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또 땅의 모든 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생명이 있어 땅에 기는 모든 것에게는 내가 모든 푸른 풀을 식물로 주노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창 1:29-30)
어떤 사람이 과일을 먹다가 갑자기 몸이 뒤틀리고 호흡이 곤란해서 급히 응급실로 옮겼습니다. 의사가 진단을 하고 치료를 하자 병이 가라앉고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가족들이 의사에게 물었습니다. “식중독이지요?” 의사가 대답했습니다. “아닙니다. 농약중독입니다.” “? ! ?”
1. 참된 생명의 먹거리가 귀하다
어릴 적에 밥그릇의 밥을 가지고 장난을 치면 ‘먹을 것을 가지고 장난친다.’고 혼났습니다. 먹을 것은 소중한 것이며, 신성한 것인데, 그 먹을 것으로 장난치면 혼날 일이었습니다. 요즘 먹을 것으로 장난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얼마 전, 중국에서 가짜 분유가 만들어졌습니다. 아무 영양가도 없는 분유가 신생아에게 먹여졌습니다. 60명의 아가들이 영양실조로 죽었고, 200명의 아가들은 몸은 자라지 않고 머리만 비정상적으로 커지는 병에 걸렸습니다. 믿고 먹인 분유였는데 엄청난 불행이 닥친 것입니다.
믿고 먹는 음식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몸을 괴롭히고 병을 일으킵니다. 먹음직스럽게 보이는 빨갛고 노란 과일들이나, 벌레 하나 안 먹고 밭에서 금방 따온 듯 싱싱하게 보이는 채소들은 400여 가지의 농약과 화학비료의 공로 때문입니다.
더욱이 밥상에 오르는 먹거리의 70%가 수입 농산물인데, 수입농산물은 수확 전뿐만 아니라 수확 이후에도 오랜 기간 상하지 않도록 살균제나 살충제를 뿌립니다. 왜냐하면 외국에서 우리 밥상에 오르기까지 한달 이상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살균제의 90%,와 살충제의 30%가 발암성입니다.
유전자가 조작된 식품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약 10% 정도의 곡물이 유전자 조작 품종입니다. 학자들은 자연 질서를 무시한 이 농산물들이 선천성 기형 등 여러 가지 부작용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광우병과 조류독감으로 축산물에 대한 공포가 온 나라를 휩쓴 적이 있었습니다. 식물만 먹고 자라도록 창조된 소에게 동물성 사료를 먹임으로 광우병이 생겼습니다. 광우병에 걸린 소의 고기를 먹으면 먹은 사람에게 광우병 증세가 옮겨온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재앙입니다.
축산물의 사료는 대부분 외국에서 수입되는데, 운송과정에서 변질을 막기 위해 수십 종의 농약이 살포되고, 사육 효과를 높이기 위해 성장 호르몬제, 항생제, 신경안정제를 투여합니다. 이것이 가축의 몸에 잔류하였다가 고기를 먹는 사람에게 축적되어 몸에 이상을 일으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의 70%가 가공식품입니다. 과자, 청량음료, 햄, 소시지, 라면 등 각종 인스턴트 식품에는 방부제, 산화방지제, 살균제, 착색제, 화학조미료, 인공감미료, 탈색제 등 370여 종의 화공약품이 첨가되어 있습니다.
정말 알고 보면 무엇을 먹을 것인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요엘 선지자의 탄식이 이 시대의 불행을 예고합니다.
“오호라 그 날이여 여호와의 날이 가까웠나니, 곧 멸망같이 전능자에게로서 이르리로다. 식물이 우리 목전에 끊어지지 아니 하였느냐? 기쁨과 즐거움이 우리 하나님의 전에 끊어지지 아니하였느냐? 씨가 흙덩이 아래서 썩어졌고 창고가 비었고 곳간이 무너졌으니 이는 곡식이 시들었음이로다. 생축이 탄식하고 소 떼가 민망해하니 이는 꼴이 없음이라.”(요엘1:15-18)
2. 양식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창 1:29)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 식물이 되리라.” (창1:29)
먹거리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은 특별한 것이며, 소중한 것입니다. 선물은 함부로 다루면 노여움을 받게 됩니다.
