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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혀진 빗장을 열기위하여
중국dms 1840년 아편전쟁의 패배로 외세에 문을 열었으며,
일본도 1854년 페리 제독의 무력 앞에 문을 열게 되었지만,
우리 민족의 문은 굳게 닫혀져만 갔다.
조선 민족에게 복음을 전하러 왔던 토마스(Robert Thomas) 선교사는
1866년, 평양 대동강에서 목 베임을 당하여 순교하였고,
같은 해 서울 한강에서는 병인양요 사건으로 수많은 사람이
잠두봉(절두산)에서 목이 잘라져 한강으로 내던져졌다.
이러한 쇄국정치는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는 길목을 막고 있었지만,
그 닫혀진 문을 열기 위해 중국과 일본에 들어와 있던 선교사님들은
최선을 다하여 준비하고 있었다.
멕킨 타이어와 로스 선교사는 중국 선교사였지만
평양 대동강에서 이십 칠세의 나이로 꿈도 이루지 못하고
목 베임을 당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
우리 민족의 선교사로 일하였다.
당시 압록강 넘어 고려 문에 장사하러 오는, 조선 사람들을 집중적으로 전도하기 시작하였고,
그들과 함께 성경까지 번역(Ross역 ) 하면서 조선 선교를 준비하셨다.
일본에서도 신사유람단으로 갔던 이수정이 죠지 낙스(George Knox) 선교사를 통해서
크리스토인이 되었고
성경을 번역(이수정 역 - 마가복음)하여 조선 선교를 준비하였다.
조선 땅에 문만 열려지면 복음을 들고 들어갈 만반의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드디어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한영, 한불, 한독, 한러.... 외세에 문호가
열리게 되었다.
조선을 향한 아름다운 발걸음
조선 땅에 문호가 열렸다는 정보가 들려지자 세계를 품은 크리스토인들은 반응하기 시작하였다.
일본 땅에서 사역을 하고 계셨던 멕크레이 선교사는 1884년 6월 직접 조선을 방문하여
고종황제에게 '의사'와 '언어선생 세 사람'을 보내달라는 두 가지 윤허를 받아내었다.
이제 조선 땅에 합법적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 정보가 오하이오주에서 병원 문을 열었던 한 젊은 의사에게 들려지게 되었다.
예일 대학을 졸업하고 뉴욕 의과대를 나와서 개업을 한,
윌리암 스크렌톤(William Scranton) 이었다.
아버지는 돌아가셨지만 어머니와 부인 세 사람이 행복하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다.
그는 조선에 의사로 들어갈 수 있다는 정보를 듣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조선 땅에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한다.
이화의 어머니, 메리 스크렌톤(Mary Scranton) 선교사
아들 윌리암 스크렌톤 내외가 조선에 선교사로 가기로 결심하였을 때,
그들의 첫 번째 장벽은 쉰 살이 넘은 어머니였다.
선교사로 가기에는 너무 많은 나이였고,
홀어머니를 본국에 혼자 두고 간다는 것은 더 더욱 어려운 문제였다.
아들이 자신의 문제로 고심하는 것을 알고는
메리 스크렌톤 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 하나님 나도 조선 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해주세요 ”
메리 스크렌톤 여사는 단지 아들 가족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선교사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녀는 직접 여성 선교부를 찾아가서 자기를 조선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참으로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
러나 그 불가능을 가능하게 한 것은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였다.
하나님은 윌리암 스크렌톤 부부와 쉰 살이 넘은 어머니까지
조선 땅에 선교사로 오실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조선에 도착하다
그들은 망망한 대해, 태평양을 20일 넘도록 항해하여 일본에 잠시 머문 후,
다시 배를 타고 부산을 거쳐 인천항에 도착하였다.
근 한 달간의 긴 항해였다.
스크렌톤은 1885년 5월 3일에 먼저 들어왔고,
뒤를 이어 어머니와 부인은 6월 20일에 조선에 도착하였다.
스크렌톤 선교사 가족은 아펜젤러 가족과 언더우드 선교사 바로 뒤를 이어
조선 땅을 밟은 선교사가 초기 조선 개척 선교사가 되었다.
