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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제와 관련하여 모방신부는 중요한 역할을 하신 신부다. 1803년 9월 20일 프랑스 노르망디지방 바이어교구 관할 바시에서 태어난다. 바시는 수많은 사제, 선교사를 배출한 신앙도시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모방은 피에르 라는 본명으로 세례를 받는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바이어교구 대신학교에 입교한다. 파리 외방전교회와 밀접한 대신학교에서 수업은 결국 모방신부를1829년 사제서품 후 아시아로 불러낸다. 1831년 파리 외방전교회 입회, 첫 목적지는 베트남 통킹이고 최종 선교지는 중국 사천성이었으나 마카오에서 조선교구 초대 주교로 임명 부임하던 브뤼기에르 주교를 만나면서 조선으로 바뀐다. ‘나도 조선에서 선교를 하고 싶습니다” 그의 간청을 받아드린 주교와 함께 조선으로 향한다.
그러나 1835년 만주에서 병으로 주교가 사망하자 1836년 1월 15일 5명의 교우들과 함께 한양으로 들어 온다. 우선 한국어 습득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열중하며 전국 교우촌을 순회 방문하며 가는 곳마다 회장을 임명하고 신자집단을 조직화 시켜 나갔다. 주일과 축일을 가려 신자를 모으고 공동기도를 하게 하였으며 교리문답, 복음, 성경, 성인전기를 읽도록 했다.
무엇보다도 조선에서 가장 큰 업적은 조선교회를 이끌어갈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생을 선발 마카오에 보낸 일이다. 그는 늘 고심했다 (어떻게 해서 든지 조선에 신부가 있어야 해, 그러기 위해서 신부감을 골라야 하는데…. 누가 좋을까? 음~) 모방신부는 박해 와중에도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할 신부자격조건을 내걸었다.
1) 때묻지 않은 소년일 것,
2) 천주교 집안일 것.
3)신앙심이 깊고 본인은 물론 가족까지 신부되기를 원하는 사람일 것.
4)건강하고 근면 할 것.
이런 조건을 충족한 사람은 바로 소년 최양업 토마스, 최방제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 안드레아 세 소년이었다.
제일 먼저 한양 배다리가 있어 주교동(舟橋洞)이라 부른 사제관에 제일 먼저 도착한 소년은 1836년 2월 6일 양업이였다. 다음은 3월 14일 방제, 그리고 가장 늦게 7월 대건이 도착하였다. 세 소년은 도착한 날부터 기초교육을 받는다. 우선 라틴어와 철학 등을 배운다. 그렇게 주교동에서 생활하다. 1836년 12월 3일 세 소년에게 서약을 받은 모방신부는 유방제 신부와 함께 중국으로 가는 정하상, 조신철 가를로, 이광열 요한 등에게 신학생을 만주에 있는 샤스탕 신부에게 인도를 부탁한다.
성 샤스탕 야고보(Jacques Chastan, 1804~1839)
샤스탕 신부에 의해 정해진 중국인 밀사 두 명과 함께 마카오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1837년 6월 7일 도착한다. 샤스탕 신부는 세 소년을 마카오로 보낸 후 정하상 일행을 따라 조선으로 입국한다. 세 소년이 출발한 당시 공부할 신학교는 결정되지 않았다. 파리 외방전교회가 운영하는 동양인 성직자 양성소인 페낭 신학교에 갈 수 있었지만, 당시 공부하던 중국 신학생들이 소요를 일으켜 면학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들은 조선인 신학교를 세운 것이다. .
( 광동성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는 여러가지 현지 사정에 의하여 본부를 홍콩으로 이전하게 된다. 그 영향으로 최초 본부를 유지할 수 없어 결국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 지금 주상복합 건불로 변하게 된 것이다.)
세 신학생은 현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1837년 4월 6일부터 11월까지 두 차례 필리핀 마닐라 롤롬보이로 피신한다. 그 때마다 세 소년은 그곳에서 몇개 월식 공부하다 마카오로 다시 돌아오곤 하였는데, 이런 와중에 최방제 신학생이 1838년 11월 27일 선종한다.
마카오를 다시 찾은 두 소년 최양업, 김대건 신학생은 라틴어와 성가를 가르친 최초 책임 교수 칼레리 스승신부에게 다음과 같은 평을 받는다. “ 르그레즈와 신부가 전적으로 교육을 맡긴 조선 소년들은 바람직한 사제상으로, 신심, 겸손, 면학심, 스승에 대한 존경 등 완벽합니다.” 이런 사실은 자신이 1837년 10월에 작성한 서한에서 나타나 있다.
당시 두 신힉생의 필리핀에서 교수진은 다음과 같다. 테플레슈 신부는 라틴어, 리브와 신부, 교리를 가르쳤고 마카오로 귀환후는 르그레즈와 리브와 신부는 라틴어, 프랑스어, 교리를 베르뇌 신부는 철학, 매스트르 신부는 신학 가르쳤다. 1844년 소팔가자로 이동한 후에는 페레올 주교가 신학을 가르쳤다.
( 소팔가자 사거리 평화의 탑)
당시 두 신힉생의 필리핀에서 교수진은 다음과 같다. 테플레슈 신부는 라틴어, 리브와 신부, 교리를 가르쳤고 마카오로 귀환후는 르그레즈와 리브와 신부는 라틴어, 프랑스어, 교리를 베르뇌 신부는 철학, 매스트르 신부는 신학 가르쳤다. 1844년 소팔가자로 이동한 후에는 페레올 주교가 신학을 가르쳤다.
1842년 아편전쟁이 종식될 무렵 프랑스함대 함장 세실이 조선해안을 방문할 목적으로 협조를 구하자 리브와 신부는 중국과 교섭 시 통역사로 김대건 안드레아를 파견한다. 12월 27일 요동에 도착한 김대건은 책문 밀사인 김 프란치스코를 만나 29일 조선입국을 시도하나 실패한다. 박해로 위험하고 신품도 없이 교우들에게 무슨 봉사를 할 수 있느냐 반대를 무릅쓰고 입국한 후 하루 전진하지만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에 큰 고통을 겪어야 하였다. 그는 결국 입국을 포기한 후 1843년 4월 페레올 주교와 최양업이 있던 소팔가자로 되돌아 갔다.