자녀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대로 할 수 없고,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생명의 쌀, 생명의 양식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자녀처럼, 먹을 양식도 귀하고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귀하게 여기면 복을 받습니다. 자식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랑하고 축복하며 키우면 복이 되고 기쁨이 되어 돌아옵니다. 먹을 양식도 귀하게 여기고 정성을 다 하면 무병장수의 복으로 내게 돌아옵니다.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함부로 하면, 그것이 재앙이 되고 저주가 됩니다. 생명의 양식에 농약이 들어가고, 화공약품이 들어가면 몸에 재앙이 찾아옵니다. 환경호르몬으로 기형아가 속출하고, 아토피성 질환, 천식, 암, 성인병 등 몸에 재앙이 찾아옵니다.
농경문화 속에서 쌀을 주식으로 삼으며 살아온 우리 민족은 쌀을 생명처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쌀 한톨에도 우주가 담겨있다고 했습니다. 하늘(天) 땅(地) 사람(人)을 우주를 구성하는 3요소로 본다면, 쌀 한톨에는 하늘의 햇볕과 땅의 자양분과 사람의 정성이 담겨서 밥상에 오르기 때문입니다.
옛날 우리 아낙네들은 귀신을 노엽게 하지 않아야 집안이 평안하다고 믿었습니다. 귀신 중에 ‘성주’(成造)라 불리는 집지킴이 귀신을 제일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귀신에게 바칠 쌀을 넣을 항아리를 ‘성주 단지’, 혹은 ‘신주 단지’라 했습니다. 아낙네들은 매 끼니 식사를 준비하면서 먼저 식구 수대로 쌀 한 숟갈씩 항아리에 넣으면서 가족의 건강과 출세를 위해 ‘성주님’께 빌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인이 된 아낙네들은 더 이상 귀신을 섬길 수 없었고 ‘성주 단지’도 필요 없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전에 ‘성주 단지’라 부르던 항아리 바깥에 십자가를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주 단지’(Lord's Pot)라고 불렀습니다. ‘성주’ 귀신을 위해 모았던 쌀을 이제는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쌀을 모았던 것입니다.
성주에게 가족들의 건강을 빌던 것을 이제는 예수님에게 가족들의 건강을 빌었습니다. 식구 수대로 쌀 한 공기 뜰 때마다 한 숟갈씩 쌀을 뜨면서, “이 밥을 먹는 우리 가족 건강하게 하시고, 오늘도 아무 사고나 어려움 없게 해 주소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이렇게 한 주간 모은 쌀을 주일날 예배드리러 오면서 하나님께 바쳤습니다. 이것이 성미입니다. 이 성미 운동은 100년 전에 시작 되었고, 오늘날까지 신앙의 전통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성미는 거룩한 쌀(聖米)이라는 뜻이 아니라 정성이 담긴 쌀(誠米)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에 쌀 한톨 함부로 하지 않는 정성이 담긴 것이라는 뜻이며, 가족의 건강을 좌우하는 것이기에 정성을 다해 밥을 짓고 먹을 양식을 삼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빼빼 마른 목사가 친구 목사들을 만났습니다. 오랜 만에 만난 친구 목사들이 물었습니다. “어디 아파? 점점 더 말라가는 것 같아.” 그러자 이렇게 말을 받았습니다. “친구들,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생각하면 밥이 목으로 넘어가나?” 몸이 좋은 친구 목사들이 황당해 하는데 그 중 하나가 이렇게 조크를 했습니다. “여보게, 자네 성미를 먹지? 교인들이 정성스레 기도로 떠오는 성미를 먹고도 살이 안 붙으면 그건 교인들에게 죄가 되는 것이야!” “?!”
3. 거룩한 밥상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오래된 전통이 있습니다. 밥상에서 음식을 먹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합니다. 기도를 하지 않고 식사를 하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할 만큼 모두 식사기도를 합니다. 여러분은 무엇이라고 기도합니까? 우리는 대체로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 양식이 밥상에 오르기까지 땀 흘린 농부의 손길과 정성껏 요리를 한 손길에 이르기까지 축복과 감사로 어우러진 식사기도를 드립니다.
기도하고 먹는데도 식사 후에 남아서 버리게 되는 음식물 쓰레기가 넘쳐납니다. 한해 우리나라에서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를 돈으로 계산하면 15조원이나 됩니다. 이것은 북한 주민의 주식비보다도 더 많습니다.
예전의 어른들은 아이들이 밥을 한 톨이라도 소홀히 하면 주의를 주었습니다. “애야, 이 쌀 한톨이 밥상에 올라오기까지 농부들의 손길이 얼마나 많이 가야 하는지 아니?” 쌀 한톨이 소중한 것은 정성이 많이 들어갔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깃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먹는 양식 중에 다른 생물의 생명이 아닌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식물의 생명이던지, 동물의 생명이던지 우리는 남의 생명을 먹고 나의 생명을 살립니다. 내 생명을 살리기 위해 누군가의 생명이 희생됩니다. 양식은 생명입니다. 식물의 생명이요 동물의 생명입니다. 희생이 되어 밥상에 오르는 것도 미안한데, 음식물 쓰레기가 되어 버림까지 받으면 얼마나 미안한 일이겠습니까?
