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1879년: 최초의 종두법 연수
지석영 선생은 1876년 수신사 일행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온 스승 박영선(朴永善)으로부터 종두귀감(種痘龜鑑)을 받아 종두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던 중, 1879년(고종 16년) 홀로 부산에 내려가 일본인이 운영하는 제생의원에서 두 달 동안 종두법을 익힌 뒤 두묘(송아지에 접종하여 접종액을 만들어낼 원액)와 종두침을 얻어 서울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던 중 충주에 있는 처가에 들러 2살된 처남에게 최초로 종두를 실시하게 되는데, 그 일화는 지금도 전해집니다.
1880년∼1882년: 본격적인 우두 실시
1880년 5월 지석영 선생은 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가는 김홍집을 따라가 직접 우두법을 익힌 뒤 우리나라에 돌아와 종두장(種痘場)을 차리고 시민들을 계몽하는 한편 본격적인 우두 접종사업을 실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그는 개화운동가로 몰려 충청도 덕산으로 피난을 해야 했습니다. 그해 8월 서울로 돌아온 선생은 난중의 방화로 불타버린 종두장을 부활시키고 전주와 충청도에서 우두국을 설치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종두를 실시하기에 이릅니다.
일찍이 28세에 과거시험 을과에 합격한 지석영 선생은 그 후 형조참의와 승지를 거쳐 1896년에는 동래부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동래에서도 천연두가 유행할 때마다 우두법을 보급하는 데 힘썼습니다.
1889년∼1892년: 유배생활과 <신학신설> 저술
1889년 여름에는 사헌부장령이 되어 나날이 기울어져가는 시폐를 논하다가 조정의 미움을 받아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기도 하였으나, 1892년 유배지에서 돌아와 다시 우두보영당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에게 종두를 실시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배지에서 지은 <신학신설>은 한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읽어 이해할 수 있게 쓰여진 최초의 위생학이자 예방의학서라 할 수 있습니다. 백성들의 건강을 위해 우두법을 도입하려던 선생의 노력이 이렇게 순탄치 못했던 것은 천연두에 대한 잘못된 인식(천연두는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통과의례로 생각되었고 이것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우두법은 백성을 해치려는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습니다)과 당시 개화파와 수구파가 대립하고 있던 정국의 혼란 때문이었습니다.
최초 종두 시행 일화
부산에서 배워 온 우두를 시술할 요량으로 장인에게 우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처남에게 시술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장인은 우두에 대한 지식이 전연 없어 우두를 정반대로 일본인이 조선 사람을 죽이기 위해 만든 위험한 약이라고 알고 있어 "이러한 독약을 어떻게 어린 처남에게 놓는단 말이야"고 펄펄 뛰며 단번에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지석영을 미친 사람으로 취급하면서 다시는 우두에 대한 설명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다. 지석영은 하는 수 없이 장인에게 "저는 바로 돌아가겠습니다"라고 인사를 하고 출발 차비를 하였다. 이 때에 장인이 "왜 떠나려고 하는가"라고 이유를 묻자 "믿지 못할 미친 사위가 어떻게 처가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가"라고 대답했더니 장인은 사위 지석영의 성의에 감탄하여 처남을 데려와 우두를 시술하게 하였다. 귀여운 처남에게 우두를 시술한 지석영은 혹 실패할까 초조하고 불안한 3일을 보냈다. 3일이 지나 우두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의 감격을 '나의 평생을 통해 볼 때 과거를 했을 때와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왔을 때가 크나큰 기쁨이었는데 그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였다'라고 후에 술회할 정도이다.
<지석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