(소팔가자 임시 성당 2층,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유골)
1844년 2월 페레올 주교 명으로 훈춘을 거쳐 3월 경원에서 밀사를 만난 뒤 소팔가자로 되돌아와 12월 10일 최양업과 함께 부제품을 받는다. 1845년 1월 밀사를 만나 의주를 통해 입국 석정동에 거처를 마련한다. 페레올 주교를 모셔올 배 두 척을 구입, 14세된 신학생 두 명을 선발 교육시키고, 현석문이 수집한 자료를 중심으로 조선 순교사와 순교자들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한다. 조선전도를 만들어 마카오로 보내기도 하였다.
(신축중인 소팔가자 성당 조감도)
김대건 안드레아는 상해에서 8월 17일 사제품을 받기 위하여 중국으로 간다. 그리고 8월 31일 페레올 주교, 다블뤼 신부와 11명의 교우들과 함께 입국 항해를 시작하지만 표류하여 제주도에 도착한 뒤 다시 항해하여 10월 12일 강경 나바위에 도착한다. 1846년 5월 서해 해로를 개척하라는 페레올 주교 명에 의하여 임치백, 임성룡, 김중수, 엄수, 김성서, 이의창 베난시오, 박성철 베드로, 노언익, 안순명 등과 함께 마포를 출발한다.
해주로 연평도로 가 중국배에 서한과 지도를 전달하고 오다 5월 1일 연평도에서 조기 39마리를 실었고 5월 3일에는 동산에 들러 소금을 구입 굴비를 만들고 건어를 만들 땔감을 사려고 장연 터진 목으로 돌아가다 중국 배 보조선을 타고 물을 길러 가면서 소강 경치에 반해 언덕에 올라 3일을 묵었다. 이곳에서 여러날을 지체하다 신분이 노출되어 6월 5일 순위도 등산진에서 잡혀 편지가 압수되고 해주감영으로 구금된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정체가 밝혀 지면서 9월 16일 군문 효수형을 당한다.
이와 달리 최양업 신부는 1821년 3월 1일 청양 다락골에서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이성례 마리아 사이에 장자로 태어났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1836년 그의 나이는 16살이었다. 당시 살던 곳은 수리산 뒤 뜸이다.
최양업의 어린 시절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15세 때인 1836년 당시 조선에서 선교하던 프랑스 신부 모방에 의해 이듬해인 1837년 6월 7일에 마카오에 도착하여 본격적으로 신부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기 시작하였다. 1838년 11월에는 최방제가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1839년 4월에는 중국에서 일어난 민란을 피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피신했다가 반년 후인 11월에 마카오로 되돌아온다. 1842년 세실 함장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의 조선 원정 시 김대건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하여 마카오를 떠났으며, 최양업은 김대건이 떠난 지 5개월 후에 귀국길에 올랐다. 이때부터 최양업은 조선에 입국할 때까지 한시도 안정이 없는 떠돌이와 같은 생활을 7년이 넘게 계속하였다. 최양업은 잠시 상해에 머문 후 같은 해 10월에 요동에 당도하였으며, 외몽고인 소팔가자로 가서 중단되었던 신학 공부를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1844년 12월경 최양업과 김대건은 삭발례와 부제품을 연달아 받을 수 있었다. 이때부터 그는 본국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한다.
1845년 1월 김대건이 의주를 통해 입국에 성공하자, 이듬해 1월에 최양업도 두만강을 건너 입국을 시도했다. 그러나 중국 경비병에 체포되어 입국에 실패하고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와야 했다.
같은해 12월 말 조선에서 온 밀사를 만나 입국을 꾀하기 위해 만주의 심양으로 갔으나, 바로 그해에 조선에서 있었던 대규모의 박해에 관한 소식만을 듣고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남겨두었다.
지금까지 나는 내 포교지 밖에서 방황하고 있으니 나도 답답하고, 듣는 신부님도 마음이 아프실 것입니다. 발길은 달리고 뛰고 있으나 얼굴은 무겁게 수그러집니다. 이는 나의 죄악과 빈곤과 허약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풍부한 자비심에 희망을 갖고 하느님의 섭리에 나 전체를 맡깁니다. 그리고 "너희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를 생각하지 말라. 하느님께서는 무엇을 말할지 일러주실 것이다."라고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말한다는 것은 비단 설교의 은총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의미하는 줄로 압니다. 그러므로 나의 빈약하고 연약함을 생각하면 두렵습니다만 주께 바라는 굳센 믿음으로 실망 하지 않겠습니다. 원컨대 저 십자가의 능력이 내게 힘을 주어,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 외에는 아무것도 배우려 하지 않기를 바랍니다.(심양에서, 1846.12.22, 르그레주아 신부께)
1846년 말, 다시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조선 국경 변문에 도착했으나, 그곳에서 그는 김대건 신부와 교우들이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조선의 국경 감시가 더욱 심해져서 해로를 통해 입국하기로 하고, 홍콩에 머물며 순교자 현석문이 쓰고 페레올 주교가 불어로 번역한 순교자 일기인 [기해일기]를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1847년에는 고군산도 쪽으로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배가 난파하여 실패하였고, 1849년에는 백령도 부근을 통하여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이때에도 실패하였다.
상해로 돌아온 최양업은 1849년 4월 15일에 사제서품을 받게 되는 큰 기쁨을 누리게 된다. 그의 나이 28세 였다. 그는 다시 요동으로 떠났으며 그해 12월 초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통해 입국할 수가 있었다. 그가 입국을
시도한지 실로 7년 반 만의 일이었다.
최양업은 1850년부터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는데, 당시 계속되는 박해를 피해 깊은 산골에 숨어사는 신자들을 찾아다닌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고국 땅에 들어온 그는 서울에서 하루를 머물고 충청도에 있는 페레올 주교를 만난 다음
여독이 풀리 지도 않은 채 다음날 전라도에서부터 사목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6개월 동안 5개도 5천리를 순회하는 가운데 어려운
시대상황 속에서 비참한 삶을 사는 신자들과 생사 고락을 같이 하였다.
건강이 악화된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대신하여 더 많은 공소를 돌보아야 했기에 피로와 궁핍을 감수하면서 교우촌을 돌았다.
