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봉독 : 빌1:12-26
* 말 씀 : 매인 몸을 통한 진보
바울은 자기의 서신들을 통해서 자신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를 낳았다고 여러 번 고백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 중 고후11:24-28절을 보면 그 어떤 사도들보다도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고 고백합니다. 30절에 보면 ‘내가 부득불 자랑할찐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4:13절을 보면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을 인하여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을 지나다가 병이 들었습니다. 더 이상 선교여행을 계속한다는 것이 무리라 생각되어 한 갈라디아 가정에 몸을 의탁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리어 갈라디아 사람들을 전도하는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는 갈라디아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갈4:14-15절을 보면 갈라디아 사람들이 병을 가지고 요양을 하기 위해서 자신들의 가정에 머물렀던 바울을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다고 말씀합니다. 또한 자신들의 눈이라도 바울에게 빼어 줄 정도로 사랑하였다고 말씀합니다.
갈6:17절을 보면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흔적’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스티그마’로서 세 가지 뜻을 가집니다. 즉, ‘문신’, ‘낙인’, ‘상흔’을 말합니다. 이것을 고후12:7절은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로 표현합니다. 성경학자들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 하여 여러 가지를 말합니다. ‘안질’, ‘간질’을 포함하여 최근에는 ‘성적인 고민’의 주장까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9절을 보면 바울은 이것에 대해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로 하여금 이런 육체의 가시, 즉 자신의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근심하거나 연려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한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이것들이 바울로 하여금 자고하지 않도록, 그리고 그리스도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진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 매인 몸이 되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자신이 옥중에 매인 몸이 된 것을 금심하고 염려하는 빌립보교회 교인들에게 도리어 기뻐할 것을 당부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2절에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의 당한 일, 즉 옥중에 매인 몸이 복음의 진보가 되었기 때문에 자신도 금심하거나 염려하지 않고 기뻐하는 것처럼, 빌립보교인들 역시 자신을 포함하여 고난 받은 자들을 바라보면서, 아니 자신이 직접 고난을 당한다 할지라도 기뻐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매인 몸은 복음의 진보가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네 가지 사실을 가능케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첫째로 실존의 고뇌에 찬 신앙고백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빌1:22절을 보면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실존에 찬 고뇌가 심화된 표현인 것입니다.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말은 일찍 바울 이전에 고대 그리스도의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나 세네카의 말입니다. 그들 역시 죽음 이후의 세계를 믿었는데, 그들이 믿은 것은 영혼수면설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는 고백은 그들이 믿는영혼수면설과는 다른 것입니다.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고백하는 것은, 육체적인 죽음 이후에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이 공급하는 영적인 생명 가운데 영원하게 지낼 것을 소망하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 고백이 오늘 우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그가 고난 가운데, 즉 옥중에 매인 몸 가운데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빌1:23절을 보면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 역시 그의 실존의 고뇌에 찬 고백입니다. 바울은 지금 계속적으로 ‘육신에 거하는 것’이 더욱 유익한지, 아니면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더욱 유익한지에 대한 고뇌에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너무나 버겁고 힘들고 지쳐있을 때 이런 고뇌를 하지 않습니까? 바울이 옥중에 매인 몸이었기에, 그리고 그 몸의 상태가 생사의 기로에 있었기에 그 고뇌에 찬 신앙고백은 가능하였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바울의 매인 몸은 선교의 역동적인 반응을 가능케 하였습니다. 15절에 보면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매인 몸으로 있을 때 밖에 있는 그를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들 중에 두 종류의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바울을 투기하며 분쟁함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8절에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즉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기뻐하리라’입니다. 바울이 로마의 옥중에 그의 몸이 매이어 있었는데, 도리어 그것이 바울을 평상시 투기하고 분쟁하였던 사람들에게나, 사랑하고 따랐던 사람들이나 동일하게 선교하여야 하겠다는 역동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청년들이 공동체 안에서, 삶의 현장 속에서 어떤 염려와 근심 때문에 너무나도 무기력하거나 우리에게 맡겨주신 그리스도인의 본분과 그 사명을 놓치거나 게을리 하지 않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도리어 열악하고 힘들고 버거운 상황들이 도리어 우리 신앙의 진보를 낳는, 바울처럼 복음의 진보를 낳는 원동력이 되었으면 합니다. 고난당하는 일 가운데, 여러 가지 금심과 염려에 매인 몸이 도리어 실존적인 고뇌에 찬 신앙고백을 가능케 하며, 다시금 하나님의 일에 더욱 충성하고자 하는 역동적인 힘이 발휘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세 번째, 네 번째 기능케 한 사실은 다음 주에 연속적으로 설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