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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꼬님 댁에서 홀로 시사회를 하고 동경으로 돌아 온 후
영화 '사이에서'가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최근에 개봉 두 달 만인 지난 6일 전국 관객 2만3천838명을 기록하면서 지난 2004년 개봉한 김동원 감독의 '송환'의 역대 흥행 기록을 넘어섰다는 낭보를 듣고 멀리 동경의 하늘 밑에서 홀로 즐거워 하고 있다.
지방극장에서 개봉을 한다는 소식도 있으니 참 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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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랫글은 동우님께서 쓰신 글 입니다.
여러분께 소개 해 드리려고 제가 가져다가 편집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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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考1》
한가위 명절.
한사코 찾아가 만나야 하고 핏줄끼리 서로 기대어 가슴 눞이는 날.
그러나 어이하랴.
눞이는 가슴들은 시나브로 여위어 가고 기대는 어깨는 갈수록 앙상하다.
농경사회적 ‘군거적 순종의 원리’에 기대어 우리의 정신은 다소 헐거워도 좋았지만 이제 시대는 살벌하다.
‘호적’이 아니라 ‘일인적’으로 살 준비들 하거라.
어딘가 기대어 폼잡을 생각 하덜 말고 벌거벗고 홀로 서거라. 단독자로서.
조상과 고향이란 곧 수몰돼야 하는 몽롱한 추상이란다.
그 물결이 이제 발목까지 차 올랐다.
슬픈 현대이고 슬픈 포스트모던이고 슬픈 역사의 변증이고.
아니다.
인간이란 근원적으로 슬픈 동물이다.
명절 연휴.
슬픈 동물인 인간과, 그리고 어떤 여인에 대하여 생각 가는대로 몇 번으로 나누어 지껄이려고 한다.
뉘 있어 그 슬픔 다독거려 주랴.
.......
올 쉰을 갓 넘긴 연배의 한 여인을 알고 있다.
록뮤직을 감성으로 들이 마시는 여자.
한밤중 홀로 차를 몰아 지방국도를 질주하여 스피드에 몸을 싣기도 하고, 승마를 즐겨 자신의 명마를 갖고 싶어하는 여자.
세종문화회관, 뉴욕 링컨센타등 수십회 국내 유수의 예술가들과 공연을 치르는 무대공연가.
음악가 소설가 연출가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인과 나누는 우정과 특히 생태음악계의 세계적 대가 스테판 미쿠스와의 돈독한 교류.
배낭을 지고 홀로 몇달동안 인도땅을 헤매고, 몽골의 오지를 헤집는 여자.
그녀는 지금도(2006년 10월초 현재) 남미 안데스 인근의 나라에 머물고 있다.
두권의 책을 써 출판하였고, 독립영화 ‘사이에서’의 주인공인 여자.
이해경 (李海京)
그녀는 무당이다.
스스로는 날라리 무당이라고 시치미를 떼지만 황해도 굿의 大巫라 불리워 지는, 이른바 큰무당이다.
무당.
그녀를 알기 전, 내가 가지고 있었던 무당에 대한 선입견이란 지극히 피상적인 것.
영화나 드라마에서 울긋불긋한 휘장 앞에서 철릭을 입고 칼을 휘두르고 주문을 외우면서 겅중겅중 뛰는 여인.
서정범 교수의 무당에 관한 몇몇 수필.
김동리의 무녀도나 을화, 태백산맥의 소희, 토지의 무당 딸 월선이.
때로 대부분의 절집마다 호랑이 탄 산신령의 탱화가 그려져 있고, 칠성각 산신각 산왕각등 신당이 사찰안에 버젓이 자리잡고 있어 상당히 의아하기도 하였고, 가장 형이상학적인 고급종교라는 불교의 도량에 어쩐 일로 귀신숭배의 전당이 공존하고 있는지 실소를 하기도 하였지만. 그렇구나, 고구려적 들어온 불교는 이미 토착화된 무속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던 것이구나 하는 정도의 느낌.
기독교 또한 무속적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어떤 것도 보고 듣고는 있었으나, 그것이 내 정서에 까지 이르기에는 요원한 대상이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던 무당에 대한 인상이란 대체로 로맨티시즘과 그로데스크가 교차하는 추상의 어떤 것일수 밖에 없었다.
