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무덤에 장사된 사울의 모습입니다.
오늘 새 날을 맞는 나 역시 사울과 같이 그리고 우리 주님과 같이 베임을 당하는 가시떨기가 되기 원합니다.
그 일은 생명의 씨로 오신 우리 주님이 하시는 일임을 믿습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밤새 오염된 나의 영혼을 주의 보혈로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정결한 마음을 주시고 정직한 영으로 새롭게 하옵소서.
남은 시간을 잘 계수하여 주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로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막 4:1-20
제목 : 씨 뿌리는 자의 비유.
1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서 가르치시니 큰 무리가 모여들거늘 예수께서 바다에 떠 있는 배에 올라앉으시고 온 무리는 바닷가 육지에 있더라.
2 이에 예수께서 여러 가지를 비유로 가르치시니 그 가르치시는 중에 그들에게 이르시되
3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4 뿌릴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5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6 해가 돋은 후에 타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7 더러는 가시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하지 못하였고
8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30배나 60배나 100배가 되었느니라 하시고
9 또 이르시되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10 예수께서 홀로 계실 때에 함께 한 사람들이 열두 제자와 더불어 그 비유들에 대하여 물으니
11 이르시되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었으나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하시니
12 이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며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 죄 사람을 얻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시고
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14 뿌리는 자는 말씀을 뿌리는 것이라.
15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었을 때에 사탄이 즉시 와서 그들에게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요
16 또 이와 같이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이들을 가리킴이니 곧 말씀을 들을 때에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17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18 또 어떤 이는 가시떨기에 뿌려진 자니 이들은 말씀을 듣기는 하되
19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요
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30배나 60배나 100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 나의 묵상
본문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공관복음에 동일하게 등장하는 비유이다.
그런데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를 물으신 다음 그 답에 대한 비유로 주시는 말씀이다.
본래 성경은 장절 구분이 없었다.
하지만 후대에 편의상 장과 절을 구분하였다.
예수님의 비유의 말씀이 선포되고 이것이 기록될 당시에는 장절 구분이 없었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배에 앉으시고 육지에 있는 무리들에게 비유를 들어 말씀을 가르치셨다.
씨를 뿌리는 자가 들에 나가 씨를 뿌렸다.
그 중 어떤 씨들은 길 가에 떨어졌는데 새들이 와서 금세 먹어버렸다.
어떤 씨들은 돌밭에 떨어졌는데 흙이 얕으므로 싹이 금방 나왔지만 금세 시들어버렸다.
어떤 씨들은 가시떨기에 떨어졌는데 가시가 나무의 기운을 막아서 결실하지 못하였다.
어떤 씨들은 좋은 땅에 떨어졌는데 잘 자라서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하였다.
들을 귀가 있는 자들은 이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다.
후에 예수님이 혼자 계실 때 무리와 제자들이 함께 예수님께 와서 이 비유에 대하여 물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너희에게는 주지만 외인에게는 모든 것을 비유로 한다고 하신다.
그 이유는 그들로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여 돌이켜서 죄 사함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모든 비유를 알 수 있겠느냐 물으시며 비유에 대한 설명을 하신다.
씨 뿌리는 자가 뿌린 씨는 곧 말씀을 뿌린 것이다.
그 말씀이 길 가에 뿌려졌는데 길 가라는 밭은 말씀을 들었을 때 사탄이 즉시 와서 그 뿌려진 말씀을 빼앗는 것이다.
돌밭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지만 그 속에 뿌리가 없으므로 잠깐 견디다가 말씀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 곧 넘어지는 것이다.
가시떨기 밭은 말씀을 듣지만 세상의 염려나 재물에 대한 유혹과 기타 욕심이 들어와서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좋은 땅이란 말씀을 듣고 받아 30배 60배 100배의 결실 하는 것을 뜻한다.
나는 이 비유를 설교할 때 이런 식으로 하였다.
우리는 모두 말씀의 씨를 받는 밭이다.
그런데 처음부터 좋은 밭은 없다.
다만 길 가와 돌밭 그리고 가시떨기 밭일지라도 그 밭을 잘 기경하여 돌을 골라내고 나무를 캐내면 좋은 밭이 된다.
그래서 그 좋은 밭에 씨를 뿌리면 많은 결실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밭은 스스로 자신을 기경할 수 없다.
성경은 아담 이후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인간들의 상태를 이렇게 묘사한다.
(롬 3:10-12)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의 상태가 바로 길 가 밭, 돌밭, 가시떨기 반이라는 말이다.
절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그런데 그 불가능함과 무력함의 밭에 생명의 씨가 떨어져서 돌과 가시떨기를 부수고 찢어서 옥토가 되는 것이다.
밭 자체가 찢고 부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떨어진 생명의 씨가 찢고 부수는 것이다.
마치 낡은 헌옷에 덧붙인 생베 조각이 그 낡은 옷을 찢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구원이다.
(롬 3:2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처럼 23절의 상태가 길가 밭, 돌밭, 가시떨기 밭이라면 24절의 상태가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 맺는 자이다.
그래서 롬 5:10절과 같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을 때에 창세전부터 준비된 하늘의 씨 곧 생명의 씨가 그 원수의 밭에 심겨져서 좋은 열매를 맺는 구원의 현실을 설명해 주는 비유가 바로 이 씨 뿌리는 자의 비유 속에 담겨진 메시지이다.
