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 진격전
※ 출처 : 육군본부, 교육참고 7-7-6『전장사례연구(3)』,1987
ㅇ 작전기간 : 1950년 10월 20일 - 21일
ㅇ 작전지역 : 평남 개천
ㅇ 적 군 : 미상
ㅇ 아 군 : 제6사단 제7연대
1. 상황 ※ 서부지역 북진상황도
1.1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감행한 국군 제6사단은 진격중에 평양을 탈환하라는 명령을 받고 10월 15일에 원산-덕원을 출발하여 10월 18일에 양덕을 점령 확보한 후 전과를 확대하면서 계속 성천까지 진격하였다. 그러나 도중에 국군 제1사단과 유엔군 부대가 이미 평양을 탈환하였기 때문에 사단은 10월 19일 12:00 군단장 명에 의거 진격방향을 바꾸어 성천으로부터 순천-개천-회천쪽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1.2 이무렵 북한군은 국군 및 유엔군의 반격을 받아 전열을 정비할 여유도 없이 북쪽으로 퇴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10월 19일에 평양을 상실하게 되자 사령부를 희천으로 이동하고 제1차 방어선을 청천강선(정주-개천-덕천 선), 제2차 방어선을 희천선, 제3차 방어선을 강계선으로 계획한 다음 최후의 저항을 기도하고 있었다.
1.3 아군은 총반격 작전이 시작된 뒤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하는 동안, 패주하는 적을 섬멸하고 전쟁을 조속히 종결짓겠다는 의욕으로 과감하고도 신속한 진격을 실시하였다. 전쟁초기에 38°선에서 남쪽으로 후퇴하던 때와는 정반대로, 이번에는 아군이 공격기세를 유지하면서 적을 강타하고 있었던 것이다.
1.4 이 지역의 적은 각 부대의 패잔병들로 혼성편성된 부대로서, 초산-강계쪽으로 퇴각하면서 일면 유격전을 기도하고, 중공군이 참전할 때까지 지연전을 전개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아군을 험준한 산악지대로 깊숙히 유도하여 주요도로 주변에 병력을 엄밀히 배치하고 아군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함으로써 일대 포위전을 기도하였다.
2. 작전경과 ※ 개천진격전 상황도
2.1 순천-개천-안주를 거쳐 희천쪽으로 진격하려는 제6사단의 선두에 나선 제7연대(대령 임부택)는 예하 제1대대(중령 김용배)와 제2대대(중령 김종수)를 공격제대로 하고 제3대대(중령 인성관)를 예비대로 하여, 10월 20일 07:00에 도보로 성천을 출발하여 순천 방향으로 진격하였다.
2.2 이 당시 패주를 거듭하던 북한군의 사기가 극히 저하되어 있었던 반면에 아군의 사기는 매우 높았다. 신속하게 북진하여 압록강에 도달함으로써 국토통일의 염원을 당장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희망과 기대가 장사병을 막론하고 그들의 마음속에 꽉 차 있었던 것이다.
2.3 순천으로 진격 도중에 제7연대장이 최전방 연대 수색대로부터 보고받은 적정으로는, 적은 이미 순천 북쪽으로 퇴각하였으므로 저항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연대장은 즉시 연대 전 병력을 차량으로 기동케 하여 급진 시킴으로써 이날 20:00에는 순천에 돌입할 수 있었다.(주: 제7연대는 북진간 북한군으로부터 노획한 차량 150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제7연대는 이날 순천 서남쪽 3.2㎞ 지점에 공중 투하된 미 제11공정사단 제187연대(대령 보웬) 병력과 연결하고 북진작전을 협조하였다. 한편 이곳 순천은 적의 후방 사령부가 있던 곳으로서, 황급히 패주하면서 적이 많은 보급품을 그대로 남겨 두고 갔으므로 아군은 이것을 월동용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주 : 제6사단은 이때 하계복장을 착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노획한 인민군 복장을 착용하는 바람에 피아식별이 곤란할 정도로 되어 버렸다. 그래서 제6사단은 "북한군으로부터 보급을 받는다"는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
2.4 다음날인 10월 21일에는 새벽부터 기동을 시작하여 제2대대는 06:00경에 개천 남쪽 15㎞ 지점까지 진격하였는데, 이곳에서 1개 중대 규모의 적과 조우하게 되었다. 대대장은 즉시 대대 전화력을 집중함과 동시에 일제히 적을 추격, 섬멸토록 명령하였다. 아군의 공격을 받은 적은 주변 산악지대로 분산, 패주하면서 산발적인 저항을 기도하였으나, 대대장은 더 이상의 추격을 중지시키고 대오를 정리한 다음 개천쪽으로의 전진을 계속토록 하였다.