순회를 하지 않을 때에는 절골(충북 배티의 한 교우촌)에서 동생들로부터 부모의 순교에 관한 증언자료와 여러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였다. 1853년 2월초까지 주교와 다블뤼 신부의 병세가 더욱 악화되어 최양업 신부는 그들을 간호해야 했고, 전국 각처에 있는
12,000여 명의 신자들에게 성사를 주어야 했으므로 본국 인이면서도 병들지 않고 신자들을 다 찾아다니기에는 말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최양업 신부는 1852년부터 1854년 사이의 사목활동에서 체포의 위기, 공소의 습격 등의 잦은 박해로 선교사들 중 가장 많은
고난을 겪었다. 한편 그는 교우촌을 방문하던 중 가짜 교우 때문에 한겨울 강추위와 능욕에 고통을 당하여 기진맥진한
상태로 한밤중에 공소를 떠나야 하는 수난을 당하면서도 주님의 사업을 위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기에 거리가 먼
지방과 중요하면서도 전교하기 힘든 지방의 성무 집행은 최양업 신부가 맡아 매년 7,000리가 넘는 거리를 걸어야 했다.
그의 관할지역은 5개 도에 두루 산재해 있었고 공소만도 100개가 넘었다. 수시로 일어나는 사적인 박해는 최 양업 신부의
전교여행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고, 동네에서 추방되고 고발되는 등 도처에서 중대한 위험을 겪어야 했다. 이같이 말할 수 없는
어려움 속에서도 많은 개종과 용감한 입교자들로 말미암아 위로와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길의 사나이'로 불릴 정도로
인생의 대부분을 객지에서 보내며 그 얼굴이 햇볕에 그을어 새까맣게 타서 갓끈자국만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전국 방방곡곡을
두루 다녔다.
최양업 신부는 12년간 온갖 고난과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그리스도를 증거하며 사목 한 덕분에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는 때인
1861년 6월 15일, 영남지방 전교를 마치고 주교에게 사목활동 상황을 보고하려고 상경하던 도중 경상도 문경에서 갑자기 쓰러져
40세의 아까운 나이로 사망하였다. 최양업 신부와 친하게 지낸 페롱 신부는 '최 신부의 복사가 내게 와서 최 신부의 사인(死因)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그가 사망한 것은 과로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작년의 소란으로 인해 그의 성사 집전이 아주 어려워졌고,
그래서 하루에 80 리 내지 100리를 걸어야 했다. 밤에는 고해성사를 주고 날이 새기 전에 떠나야 했다. 그래서 그는 한 달 동안 나흘
밤 밖에 잘 수 없었다.'고 하였다. 장례식은 베르뇌 주교의 집전으로 여러 선교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배론 신학교에서
장엄하게 거행되었고, 시신은 신학교 뒷산 기슭에 안장되었다.
이상은 한국 첫 사제, 두 번째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에 대한 신학생, 그리고 사제서품 후 사목활동,
순교와 선종에 대한 이야기이었다. 그럼 마카오 다시 돌아가 순례의 길을 걸어 보려고 한다.
작년 8월과 달리 금년은 남행이었다. 작년에는 두 사제( 김대건, 최양업)의 마카오 신학생 생활 이 후 만주에서의 신학생
생활과 삭발계와 부제서품, 북경에서의 사제서품과 조선으로의 입국을 위한 노력의 과정에 대하여 순례를 하였다면
금년은 마카오에서 신학생 자격으로의 삶에 대한 행적을 찾아 순례하는 것이 주 목적이다. 그리고 성모승천 대축일에 맞춰
베트남에 있는 성모님 발현성지 두 곳을 찾아 순례하는 것 또한 일정에 포함되어 있다. 이른 아침 비행기 탑승 후
예정시간에 맞춰 마카오 공항에 착륙하였다. 짐은 찾을 필요가 없었다. 다낭으로 바로 보내 버렸기 때문이다. 점심식사
후 마카오 일정 일부를 소화한 후 다시 다낭으로 떠나 성모님 발현 성지 두 곳을 순례하고 다시 마카오로 돌아와
나머지 일정을 소화할 예정이다. 가지 않는자는 그 곳을 볼 수 없고 걷지 않는 자는 앞으로 나갈 수 없다. 순례 역시
역사성이 존재하는 곳을 찾아가야 한다. 그리고 보는 것 만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성지 안에 녹아 있는 신앙 선조의 역사적
현실을 간접 체험하여 고스란히 순교자의 피와 땀이 나의 심신속에 부활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성지 순례의
거룩한 목적이다.
광동요리를 전문적으로 하는 식당에 들렀다. 우선 영보님 식사 자리를 챙긴후 다른 순례자들 식탁을 둘러 보고 나의 자리로 돌아와
점심을 챙겼다. 음식과 잠은 순례와 걸음 여행, 행보에 절대적 영향을 끼친다. 식사를 끝내고 마트로 가 생수를 직접 구매하였다.
체칠리아 자매님과 같이 들고 버스로 돌아 왔다. 자~ 이제부터 본격적인 순례의 시작이다. 버스를 이용하여 첫 순례지 성 바오로
성당이 있던 유적지를 찾았다.
마카오 전체가 잘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서 있는 석조건물 잔해, 그것은 성전이 아니라 소실된 성당의 잔해물이었다. 만고풍상이
깃든 역사적 유물이지, 성당으로서 기능을 지니고 있는 성전은 아니다. 성당의 완전체가 아니다 보니 소실된 성당 부분을 여러
상상으로 나머지 부분을 조합할 수 있었다. 목재 카시오를 짜 맞춘 후 그 위에 지붕재를 덮었을 것이고 양 벽면엔 개구부를 열어
창문을 달고 아름다운 스테인 그라스로 예수님의 일생을 그려 넣었겠지 ,그리고 창문 바로 위에 14처를 달아 놓고 남쪽 방향엔
제대를 만들었을 것이고 전면이 5단인 것으로 보아 성가대 석이나 파이프 오르간 설치하고 층계송에 필요한 계단도 설치하였을
것이다.종탑도 세워, 때마다 아름다운 천상의 시간을 빌려 은은한 종소리도 온 세상에 들려주었을 것이다.
