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天)은 무당,
방(方)은 목수,
지(地)는 지관,
축(丑)은 소를 잡는 백정,
마(馬)는 말을 다루는 백정,
골(骨)은 뼈를 다루는 백정,
피(皮)는 가죽을 다루는 백정이라는 내용의 속설이 있다고 한다.[출처 필요][2]
그러나 이 속설은 역사서나 문헌에 기록이 없어 어디서 유래되었는지 알 수 없으며
이 설에 대해 뒷받침 할 수 있는 근거 자료도 없다.
전국 약 3만여권의 족보를 소장하고 있는 부천족보전문도서관의 김원준 관장은
"천민은 기본적으로 성씨에 대한 기록이 없다"며 "
단 민란 등 중죄를 일으킨 이에게 동물을 뜻하는 글자를 성씨로 부여하는 일은 있었지만
후손들이 죄인임을 뜻하는 그 성씨를 잇지 않고 다른 성씨로 바꾸기 때문에
대대로 이어지는 일은 없다."고 하였다.[3]
김진우 한국성씨연구소장은 이 속설에 대해
"일부 성씨가 그 집단의 종원 수가 적다고 하여 천한 성씨라고 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는 전혀 근거가 없는 악의적 통설이다.
18세기 이후 잘못된 족보가 성행하면서
상대적으로 인구가 적은 성씨를 마치 천한 성씨인 것처럼 퍼뜨린 것이다."라고 하였다.[4]
역사학자 이덕일 박사는 "천방지축마골피는 천계가 아니다.
이는 잘못된 상식이다.
천(千)씨, 방(房)씨, 방(方)씨, 지(池)씨 등은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이며,
천계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러한 통설은 호사가들이 악의적으로 만든 내용이 아무런 검증 없이
무차별적으로 사용됨으로써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 경우이다."라고 하였다.[5]
실제 성씨[편집]
축씨와 골씨는 1985년에 실시한 성씨 조사에서 단 한명도 없어
존재하지 않는 성씨인 것으로 나타났다.
실존하지 않는 축씨를 제외한 나머지 성씨에 대한 개요는 다음과 같다.
천씨는 일천 천(千)을 사용하는 영양 천씨와
하늘 천(天)을 사용하는 성씨가 있다.
『영양천씨매헌공가승보(潁陽千氏梅軒公家乘譜)』에 의하면
시조는 명나라 홍무(洪武) 연간에 도총장(都總將), 판도승상(版圖丞相)을 역임한 천암(千巖)이다.
천만리가 명나라 조병영량사 겸 총독장(調兵領糧使兼摠督將)으로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조선에 들어와 귀화하여 한국 천씨가 비롯되었다.[6]
천(天)씨는 연안, 우봉, 충주 등 6개의 본관이 있으며
2000년 통계청 조사에서 8,416명으로 조사되었다.
역사 인물로 조선 정조 4년 생원시에 합격한 천명익(天命翊)이 있다.
방씨는 대표적으로 모 방(方)을 사용하는 온양 방씨와
방 방(房)을 사용하는 남양 방씨가 있다.
방(方)씨는 중국 하남성 낙양현에서 계출된 성씨이다.
중국 염제(炎帝) 신농씨(神農氏)의 10세손인 유망황제(楡罔皇帝)가
장남인 뢰(雷)에게 사패지(賜牌地)를 주어 하남성(河南省) 방산(方山) 지방에 봉하였고,
지명을 따서 방씨로 득성하였다.
방뢰(方雷)의 134세손 방지(方智)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669년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로 신라에 동래하여 온양 방씨의 시조가 되었다.
6세손 방운(方雲)이 고려 태조를 도와 중무장군(中武將軍)과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좌승지(左承旨), 지성사(知省事) 등을 역임한 후 광종 때 좌복야(左僕射)에 올랐으며,
993년(고려 성종 12년)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졌다.
역사 인물로는 방우선, 방순(方恂), 방강, 방유령, 방덕룡 등이 있으며,
이순신 장군의 장인이 보성군수 방진(方震)이다.
방(房)씨는 당 태종 때 재상인 방현령의 둘째 아들 방준(房俊)이
당나라 8학사 중 한 사람으로 고구려에 들어와 당성(唐城)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의 후손으로 고려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에 오른 방계홍(房季弘)을
남양 방씨의 1세조로 한다.
지씨는 대표적으로 못 지(池)를 사용하는 충주 지씨와
슬기 지(智)를 사용하는 봉주 지씨가 있다.
충주 지씨(池)의 시조 지경(池鏡)은 중국 송나라 태학사로 고려 광종(光宗) 때 사신으로
고려에 들어와 귀화하여 벼슬이 금자광록대부태보평장사에 이르렀다고 한다.