이 씨에 관한 메시지는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많이 들어왔는가?
창 3:15절에 나오는 여인의 후손 그가 바로 이 씨이다.
그 씨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 뿐인 길가 밭, 돌밭, 가시떨기 밭인 우리 안에 심겨서 우리가 옥토가 되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 마음 밭을 갈아엎어서 옥토가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갈라디아서에는 그 씨에 대하여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갈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그리스도가 바로 아브라함의 자손 곧 씨이며 그 씨가 말씀으로 오셨다.
(요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으로 오신 그 씨가 우리의 마음 밭에 떨어진 것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복음의 메시지이다.
그래서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막 4:13) 또 이르시되 너희가 이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
이 말씀은 모든 비유가 다 같은 이야기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이야기인데 지금 이렇게 쉬운 씨 뿌리는 자의 비유조차 바르게 알지 못하면 다른 비유들은 복음이 아니라 도덕적 윤리적인 교훈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이다.
나는 씨 곧 예수 그리스도의 중요성을 간과한 자였다.
그저 말씀을 이용하여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교훈을 통해서 듣는 이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 감동을 주는 것에 만족하는 자였다.
그러나 설교자는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사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사는 자여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듣는 이들의 마음을 설령 아프게 한다 할지라도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복음이요 장사복음의 핵심이다.
예수님은 결코 십자가에서 부활하지 않으셨다.
십자가에서 무덤에 장사됨을 건너뛰어 부활로 가면 거기에는 복음의 핵심은 사라지고 오직 상징만 남을 뿐이다.
복음의 핵심은 바로 장사됨이다.
과연 어떤 사람이 무덤에 장사되는 것을 좋아하겠는가?
하지만 이것이 생명을 주는 복음이기에 건너뛰어서는 결코 안 된다.
마태복음 13장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는 예수님께서 이사야서 6장의 말씀을 인용해서 설명하신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이사야를 보내시면서, 네가 가서 그들의 눈과 귀를 다 막으라고 하신다.
(사 6:9-1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기로
그런데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마 13:14-15)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 아닌가?
주님이 오신 목적이 보고 듣고 깨달아 돌이켜서 주님께 고침을 받는 것 아니던가?
그런데 그렇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신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문제는 우리들 스스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아무리 내가 보고 듣고 깨달아 주님께 돌이킨다고 해도 그것이 결코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말은 오늘 본문의 말씀을 떠나서는 이해할 수 없다.
본문에 나오는 생명의 씨는 분명 예수님이 맞다.
그런데 그 씨가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단단한 길 가와 돌짝 그리고 가시떨기는 과연 누구일까?
이처럼 열매를 맺는 것을 가로막는 대적의 역할을 하는 자가 바로 예수님이라는 말이다.
(사 6:12-13) 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그 중에 1/10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
(롬 9:33) 기록된 바 보라 내가 걸림돌과 거치는 바위를 시온에 두노니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 땅이 황폐하여져서 더 이상 사람들이 살 수 없는 곳이 될 때까지, 그리고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때까지이다.
가시떨기나무가 베임을 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베임을 당할지라도 그루터기는 남는데 그 남은 그루터기가 바로 임마누엘이신 그리스도다.
나야말로 죄인 중에 괴수가 맞다.
그런데 아무런 죄가 없고 죄를 알지도 못하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하여 그 죄(걸림돌, 돌짝)이 되셨다(고후 5:21).
그리고 생명의 씨가 와서 그 걸림돌인 길 가와 돌짝 그리고 가시떨기를 찢어버린다.
이것이 십자가 죽음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뱀을 표상하는 마귀를 멸하셨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멸하신 것이다.
이렇게 생명의 씨가 의인으로써 죄인이 되신 그리스도를 부수고 찢어버린 것이다.
훔치지 말았어야 할 여리고성의 값비싼 물건을 훔쳐 죄인으로 지목된 아간은 죄인 중에 괴수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아골골짜기에 돌무더기가 되어 죽었다.
이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상한다.
그리고 그 아골골짜기가 소망의 문이 되었다.
(호 2:15) 거기서 비로소 그의 포도원을 그에게 주고 아골골짜기로 소망의 문을 삼아 주리니 그가 거기서 응대하기를 어렸을 때와 애굽 땅에서 올라오던 날과 같이 하리라.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대신하여 걸림돌인 죄인이 되시고 스스로 깨지고 부서지는 십자가를 지신 우리 주님의 그 크신 사랑 앞에 오열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린다.
나는 골백 번 죽어도 마땅한 자이나 이런 나를 주님의 생명으로 감싸 안아 주시고 은혜와 생명의 나라로 옮겨주심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사랑임을 믿는다.
주님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내가 무엇이라고 나를 이리도 사랑하셨나요?
죄인 중에 괴수인 나는 죽어야 마땅한데 이런 나를 대신하여 주님께서 죄인이 되시고 나를 당신의 나라로 옮겨주신 그 은혜 앞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조아립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해서든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무진 애를 쓰던 자였습니다.
하지만 도덕적 윤리적 교훈을 넘어 주님이 선포하신 복음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이는 복음만이 나를 영원한 생명으로 옮길 수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조차 주님의 선물입니다.
나의 모든 것 되신 주님께 이 시간 나의 모든 것을 내어드립니다.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기 원하오니 나를 받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