2.5 한편 연대 예비대였던 제3대대는 순천에서 제1대대와 제2대대를 초월하여 북쪽 50㎞ 지점에 있는 개천을 금일내로 점령, 확보하라는 연대장의 명령을 받았다. 이에 따라 제3대대장(중령 인성관)은 대대 전병력을 제9중대, 제10중대, 제12중대 및 제11중대 순으로 차량에 탑승시켜 개천을 목표로 차량행군을 실시하였다.
2.6 대대는 북진도중에 도로상을 2열 종대로 행군해 가는 1개 대대 규모의 적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아군의 추격을 받고 북쪽으로 후퇴하는 패잔병들이었다. 그들의 후퇴 속도보다 아군의 진격속도가 더 빨랐기 때문에 적의 후미가 아군의 선두부대에게 발견된 것인데, 총반격 및 북진 과정에서는 이런 현상이 드물지 않게 일어났다.
2.7 첨병소대의 보고를 받은 대대장은 급히 중대장들과 대대참모들을 모아놓고 행동 방향을 의논하였다. 여기서 내린 결론은 대대가 적과 교전을 벌일것이 아니라, 바로 개천까지 계속 진격한다는 것이었다. 현재 대대가 처해있는 상황에서 정해진 시간내에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중간에서 지체할 수가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2.8 그리하여 대대장은 차량화된 전 대대를 적 행군 대열의 중앙으로 전진시키고 차량위에서 "전쟁은 이제 끝났으니 총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고함을 질렀다. 이와같이 돌발적인 상황을 당한 적은 당황한 나머지 대부분 총을 버리고 사방으로 분산하였으며, 일부는 주변 산악지대로 도주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하여 제3대대는 한발의 소총도 쏘지 않고 개천까지 진격할 수 있었다. ※ 유사전례 : 싸우지 않고 투항권고
2.9 그러나 아군 제3대대의 위세에 눌려 행군도중 분산되었던 적의 일부 병력은 이 대대가 통과하자 다시 규합하게 되었다. 그들은 전반적인 상황이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나 저항을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들은 언제든지 아군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위험요소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2.10 선두 대대가 목적지인 개천에 무사히 도달할 무렵에 제7연대의 본대는 제3대대를 후속하여 개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선발부대가 이미 아무 이상없이 통과한 지역이었으므로, 본대는 비교적 경계심이 이완되어 있었다. 그런데 도중에 적의 패잔병들로부터 기습을 받게 된 것이었다. 비록 패잔병들의 무리라고는 하지만 오직 신속한 진격만을 위해 행군 종대로 북진하던 아군에게는 적지 않은 충격을 주었다. 피습을 당한 본대의 선두에 위치해 있던 연대 수색중대는 즉각 대응하여 교전을 벌인 결과 약 20분 후에는 적을 격파하고 행군을 계속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 접전에서 아군은 장교 1명, 사병 8명의 손실을 입었다.
3. 교훈
3.1 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함께 낙동강 방어선에서부터 대반격 작전을 전개한 아군은 계속 적을 추격하여 38°선에 이르럿고, 여기서부터 대망의 북진작전을 감행하면서 기세 좋게 진격을 계속하였다. 적은 이미 지휘체제와 전열이 와해되고 장병의 사기가 저하되어서 조직적인 저항을 할 수 없게 되어있었던 반면, 아군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공격기세를 유지하면서 적을 급히 추격하였던 것이다.
3.2 공격기세를 유지하고 있는 부대는 그렇지 못한 부대보다 큰 힘을 발휘한다. 제7연대 제3대대가 패주하는 적 1개 대대 병력을 무시한채 차량으로 중앙돌파를 할 수 있었던 것이나, 적1개 대대가 아군의 기세에 눌려서 저항하지도 못한채 분산되어버린 것은 이런 현상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따라서 어떤 군대이든 공격하는 부대는 그 공격기세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공격기세유지는 공자의 공격에 대응할 여유를 적으로부터 박탈함으로써 공격측의 의도대로 작전을 진행시켜 결정적인 성과를 달성할 수 있게 한다.
3.3 그런데 총반격 작전이 시작된 뒤 북진하는 동안 대부분의 부대가 시간을 다투어가며 진격에 경쟁을 벌임으로써, 진격부대 후방에 무수히 흩어진 적 패잔병으로부터 기습을 받아 지휘의 혼란 및 불의의 병력손실을 초래하게 되었다. 제7연대 제3대대와 연대 수색중대의 경우도 그와 같은 사례의 하나가 되는 바, 이것은 아무리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만을 거듭하는 적이라 할지라도 이를 무시하면 예기치 못한 피해를 입게 된다는 교훈을 시사 해주는 것이다.
3.4 그리고 이와 같은 경우, 목적지 도착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해도 제3대대는 적을 격파하여 저항의 소지를 없게 하거나, 아니면 자기들의 조치 결과를 연대에 보고하여 대책을 강구하도록 해야만 된다. 또 후속부대는 선두부대가 지나간 위치에서도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