성만찬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며,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하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는 거룩한 식탁입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우리가 생명을 얻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다른 생명의 희생으로 나의 생명이 살아가는 밥상은 거룩한 성찬입니다. 날마다 받는 밥상은 그대로 성찬입니다.
이현주 목사님은 ‘밥먹는 자식에게’ 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천천히 씹어서/ 공손히 삼켜라/ 봄부터 여름 지나 가을까지/ 그 여러 날들을/ 비바람 땡볕 속에 익어온 쌀인데/ 그렇게 허겁지겁 먹어서야/ 어느 틈에 고마운 마음이 들겠느냐/ 사람이 고마운 줄을 모르면/ 그게 사람이 아닌거여 ”
생명에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씨를 뿌리고,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가 익기까지는 정성도 필요하고 시간도 필요합니다. 길고 긴 기다림 끝에 탐스런 열매가 생명의 축복으로 얻어집니다.
그러나 패스트 푸드(Fast Food)를 먹고 자란 현대인들은 기다림을 모릅니다. “빨리, 빨리” 재촉하며 살아갑니다. 충동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합니다. 인생을 재촉하면서 인생의 참된 맛을 음미하지 못한 채, 하나님이 주신 삶의 멋을 맛보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5월20일 저녁, 서울 프레스센터 18층 외신기자클럽에서는 독특한 모임이 열렸습니다. 슬로푸드 한국위원회 회원 20여 명이 모여 ‘슬로푸드’를 즐긴 것입니다. 식탁은 소박하면서 풋풋했습니다. 현미밥과 된장국, 산나물 무침·오이 물김치·김…. 우리 교인들이 매주일 점심에 먹는 것과 똑같은 음식입니다. 회원들은 정성이 가득한 음식을 천천히 음미했습니다.
그 다음날 낮, 서울 정동의 한 패스트푸드점. 비교적 젊은 남녀 예닐곱 명이 주문대 앞에 서서 햄버거와 주스·아이스크림 따위가 나오기를 기다렸습니다. 1,2분 뒤 음식이 나오자 그들은 딱딱한 의자에 앉아 서둘러 음식을 먹었습니다. 식사는 간단했습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햄버거를 몇 입 베어먹고, 음료수를 마셨습니다.
두 가지 풍경은 한국 음식 문화의 현주소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슬로푸드 운동가 처지에서 보면, 요즘 한국 사회에서 소비되는 음식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슬로푸드와 패스트푸드. 여기에서 슬로푸드란 단순히 햄버거나 피자 같은 패스트푸드의 반대 개념이 아닙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슬로푸드국제본부(국제본부) 쟈코모 모졸리 부회장은 슬로푸드를 “즐거움과 건강을 주고, 고유의 기술로 만들어 독특한 맛을 내는 전통 음식이다”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슬로푸드를 좀더 자세히 알려면 이 국제본부 내에 있는 방주위원회를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방주란 노아의 방주에서 따온 것으로, 이 위원회는 ‘음식 평준화 및 세계적 유통망’이라는 거대한 홍수에 맞설 고품질 음식과 생산물을 찾아 기록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음식이 방주에 오를 수 있는 것일까.
슬로푸드미국위원회는 그 조건을 이렇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첫째, 독특하고, 품질이 뛰어나고, 맛이 좋아야 한다.
둘째, 멸종 위기에 처한 식품이어야 한다.
셋째, 표준화한 음식이 판치는 세상에서 설 자리를 잃은 식품이어야 한다.
넷째, 역사적·문화적으로 뚜렷한 지역성을 가져야 한다.
다섯째, 생산량이 한정되어 있어야 한다.
여섯째, 정해진 기술로 만들어야 한다. 등등
그러니까 패스트푸드점이 아닌 일반 음식점이나 가정에서 먹는 음식이라도 재료나 맛이 획일적이거나, 만드는 방식이 똑같으면 슬로푸드가 아닌 셈입니다. 한국의 공장에서 생산되는 김치나 장류, 젓갈류가 여기에 속합니다. 문제는 겉은 슬로푸드인데 안은 패스트푸드인 음식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사회가 계속해서 ‘더 빨리’를 주문처럼 강요하고, 과정보다 성과를 더 중요시한다면 싼값에 대량으로 생산되는 패스트푸드는 점점 더 늘어날 것입니다.