나와는 전혀 다른 세계에 사는 이질적인 사람.
가엾기도 하고 요사스럽기도 하다는 정도의 느낌이었을 뿐 관심도 없었거니와 관심을 유발할 만한 그런 기회도 없었다.
그런데 얼마전.
잠시 한국을 다녀간 동경의 친구와 서울의 친구를 통하여 나는 그 녀를 알게 되었다.
나로서는.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어떤 샤먼적 소스라침을 은근히 기대하였었는데 저런,
그녀를 접하고는 안도하였다기 보다 오히려 엉뚱한 쪽으로 조금 놀라고 말았으니.
너무나 평범하고 편안한 면모.
그 연배의 여늬 여성에 비하여 첨단의 트랜드를 소화하고 그를 즐기는, 유능한 블로거이기도 한 그녀, 이해경.
그렇지만 그녀의 본령은 역시 무당이었다.
그 사실은 ‘사이에서’라는 영화에서 소름 돋을 만큼 여실하게 드러난다.
서면의 CGV에서 100분여 어두운 객석에 파묻혀, 스크린에서 명멸하는 그녀를 보았다.
일상의 면모와는 너무나 다른 모습, 오로지 무당인 그녀가 스크린 속에서 들뛰고 있었던 것이다.
“사이에서”
이창재감독이 만든 장편독립영화. (전주국제영화제에 초청돼 호평을 받았던 작품으로 지금(2006년 10월초순) 서울 부산등 대도시의 CGV에서 상영되고 있으며 독립영화로서는 유례없는 대단한 호응을 일으키고 있다)
이해경이 내림굿을 베푸는 여인들.
무병을 앓는 이상한 사람들.
익숙하게 살아왔던 여태까지의 삶의 형식을 모두 포기하고 무당이라는 전혀 새로운 형식으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운명의 사람들.
신이 선택한 사람들.
생생한 영상이다.
기획 단계에서 이해경은 어떠한 연출의 틈입도 거부하였고, 이창재감독 역시 작위적인 과장을 일절 배제하였다는 것은 이 영화 최대의 미덕이다.
이를테면 종장 굿판의 어떤 장면에서 그 천연덕스러운 촬영현장이 고스란히 화면에 잡힌다.
"이감독, 거 뻐기지 마슈." 이해경의 목소리.
나중 내게 설명하여 주는바, 쵤영 끝나고 나서 밥을 산다고 하였더니 감독은 ‘다음에’ 하고 거절하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감독한테 내뱉은, 영화와는 상관없는 푸념섞인 중얼거림이 편집과정에서 간과되어 증폭된 마이크에 그대로 잡혀 상영관에 걸렸던 것이다.
드라마트루기를 염두에 두지 않은 순수한 다큐멘타리이지만 랜덤하게 촬영되었을 방대한 분량의 필름의 편집은 극영화 못지않은 상당한 긴장감을 조성하여 이 부분에서 감독의 역량이 돋보인다.
그리하여 무당의 세계.
감독은 신비주의나 과장을 억제하며 담담한 다큐멘터리의 눈길로 그것을 바라본다.
그러나 감독의 눈길이 아무리 지성적이고 객관적이었다 할지언정 피사체의 그 다이나미즘을 어이하겠는가.
감독은 아마도 관음증의 희열로 즐겼으리라.
화면은 날생선처럼 살아 펄떡이는 에너지로 넘친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오로지 이해경으로부터 뿜어져 나온다.
그녀는 날 것으로 무당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비린내 진한 날 것의 에토스.
스물여덟의 처녀, 무병을 앓고 그를 인정하면서도 신을 받기 싫다고 몸부림치는 여인, 어쩌란말이냐 이 불쌍한 것 어쩌란 말이냐. 신이 네게 오겠다는데 왜 이리 힘들게 하느냐 불쌍한 것.가엾은 것..고대로 자신을 그 처녀에게 투사하여 함께 느껴 우는 이해경.
퇴행하여 어린애가 되어 버린 쉰 넘은 여인의 어린애 목소리와 공수를 주고받는 이해경.
