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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무단으로 퍼갈 수 없습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마음의 고향-청산도 글/사진: 이종원
눈이 부시도록 푸른 섬이 있었다. 에머랄드 바다 빛깔도 그렇고 일렁이는 청보리밭도 온통 푸른 빛을 발산한다. 풍경만 아름다우랴. 그 푸르름을 일구고 있는 민초들의 심성도 감미롭고 고단한 삶 역시 靑山만큼이나 숭고하다. 마음 속에 늘 꿈꾸어 왔던 이상향의 푸른섬 청산도가 벅찬 감격의 눈물을 흘리게 만든다.
완도에서 50리 바닷길을 헤쳐가면 청산도가 나온다. 45분간의 뱃길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보석 같이 박혀 있는 섬들에 흠뻑 빠지다보면 어느덧 배는 청산도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도정항에 내려 버스에 올라 타 섬 일주하는 것도 좋지만 바다를 벗삼아 당리마을까지 터벅터벅 거닐면서 영화 '서편제'의 주인공인 송화와 동호가 되는 것도 괜찮은 추억거리다. 오르면 오를수록 밭은 높아만 가고 바다는 더욱 넓어진다. 푸른 마늘밭에 비료를 뿌리고 있는 아낙을 만난다. "찍을 것이 뭐
있다고 늙은 할멈을 찍소"
비료를 마늘밭에 뿌리고 있는 것인지 ...바다에 뿌리고 있는 것인지...
당리진터에 오른다. 양쪽의 부드러운 산세가 두 팔 벌려 바닷물을 한아름 안고 있었다. 항아리 안쪽 한 켠을 차지하고 있는 양식장엔 풍요가 흘러나왔다.
계단식 논밭은 청산도 사람들의 주름살이었다. 눈물을 흘릴 때마다 밭고랑의 주름은 한 칸씩 한칸씩 늘어만 간다.
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청산도에서 가장 크다는 당리마을이 천연색 지붕을 맛대며 옹기종기 살아가고 있었다.
청산도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가장 감동을 주는 것이 돌이었다. 집도 돌로 올렸고, 담벼락도 온통 돌이고, 구들장 논도 돌로 다졌고, 논두렁, 밭고랑 역시 돌이었다. 가장 흔한 것이 가장 소중한 생활방편이 된 것이다. 단단한 돌이건만 '후-' 불면 무너질 것 같은 헐렁함. 어쩌면 그런 느슨함과 여유가 섬사람의 모진 생을 버티게 해주었는지 모른다. 틈 한점 없는 콘크리트의 공간에서 완벽을 추구하며 경쟁하다 결국 지쳐버린 현대인들에게 청산도 돌담은 산소호흡기 같은 존재다. 돌틈에서 흘러나오는 황토내음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서편제에서 유봉이 어린 송화와 동호에게 아리랑을 가르쳤던 장면이 나온다. 당리마을 입구에 당시의 초가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 비록 밀랍인형이지만 영화속으로 빠져 들기게 충분했다.
송림 속에 당집만이 외롭게 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로 이곳이 한국 영화 사상 최고의 명장면을 연출되었던 당리 황토길이다.
초겨울 보리가 막 심어진 밭둑. 유랑생활을 하며 떠돌던 유봉이 송화와 봉호를 데리고 걷다가 애잔한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며 지나갔던 곳이다. 황톳길 꼭대기에서 어슴프레 보이는 3사람이 언덕 아래로 천천히 내려오면서 급기야 화면 가득 채우기까지 5분 40초가 단 한 컷으로 처리된 한국 영화사상 최고의 명장면이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한 여인과 두 남자의 운명의 실타레를 진도아리랑 가락에 실어 애절한 한을 마음껏 풀어낸 황톳길. 1994년 주민의 요청으로 황톳길은 콘크리트로 덮혔다. 이상향의 길이 없어진 것이 어찌나 서운한지...급기야 임권택 감독과 관광객들은 영화속의 길을 만나고 싶어했고 결국 절반 정도만 황톳길로 복원되었다.
지게를 지고 마을로 돌아가는 이장님과 지팡이를 지고 있는 할머니를 만났다. 얼마나 고마운 장면인가? 세월이 흘러 나이 먹은 송화와 봉호가 걷는 것 같다.
진도아리랑의 선율이 밭고랑 사이에서 들린다.
한국 영화사상 가장 유명한 롱테이크 장면인 서편제의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신명나네 춤추는 장면. 바로 이곳이다.
할머니께 소리 한곡 부탁했다. 구성진 남도가락이 돌틈이 머문다.