패스트푸드 범람은 곧 슬로푸드 감소를 의미합니다.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는 심각할 정도로 많은 음식과 맛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영농 기술 발달과 빠른 수송 기술이 그같은 ‘비극’을 키우고 있습니다. 수송 시간이 짧아지고 가공 기술이 발달하면서 먼 나라에서 생산된 음식을 맛볼 행운을 얻었지만, ‘세계적인 맛’에 길들여지는 불행을 초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닙니다. 이미 많은 식품이 중국에서 홍수처럼 밀려들고 있고, 열대 과일은 90% 이상이 외국(미국·칠레 등지) 산입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음식도 고등학교처럼 ‘평준화’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 탓에 지방 어디를 가든 똑같은 맛, 비슷한 음식이 지천입니다. 20여 년 전만 해도 각 지방마다 깍두기 맛은 물론 모양까지 다 달랐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리산에 가도 횟집이 있을 정도로 전국의 음식과 맛이 비슷해졌습니다. 지방이 아니더라도 백화점이나 할인매장 등에서 똑같은 맛의 음식을 수도 없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가공식품, 즉석 냉동식품, 인스턴트식품이 그것입니다. 신선한 음식의 대명사인 과일과 채소는 또 어떤가. 비슷한 크기와 색뿐이고, 판매되는 종류도 얼마 되지 않습니다. 소비자 처지에서는 그만큼 음식과 맛을 선택할 기회가 줄었습니다.
단일 품종을 대규모로 경작하는 바람에 지금도 수많은 식물 종이 사라지고 있습니다(여섯 시간마다 식물 종이 하나씩 사라집니다). 10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은 100-1백20종의 식물을 섭취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기껏해야 30여 종입니다. 머지않아 우리의 입맛을 다국적 식품회사나 거대 식료품회사들이 좌지우지하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다행히 아직 다양한 맛을 누릴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슬로푸드로 보존할 만한 지역 음식과 토속 비법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여러 김치와 장류, 각 지방의 토속 음식이 여기에 속합니다. 문제는 그것들을 지켜낼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5월20일 밤, 쟈코모 모졸리 부회장은 슬로푸드한국위원회 회원들과 식사하면서 산나물 무침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는 재료를 산에서 직접 채취해 왔다는 말을 듣자 이같은 음식을 지키고 널리 보급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계속 말했습니다.
“슬로푸드란 옛 사람들이 했던 일을 되살리는 것이다. 그러나 슬로푸드는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다운 미래를 위한 것이다.”
여러분, 우리는 패스트푸드에 맞서서 슬로우프드(Slow-Food)운동을 해야 합니다.
몸에 좋다면 못 먹는 것이 없는 한국인들이 이제는 태평양 건너 알래스카의 병원에까지 장수비방을 찾아 진출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수난을 당하는 동물은 사슴(녹용), 곰(웅담), 물개(해구신) 등이라 하니 자연보호론자들에 의해 야만인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아프리카와 코뿔소와 태국의 뱀들이 수난을 당하는 것은 이제 국제적인 망신거리로 세계 언론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전세계에서 나오는 녹용과 해구신의 80%가 한국인에 의해 소비된다니 이것들은 유독 한국인의 몸에만 약효가 있는 것인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모든 양식이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것으로 믿는 그리스도인은, 가능한대로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용하지 않고 농사하며, 가공식품이나 인스턴트 식품이 아닌, 어머니의 정성이 들어간 소박한 음식을 천천히, 감사하며, 깨끗이 먹는 생명의 밥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모든 가족과 교회가 이렇게 거룩한 밥상을 회복하면 그곳이 바로 천국 잔치 자리입니다.
기도
영원하신 하나님 인간의 지식으로 헤아려 알 수 없는 신비롭고 영광스러운 당신의 창조의 섭리를 감사 드립니다. 영원하신 하나님 주님께서 손수 지으신 궁창과 물과 태양과 바람, 모든 쌀과 보리, 채소와 과일을 보고 먹으면서 감사 드립니다. 우리를 인도하시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선물, 좋은 먹거리를 조작하고 파괴해 온 우리의 죄를 고백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우리를 강건케 하시어 이세상과 모든 먹거리가 주님의 것임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옵소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어 주님의 창조와 생명의 언약을 깨닫게 하시고 파기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언약으로 삼아 주옵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