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서천의 둘째 날입니다.
빡빡한 오전 일정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잠 중에 흔들어 깨워주시니 피곤한 몸이지만 일어나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언제 어디서나 이 생명의 교제를 할 수 있는 모든 은혜 주심을 감사합니다.
십자가 보혈을 의지합니다.
자기의를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주님의 보혈로 덮어 주옵소서.
정결한 영혼, 정직한 영을 허락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21.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에나 평상 아래에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이르시되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며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도 빼앗기리라
26. 또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이 씨를 땅에 뿌림과 같으니
27. 그가 밤낮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씨가 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를 알지 못하느니라
28.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되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29.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라
(본문 주해)
21~25절 : 등불의 비유이다.
등불의 목적은 어두움을 몰아내는 빛을 비추기 위해서이다.
등불이 비춰짐으로 그 빛을 받아들인 자들은 그 빛을 더욱더 원하게 되고 그럴수록 더욱 많은 빛이 자기 안에 비추어지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무언가 있다고 하는 것조차 빼앗긴다는 말씀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듯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그 나라의 말씀은 말이나 등경 위에 감추어지기 위함이 아니라 위에 드러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말씀은 들을 귀 있는 자들에게만 들린다.
그러므로 조심하여 들을 것이다. 조심하고 집중하여 들을 때 더 많이 깨닫는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께서는 더욱 은혜롭게 반응하신다.
그리하여 말씀을 듣는 자는 열매를 맺도록 조심할 것이며 그때 하나님께서는 기대한 것 이상으로 많이 주시며 풍부하게 베푸신다.
그러나 마음의 척도를 좁게 하여 헤아리는 자는 있는 것마저 빼앗긴다.
유대인들은 등불을 기다렸다. 메시아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등불을 알아볼 눈과 귀가 없었다. 만약 그들이 빛을 알아보고 받아들였다면 더욱 그 빛이 충만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빛이 그들 안에 없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다.
26~29절 :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땅에 씨를 뿌려 놓고, 밤낮 자고 일어나고 하는 사이에 그 씨에서 싹이 나고 자라지만, 그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땅이 저절로 열매를 맺게 하는데, 처음에는 싹을 내고, 그 다음에는 이삭을 내고, 또 그 다음에는 이삭에 알찬 낟알을 낸다.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댄다. 추수 때가 왔기 때문이다."”(새번역)
하나님의 나라는 밭에 뿌려진 씨가 자라는 것과 같다.
하나님 나라가 자라기는 자라는데 눈에 보이게 쑥쑥 자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언제 자라는지 모르게 조금씩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죽은 나무가 아니다. 씨가 뿌려지고 생명이 있기에 자라가고 있는 것이다.
29절의 ‘추수 때’는 심판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시작과 끝이 있는 나라라고 말씀한다. 지금 태동 되어 미미하게 자라는 것 같지만 거대한 거목으로 자라갈 것이며 그 열매가 맺혀 추수 때가 되면 낫을 대는 때가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전하는 자는 그 말씀이 어떻게 결실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씨가 자라서 추수할 때가 오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반드시 임한다. 이런 과정에서 사람이 어떤 본질적인 영향을 미칠 수 없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와 함께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를 통해 반드시 완성된다.
그러므로 그 나라를 전파하는 자는 그 일에 충실하되 결과를 초연한다.
도리어 농부의 여유로움과 태평스러움으로 그 나라가 결실할 것을 신뢰하는 것이다.
(나의 묵상)
등불이란 빛을 비추기 위한 것이다.
내게 예수님이 등불로, 빛으로 오셨다. 그러자 곧 나의 어둠으로 드러났다. 전적인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참으로 신비한 것은 비참한 죄인임을 고백하면서도, 죄인임을 드러내는 그 복음의 빛을 기뻐한다는 사실이다.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의 말씀처럼 내 안에 작은 등불을 켜 주심으로 나의 어둠을 보게 되니 나는 더욱 빛을 구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b)
나는 이 말씀을,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더 잘 사는 복을 받는 것이라고 오해했었다.
더 풍성히 얻게 되는 것은 더 밝은 빛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죄인 됨의 심각한 상태를 더 확실하게 보게 되니 더욱 주님께 연합되어지기를 원하게 되는 것이다. 주님 아니시면 안 된다는 고백을 하게 되는 것, 그래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더 잘 믿게 되는 것이다.
2015년 내게 밝혀주신 그 등불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환한 빛이 되어 내 안을 밝힌다.
예수님은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내게 몰고 오셨다.
언제 싹을 내었는지, 언제 이삭을 내었는지 나는 모르지만 내 안에 하나님 나라는 계속 확장되고 있다.
어제 오늘 전국여신도 연합회 행사로 서천에 와서 강의도 듣고 교육도 받고 있다.
함께 참여한 우리 4명은 모두 복음과 생명을 아는지라, 우리의 마음은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니 참으로 기쁘다.
이곳에서 말하는 ‘생명, 평화, 정의.....’ 등은 언제나 인본주의적이다.
생명은 언제나 환경과 자연보호, 여린 육체의 생명 보호만을 말하지 아들의 생명을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평화는 언제나 남북 문제 등 세계 정치의 평화를 이야기 하지 죄인이 용서받음으로 주님께서 이루어주신 화평은 잘 말하지 않는다.
정의는 언제나 인간의 의와 선을 기준하니, 의인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은 아랑곳하지 않고 무시한 채 인간의 의를 기대를 한다.
그리고 이 땅에 인간들이 원하는 그런 하나님 나라를 이루자고 손에 손을 잡게 한다.
무엇보다 가장 큰 괴로움은 이런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주최자들과 그에 박수를 치는 많은 사람들이다.
어제 저녁 조별 토론 때는 너무도 어이가 없는 일도 있었다.
아담의 범죄 후 하나님께서 가죽옷을 입혀주신 말씀을 가지고, ‘환경보호 차원에서의 옷’에 대해 토론하게 하였다!
자기 안에 빛이 없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한 바리새인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이 몰고 오신 하나님 나라를 변질시키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참으로 괴롭지만 우리들 4명에게 이러한 것을 분별할 수 있는 눈과 귀를 열어주신 주님께 감사했다.
들을 귀 있는 자로 만들어 주시고, 우리 안에 커져 가는 하나님 나라를 기뻐하는 자로 만들어주신 것이다.
우리들로 하여금 깜깜한 심령 속에 작은 등불을 밝히는 자로, 하나님 나라의 여린 싹을 찾아나서는 자로 삼아 주심을 감사하며, 하나님 나라 확장을 이루어 가실 주님을 기대할 뿐이다.
(묵상 기도)
주님,
이곳에 오면 늘 답답합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태도만을 드러낼 것이 아니라,
단 한 사람이라도 복음을 알게 하고 생명으로 사는 일을 전해야 함을 생각합니다.
저 혼자 왔던 때가 있었습니다.
이제 어느덧 4명이나 오게 되었으니 영혼을 붙여 주시옵소서.
제 생각으로는 아득한 일 같지만 주님의 계획을 기대합니다.
주님처럼 등불을 비추게 하시고
우리도 모르게 자라게 하신 싹을 발견하여 물을 주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할렐루야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권사님을 통해 이루어가시는 하나님나라를 기뻐하며 주님께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