모델도 되어 주시고 소리까지 들려준 할머니께 뭔가 드리고 싶어 차안을 뒤져 보았더니 오렌지와 꿀짱구가 나왔다. "할머니. 서울에서 오렌지는 가장 예쁜 사람에게 주는 거여요." 도시의 씁쓸한 문화를 전해주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할머니는 햐얀 이를 드러내며 감사의 미소를 보여준다. "우리 집으로 가소. 섬에서는 밥도 제대로 못 찾아 먹을터인데..우리집에서 밥한술 뜨고 가소." 할머니 집에 가서 아침을 먹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힘겨운 살림을 축내는 것도 미안했고 다음 일정이 만만치 않아 정중히 사양했다.
할머니는 바다색 슬리퍼를 끌고 지팡이를 짚으며 붉은 황톳길로 접어든다. 내가 걱정이 되었는지 뒤를 힐끔 돌아 보고는 씩 웃고 다시 마을로 들어간다. 그녀의 모습도 서서히 사라진다. 황톳길에는 잔영만 남았다. 마음속에 그린 고향풍경이 내 기억속에 사라지는 것 같아 서러움이 복받쳐 오른다. 서편제는 몇 년전에 끝난 영화가 아니었다. '할머니 오래오래 사셔요.;
당리 마을에서 놓치기 쉬운 것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초분이다. 당리 진터 바로 밑에 있기 때문에 눈여겨 보지 않으면 스쳐지나가기 쉽상이다. 초분은 사람이 죽었을 때 시신을 땅위에 눕히고 그 위에 짚과 풀로 덮어 시신이 완전히 썩도록 만든 것인데 3년이 지나면 뼈만 거둬 땅속에 안장하는 장례 풍습이다.
당리 초분의 시신은 이미 이장한 것이며 관광객을 위해 따로 이엉만 올려 놓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시신이 들어 있는 초분을 꼭 보고 싶었다. 구장리에 있다는 소리만 듣고 물어물어 찾아다녔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다시 큰길로 돌아와보니 보리밭을 메고 있는 아저씨가 답답한지 자기 경운기를 따라 오라고 한다. 남도사람들의 정이 이렇다. 막상 볼려고 하니 겁이 덜컹 난다. 새마을운동 이후에 없어졌던 초분은 이렇게 전라도 외딴 해안지방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몇 년후에는 우리 기억속에서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이 초분은 1년된 시신이 모셔졌다고 한다. 잡귀를 없애고 벌레가 들지 않도록 솔가지를 올려 두었고 이엉은 짐승들이 훼손하지 못하도록 돌로 단단히 묶어두었다. 어쩌면 3년 시묘살이나 다름이 없다. 매일 밭에 나가 부모의 시신을 뵙고 그 밭에서 일하고 다시 인사하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 지극한 효성이야말로 참 대단하다.
이 조그만 섬에 어찌나 무덤이 많은지 모른다. 땅이 부족해 산에서 흙을 날라 계단식 논을 만들 정도로 버거운 삶의 연속이었다.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조상의 무덤은 잘 모시는 것이 이들의 심성이다. 마늘밭 한 가운데도 무덤이 있고 논 바닥 가운데도 조상이 묻여 있었다. 누가 죽었는지 누가 살아 있는지 헷갈릴 정도로 죽어있는 자나 살아있는 자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곳이 청산도다. 죽어도 한번 죽나? 초분에서 3년, 다시 봉분으로 옮긴다. 그러니까 사는 것은 한번, 죽는 것은 두 번인 셈이다.
범바위를 찾다가 길을 잘못들어 권덕리까지 들어왔다. 길을 헤메며 새로운 풍경을 만나는 것도 여행의 맛이다. 하긴 범바위를 못찾은 것은 아니다. 포구에서 고개를 쳐드면 호랑이처럼 힘찬 바위가 하늘과 맞닿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마을에 들어서니 둘담으로 둘러진 공동우물터가 나온다. 쌀 씻고,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폐교가 눈에 들어온다. 쓰러진 폐교가 아니라 리사무소와 노인정으로 쓰이고 있었다. '청산초등학교 권덕분교장' . 쓸쓸하게 서있는 학교 연혁비가 가슴아프게 만든다. '개교당시 학생수 15명 ,폐교당시 학생수 1명, 최대 번성시 21명, 졸업횟수 18회 졸업생 수 14명, 개교 57.3.15. 폐교 99.3.1.' 학생이 21명이었을 때는 얼마나 북적거렸을가? '
청산도에서 돌담, 무덤만큼이나 많이 보이는 것이 공덕비다. 뭐 그리 감사해야 할 사람들이 많은지... 마을마다 공덕비 두 서너기는 기본이다. 아마 마을을 온전히 이끌어가는 지탱목이 바로 이런 것들이 아닐까. 권덕분교장 6대 교사 손대현 선생님은 참으로 행복한 선생님이시다. 여기
버려진 부토위에 1978. 3. 15.
이장님의 방송 스피커도 정겹고....
작은 배에 몸을 싣고 김을 따는 어민들도 사랑스럽다.