고려사에 기록된 고려 문신으로 지용기, 지윤 등이 있으며,
성빈 지씨는 정종의 후궁으로 덕천군, 도평군의 어머니다.
봉주 지씨(智)의 시조 지채문(智蔡文)은 1026년(고려 현종 17) 상장군(上將軍)·
우복야(右僕射)가 되고
1031년(덕종 즉위) 1등공신에 추록된 명장으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7]
마씨는 말 마(馬)를 사용하는 장흥 마씨, 목천 마씨와
삼 마(麻)를 사용하는 영평 마씨, 상곡 마씨가 있다.
장흥 마씨(馬)는 은나라 군자 마완(馬浣)을 시조로 하고,
백제 개국공신 마려(馬黎)를 득관시조로 하며,[8]
고려 선종 때 판개성윤(判開城尹)을 지낸 마혁인(馬赫仁)을 1세조로 한다.
역사 인물로 조선 좌명공신인 마천목이 있고,
목천 마씨에는 마희경, 마현겸, 마유 등이 있다.
영평 마씨(麻)는 고려 태조 원년에 개국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녹훈된
마난(麻煖)을 시조로 한다.[9]
상곡 마씨(麻)는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에 온 마귀(麻貴) 제독(提督)의 후손이다.
골(骨)씨는 조선시대에 강화 골씨가 있었으나 현재는 이어지지 않고 사라진 성씨이다.
역사 인물로 계공랑(啓功郞) 품계로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낸 골귀손(骨貴孫)이 있으며,
그의 아들 골인서(骨仁瑞)가 조선 선조 1년(1567년) 진사시에 급제하였다.[10]
피씨는 가죽 피(皮)를 사용하는 홍천 피씨,
괴산 피씨가 있다.
피(皮)씨는 중국 천수(天水)에서 계출된 성씨이며,
주나라 경사인 번중피(樊仲皮)라는 사람이 공명이 있어
이름 마지막 글자인 피자를 따서 성으로 삼았다고 한다.
괴산 피씨의 시조 피경연(皮慶延)은 원나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고려에 망명했다.
홍천 피씨의 시조 피위종(皮謂宗)은 송나라에서 금오위상장군(金吾衛上將軍)을 지냈는데,
동국안렴사(東國按廉使)로 고려에 왔다가 귀화하였다.
장남 피인선(皮寅善)은 홍천군(洪川君)에 봉해지고,
차남 피인고는 단양 피씨로 분적했다.
사서에 기록된 역사 인물로는 고려 공양왕 2년 문과에 급제하여 상서(尙書),
광주교수관(廣州敎授官) 등을 역임한 피자휴(皮子休)[11],
고려 말 용담현령(龍潭縣令)을 지낸 피원량(皮元亮)[12] 등이 있다.
고려시대의 신분
고려시대는 신라시대의 골품제도를 타파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표면적으로는 혈연에 의한 신분제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음서제도 등 지배층의 특전은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고려시대는 기본적으로 귀족, 평민, 노비로 나뉘어졌습니다.
하지만 귀족들이 실무까지 담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급관리를 중심으로 한 중류층이 새롭게 등장합니다.
고려시대는 사노비 외에도 공노비가 등장하는 등
노비제도가 체계화되기도 했습니다.
신분 제도는 태어날 때의 출신에 따라서 계급을 나누는 제도예요.
신분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아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었어요.
조선 시대의 신분은 크게 양인과 천민으로 나뉘고,
양인은 다시 양반, 중인, 상민으로 나누어졌어요.
각 신분의 사람들은 같은 신분끼리 마을을 이루며 살았고,
신분에 따라 사람들의 생활 모습도 매우 달랐어요.
양반은 과거를 통해 관리가 되어 나라를 다스리는 데 직접 참여하였어요.
자신의 땅과 노비를 가지고 있기도 하였어요.
중인은 양반을 도와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 의학이나 법률 등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 외국과 교류할 때 외국 사람과의 통역을 맡은 역관 등이 있었어요.
상민은 농업, 어업, 수공업, 상업 등에 종사하였어요.
군대에 가서 나라를 지키고 세금을 냈지요.
주로 초가집에서 살았으며, 농사를 지어 거두어들인 곡식의 일부를 세금으로 내거나 땅 주인에게 바쳤어요.
상민도 양인에 속하였기 때문에 과거를 보고 벼슬에 오를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벼슬에 오르기는 매우 힘들었다고 해요.
천민은 노비와 천하다고 생각되던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노비는 나라와 양반의 재산으로 여겨졌으며, 주인을 위해 여러가지 일을 하였어요.
한편, 신라에는 골품제라는 신분 제도가 있었고,
고려시대에도 신분 제도가 있었는데 귀족, 중류층, 양인, 천민으로 나누어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