은전(銀錢) 수십 가마를 사용하여 신축하였다는 증거는 석벽(石壁) 전면에 모여 있었다. 정교하고 미적인 감각이 뛰어난 석벽 부조
(浮彫)는 차라리 황토로 빗는 데라코타처럼 손 쉬운 작업물로 다가 왔다. 성령을 입은 석수쟁이의 손끝에 잡힌 정(釘)은 신이 들려
있었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벗어난 성스런 부조(浮彫)는 석벽을 타고 피어난 성화(聖花) 였다. 박해를 피해 마카오로 도망온
일본 석수쟁이는 박해자 막부에게 앙갚음이라도 하듯 하늘의 뜻이 담긴 이야기를 석화(石花)로 만들어 낸것이다. 우직한 중국인
신자들이 석벽을 쌓고 나면 일본 신자들은 정(釘) 과 망치로 부조를 돌표면에 일으켜 세운 것이다. 각자 예수를 꿈꾸며 만든
수도회, 예수회 신부들은 신앙적 기품으로 설계를 시작하여 평면을 그리고 입면을 다듬어 작업 인부들 손에 들려 주었다.
그 면면에 동서양의 일치의 꽃, 사랑과 자비의 꽃, 은총의 열매와 평화의 결실을 그려 넣었다. 돌위에 피어난 성화는 하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너희들 또한 그런 치세속에 행복하게 살아라 하는 음성이 가득한 부조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분명 성당 유적지에 불과하지만 보는이로 하여금 그 이상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하느님의 거룩함이 묻어나는 부조벽(浮彫壁)이었다.
제대가 있었던 이 자리, 성당 중앙 통로가 있었던 자리를 유추하며 성당 전체의 건물 형태를 짜 맞춰다. 그렇게 서서 사진을
찍고 다시 서서 의문을 갖는다. 왜? 여러 번 화재로 소실시켜 버리셨을까? 평화의 사도가 되어라 하였는데 국가권력과
신앙이 엉키면서 일탈이 생기기 시작하는 모습에 진노하셨던 모양이다. 그렇다면 진노의 핵심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 원인을 찾아 보려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우고 자리를 물러나려는 순간 형제님과 자매님들이 보였다. 얼른 텅 빈 석벽에
세우고 셔터를 눌렀다. 나의 생각을 공유하려면 이곳에 서서 성당 정문을 바라 보아야 한다. 사라진 성당의 실체의 환영을
생각하며 말이다. 잔득 흐린 하늘과 아랑곳 없이 순례객들은 시간이 오후로 갈수록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걷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은 서로 엉키기 시작하였다. 제대로 된 사진하나 찍을 수 없을 만큼 혼잡했다.
혼잡은 오히려 나를 부조(浮彫) 앞으로 끌어 당겼다. 나는 혼잡과 그 안에서 실종된 나를 밀어내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지만
당김이 강하게 밀려 왔다. 그것은 일종의 유혹이었으며 공유라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는 모르겠다. 수많은 것이 존재하는 곳에선
오히려 고독이 느껴진다고 했다. 그것은 자신만이 알고 느끼고 간직하고 싶은 병든 이기심의 영향으로 생기는 오만함일 것이다.
후덥지군한 바람이 작은 파문을 일으키며 스쳐 지나갔다. 잃버리고 있었던 권점생 선생의 시가 떠 올랐다.
사람들은 참 모른다.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것 모두
내거 라 고 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은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느님도
내거 라 고 하지 않으신다.
이세상의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의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 맹이 하나라도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그렇다. 하느님 조차 나의 것은 없다고 하셨는데 사람들을 자기 것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것들은 온 세상 모두의 것이라고
긍정하였을 때 비로서 하느님의 말씀이 온누리를 감싸고 평화의 기운이 넘칠 것이라 생각하며 성 바오로 성당 유적지를
떠날 준비를 하였다.
떠나기 앞서 바짝 다가 가 시선을 좌에서 우로 아래에서 위로 아주 천천히 살펴 보았다. 수차례 눈여겨 보면서 입체적 성경 말씀이
시선을 넘어 마음 안으로 가득 새겨졌다.
Camoes Grotto & Gardens , 白鴿巢公園
1497년 리수본에서 바스코다가마(Vasco da Gama)의 범선 3척이 출항한다. 포르투갈은 이 범선의 출항으로 대항해시대(Era dos Descobrimentos, Age of Discovery)의 장막을 열고 전세계를 돌아 다니며 새로운 땅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포루투갈 탐험가와 항해사와 선원들은 미지의 땅을 찾아 떠나면서 열정과 목숨을 건 모험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그들은 선박에 군인과 종교인들과 함께하였다. 기획 적인 의도에 의하여 낮 선 땅에 닺을 내리기도 하였지만 풍랑에 길을 잃어버리고 표착을 하여 우연히 만나는 나라도 있었다. 그렇게 그들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아시아 등에 포르투갈 흔적을 남겼다. 유럽의 다른 강대국에 비해 작은 나라였지만 열정과 모험심 하나로 부를 쌓아 나가면서 네덜란드 처럼 동인도회사를 만들어 국가의 부강을 이끌었다. 그런 곳중 하나가 바로 마카오였다. 중국당국과 협상에 의하여 조차하게 된 마카오는 포루투갈의 극동아시아 무역의 전지기지였다. 그리고 종교의 선교 전지기지도 된다. 수많은 수도회가 마카오로 몰려든다. 예수회 소속으로 마카오에 온 마테오 릿지는 마카오 신학교에 머물며 여러 궁리를 하다 북경으로 향한다. 18년간의 유랑끝에 도착한 북경 황제의 도움으로 토지를 받아 남당을 설립하고 천주교 신앙의 주춧를 놓는다. 그리고 한문으로 천주실의를 만들어 조선의 실학자들 손까지 옮겨 놓는다.
민족 시인이며 군인이었던 루이스 드 까몽이스는 포루투갈 혼이라는 애국서사시인으로 유명해 진다. 그러나 불같은 사랑이 그를 마카오로 몰아내고 만다. 연적을 물리치고 여인의 사랑을 독점하기 위하여 결투를 신청한 그는 연적을 죽이고 만다. 자의반 타의 반의 신세로 자신의 조국을 떠나 마카오로 온 그는 친구가 운영하는 동인도회사 바로 옆에 저택을 짓고 상주하며 사랑을 떠나야 했던 상심의 마음을 달래려고 정원을 가꾸기 시작한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인의 연적과 결투하여 그 사람을 살해하고 이곳으로 망명하였다는 이야기는 어느 곳에도 찾을 길이 없다. 구전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다.