읍리에 접어들면 큼직한 고인돌과 하마비가 나타난다. 고인돌은 섬사람들에게 풍요의 신인가보다. 계단식 논을 바라 보고 있는 고인돌. 하마비 뒷면에 새겨진 불상도 유심히 봐야 한다.
읍리에서 고갯길을 넘어가면 물결처럼 부드러운 논두렁이 한없이 이어진다. 부흥리 마을이다. 밭이 아니라 물결처럼 부드러웠다. "어머니..참
좋은 곳에서 사십니다." 굳이 두 번씩이나 그 말을 강조한 이유는 뭘까? 내 눈엔 멋진 경치였다면 이들에게는 지긋지긋한 노동현장이었기 때문이다.
흙보다 돌이 더 많은 청산도. 그 많은 돌을 구들장처럼 돌을 쌓고 산꼭데기에서 흙을 퍼다가 만든 논과 밭이 바로 구들장 논이다. 귀한 흙을 적게 쓰고 쌀 한톨이라도 더 얻기 위한 섬사람의 눈물겨운 노고에 눈물이 날 정도다. 대봉산 정상에서 20미터 아래 있는 곳까지 구들장논 흔적이 있다고 마을 이장님은 귀뜸해준다. "이런
논은 도대체 어떻게 만들었어요?"
천수답이라 비가 오지 않으면 벼가 타들어가는 것을 고스란히 지켜봐야한다. 청산도 여인들의 한과 애환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오죽했으면 쌀이 귀해 "청산도에 나서 뭍으로 시집가기 전까지 쌀 서말 먹고 가면 부자집" 란 속담까지 나왔을까
산에서 나무를 해오는 것도 여인의 몫이다.
구불구불한 길을 매일 걸어 올라다녀야 한다. 한을 삭히고 배고픔을 이기느라 이 길을 터벅터벅 오르며 아리랑을 불렀을 것이다. 굽이길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가끔 눈두렁에 불을 지피다가 화상을 입는다고 한다.
허리 한번 펴기 힘들다.
왠 효녀 효부도 이리 많은지...열녀비도 정성스레 꾸며 놓았다.
땅 한평 얻기 위한 청산도 사람들의 노력이 눈물겹다. 바다 바로 옆에 돌을 쌓고 땅을 다져 이렇게 마늘을 심었다. "태풍때
바닷물 들어오면 어떻해요?" 그걸 알면서도 땅을 파고 있는 이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부다.
활처럼 휘어진 진산해수욕장을 지나면 노적봉 전망대가 나온다. 일출이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 사진작가들이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날씨가 좋으면 거문도까지 보인다고 한다.
천연자연돌인 진산갯돌밭의 주인은 주먹만한 갯돌들이다. 갯돌만큼 청산도 사람들의 심성을 말해주는 것도 없다. 삶이 늘 고단해도 심성은 조약돌처럼 곱다. 깨돌밭에 앉아 눈을 감으면 파도와 갯돌의 만남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쏴쏴"
청산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다운 해수욕장을 꼽는다면 바로 지리해수욕장일 것이다. 1.2 km의 고운 백사장이 아름다운 곡선을 만들어 내고 있다. 두꺼운 해 송도 볼 만하고 그 고운 모래가 어찌 이리 단단한 해변을 만들어내는지 의아할 정도다. 특히 이곳은 일몰의 명소다. 장도너머로 지는 일몰은 천항일품으로 알려져 있다. 근처 갯바위에 나가 낚시대를 드리우면 묵직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곳이다.
지리해수욕장을 지나 고개를 넘어서니 내가 도착했던 도정항이 나온다. 오늘이 청산도 장날인가보다. 예쁜 옷과 잡화가 널려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이 붕어빵을 파는 곳...그렇게 생선을 많이 접하면서도 붕어빵이 먹고 싶을까?
이제 청산도를 떠나야 한다. 아늑히 멀어지는 항구를 보며 아련함에 빠져본다. 청산도가 푸른 것은 바다와 보리밭 때문만은 아니다. 민초들 마음속 구석구석에 파란 마음들을 간직했기에 영롱한 푸른 빛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지.. 마음의 고향 청산도를 떠나며....
모놀과 정수 .....여행작가 이종원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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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사계절에 우리 강산 우리 가락의 서편제 참 감동으로 봤던 영화 촬영한곳...가 보고 싶은곳입니다..수고 하심으로 감사히..
근디...와자꼬 저걸보면서 울고싶어지게 되지? 이 아침에~!!
아리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멜읽으며 나도 모르게 아리랑을 흥얼거리더군여^^
좋은 곳이여. 편안하게 다가오는...^^ 제 고향이 그 옆 섬입니다. 꽃섬(화도)근처
어릴적 늘상 들었던 이 아리랑 새삼 눈물짓게 하네요. 고향의 산천은 잊을수가 없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