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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3년 윤 4월7일 영조는 창덕궁 영화당에서 소여(小輿)를 타고 성균관으로 향했다. 많은 신하들과 종친, 의빈(儀賓)들이 국왕을 수행했다. 군신이 함께하는 활쏘기 시합인 대사례(大射禮)를 위해서였다.
의궤는 왕이 친히 열람하는 어람용 1부를 비롯하여 4부가 더 만들어져 의정부, 사고, 예조, 성균관에 각 1부가 보관되었다. 대사례가 성균관에서 열린 것은 국왕이 친히 유생들을 격려하고 심신의 수양을 쌓을 것을 권장하려는 취지에서였다. 성균관 유생들 모두가 국가로부터 장학금과 각종 물품을 무상 지급받았던 것이나, 대사례를 비롯하여 왕세자의 입학 의식을 이곳에서 열었던 것은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에 대한 국가의 기대를 보여준 것이다.
궁궐을 나온 영조는 창덕궁과 연결된 성균관의 하련대(下輦臺)에 이르러 가마를 내렸다. 임시 숙소인 악차(幄次)에 들어가서 제복인 면복(冕服)으로 갈아입은 후 성균관 문묘에서 선현들을 참배하는 의식인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악차로 돌아온 영조는 성균관 명륜당으로 들어가서 이곳에 대기하고 있던 신하들과 유생들을 격려한 후 본 행사인 대사례를 시작하였다.
의궤 앞 부분에 그려진 세 장면의 그림을 통하여 현장의 모습과 분위기를 접할 수 있다. 세 장면의 그림은 왕이 활 쏘는 모습을 그린 ‘어사례도’, 신하들이 활 쏘는 모습을 그린 ‘시사례도’, 성적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과정을 그린 ‘시사관상벌도’로서 행사의 모습은 시간적 순서에 따라 그려져 있다. 왕이 맞힐 과녁은 90보 정도 떨어져 있었으며 곰을 표적으로 삼았다.
신하와 종친들은 사슴을 표적으로 활을 쏘았다. 네발을 맞히면 표리(表裏·겉옷과 속옷감)와 탑견(搭肩·어깨걸이)을, 세발은 이(裏)와 탑견, 두발은 궁시와 진요(搢腰·허리띠), 한발은 궁과 진요를 상으로 받았다. 맞히지 못한 자에게는 벌주가 돌아갔다.
대사례를 마친 후에는 선비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고 포상하는 행사가 뒤따랐다. 영조는 ‘희우관덕(喜雨觀德)’을 시제로 내었다. 오랜 가뭄 끝에 단비가 내리자 ‘희우’로 그 기쁨을 표시하고 유교경전에 나오는 ‘관덕’이란 말을 시제로 삼은 것이다. ‘예기’에는 ‘예로부터 활쏘기(射)는 덕을 보는 것(觀德)이며, 덕은 그 마음에 얻는 것이므로 군자가 활을 쏘는 것은 그 마음을 보존하는 것이다’라며 활쏘기가 마음의 수양에 있음을 강조하고 이를 ‘관덕’으로 표현한 구절이 있다. 영조는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활쏘기가 함축하고 있는 ‘희우관덕’을 시험 문제로 낸 것이었다.
탕평정치의 완성으로 강력한 왕권을 확립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백성의 교화에 진력하던 군주 영조에게 있어서 대사례는 단순한 활쏘기 행사가 아니었다. 대사례를 통해 관리들의 정신자세와 기강을 확립하고 성균관 유생들을 격려하는 한편 국왕의 교화가 만백성들에게까지 전파되도록 하려는 원대한 정치적 포부가 함축되어 있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열전에 돌입하였다. 고구려 시조 동명성왕의 신기의 활솜씨와 250여년 전 시행된 대사례, 그리고 올림픽 양궁의 금메달이 자꾸만 오버랩된다.
〈신병주/서울대 규장각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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