(이와 같은 이야기는 마카오에서만 전해 지는 이야기일뿐이다. 포루투칼 국내 역사서에서는 루이스 드 까몽이스( Luís de Camões) 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498년 바스꾸 다 가마 (Vasco da Gama)의 인도항로 개척은 진정한 유럽의 경제혁명을 불러 일으켰다. 이로 인하여 16세기 중반, 포르투갈은 위대한 항해시대를 이끈 유럽의 가장 중요한 국가로 자리 잡게 된다. 동 마누엘 (D. Manuel, 1495-1521)의 통치기간 동안 리스본은 유럽과 아시아 무역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고 유럽 중심 국가들의 선진 문화와 사상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은 인도항로의 개척과 연 이은 극동으로의 해양개발과 아프리카, 아메리카대륙의 이국 문화를 수용함에 적극적이었던 포르투갈에 까몽이스 (Camões)라는 위대한 시인을 탄생하게 한다. 드라마틱한 삶과 해박한 지식, 풍부한 경험의 시인은 포르투갈의 르네상스를 꽃피우며 포르투갈 최고의 고전주의 시인이라는 영예를 부여 받았다. 그의 대표적 서사시인 우스 루지아다스(Os Lusíadas)는 작품성에 있어서도 르네상스시대 최고 걸작으로 손색이 없을 뿐 아니라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문화를 소개하는 자료 로서의 가치 또한 높게 평가받고 있다.
루이스 드 까몽이스 Luís de Camões 의 방황과 고통의 삶
그의 삶은 많은 논란 속에서도 근거자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아직까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몇 가지의 사실들은 병무기록부나 사면장, 연금지급서 등의 공식적 문서에 의해 확인되고 있지만 그 외의 것들은 주위 사람들의 기억과 작품을 통한 유추에 의존하고 있으므로 정확성을 기하기 어렵다.
1524년 (혹은 1525년) 리스본의 몰락한 하급귀족의 집안에서 출생한 까몽이스는 당시 포르투갈 최대의 대학이었던 꼬임브라
대학에서 예술과정을 수학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는 그의 작품에 언급된 다양한 분야에 걸친 해박한 지식과, 당시 그의
삼촌이 꼬임브라의 싼따 끄루스 (Santa Cruz) 수도원의 원장으로 있었으며, 이후에 발표된 그의 작품에도 꼬임브라에 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다혈질적이고 방탕한 생활 속에 젊은 시절 궁정의 귀족들과 교류하였고 동시에 리스본의 보헤미안들과
어울렸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그의 사적 서신에서 귀족들과 거리의 여인들 사이에 관련된 다툼에 휘말렸던 사건을 언급했던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싸 드 미란다와 연관된 학회의 주변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출신과
지위로 인하여 문학적 재능을 뒤로한 채 군인으로 모로코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오른쪽 눈을 잃게 된다.
이후 리스본으로 후송되어 궁정에서 근무하면서도 한쪽 눈을 잃은 사실은 그를 괴롭히게 된다. 일부의 여인들은 그를 “눈 없는
얼굴” (cara-sem-olhos)로 부르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문학적 재능으로 인하여 높은 신분의 많은 여인들로부터 사랑
받기도 하였고 그 중에는 동 마누엘의 공주였던 도나 마리아 (D. Maria)도 속해 있었다.
그러나 신분의 차이로 인하여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그는 더욱 깊은 시름과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을 가지게 되었다. 방황의
시간을 보냈던 그는 1550년, 권력의 주변에 있지 못했던 다른 하급 귀족들처럼 인도에서의 근무를 자원하였지만 꿈을 실현하지
못하였다그러나 2년 후 궁정의 관리를 칼로 찔러 상처를 입히게 됨으로 투옥되었으나 몇 달 후, 1553년 3월, 동 주앙 3세
(D. João III)로부터 사면장을 받게 된다. 자유를 얻은 시인은 삶의 탈출구로 인도 행을 결심한다. 그로부터 약 16년 동안 인도를
비롯한 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니는 힘겨운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1553년 9월, 약 6개월의 항해를 통해 인도의 고아(Goa)에 도착한 시인은 그곳에 오래 머물지 못하고 아시아의 여러 지역에서
복무하게 된다. 말라바르, 홍해, 말라까 그리고 자바, 보르네오, 티모르 등의 말레이시아의 여러 섬들을 전전하였고 마카오에서도
근무하였다고 전해진다. 중국인 애인과 항해도중 메콩 강의 하구에서 배가 난파되어 우스 루지아다스의 원본만을 가까스로 건진
채 여인을 구하지 못했다는 일화는 빈번히 인용되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사망자와 실종자를 파악하는 일을 맡았던 시인은 다양한 이국의 문화와 자연을 접하게 되었으며 힘겹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다. 유럽 인들에게 당시 아시아의 문화는 막연한 상상과 신비에 가득한 세계였으나 까몽이스에 의해 보다 선명하고 생생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1567년, 오랜 해외생활과 경제적 어려움에 지친 시인에게 모쌈비끄 (Moçambique)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한 친구가 일자리와 여행경비를 약속하게 되자 귀국을 생각하게 된다. 그로부터 2년 후 마침내 우스 루지아다스의 원본과 그동안의 작품을 챙겨 모쌈비끄에 도착하지만 약 1년 동안 거의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게 되고 이때 서정시집 포르투갈인의 시문집 (O Parnaso Lusitano)을 도난 당하게 된다. 그러나 친구인 디오구 드 꼬우뚜 (Diogo de Couto)를 우연한 기회에 만나게 되어 그의 도움으로 리스본으로 향하는 배에 몸을 싣게 되었다. 시인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감격적인 상황을 바스꾸 다 가마의 귀환으로 대변하고 있다.
리스본으로 돌아온 시인은 오랜 항해로 인한 지친 몸을 추스르며 생의 마지막 열정을 우스 루지아다스의 출판에 불사른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에서도 마침내 1572년, 세상의 빛을 보게된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서사시 우스 루지아다스는 동 세바스띠앙
(D. Sebastião)에게 헌사되고 그에 대한 대가로 15,000 헤이스 (réis)의 연금을 지급 받게 되었다. 그러나 생활을 유지하기엔 너무나
부족한 액수였기에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사망 시기 또한 정확하지 않아 연금 지급이
중단된 1580년 6월 10일을 사망일로 삼고 있으며 현재 이 날은 ‘포르투갈의 날’ (O Dia de Portugal)로 지정되어있다.