여덟살짜리 소년에게도 신은 내리는 모양이다. 신이여 신이여 이 아이가 어른이 될때까지만 오지말라고 누름굿을 하면서, 스스로가 어린애가 되어 천진하게 전쟁놀이를 하는 이해경.
진오귀굿, 교통사고로 죽은 젊은사람의 혼이 씌어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못다한 말을 절절하고 흐드러지게 토하는 이해경.
이러한 것들.
아하,이를테면 모더니즘의 자식일법한 내게 그런 것쯤은 아무것도 아닐 터인데.
그런데 이상할사.
그 유치해 빠진 날것들이 내 무엇을 자극하여, 요상한 감동의 전율이 내게 엄습하였으니.
심장이 뛰고 얼굴은 붉어지고 때로 눈물이 비어져 나왔다.
감동이란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이다.
무의식이 자극받지 않은 감동이란 거짓이다.
그렇다면 그 감동의 정체란 과연 무엇이었을까.
어딘가 숨어있는 어떤 원시적 에토스의 원형질을 간파 당한 서늘함은 아니었겠는지.
그 감정모체의 현실은 한반도에 터잡아 연연히 이어온 이 민족이 공유한 집단무의식일런지.
홍청백 강렬한 원색으로 울긋불긋 너울너울 걸리고 차려진 신당.
흰수염의 산신령, 호랑이, 색색의 유치한 그림들.
북 장구 징의 단순 강렬한 리듬.
날선 작두를 핥고, 작두 위에서 춤추는 이해경.
한마당 축제같기도 한 그 제의(祭儀)의 원시적 형식미.
벌거벗은 원시성이 그곳에서 펼쳐졌는데.
단군으로부터 연연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감성의 원형질
그 집단무의식을 자극하여 펄떡이게 하는 것이 거기에 있었지나 않았는지.
그리고 울음과 눈물이 범람한다.
시종 울음이 주제인 영화.
이해경 뿐이랴, 공수를 받는 사람도 구경하는 사람도 어울려 거침없이 쏟아내는 눈물과 울음.
아, 다른건 몰라도 나는 알게 되었다.
무당이란 우는 사람이라는 것을 비로소.
우는 사람이고, 울게 하여주는 사람이 무당이였구나.
울음이란.
무당 스스로에게는 카타르시스이며 다른 이에게는 동화일까.
어쨌거나 울음의 메타포는 화해이다.
과거와의, 혹은 인연과의 혹은 한과의 혹은 맺힌 것들과의 다툼과의.
내 앞 서너칸 앞좌석에 앉아 영화를 감상하던 중년의 세여인.
처음부터 그녀들의 어깨는 들먹였고 처음에는 억제하는 듯 하다가 한 이십여분 지났을까 그녀들의 울음소림는 거침없이 내 귀에 이르렀다.
영화 끝나고 불이 밝혀지고 나서도 민적거리는 사람들, 부운 눈시울 진정시키려 함 내 모르랴.
나 또한 민적거렸는걸.
이 영화 포스터의 카피가 이러하다.
“신도 싫고 인간도 싫다. 그래도 또.. 울고가자”
이해경이 TV 방송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들었는데 나중 생각하니 그 함축하는 의미가 크다.
“무당이 되기전 너무 울었고 무당이 되고 난후에는 더 많이 울었습니다.”
너무 울었기 때문에 그 눈물이 무당으로 내몰았고, 무당이 되고 나니 남의 한겨운 설움에 내 설움 겹쳐 더욱 울게 되었다는.
나는 그러나.
명색 크리스찬으로서 나의 도그마는 확고하고 삼엄해야 한다.
그녀가 모시는 장군님이나 신령님이나 조상님들이 만일 신적인 어떤 것이라면 그녀의 신에게는 감동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영적인 독립된 존재라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마귀가 아니라는 점은 명백하여 결코 악한 영은 아닐 것이다. 사람에게 도움닫는 신령한 귀신들.
그러나 그것은 외부에 존재하는 어떠한 독립된 신적인 객체는 아니라는 것이 나의 도그마이다.