이화의 첫 학생
당시 조정은 의료와 학교 외에 선교는 절대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윌리암 스크렌톤 선교사는 9월 10일 정동병원을 개원하여
이름을 시병원이라고 짓고 조선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님은 쉰 살이 넘어서 조선 땅을 밟았는데
근 일년 동안 한국 말을 배우면서 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였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에게 하나님은 길을 열어주셨다.
아들 윌리암 스크렌톤이 시작한 병원에 첫 번째로 찾아 온 환자가
병들고 가난한 자기 집에서는 딸아이를 도저히 돌볼 수가 없다는 이야기였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는 그 여자 아이를 집에 대려다가
돌보면서 가르치기 시작하였는데(1886년 5월 31일)
그 여학생이 바로 이화의 첫 학생이 된 것이다.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님은 후에 정동에 기와집을 얻어 학교를 시작하게 되었고,
고종 황제로부터 이화학당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았다. (1887년 2월)
이화여대 출신 선교사
메리 스크렌톤 선교사가 작은 기와집에서 시작한 이화는 100년을 훨씬 넘겼다.
이 역사의 뒤안길을 돌아보면, 이화는 미션스쿨의 정신을 이어받아 수많은 선교사를 배출하였다.
해방 후에 김활란 총장이 중심이 되어 이화여대에 선교운동이 시작되었고,
전재옥 선교사를 포함한 세분의 선교사가 선두 주자로 파키스탄에 파송되었고,
그 바톤을 이어받은 수많은 이화여대 출신 선교사가 세계 곳곳에 파송되었다.
| 1886년 세워진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 ‘이화학당’. |
19세기에 내한했던 미국 선교사 중에서 매리 플레처 스크랜턴(Marry fletcher Scranton) 여사는
한국의 근대 여성사를 개척한 선구자였다.
이화여대의 모체가 되는 이화학당을 설립해 근대 여성 교육을 선도한 주인공이 스크랜턴 여사였다. 또한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여성 병원을 개설해 근대 여성 의료를 시작하고,
감리교 여성 선교를 통해 근대 한국을 대표하는
위대한 여성 지도자들을 양성해 낸 주인공 역시 스크랜턴 여사였다.
여사는 1832년 미국 매사추세츠 밸처타운에서 에라스투스 벤턴의 큰딸로 태어났다.
혼인 전 이름은 매리 벤턴으로, 벤턴 가문은 뉴잉글랜드의 저명한 감리교 가문이었다.
여사의 부친인 에라스투스 벤턴 역시 미국 북감리교의 저명한 목사였고,
동생과 조카 또한 감리교 목사였다.
이처럼 저명한 신앙 가문에서 태어난 스크랜턴 여사 역시 어려서부터 독실한 신앙을 자랑했다.
24세가 되던 1855년, 여사는 윌리엄 스크랜턴과 혼인했다.
다음 해에 여사는 외아들 윌리엄 벤턴 스크랜턴을 출산했다.
하지만 41세가 되던 1872년 남편과 사별했다.
그때 아들 벤턴 스크랜턴은 17세였다.
남편을 잃은 후 여사는 아들 뒷바라지에 전념하면서
미국 북감리교의 여성 해외 선교 활동에도 힘을 기울였다.
독실한 신앙 가문에서 성장한 여사는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어려서부터 해외 선교에 관심이 컸다. 크리스토교 신앙인에게 해외 선교는
당연한 사명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믿음은 남편과 사별한 후 더욱 깊어졌다.
홀로 된 여사는 세상에 남겨진 자신과 아들의 사명에 대해 깊이 묵상했다.
어째서 하나님은 남편만 데려가고 자신은 세상에 남겨뒀을까?
남겨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맞는 것일까?
이런 질문 끝에 여사는 해외 선교가 자신의 사명이라 확신하게 되었다.
그런 확신에서 스크랜턴 여사는 북감리교의 해외 여성 선교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나아가 외아들 벤턴 스크랜턴 역시 의료 선교사로 키우고자 했다.
벤턴 스크랜턴은 1878년 예일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 의과대학에 입학해 1882년 졸업했다.
그 사이 여사는 아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뉴욕으로 이주했는데,
뉴욕에서도 여성 해외 선교 활동에 열심이었다.
한편 벤턴 스크랜턴은 뉴욕 의대를 졸업한 후 오하이오 클리블랜드에 병원을 개업했고,
결혼도 했다. 개업의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그는 1884년 딸까지 둬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다.