시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주검이 오늘날 포르투갈 최대 규모의 제로니무스 성당 (O Mosteiro dos Jerónimos)에 바스꾸 다 가마의
석관과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아무튼 포루투갈의 가난한 시인 때문에 멀리 타향 이곳에 도착한 세 소년을 신학교와 성 안토니오 성당을 그리고 부근에 있는
각 성전을 오고 가면서 들렀을 도시 안의 숲, 루이스 드 까몽이스이 만들었다는 바로 이 정원, 세 소년들에겐 아름다운 휴식처
역활을 해 주었을 것이다. 힘들고 외로운 환경에서 흙을 만지고 초목을 건사하며 보내는 시간처럼 유익한 것은 없다. 무료할
시간없이 손과 발품을 끊임없이 사용하면서 풀고 쌓아 놓는 노동은 아름다운 모습으로 귀결되어 자신에게로 돌아 오는 정직함이
너무나 감동을 주는 것은 사실이다. 시인은 시인적인 발상으로 이 정원을 만들고 가꿨지만 세 소년은 이 정원에서 걷고 생각하고
사색하며 하느님의 모습을 닮으려 애를 썼을 것이다. 만약 세 소년중 어느 누군가 일기라도 남겼다면 이곳 생활에 대하여
자세하게 알 수 있겠지만 그런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추론으로 생각해야 하니 참 안타깝다.
이 정원 바로 앞에 있었던 파리 외방전교회 조선 신학교, 이곳으로 모방신부에 의하여 선택된 조선의 세 소년은 유학을 온다.
그 소년들이 마카오에 오기 까지의 여정은 험난했다.
세 소년의 마카오를 향한 여정
1836. 12. 02. - 모방신부에게 서약한 후 유방제 파치피코 산부( 중국성명 여항덕)와 정하상 바오로, 조신철 가롤로,
이광렬 요한과 함께 의주로 출발
1836. 12. 28. - 의주거쳐 중국 요동 변문에 도착하여 샤스탕 신부와 만남
1836. 12. 29. - 1837. 06. 06일까지
중국 산시엉 출신 안내자들을 따라 내 몽고 마가자의 동산 천주교당, 하북성 서만자, 산서성 교구청
태원을 경유하여 마카오에 도착한다. 산시성 교구청 태원 이후의 여정은 확인되지 않었음,
비행기를 타면 고작 4시간 3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마카오, 세 소년은 걸어서 약 만리가 되는 길을 걸어서 이곳에 왔던 것이다.
상상만 하여도 끔직한 일이다. 걸어서 하늘까지란 말을 되뇌이며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동상 앞에 섰다. 그리고 세 소년을
생각하며 짧은 기도를 드렸다. 믿음! 지금 우리들이 지니고 살고 있는 이 믿음은 , 우리를 이곳으로 불러들인 믿음은 결국 이 세
소년의 삶의 역사를 딛고 서 있게 된 것이라 하여도 과한 것이 아니다. 짧은 생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짧은 사목의 행적을
남긴 안드레아,이 당시 생긴 건각으로 조선의 5도를 걸어 다니며 십여년의 땀의 사목의 행적을 남긴 토마스를 생각하며 성 안토니오
성당으로 걸음을 옮겼다.
성 안토니오 성당, 친근하게 다가 온다. 아마 그것은 세 소년과 인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에 사는 한국인 천주교 신자들, 그들은
이곳에서 신학공부를 하다 만주 소팔가자로 가 부제품을 받고 이어서 북경으로 가 사제품을 받은 후 조선으로 입국하여 사목활동을
하다 순교한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를 기억하고 이 성당에 목각을 만들어 기증하여 모셔 놓았다. 지금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과 관련된 것들만 있지만 나중에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도 성인 반열에 오르시면 신부님의 모습도 만날 수 있을 것
이다.
우선 입당 후 미사를 봉헌하였다. 단체 사진을 찍으면서 느낀 것은 순례단 각자, 감회가 어려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인연이란 사실 때문일 것이다. 조선의 어린 소년 셋중 두 소년은 사제가 되어 고난의 세월 안에서 자신들의 역할에 충실하다
순교의 길을 걷게 된다. 지금은 역사적 행적만으로 우리들 마음에 살아 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부활의 의미가 강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교회의 역사안에서 강렬한 힘으로 이끌어 주고 있는 두 사제, 그들이 기도하고 묵상하였을 이곳
에서의 미사봉헌과 묵상과 기도,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인연은 참 소중하다. 어떤 연유가 맺어준 인연이든 맺음을 통하여 소통은
분주하게 오고 가며 마음의 그릇 안에 이거 저것 쌓아 놓는다. 기쁨도 있지만 때로는 어렵고 합당하지 못한 일도 있는 것이 인연이
만들어 놓는 일중에 하나다. 유익함은 항상 필요불급한 일이지만 무익하고 성가신 일도 있는 것이 세상만사의 이치다. 유익한 일은
성가시게 하는 일이 없으니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효용있게 겸손한 마음으로 사용하면 그만이지만 불편한 것들은 하루속히 치우고
싶어도 내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서 댓가를 치러야 한다. 이런 것을 마음 고생이라 하는 것이다. 마음 안에
상처가 쌓인 만큼 후회가 들면서 그 일에 대하여 반면교사로 삼아 반복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인연은 삶의 동력도 되지만 때론
거추장스럽고 사람을 힘들게 하는 속성이 있지만 어떻게 관리하고 사느냐에 따라 인연의 형편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성 안토니오 성당, 세 소년과의 인연 그리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이 주보 성인이신 관계로 우리 순례단에게 여러모로 기쁨을
주는 성당이다. 요즈음은 이곳엔 한국인 신부님과 수녀님들이 파견되시어 사목활동이 활발한 곳이다. 우리 순레단과는 각별한
또하나의 인연이 있어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적으려 한다. 안토니오 성인께서도 프란치스칸이시다.
성 안토니오 성인은 포루투칼 리스본 출신이다. 출신성분에 대하여 엇갈리는 부분이 있어 이곳에서는 생략한다. 부유한 귀족
출신인 것 만은 사실이다. 본명은 페르난도 마르칭수이다. 성인께서는 지역 교구 학교에 입학한 후 15세 무렵 리스본 변두리에
있는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상비센테드포라 수도원의 수도 참사회원으로 입회 한다. 1212년 가족들과 친구들의 잦은 방문으로
정신이 산만해진 성인은 수도원 장상을 만나 코임브라에 있는 아우구스티노회 모원 산타크로즈 대수도원으로 옮겨 줄 것을
간청하여 승락을 받는다. 페르난도는 다시 리스본으로 돌아와 신학과 라틴어 공부를 다시 하기 시작 한다.