엘리사 다니엘 호세아등등 구약과 신약의 선지자 사도들에게 내린 능력의 기적을 신내림 현상의 일반론을 대입하여 무당을 연상하는 것은 불경할뿐더러, 사도행전등에는 별도로 예언의 능력을 가진 무당이 존재함을 기록하고도 있다.
그러므로 아아, 보다 근원적인 인간성 자체와 함께 하는 무엇이 巫가 아니겠는가 하는..
영화의 제목 ‘사이에서’는 신과 인간의 사이에서라는 뜻이다.
나는 라캉은 읽어보지 못하였지만 프로이트 융, 프롬, 프랭클은 조금 읽어 보았고, 매우 유치한 수준으로 정신분석을 천착한바 있어, 이 점에 있어서 나는 그 쪽으로 도피할 수밖에 없어 어설프나마 그쪽으로 잠시 지껄이려 한다.
오늘은 안녕
《무당考2》
"무당도 귀신이 무섭다"
무당 이해경의 말이다.
무당이 무서워 하는 귀신.그것은 귀신이 아니라, 퍼스낼리티 내부에 시커먼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무의식의 심연인지도 모른다.
무당이란 어쩌면.
무의식의 실체를 겪은 특이한 능력의 사람.
용암처럼 부글부글 들끓는 리비도의 정체를 엿본 사람.
그리하여 ‘이드’를 간파할수 있는 능력을 보유한 사람.
그 욕동의 현장을 파악하여 예지의 능력까지 이른 사람.
카오스적인 직관의 감성으로서.
에너지는 바로 모든 정신적 에너지의 원류인 ‘이드’로부터 곧바로 분출되므로 그토록 다이나믹한 것은 아닐까하는..
정신분석의.
방어기제를 무장해제시키는 사람.
합리화,주지화,동일시,내향화,투사,부정,억제,억압,반동형성,퇴행,상징화.를 깨뜨리고, 페르소나를 벗겨버려 감정모체의 진실과 대면케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바로 정신분석의일 것이다.
정신분석의는 양복입은 무당이다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지만 그러나 그는 무당이 될 수가 없다.
카우치에 누운 환자(프로이트의 경우)의 머리맡에서 전이와 저항을 다루는 그는 냉정하고 엄격하여 결코 환자에게 동화되어서는 아니된다.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여야 하며, 자신을 향하여 전이되는 환자의 감정을 좌절시켜야 한다.환자 또한 그 좌절을 견딜수 있는 강인한 자아가 요구된다.
분석을 받는 환자는 고독하게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감정모체의 현실과 대면하여, 스스로의 힘으로 어떠한 현상적 고통에서 벗어나야만 하는 것이다.
정신분석은 물리학과 같은 과학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의는 차갑지 않으면 아니된다.
그러나 무당은 함께 울어준다.
환자의 내면으로 서슴없이 걸어 들어간다. 그리하여 상대의 감정모체와 혼연일체가 되려 능동적으로 자신부터 벌거 벗는다.
동화하여 일체가 된다.
감정모체의 진실을 까발려 분석하고 보여 주려 하지 않는다.
심성의 존재 그대로 화해를 주선할 뿐이다.
현실의 극심한 고통의 감정모체의 진실이 근친상간적 충동이면 어떻고 유아적집착에 근거한 죄의식이면 어떠랴.
그 고통의 대상과 화해하여 버리면 되는 것을.
인간성의 본질적 동정에 근거한 것이므로 무당은 따뜻하다.
영화의 제목 ‘사이에서’는 신과 인간 사이에서 뿐이 아니라.
의식과 무의식, 外飾과 이드, 페르소나와 리비도, 현존의 것과 태고유형의 ‘사이에서’로 해석하여도 무방하지 않을런지.
분열된 그것들 사이에서 화해를 주선하는 무당.
주제넘게 내 무엇을 안다고 더 지껄이리, 이 주제는 이만.
‘혼의 소리 몸의 소리’
이해경이 쓴 책의 제목이다.
무당에 이르는 역정과 무당 이해경의 사상.
그녀가 무당에 이르는, 그 신산스런 삶의 역정은 어찌 보면 진부하다.
이 땅에는 그녀보다 몇 배나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왔고 살고 있는 사람들 무릇 기하일까.