아들 중병 앓자 ‘조선 선교는 신의 뜻’ 이라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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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학당과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
이화여자고등학교와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梨花學堂)은
메리 스크랜턴 선교사가 설립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다.
메리 스크랜턴(Mary F.B. Scranton 1832~1909)은 40세 때
남편과 사별하고 53세이던 1885년 5월에 미 북감리교
여성해외선교회 파송으로 의사인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턴(William B. Scranton 1856~ 1922)
내외와 함께 조선이라는 미지의 땅으로 온 한국최초의 감리교 여선교사이다.
이들 모자(母子)는 이 땅에 와서 어머니는 여성평등과 교육에,
아들은 의료와 교회 개척에 힘쓰며 조선선교에 헌신하였다.
메리 스크랜턴은 서울 정동에 자리를 잡은 후 이화학당 설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당시 조선의 여성들은 가부장적 가치관이라는 전통과 인습의 굴레 속에서
양반집 아녀자가 아니면 교육받을 기회조차 없었다.
이렇듯 여성교육을 기피하는 사회풍조에 서양인에 대한 배타적 심리가 더해져
설립 초기 학생 유치에 어려움이 따랐다.
그런데 1886년 5월 31일,
한 관리의 소실인 김 부인이 영어를 배워 왕비의 통역관이 되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왔다.
이로써 단 1명의 여학생으로 역사적인 첫 영어수업이 이루어졌고,
이 날이 이화학당의 창립일이다.
1887년 학생수가 7명으로 늘어나고, 과목도 성경과 국어가 추가되었으며
동년 11월에는 200평 규모 기와집 교사(校舍)가 완공되었다.
그리고 명성황후로부터 ‘배꽃같이 순결하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열매를 맺으라.’는 뜻의
‘梨花(이화)’라는 친필의 교명을 받았다.
1889년 최초로 조선인 이경숙을 교사로 채용하면서 한글과 한문 교육이 시작되었고,
한글과 영어로 기초과목과 종교과목을 가르쳤다.
학생이 꾸준히 늘자 1891년에는 기와집 교사를 헐고 붉은 벽돌 2층 건물을 세웠다.
1904년에 중등과(4년)를 설치하여 1908년 중등과 제1회 졸업생을 배출했고,
같은 해에 보통과와 고등과를 신설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 대학과(4년)를 신설함으로써 초·중·고등 교육을 모두 아우르게 되었다.
이후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는 1938년 이화고등여학교에서 1946년 이화여자중학교(6년)로, 1950년에는 3년제 이화여자중학교/고등학교로 분리 개편되었으며,
현재는 자율형 사립고로 전환되었다.
대학과는 1925년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1943년 일제의 탄압으로
여자청년연성소 지도자양성과(1년)로 격하되었다가
1945년 경성여자전문학교로 개칭하였고 동년 10월 '이화'라는 교명을 되찾고
종합대학교로 승격했다.
125년 전 정동의 한옥방에서 싹튼 한 여선교사의 꿈이 자라나
지금의 이화여고와 이화여대가 된 것이다.
한편 이화학당은 크리스토교계 교육기관으로 총독부 제약을 덜 받았기에
학생들의 민족의식도 남달랐다. 3·1운동은 물론 6·10만세운동,
광주학생운동에 호응한 1929년 말~1930년 초 서울학생시위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이처럼 이화학당은 전통적으로 여성 교육이 전무하던 우리나라 여성들에게
크리스토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여성의 의식을 깨우고 다양한 사회진출을 가능케 하였다.
3·1운동의 상징적인 여성운동가 유관순 외에도
우리나라 최초의 여자 양의사 박에스더(김점동),
한국 여성 최초로 미국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와서 여성 계몽운동을 펼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북경에서 독살당한 하란사 등 역사적인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현재 이화여고 내에는 심슨기념관(등록문화재 제3호), 정문으로 쓰였던 사주문,
유관순 열사가 빨래하던 우물터가 남아 있으며,
본관 뜰에는 한국여성 신교육의 발상지 기념비가 서 있다.
“내가 하는 일이 이 땅의 사람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나는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남긴 이 글처럼 메리 스크랜턴 여사는 초로의 나이에 열악한 환경의 이 땅에 찾아와
크리스토의 정신으로 진정으로 이 민족을 사랑하며 섬겼다.
