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곡 가실성당 6·25 포격도 피해간 언덕 위의 ‘작은 평화’
칠곡 가실성당은 1922~1923년에 지어진 성당으로 설계자는 프랑스인 박도행(Victor Louis Poisnel) 신부,
공사는 중국인 기술자들이 했다. 6.25때 남한과 북한 양측 군인들에 의해 병원으로 사용됐다.
그래서인지 낙산 지역에서 전투가 심했는데도 성당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해가 기우는 황혼 무렵, 멀리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성당, 하늘로 치솟은 종탑에서 들리던 은은한 종소리.
어디에서 어떻게 실제로 경험한 일인지조차 확신이 가지 않는 저 먼 유년의 기억 속의 한 장면이다.
그런데 그곳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에 위치한 가실성당이 바로 그곳이었다.
오락가락하는 장맛비를 헤치고 가실성당을 찾았다. 일요일 오후, 미사에 참석했던 신자들이 모두 떠난
성당은 적막 그 자체였다. 슬프도록 아름답구나! 정문을 통과하며 올려다보았던 언덕 위의 성당은 유년의
해묵은 기억 속의 한 장면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역 중의 하나가 칠곡군이다. ‘신나무골 성지’와 ‘한티 성지’ 등
2곳의 가톨릭 성지가 이곳에 남아있는 사실만으로도 이론이 제기될 여지가 없다. 천주교회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곳의 성지와 더불어 반드시 찾아보아야 할 곳이 가실성당이다.
현재의 가실 성당은 멀리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낙산의 언덕 위에 조용히 서 있다. 주위의 풍광은 물론
성당 본당과 구사제관 등 붉은 벽돌로 지어진 건물 하나하나까지 너무나 아름답다. 가톨릭 신자들이 종종
가실성당을 ‘기도하기 좋은 성당’이라고 한다는데, 입지와 주변 경관만 보더라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마치 중세 유럽의 어느 마을에 있었든 한적한 교회 같다는 느낌이 들고, 그래서 이곳을 찾을 때마다
세속의 찌든 때가 씻겨나가는 청량감을 맛보기 때문은 아닐까.
가실성당은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1895년 조선 교구의 11번째 본당으로 설립되었다. 대구ㆍ경북지역에서는
계산성당에 이어 두 번째로 세워진 본당으로 초기 천주교회 중의 하나인 셈이다. 이 성당 터는 원래
한국 천주교회 창립 시기부터 천주학을 받아들였던 실학자 성섭이 살았던 곳으로, 그의 증손자 성순교는
1861년 경신박해 때에 상주에서 순교를 했다고 한다. 현재 성당의 정문 곁에는 순교자 성씨 가문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처음 성당을 세웠던 분은 초대 본당 신부인 파리 외방 선교회 소속 파이아스 가밀로(한국명 하경조) 신부였다.
조선 말 문호개방의 열풍 속에서 1886년에 한불수호조약이 체결되자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활동이 한층
자유로워지면서 많은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진출하였다.
파이아스 신부도 1894년에 조선으로 와서 칠곡에 도착하여 신나무골에 정착하였다. 성당을 세울 곳을 찾아
다니던 파이아스신부는 신나무골에서 10여리 떨어진 낙동강변에서 기막힌 자리를 발견하였고, 19칸 자리
한옥을 매입하여 성당으로 고쳐 지었다고 한다. 그곳은 풍경이 아름답고 멋진 곳이기도 했거니와 낙동강
수로를 이용해서 대구, 안동, 부산 방면으로 오가기 쉬운 이점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 낙산리에 1895년에
성당을 세웠으며, 가실성당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118년 전의 일이다.