이후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대수도원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접대하는 책임자로 발령을 받는다. 코임브라에 머물고 있을 당시 마침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이 코임브라 외곽 작은 은둔소에 머물고 있었다. 그들의 소박한 복음적 삶에 매료된 페르난도는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 당시 모르코로 포교활동을 떠났던 프란치스코 선교사 5명이 참수를 당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는 이 소식을 듣고 순교자의 몸값을 지불하고 시신을 안전하게 모셔와 산타크로즈 대수도원에 안장하도록 지시한다.
프란치스코회 선교사들의 순교에 감명을 받은 페르난도는 수도원 장상에게 허락을 받아 아우구스티노 참사회원의 자격을
버리고 새롭게 프란치스코회 입회하여 수사가 된다. 사막의 교부들 가운데 한 사람이자 모든 수도자의 아버지라 불리는 대
안토니오의 이름 따 수도명을 안토니오로 받는다. 안토니오는 수도 서원을 받은 후 모르코로 파견된다. 모르코에 도착하여
심한 병에 시달린 성인은 다시 포루투갈로 귀국하는 도중, 배가 항로를 이탈하여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당도한다. 안토니오는
다시 항해를 하여 토스카나 도착하여 수도원에 들어 가지만 병약해진 성인은 수도원을 나와 로마냐 포를리 인근에 있는 산파올로라
시골 은둔소로 배속된다. 그곳에서 독방에 은거하며 기도와 공부를 계속한다.
1222년 어느날, 포를리에서 프란치스코회 사제 서품식이 있는 날 도미니코 수사들도 참석하였다. 미사중 강론을 누가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생겼다. 프란치스코회 측에서는 설교회로 유명한 도미니코회 측에서 강론을 하리라고 믿었지만 도미니코측은 그 반대
생각을 하고 아무것도 준비하지 않았다. 난처해진 은수원장은 안토니오 형제에게 부탁한다. 처음에는 고사하지만 결국 강론대에
서게 된다. 안토니오의 강론은 듣는 사람 모두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아우구스티노에서 수년간 익힌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겸손이 묻어나는 강론은 서품식에 참석한 모두를 탄복하게 만들었다.
강론 이후 안토니오에 대한 이야기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결국에는 사부님 귀에까지 들어갔다. 사부님은 신학공부에 열중하는
것을 경계하였다. 너무 신학공부에 빠지면 청빈하게 살겠다는 약속이 잊혀진다고 강하게 부정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안토니오를
만난 사부님은 그런 우려를 씻어내고 말았다. 오히려 사제 서품을 받았거나 준비중인 수사들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1224년 작은
형제회 회원들의 교육을 안토니오 수사에게 위임하였다.
오늘날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을 때 안토니오 성인에게 청하는 유래가 볼로냐에서 있었던 일이 계기가 된 것이다.
안토니오는 학생들 수업을 위하여 항상 교육용 원고와 시편 집 한 권을 휴대하였다. 어느날 수련자가 허락도 없이 시편집을 갖고
사라졌다. 당시에는 인쇄술이 없어 모든 성경과 관련된 서적은 전부 육필이었다. 정말 귀중한 책이었다. 시편집이 사라진줄 알고
안토니오는 발견할 수 있게 해 주거나 되돌아 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에 매달렸다. 기도 후 수련자는 회개를 한 후 시편집을
안토니오에게 돌려 주고 수도회 복귀하게 된다. 당시 도난 당했던 시편집은 보로냐 프란치스코 수도원에 보관되어 있다.
역사학자 소프로니우스 클라젠은 안토니오의 설교 및 강론은 기독교계의 자랑이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의 강론은 주로
성경의 비유 및 상징의 의미를 알기 쉽게 풀이해주는 것이었다. 1226년 프랑스 아를에 소집된 수도회 총회에 참석한 다음
이어서 프로방스 지역에서 설교를 한 그는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프란치스코회 이탈리아 북부 관구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자신이 거처할 도시로 파도바를 선택하였다. 1228년 안토니오는 프란치스코회 대표 자격으로 교황 그레고리오 9세를 알현하였다.
교황궁에서 한 그의 설교는 성경의 보물 창고라는 칭송을 받았으며, 강론집 저술을 요청받았다. 그리하여 완성된 것이 바로
《축일 강론》(Sermones in Festivitates)이다. 그레고리오 9세는 안토니오를 가리켜 ‘신약의 방주’(Doctor Arca testamenti)
라고 칭찬하였다 안토니오는 맥각중독증에 걸려 1231년에 두 명의 수사와 함께 캄포삼피에로의 숲으로 요양을 갔다.
그곳에서 그는 호두나무 아래에 자신을 위해 세워진 가옥에 거주하였다. 1231년 6월 13일 파도바로 돌아온 안토니오는 글라라회
수녀원에서 향년 35세의 나이에 선종하였다.
본인의 유언에 따라 12세기 후반에 본인이 설립한 수도원 근처 작은 성당 산타 마리아 마테르 도미니 성당에 유해가 안치되었다.
성인에 대한 유명세가 날로 커지자 1232년부터 거대한 성당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1301년 완공된다. 당초 작은 성당은 포르치운
쿨라처럼 대성당 내 검은 성모 경당(Cappeella della madonna Mora)으로 자리 잡는다. 지금은 안토니오 이름을 따서
파도파의 성 안토니오 대성당이라 부른다. 성 안토니오 선종과 관련하여 많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선종 즉시 길거리의 아이들이
울음을 터트리고 성당의 종소리가 일제히 울려 퍼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선종 후 유해중 혀만 생생하게 보존되어 온다는
사실이 놀라움을 주고 있다. 대성당 내부 경당에 안치된 후 30년이 지난 후 시신이 발굴되었는데 다른 부위는 부폐가 되었지만
혀만 생생하게 보존되어 있어 성해함에 넣어 공경예절을 위해 전시되어 있다. 생전에 성 안토니오의 강론이 얼마나 존경
받았는지에 대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안토니오는 선종한 지 1년만인 1232년 5월 30일 이탈리아 스폴레토에서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의 명성은 포르투갈에까지 널리 퍼졌으며, 오늘날 파도바는 물론 포르투갈의 여러 지역 및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나라들에서는 안토니오를 수호성인으로 지정하여 공경하고 있다. 안토니오는 특히 잃어버린 것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
로 유명하다. 유럽에서 가장 존경 받는 성인이다.
