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는 몰랐다. 강진에서 마량으로 향하는 23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갑자기 그림처럼 나타나는 구강포의 푸른 물결을 만나기 전까지는. 오른편에 펼쳐진 바다와 왼쪽으로 옹기종기 들어서있는 마을을 번갈아 바라보며 그 아름다운 정경에 감탄하기 전까지도 역시 몰랐다. 전원찻집 '도향'(강진군 대구면 저두리 하저마을)이 영화 '봄날은 간다'의 라스트 씬을 촬영한 배경이었다는 것을 안 것은 '도향'의 안주인인 반수련(55) 씨와 영화의 주인공 유지태가 함께 찍은 기념사진을 보고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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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봄날은 간다'에는 사랑을 처음 시작할 때의 설렘, 그 사랑이 끝나갈 때의 스산함과 그리고 결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사랑이 변하고 잊혀지는 것에 대한 쓸쓸한 느낌이 담겨있다. 남자 주인공 유지태에게 사랑은 절대적인 어떤 것이지만 여자 주인공에게는 진짜 사랑을 했는지 어땠는지도 모를만큼 불확실하고 모호하고 얄미운 감정이다. 그런 사랑이 짧은 봄날처럼 '연분홍 치맛자락을 휘날리며' 떠나고 남자 주인공 유지태는 사랑의 상처를 안고 길을 나선다.
그 곳이 바로 강진군 대구면 저두리 들녘. 그는 5천 평의 보리밭 사잇길을 헤치고 구강포에서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녹음한다. 그가 두 팔을 벌린 채 바람을 맞으며 얼마나 행복해 하는지. 결국 사람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까.
영화 속의 배경임이 알려지면 금방 명소가 되는 세상에 뜻밖에도 저두들녘은 아직 고즈넉했다. 그보다는 전원찻집 '도향'에서 바라보는 구강포 바다며 저두들녘과 그곳을 배경으로 해가 지고 뜨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사실이 더 유명한 곳이었다. '도향'은 입구에서부터 꽃대궐을 이룬다. 마침 때가 늦가을인지라 국화꽃이 만발했다.
'도향'은 강진이 고향인 윤담 씨가 오랜동안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 은퇴한 뒤 내려와 마련한 찻집이다. 마침 윤 씨는 새로 이을 초가지붕 때문에 사람을 만나러 가고 찻집에는 안주인인 반 씨가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서울에 있을 때도 전원주택에 관심이 많았다”는 반 씨는 “그러나 전쟁끝에 고향을 떠난 남편은 그리 고향에 내려와서 정착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이 집터를 보고는 마음에 들어 덜컥 결정을 해버렸다”고 말한다.
이들 부부는 3년전 바로 서울에서 이사와 75년이나 된 안채의 뼈대를 그대로 살리면서 수리해 꽃이나 가꾸며 살려 했다고 한다. 그랬던 것인데 집꾸밈이 하도 예뻐서인지 길가던 사람들이 주차하고 구경하고 들락거리는 바람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찻집 운영을 하게 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찻집으로 착각할 정도였던 것. 지난 11월 1일이 찻집 문을 연 지 꼭 3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전업주부로 살면서도 인테리어와 맛있는 차를 끓여내는 데는 일가견이 있어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명했다”는 반 씨. 그래서인지 뜰에는 온갖 가을꽃을 가득 담은 꽃수레와 깨진 항아리나 도기마다에 갖가지 야생화가 가득하다.
찻집에 들어서기 전 뜰을 거니는 맛도 일품이다. 그 뜰에 머물며 구강포 앞바다의 잔물결을 바라보거나 노을이 내려앉은 모습을 보노라면 예가 바로 선경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차는 대추차, 꽃차, 오룡차, 작설차, 구기자차, 쌍화탕, 영지꿀차, 연차, 오가피차, 매실차, 홍차, 솔잎차, 생강차 등 모두 안주인이 손수 담궈 내놓으며 그 맛이 깊고 그윽하다. 지극한 정성으로 차 한잔 한잔을 대접하다보니 한번 이 찻집을 들른 사람은 이내 단골이 되곤 한다. 근처엔 강진 청자도요지 등이 있어 두루두루 돌아볼만 할 듯 싶다.
우리가 살면서 정년 이후의 삶을 계획할 때 한번쯤 떠올릴만한 전원 찻집의 꿈을 그려가고 있는 윤 씨 부부의 넉넉한 분위기가 참 아름다웠다. ☎061-434-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