붉은 벽돌로 된 아름다운 성당 건물과 구사제관(지금은 유물전시실 및 교리실로 사용됨)은 1923~1924년에
원래의 성당 터에서 자리를 언덕 위로 옮겨 신축된 것이다. 설계자는 프랑스인 빅토르 루이 프와넬(한국명 박도행)
신부였다. 그는 1896년부터 1925년까지 30여년 동안 대구 계산성당, 왜관성당을 비롯한 한국 교회 건축물 대부분을
설계한 뛰어난 건축가였다. 건축에 사용된 붉은 벽돌은 중국인 기술자들을 고용하여 현장에서 구워서 사용했다고
하는데, 공사를 감독했던 빅토르 투르뇌(한국명 여동선) 본당 신부는 벽돌을 한 장씩 망치로 두드려 확인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본당의 로마네스크 양식과 종탑의 고딕 양식이 적절하게 결합된 뛰어난 건축미를 자랑하는 성당 건물은 건축
당시의 원형을 거의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이 6ㆍ25전쟁 당시 낙동강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되었던
전장(戰場)의 한 복판이었던 사실을 떠올리면, 총탄 흔적과 같은 작은 상흔 정도만 남긴 채 원형 그대로 유지된
사실은 천행(天幸)이라 해도 좋겠다. 황동환(이사악) 주임 신부는 가실성당이 국군 및 미군과 북한군 양측에 의해
모두 임시 야전병원으로 이용되었기에 포격과 같은 심각한 전쟁의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고 귀띔해 주었다.
낙산 언덕에 세워진 붉은 벽돌의 성당은 고딕양식의 상징인 종탑이 하늘을 향해 뻗어 있고 중후하고 안정감 있는
건물 그 자체도 매력적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볼거리가 더욱 많다. 우선 아치형 터널 형태의 천정 구조는 오랜
역사를 지닌 중세 교회 안으로 들어온 느낌을 준다.
또 기둥 사이 열 개의 창문에는 10개의 스테인드글래스(색유리화)가 있는데,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십자가에서의
죽음 그리고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나타난 장면까지 예수의 삶을 차례로 이야기하고 있다. 빛과 섬세한 선, 오묘한
색채를 이용한 색유리화는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신비감을 느끼거니와, 하나하나에 담긴 이야기를 알아보는 것도
또 다른 재미를 준다. 또 칠보로 장식한 감실과 행렬용 무지개 십자가도 성당의 자랑거리이다. 색유리화나, 감실,
행렬 십자가는 모두 독일의 세계적인 작가 에기노 와이너트의 작품이라고 한다.
성당 안에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이자 예수의 외할머니이신 안나상이 모셔져 있는 점도 이색적이다. 성당 관계자에
따르면 안나 성녀는 “어머니들의 주보성녀”이므로 가실성당이 어머니들의 성지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했다.
안나상은 성당 신축 당시에 프랑스로부터 모셔온 것이라고 하니, 20세기 초반에 이미 어머니 혹은 여성의 권리를
염두에 두었던 어떤 선각자의 배려인가 싶다.
구사제관에 만들어진 유물전시실의 전시소장품도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 19세기 후반의 각종 교리서에서부터
성화, 일제 시대의 성경과 미사 집전에 사용한 의례용품 등 한국 초기 천주교사를 증언하는 유물들이 다수 전시ㆍ
보관되어 있어 천천히 하나씩 느긋한 마음으로 살펴볼 만하다.
가실성당은 1958년 이래 약 50년간 ‘낙산성당’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가 2005년에 원래의 이름을 회복했다고 한다.
건물의 외양이나 성당 내부의 모습 못지않게 아름다운 이름이다.
작고 예쁜 성당이라는 명성이 널리 퍼지면서, 근래 가실 성당은 유명세를 타고 있다. 2004년에는 배우 권상우가
주연한 ‘신부수업’의 촬영지가 되었고, 최근에는 예쁜 사진을 찍으려는 사진 애호가들의 단골 출사 장소가 되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 건축을 공부하는 건축학도와 문화재 연구자들이 연구 대상으로 삼아 자주 찾는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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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한번 가보았는데 막연히 그냥 둘러보고 온것 같습니다 좋은정보 감사합니다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본 만큼 느낄 수 있다고 합니다.
견학 또는 답사에 도움이 된다니 고맙습니다.
정보 감사합니다~^^
저도 다음에는 좀 더 관심을 가지고 살펴보아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문화유적은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본만큼 니낄 수 있다고하니
많이 배우고 현지답사를 하면 문화재 이해에 도움이 된다고 배웠습니다.
또한 문화관광해설사로서 지식과 정보 공유차원에서 소개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