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덕계곡에 논을 만들려고 독한 소주를 부어 바위에 불을 붙여 돌을 깨고 깎아내어 물길을 낸 수로가 있다.”
십여 년 전 한학자 오문복 선생께서 들려준 화순리 수로에 관한 이야기이다. ‘논밭에 댈 물길을 만들려고 바위를 깎아내?’ 논조차 구경하기 힘든 제주에서, 그것도 변변한 연장조차 없던 170여 년 전에 바위를 깎아 만들었다는 수로(水路)에 관한 전설은 신비와 호기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거듭 다음을 기약하며, 말 그대로 화순리 수로는 나에게 전설로 남아있었다. 오늘, 그날의 전설을 만나러 떠난다. 화산섬의 척박한 자연을 개척해 냈던 옛 제주선인의 일면이 생생한 유물로 남아있는, 안덕면 화순리 안덕계곡 하류에 있는 속칭 ‘도채비빌레’의 수로(水路)를 찾아.
전 재산을 바쳐 논을 개척한 김광종
화순리 마을 동쪽 끝, 일주도로에서 화력발전소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약 3백m 정도를 내려가다 좌측으로 처음 보이는 좁은 시멘트 농로가 수로를 찾아가는 길이다. 계곡으로 내려가는 초입엔 선홍빛 동백이 피를 토하듯 벌려있고 드문드문 벚꽃망울이 하나둘 향기로운 분홍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 사이로 졸졸졸 흐르는 시냇물소리가 대부분 건천인 여느 곳의 ‘내창’과는 사뭇 다른 풍경임을 암시한다. 덤불숲 사이 좁은 길을 타고 잠깐 몇 구비를 돌면 위태롭게 움푹 패인 구덩이가 나타난다. 그 옆 둔덕에 순한문과 국한문으로 새겨진 김광종의 영세불망비 2기가 얼마만큼의 거리를 두고 서있다. 수로를 만든 주인공 김광종의 공을 기려 세운 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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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穿山引水 漢西開始 多費己財 以裕後世 食我香稻 頼公德基 功擬召父 歲祈田祖’
‘산을 뚫고 물을 끌어 한서(漢西 ; 한라산 서쪽) 지방에 논을 개척하였으며 이에 필요한 많은 비용을 오직 자신의 재산을 바쳐 후세 사람들을 유족하게 하였다. 이제 우리도 향그러운 쌀밥을 먹고 있으니 이게 모두 김광종 공(公)의 덕을 입은 것이다. 그 공로가 소부(召父:중국 한(漢)나라의 태수(太守) 소신신(召信臣))의 선정(善政)과 비길 만하므로 이에 전조(田祖)로 모셔 해마다 기도드린다.’
1938년 증손 · 현손 · 화순리답회(和順里畓會)와 1968년 화순답회원과 6대손 김창진(金昌辰 ; 전 제주시장)이 각각 세운 ‘김해 김광종 영세불망비’의 전문이다.
불망비 아래로 물소리를 더듬어 따라 내려가니 시멘트로 만든 수로가 절벽 가장자리를 따라 계곡 위쪽으로 뻗어 있었다. ‘1800년대 초반에 시멘트라?’ 바위 위에 깊게 패인 홈으로 길게 난 수로를 연상했었는데 시멘트 수로는 의외였다. 하지만 오문복 선생의 답사 당시의 증언 등을 통해 지금의 수로가 일제강점기 때 원래의 수로를 시멘트로 개수(改修)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원래의 수로는 변변한 연장도 없이 바위산의 ‘옆구리’를 쪼아 가면서 만든 수로였다. “소주를 독하게 만들어 바위에 붓고 불을 붙이면 돌이 약해져서 일하기가 좀 쉽지. 당시 그 노인이 길 건너편 밭을 가리키며 ‘술막(소주를 만들었던 임시 거처)이 있던 밭’이라고 하더라.” 오문복 선생이 전해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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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맑은 물을 그득 채운 수로는 산굽이를 따라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다. 물길을 거슬러 오르다 한 곳에 멈춰 수로를 측정해보았다. 폭은 약 72cm, 깊이는 약 55cm. 비문에는 이러한 수로의 연장이 총 670m임을 밝혀놓고 있다.
대단한 역사(役事)였다. 1832년(순조 32) 3월에 착공하여 1841년(헌종 7) 9월에 완공하였다 하니, 그 열정과 집념이 보통사람으로서는 감히 흉내도 못 낼 일이다.