성장, 학창시절, 결혼생활, 아들을 여위고 파경을 맞고, 신비한 경험과 증세, 그리고 드디어 무당이 되어가는 도정을 담담히 기술하였는데, 문장 사이 사이 왜 감춤 없겠으랴마는.
그러나 부끄러운 기억들을 망각과 도피의 영역으로 외면하거나, 혹은 자기합리화의 암시에 함몰되지 아니하고 써내려간 정직한 고백이다.
전업작가의 대필이 아니므로, 문장은 때로 생경하고 거칠지만, 적나라한 표현은 무당으로서 이해경의 미덕이기도 하지만 진정한 용기이기도 하다.
신이 선택한 여자.
그녀를 무당의 길로 내몬 것은 결코 자신이 아니다.
싫다고 싫다고 하는 그녀를 떠미는 그 신령이라는 것의 정체..
내림굿을 받는 장면의 긴박한 묘사는 거친 문장 속에 펄펄 살아있다.
그리고 그녀는 필경 운명을 승복하여야 한다.
“내게 들어 온다는게 신인지 귀신인지 모르겠지만, 이 길을 가야한다면 도와 주십시오. 신명이 나를 택해 무엇을 하려는지 신명의 뜻을 깨달아 신명이 시키는대로 할수 있게끔 도와 주세요.”
그러자 그녀의 입에서는 우렁찬 소리가 흘러 나온다.
신어미에게 호통을 친다.
“하늘의 문을 열고 천하 장군님이 드신다. 다들 나와서 장군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맞아 들이라!”
그리고 이해경은 무당이 되었지만.
다시 한번 만신 김금화 대무가 베푸는 또한번의 내림굿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신딸이 된다.
김금화만신은 치마를 벌린 그녀의 치마폭에 부채와 방울을 들리고 소리친다.
“무당새끼 하나 나왔다!”
“잘 물려라, 어진 사람이 되어야 하느니라. 중심을 잡아라.”
여기서 이해경은 구름 위에 떠있는 기분으로 날선 작두를 탄다.
비로소 그녀는 진짜배기 무당이 되었다.
오늘은 안녕
《무당考3》
과거사 용케 알아 맞추고, 현재사 정확히 짚어내어, 미래사 단도리 잘하는 무당.
장안에 용한 무당이라 소문이 나면서, 애둥이에게 내림굿을 베풀고 신딸과 신아들을 거느리며 차츰 큰 무당이 되어가는 이해경.
다른 한편 그녀는 국악에 빠져 들어간다.
어떤 대학생의“굿판의 장단이 휘모리로 시작해서 휘모리로 끝나느냐”는 질문 한마디가 그녀의 자의식을 뒤흔들었던 모양이다.
긴 세월 이 땅 사람들의 정조가 스며있는 음악인 국악이라는 장르.
모르겠으나 무당적 감성이 수렴한 국악의 음악적 요소들은 무당의 음율과 상당한 교호점이 있었을 법하고, 그녀가 국악의 오의에 이르게 된 과정은 알수 없으되 아마도 맹렬한 공부가 있었을 것이라고 유추할 뿐이고, 가야금 명인 황병기와의 공연등, 혹은 굿을 공연예술로서 연출하여, 국내외 무대에서 수십회 공연을 치르는 그녀에게서, 결과론적으루다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미루어 짐작 할 뿐이다.
이와 같은 무당外적인 예술행위로 인하여 명예와 돈, 또는 이른바 문화예술인으로 부러움을 샀을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어디까지나 순수한 무당임을 인식하고 당당하게 이를 천명하고 있다.
이것이 나로서는 이해경의 펀더멘탈은 어디까지나 무당이라고 믿고 있는 소이이기도 하다.
무당이라고 하여 스물네시간 내내 귀신에게 넋을 의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신명을 떠나 있을때 일상의 이해경은 지성적 면모 약여한 현대 여성.
그녀의 말에 의하면 굿판에서 조차 시종여일하게 신비주의에 함몰되어 있는 것은 아니란다.
신명에 사로잡혀 있을 때는 순간 순간이어서 대부분은 자신의 이성적 의식이 작용하여 공수를 베풀고 있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엘리야도 전시간을 관통하여 하나님께 사로잡혀 있지는 아니하였다.