특별히 여성사회를 변혁시키고 근대화해서 한국사회의 전체적인 여성의식들을 변화시키겠다는 의지로 이화학당을 설립함으로 근대 여성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한국 최초의 여성병원인 보구여관(保救女館)을 설립 운영하고 여선교회를 조직하였으며
'전도부인'을 조직하여 지방 전도·교육 활동을 펼치는 등으로 구한말 여성인권 향상과 교육,
의료, 복지에 기여한 감리교 뿐 아니라 전체 크리스토교 여선교사들의 대모이다.
조선인들은 스크랜턴 여사에 대한 존경심으로 그를 ‘대부인(大夫人)’으로 불렀다.
이 땅에 여생을 바친 그는 1909년 25년간의 한국 사역을 마감하고 양화진에 잠들어 있다.
(연합기독뉴스 발췌)
1월21일, 1885년 이 날은 스크랜튼(Scranton, W.B.) 선교사가 그의 가족과 함께 의료선교를 위해 자신의 나라 미국을 떠난 날이다.
미국북감리교 소속이었던 스크랜튼이 한국에 온 배경은 다음과 같다. 1883년 9월 13일 워싱턴에서 방미 사절단인 민영익을 만난 까우처 목사(Dr. J. F. Coucher)는 한국선교를 결심한다. 그리고 당시 일본 주재 미감리교 선교책임자였던 맥클레이 박사(Dr. R. S. Maclay)가 가우처 목사의 선교제의를 받아들인다.
1884년 6월 23일 제물포에 도착한 두 사람은 7월 3일 ‘감리교회의 교육과 의료사업’에 대한 고종 황제의 윤허를 김옥균을 통해서 얻어낸다. 고종 황제가 맥클레이 박사에게 선교사업의 윤허를 내리자 이를 계기로 선교사의 입국을 허락 받는다. 맥클레이 박사가 일본으로 돌아가 미국 선교 본부에 한국선교사를 요청하고, 그것에 의하여 교사로 아펜젤러(Rev. H. G. Appenzeller) 목사 부부와 의료사업자로 스크랜튼 의사(Rev. W. B. Scranton M. D.), 그리고 스크랜튼 의사의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 여사(Mrs. M. F. Scranton)가 한국의 첫 선교사로 선택되어 온다.
여기서 우리가 조금 깊게 살펴 볼 것은 스크랜튼의 위대한 선교 사업도 중요하지만 1885년 1월21일 아들을 쫓아 온 어머니 메리 스크랜튼 여사이다.
메리 스크랜튼 여사는 누구인가? 그녀는 우리 나라의 여성들을 주체적이고 근대적인 여성으로 이끄는 데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
이화여대의 전신인 이화학당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메리 스크랜튼 여사다. 그녀는 1886년 한국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우고 20여 년 간 여성지도자 양성과 학교경영에 힘쓰는 한편, 전도사업에도 전력하는 등 많은 공적을 남겼다.
당시 여성들의 교육기회가 거의 전무한 상황에서 여성들을 위한 전문 교육기관을 세웠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더욱이 당시 서양 신지식에 대한 박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대상황에 굴하지 않았던 스크랜튼 여사의 업적은 역사에 남을 만하다. 학생이 없어서 한 명을 놓고 가르치기도 했던 그녀의 신념은 한국 근대화의 교육, 여성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한국 최초 여의사라고 하는 박에스더(Mrs Esther Kim Park,본명 김점동)도 바로 이화학당의 초창기 인물이다. 그녀 또한 그러한 배움을 어렵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대로 몸으로 실천하게 된다.
이처럼 기독교의 학원선교는 단순한 전도의 차원이 아니라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에 대해, 인권에 대해 관심을 쏟았다. 현대 성장중심의 학원선교를 바라보며 과거 메리 스크랜튼 부인의 업적을 반추해 본다. 그녀는 자신의 자식이나 보살피기 위해 한국에 같이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그가 진정 원했던 것은 자신만을 위한 지식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로 연결된 나만의 부가 아닌, 나로 인한 우리 모두의 지식이 되길 희망했다. 이러한 그녀의 뜻을 기린다면 오늘날 학원선교는 보다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생명 살림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