민영 300동이 물에 실려 감져!
다시 수로를 따라 올라갔다. 불망비가 세워진 곳에서 수로를 따라 천천히 20분 정도를 걸었을까, 물을 막아 가둔 보(堡)가 보인다. 속칭 ‘보막은소’라 불리는 이곳이 수로의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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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을 막아 가둔 보(堡)
- “그 보는 왜정시대 때 원래의 것을 시멘트로 고쳐 만든 것이고 처음에는 맹탱이(가마니)에 흙을 담아다 만들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어느 날 큰 비가 와서 맹탱이가 물에 쓸려가자 그 어른(김광종)이 “아이고, 나 민영(무명) 300동이가 물에 실려 가부럼져!’했다는 말을 화순리의 지(池)씨 노인에게 들었지.” 오문복 선생이 들려 준 말이다.
처음의 보를 만들 때 일꾼의 일당을 무명으로 계산해서 치렀는데 보만을 완성하는 데 300동의 무명이 들었다는 말이다. 당시 쓸려나간 맹탱이를 대신한 보의 모습은 지금과는 분명히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돌과 흙과 짚으로 쌓아올린 보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어쩌면 소라 껍데기 등을 이용한 석회로 마감되었는지도 모른다. 당시 재력 있는 분네들의 장사(葬事)에 ‘회다림’을 통해 관에 석회칠을 한 것처럼. 아무튼 지금의 보는 일제강점기에 시멘트가 들어오면서 바뀐 것이다. 수로 또한 한쪽 벽이 어른이 밟고 서있을 수 있을 정도의 두꺼운 시멘트벽으로 고쳐 만들어 진 것도 이때의 일이다.
그래도 수로의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는 곳은 없을까? 김광종이 처음 물길을 만들었을 때의 흔적을 찾아보았다. 있! 었! 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모습으로!
170여 년 전 그대로, 수로역사(役事)의 비밀
불망비 바로 아래, 언뜻 보면 위의 언덕에서 흙이 무너져 수로를 덮어버린 것 같은 그곳. 답사꾼들이 가서도 쉬이 놓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170여 년 전 그때의 손길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수로역사(水路役事)의 비밀이 그 아래 숨어있었다.
▲ 산을 파낸 후 메워놓은 흔적 불망비가 세워진 동산 계곡 쪽은 독립된 바위들이 울뚝불뚝 솟아있어 산세가 다른 곳과는 다르다. 산세로 보자면 차라리 이곳에서 보까지가 평이해서 바위를 쪼아 홈을 내기만 하면 되는 듯 보였다. 난코스 중의 난코스, 그래서 아예 산을 뚫어버렸다! 정확히는, 비탈진 언덕 위에서부터 약 10m 아래로 산을 파낸 후 물길을 잇고 그 위에 큼직한 돌들을 차곡차곡 쌓아올리고 다시 흙으로 메워 놓았다. 입이 떡 벌어진다. 바위에 물길을 내는 일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산을 통째로 파내어버릴 생각을 하게 된 걸까? 왜 하필 불망비가 수로의 출발점인 보가 아닌, 사람의 왕래가 잦은 농로가 아닌 이곳에 세워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 동산만 지나면 수로는 흙을 수평에 맞춰 파내기만 하면 되는 ‘누워서 식은 죽 먹기’식 공사였던 것이다.
6월이면 어김없이 자라는 벼줄기
화순리에는 이미 1696년경에 퍼물(泥水)를 이용한 2천여 평의 천수답이 있었다. “김광종은 원래 저지리 사람이다. 그 어른이 육지에 말을 진상하러 갔다가 논농사 하는 것을 보고 왔는데 화순에 일이 있어 왔다가 이곳을 보고 ‘논밭을 만들면 좋겠구나’. 하고 전 재산을 들여서 공사를 했다고 하더라.” 결국 김광종은 당시 이곳에 있던 천수답과 광활한 5만여 평의 들녘, 그리고 안덕계곡의 풍부한 수량을 보고 육지에서의 견문을 토대로 이곳에 수로를 개척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실상 눈으로 보면 주변의 뛰어난 경관과 함께 탄성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그곳엔, 하얀 쌀밥 한 번 배불리 먹고 살아보자던 옛 선인들의 소박하면서도 간절한 소망이 흐르는 물길 굽이굽이마다 배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 물굽이는 17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세월과 함께 흐르고 흘러 6월이면 어김없이 푸릇한 벼줄기를 길러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