육체적으로는 사람의 몸을 입고 있고, 성정 역시 사람일뿐으로서 때로 투덜대며 여호와께 불평을 늘어 놓기도 하였던 것이다.
무당임에랴.
평소 무당이라는 정체성에 대하여 회의하고 고민하는데, 그녀에게는 무당으로서 뚜렷한 소명의식이 있다.
뭐랄까,그녀는 이를테면 의식화된 무당일 것이다.
이것이 여늬 무당과는 다른 점이고, 이로 인하여 무당계에서는 이단(?)이라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하는 모양이다.
요즘 내림굿을 받는 애둥이 햇무당은 생글생글 웃는다나?
돈을 벌게 될 기대감에.
그녀는 이런 것들이 당췌 못마땅한 모양이다.
아무리 생명가치는 경제가치에 비하여 똥친 막대기 꼴이라지만 적어도 명색 신명을 모시는 무당마저 이런 풍조에 풍덩 빠져 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단호한 의식이 그녀에게는 있다.
귀신의 조화를 빙자한 한탕주의- 무당계에 만연한 배금주의에 대한 성찰이다.
내 안에 찾아 오시는 귀신이란 과연 무엇이고, 그 귀신의 권능은 나를 통하여 베풀고자 하는 것음 무엇이고, 과연 어떻게 어떤 식으로 어떤 쪽을 향하여 표출되어야 하는지.
중생의 고단함을 닦아준다는 巫的 덕목의 상실에 대한 안타까움.
그녀가 생각하는 무당의 정의란 지극히 분명하다.
넋두리를 들어 주는 역할.
넋두리를 들어주고, 그 넋두리에 함께 울어주고, 고달픔과 외로움과 아픔을 함께 나누어 응어리를 풀어주는 사람.
모든 것을 귀신에게 의탁하는 것이 아니고, 해답은 바로 그 넋두리 안에 있다는 것.
그리고 넋두리란 대상을 향한 믿음과 존경이 있어야 나오는 것이고, 그 신뢰와 존경의 근거가 바로 무당이 모시고 있는 신명의 권위이고 권능이라는 얘기다.
또한 신명이란 넋두리를 집중하여 들을수 있는 능력의 근본이기도 하다.
무당은 무슨 굿이든 혼신의 힘을 다하듯 다른 이의 넋두리 역시 혼신의 힘을 다하여 들으면서 그 이야기 속에 동화 되어 가는 것이다.
이해경은 이를 주파수를 맞춘다고 표현한다.
사람마다 파장이 있는데 라디오의 주파수를 맞추듯 무당은 사람 사람마다의 그 파장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결국 정답은 그 넋두리에서 나오는 것이지, 신명의 느닷없는 공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녀는 꿈이 있다.
도시 중심가에 교회나 성당이나 절처럼 거창하지 않더라도 엄숙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누구라도 편안하게 찾아올수 있는 소담한 넋두리의 집을 만들고 싶다는 꿈.
넋두리의 집이라니.
넋두리의 집.
얼마나 근사한가.
넋두리라면, 종교에 있어서 그것은 바로 기도의 의미 일것인데.
그러나 기도는 넋두리가 아니다.
나의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중언부언 하지 말라, 그는 이방인들이 하는 짓거리. 너의 하나님께서는 이미 네가 필요한 것을 알고 계시다고.
이 말씀의 배후에는 예정론이라는, 심오한 창조주의 손길이 느껴지는바 하나님 의식없는 그저 늘어놓는 넋두리로서의 기도란 실로 천박하다.
그러나 어쩌랴.
인간이란, 중언부언 속의 맺힌 것들을 뱉어내야 위로가 되는 동물이어서, 이 시대 신앙은 중언부언 ,..주옵쏘서...주옵쏘서.하면서 스스로 기복신앙으로 끌어 내려 자신의 종교를 스스로 폄훼하는데, 어쩔수 없는 인간의 속성이 그러한걸.
완벽한 성서적 삶이란 아마도 존재할수 없을 것.
예수님의 그 사랑이란 인간의 성정으로서는 도달할수 없을 것.