이와 같은 역사가 있는 성인이데 어찌 감회가 없겠는가! 우리 순례단들에겐 필연이 바로 성 안토니오 성당이다.
마카오에서 첫 미사를 봉헌한 성 안토니오 성당. 무엇으로도 표현할 수 없는 벅찬 감정이 끓어 올랐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차에 올랐다. 차에 오른 후에도 세 소년과 성 안토니오와 그리고 사무실에서 만난 한국인 신부님과 회계처리 절차에
대하여 안내해 주신 수녀님에 대한 모습을 쉽게 지울 수 없었다. 이곳으로 파견되어 오신지 3년차가 되셨다는 수녀님께서 좋은 은총
의 순례의 시간되라고 격려도 해주셨다.
성 도미니코 성당을 찾아 왔다. 약 3,700m의 세나도 광장 길 중 성바오로 성당 유적지로 가는 길 좌측에 있다. 노란빛 성당 외벽이
눈길을 끈다. 입당하기 전 가만히 숨울 고르고 있었다. 우리의 사부와 친 형제처럼 지냈던 성인 도미니코, 두 사람의 인연을 잠시
정리하느냐 숨을 고른 것이다.
펠릭스 구즈만과 복녀 요안나 아자의 아들인 도미니꼬는 스페인의 칼라루에가에서 태어났고,
1184년-94년 사이에는 빨렌시아의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으며, 아마도 학업을 계속하는 중에 그곳에서 서품된듯 하다.
그는 1199년에 오스마에서 카논으로 임명되었다.또 그는 1203년에 오스마의 주교 디에고데 아베제도를 수행하여
랑꿰독으로 가서 알비 이단을 상대로 설교하였고, 씨토회의 개혁을 도왔다.
1206년에 그는 알비파 지역인 푸루일레에서 여자 수도회를 창설하였고, 수많은 수도자들에게 강론하였다.
1208년에 교황 대사 베드로 까스텔난이 알비파에 의하여 피살되었을 때,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그들을 상대할 십자군을
조직하고, 그 대장으로 몽포르의 시몬 4세 백작을 임명하였다. 이때의 전투는 7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도미니꼬는 이 군대를 따라다니며 이단자들에게 설교하였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하였다. 1214년, 시몬 4세가 그에게
까세네일의 성을 주었는데, 이때 그는 여섯 명의 동료들과 함께 알비파의 회개를 위하여 활동할 수도회를 세웠다.
그리고 이 수도회는 그 다음 해에 뚤루즈의 주교로부터 교회법적으로 승인 받았다. 그러나 1215년의 라떼란 제 4차
공의회에서 자신의 설교회가 승인받는데는실패했지만, 다음 해에 호노리오 3세로부터 승인을 받고, 설교회 즉 도미니꼬회가
창설된 것이다.
도미니코 수도회
도미니코 수도회 또는 도미니코회 (한자:道明會)라고 부릅니다. 사명은 설교함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설교자들
의 수도회 (설교자회, 라틴어: ORDO FRATRUM PRAEDICATORUM [O.P.] )라고도 합니다.
본 수도회의 모토는 회원 성 토마스 아퀴나스께서 요약하신 대로 "진리를 관상하라 그리고 전한다"
(contemplari et contemplata aliis tradere)입니다. 밤낮으로 하느님의 계시된 진리를 공부와 기도함으로서
알 게 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설교와 가르침으로서 전하는 뜻입니다.
설교와 관련된 수도회가 세운 마가오 도미니코 성당,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 세웁니다. 설교를 하기 위해 최적의 장소가 바로
세나도 광장이었다.
4차 라떼란 공의회 중에 로마에서 성 프란치스코와 만나 두 탁발 수도회의 설립자들은 막역한 친구가 되었다.
또한 도미니코 성인의 요청으로 성 프란치스코는 그에게 작은형제회의 거친 허리띠를 착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다.
전설에 따르면, 도미니코는
하느님의 분노로 위협받는 죄많은 세상이 성모님의 중재로 구원받는 광경을 보았다고 한다.
그때 성모님께서 당신의 아들로 두 사람을 지적했는데 한 사람은 도미니코 자신이고, 다른 한 사람은 낯선 사람이었다.
다음날 교회에서 도미니코는 꿈속의 그 낯선 남자가 누더기를 입은 거지 차림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그는 거지에게로 가서 그를 껴안고 환영하면서 "당신은 나의 친구이며, 나와 동행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결합한다면 세상의 그 어떤 힘도 우리를 쓰러뜨릴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거지는 바로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였다.
작은형제회는 1658 년 총회에서 사부님 축일처럼
도미니코 축일도 대축일로 성대하게 기념할 것을 성청에 청원하였다.
1688 년 총회에서 성 도미니코를 작은형제들도 "사부(pater)"라고 부를 수 있다고 결정하였다.
이러한 오랜 전통에 따라 오늘날도 세계 곳곳에서 두 수도회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로사리오에 대한 이야기는 전통적으로 성 도미니꼬가 성모님으로부터 로사리오를 받았다고 말한다.
남프랑스 전설에 따르면 성 도미니꼬는 알비파와 카타리파의 이단자들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복음을 열정적으로 선포 할 때,
"로사리오에 대한 신심을 퍼지게 하라. 그 (신심) 행위로 많은 죄인들이 회개할 것이다"라고 말하는 성모 마리아의 음성을 들었다고
한다. 도미니꼬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깊은 신심을 가지고 계속 기도하고 형제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가르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도미니꼬회원들은 로사리오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 15세기에 루페의 알라노와 야고보 슈프렝어 신부가
북유럽에 이 기도를 전하며 정립시켰고, 도미니꼬 회원인성 비오 5세 교황은 이 기도를 전세계에 전파하였다. 오늘도
도미니꼬회의 형제들은 날마다 묵주 기도를 바친다.
숨어 있는 이런 저런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되새김하며 성당을 천천히 둘러 보았다. 강물처럼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통해
역사는 만들어 진다. 성당 곳곳에 성 도미니코 의도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을 경험하며 성당에서 물러 나왔다. 마카오에서
순례는 성모 발현지를 순례한 후 되돌아와 다시 시작할 것이다.( 계속)
첫댓글 역사에 갇힌 세 소년의 발자취를 따라서~
상세하게 올린글 잘 읽고 갑니다~
감명입니다~
슬픔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