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글빙글 여러가지 의미를 담은 야릇한 미소만 주고받았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중년들과 마주했으나 이미 무디어진 기억의 문은 이름마저도 얼른 떠올리지 못했다. 성이 朴이였는지 어찌 생각하면 金이기도 한 것 같다. 나의 친구들이라는 사실은 틀림없을지언정 그 때, 첫 날은 흐르는 침묵이 어색해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저 멀리 창공으로 사라지면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던 부메랑이 당당히 복귀하는 형상이다. 길었다고 생각되는 세월의 강을 건너는 시간은 찰나였다. 수 십 년의 세월을 한 걸음으로 훌쩍 넘을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이야기 타래 술술 풀어질 때마다 아무리 숨기려 해도 공유했던 우리들만의 찐득한 정서는 묻어났다. 개인의 자잘한 추억 한 가지씩 모여서 동창들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나의 그릇은 작고 견고하지 못해서 현재의 친구, 터전도 가꾸는 힘이 부친다는 자괴감이 크던 무렵이다. 이제는 익숙하다고 생각되는 이 삶도 힘겨워서 바쁘다는 말을 달고 사는데 마음 한 자락 뚝 떼어서 다시 그 시절로 회기 시켜야 하다니. 친구들의 근황이 궁금했지만 자신이 없던 나는 이런 저런 집 안팎의 핑계를 대며 망설였다. 그러나 어떤 나무가 뿌리 없이 튼튼한 잎 새를 틔울 수 있단 말이던가? 아무리 부정해도 그 시절은 나의 근본이며 오늘날의 자신은 친구들로부터 받은 기운과 영향인지도 모른다. 나와 우리 집을 온전히 아는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를 생각하게 되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오랜 기간 벌거벗은 나를 지켜본 눈들이 모여 있는 초등학교 동창회로 들어서는데 더 이상의 주저가 필요치 않았다.
해마다 8월 하순에 열리는 우리들의 만남은 식물들도 솟구치는 푸르름을 잠시 멈추고 휴식한다. 견디기 괴로운 장마와 무더위마저 숙지는 때이니 기쁜 마음으로 친구들을 만나러 모교로 모여들었다.
‘상윤아 살 좀 쪄’
‘상윤아 네 아들 장가갈 때 되었지?’
‘상윤아 네 동생들 다 어디에 사니?’
‘상윤아 네 할머니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지?’
상윤아 상윤아 상윤아.
상급학교로 진학하기 이전까지 불려 졌던 어린 날의 나의 이름 相(상)允(윤)이 무한정 불리우는 자리. 졸업 이후의 인간관계는 전방에서 나, 개인이었다면 우리 가족의 안부까지도 궁금해 하는 곳이었다. 어김없이 다가온 여흥 시간에 아는 노래도 별로 없는 내가 용기 내어 한 곡 부르려고 마이크를 잡고 있는데 느닷없이 선규는 뒤에서 장난을 쳤다. 한 웅큼의 머리카락을 쥐고 그 옛날처럼 사정없이 잡아당겼다. 따갑고 귀신처럼 산발되어도 조금도 마음이 상하지 않는다. 술이 얼근하게 취하고 좌석이 무르익었을 때 누군가 나를 보고 저 지지배는 어쩌고저쩌고 ......이제는 가물가물한 지지배란 말이 귀속에 담기며 나는 막 웃음이 쏟아졌다. 중년이 된 나에게, 더군다나 집안에서는 어른의 대열에 올라선지 오래인 내게 그 시절처럼 거침없이 뱉아지는 저 객쩍은 말들. 그처럼 언행에 체면과 격식을 차리지 않더라도 그곳에서는 괜히 관대해지는 것인지.
지긋한 나이도, 우리가 늙었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유년으로 완벽하게 되돌림 되는 모양이다. 웃고 떠드는 친구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행복’이라는 단어가 저절로 떠오른다. 아무런 이해, 득실 없이 진정 순수한 관계일 때의 표정은 둔한 내가 보아도 달랐다. 지금 삶의 정도 따위는 개의치 않아도 된다. 마음은 이미 어린 시절로 충분히 퇴보한 상태니까.
다시 뭉칠 날은 점점 다가오는데 한 친구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는 부음을 전해 들었다. 아직 죽음을 구체적으로 예상해보지 않아서 그 건 우리들에게 돌발 상황이었다. 어떻게 슬퍼해야 되는지조차 모르던 무의식 상태가 그랬을까? 득달같이 메시지나 수시로 드나드는 카페에서 비보를 소통하고 있었다. 다른 친구들도 나와 같이 큰 놀라움 속에 휩싸인 듯 했다.
일련의 哀사를 겪으면서 맞은 동창회는 더한층 일체감을 이루는 것만 같다. 사고의 전말을 유추해보며 떠난 친구를 추억 했다.마치 가족 중 하나가 먼저 떠난 뒤 남은 식구들이 모여앉아 결연히 미래를 의논하고 고인에 대한 애도를 다시한번 하는 장인 듯하다. 걱정과 배려는 우정을 넘어서 동기간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1박2일의 만남이 있고 헤어져야 하는 날 아침이다.
햇살이 비추기 전이라 이슬 머금은 운동장에서 서성이던 친구들에게 포즈를 취하게 한 후 나는 사진 몇 컷을 찍었다.
그곳이 아니더라도 간혹 자녀들의 혼사 때 보기는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분위기는 또 다르고 귀하니까.
친구들과 일일이 내년을 기약하는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마침 휴일이어서 집에 들른 아들이 운전 못하는 나를 태우러 현지까지 와 주었다. 뒷좌석에 눈을 감고 앉으니 어제부터 들은 왁자한 고향 사투리와 웃음소리의 여운이 내 안에 술기운처럼 화악 퍼진다. 저급한 언어를 끌어다가 야한 농담을 걸어도 낯 뜨거워지지 않은 자리. 가장 소중했던 어린날 무형의 가치를 그동안은 잃어버렸다면 동창회에서 친구들을 만나므로 찾아서 횡재한 기분이다.
아! 초등학교 동창생들이 있는 그곳은 정말 편했다.
끝.
2012 10 10일에 씀
(이 음전)
첫댓글 그 기분이 자알 압니다 늘 초등 아니 국민학교 동창들 보다 더 편하고 아늑한 친구들은 별로 없을것 같습니다
오래 우정 간직 하시고 아직은 청춘인데 먼저간 동창이 누군지 모르지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금동열.
짠한 느낌이야...!
글쓰는 좋은 친구가 있어서 참 좋다
이런 좋은 글도 읽게되고...
ㅎㅎ좋은 글을 쓰리라는 다짐은 자주하지만 결코 쉽지않은 일이야.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