완벽한 헌신과 숭모, 복종과 예배란 인간에게는 참으로 지난한 과제일 뿐, 나같은 나이롱은 흉내 내기에도 숨차다.
인간.
모두에 나는 인간이란 슬픈 동물이라고 썼는데, 참으로 섯불리 뱉어낸 그 한마디가 이제 와 참으로 버겁다.
그러나 할수없지.
예전 접하였던 에리히 프롬의 컨텐츠를 빌려다가 아서 클라크의 상상력에 빌붙어 몇마디 지껄이고 빨랑 끝내야겠다.
아득한 옛날.
물끄러미 달을 올려다 보고 있는 동물 한 마리가 있었다.
문워처(Moon Watcher)라는 이름의 숫컷.
네안데르탈인 쯤의 원시인.
아, 그는 슬슬 자각(Self-Awareness)과 이성(Reason)과 상상력(Imagination)이 싹트고 있는 중이다.
동물의 생존을 특징짓고 있는 조화 (Harmony)가 붕괴되기 시작하는 징조.
자연과의 조화로움이 사라지기 시작하는 동물이란 필경은 우주의 기형아가 될 터인데도 문 워처는 어쩔수가 없다.
누군가가 그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비극의 시작은 이토록 애잔한 원시의 달밤의 프롤로그로 페이드인 된다.
문워처는 이제 현대인이다.
호모 사피엔스에 이르고자 장대한 시간이 흘렀고, 철학과 과학과 예술이 그의 인생을 수놓고 풍요롭게 하였을지언정 아직도 호모 사피엔스에의 길은 요원할 뿐.
문워처는 역시 자연의 일부분이다.
그러나 그는 자연의 물리적 법칙에 순응하고 그 법칙은 바꿀수 없지만, 자각과 이성과 상상력은 그를 자연으로부터 낯선 것으로 끊임없이 내몰고 있다.
그러나 문워처는 자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무력함과 존재의 한계성을 깨닫고 있다.
그는 자기 인생의 결말, 즉 죽음을 눈 앞에 그려 본다.
존재의 이분법.
자기가 아무리 원하고 있다 하더라도 자기 마음을 쫓아 낼수 없으며 또한 살아있는 한 자기 육체의 자연법칙에서도 벗어날 수 없는 문워처.
그리고 그의 육체는 그를 살고 싶게 만든다.
전적으로 지적인 존재도 아니고, 전적으로 동물도 아닌 문워처.
이 양극성에 균형을 이루지 않는다면 그는 살아 낼수가 없다.
문워처는 思考 속에서만 아니라 생존 과정 중에서도, 자신의 행동 중에서도 자기 존재의 양면성에 저항해야 하면서, 존재의 모든 영역에서 통일성과 일치감을 경험하기 위한 눈물겨운 몸부림이 필요하다.
존재의 모든 영역에서 통일성과 일치감을 경험하기 위하여 그는 발명하고 발견한다.
신이 있어야 하고, 다른 한편 모듬살이가 있어야 한다.
군거적 순종의 원리, 모듬살이의 원리란 지극히 비이성적인 집단적 무의식이면서 어떤 경우 집단적 광기가 되기도 하지만.
그러나.
하고자 하는 얘기인즉슨,
군거적 순종의 원리(Herd Allegiance)에 지배받는 문워처의 근세적 삶은 아름다웠고 그의 죽음은 행복하였다는 얘기다.
문워처의 무당은 그의 군거를 이룬 동굴이었고, 우리에게는 이미 그 동굴이 없다.
아아, 이만.
가을이라는데 한낮은 이리도 덥도다.
나의 무당이여.
나를 .
죽은 내 어머니와 화해케 해다오.
2만관객 돌파!관객여러분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있는〈사이에서〉가지방 관객분들을 찾아 뵙습니다!!!
2006년 가을,죽은 자를 만나는 이들이 전하는 산 자의 뜨거운 눈물!〈사이에서〉
추가 개봉관
광구극장 - 10월 26일부터 2주간 상영
대구 동성아트홀 - 11월 2일~15일
대전 아트시네마 - 11월 9일~22일
첫댓글 어디서 이런 좋은 정보를 얻어오시나???? 내일까지넹 힝 어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