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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보라매병원 사태때 적은 글입니다.
요즘의 상황과 오버랩되는 부분도 있어 옮겨봅니다.
다시 꾸며보는 옛이야기/ 토끼와 동물재판
은행나무가 우거지고 살구꽃이 만발한 어느 숲속에 토끼가 살았습니다.
마음이 따뜻하고 눈빛이 밝은 토끼는 원래 나무를 하며 사는 나무꾼이었었는데 언젠가 커다란 가시가 잇몸에 박혀 고생하는 사자을 도와준 적이 있었습니다.
사자는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오히려 가시를 빼려고 사자 입에 들어간 토끼를 잡아먹지 않은 것만 해도 고맙게 생각하라며 거드름을 떨었지만, 토끼의 섬세한 손길과 용기있는 이 행위는 멀리까지 소문이 퍼져 다치거나 몸이 아픈 동물들은 언제나 토끼에게 달려왔지요.
사나운 동물에 쫓겨 가시밭을 지나다 발바닥을 다친 작은 동물이 오기도 했고요, 높은데서 떨어져 허리를 다치거나 바위에 부딪쳐 깊은 상처를 입은 큰 동물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열이 나거나 설사를 하는 동물들도 찾아왔지요.
하루종일 아픈 동물들을 보살피느라 때로 끼니를 굶거나 제대로 잠을 자지도 못했지만 토끼는 몸이 나아진 동물들의 미소와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보람에 힘든 일들을 다 잊었습니다. 숲속 동물들은 그래서 토끼가 사는 곳을 보람의 집이라고 불렀지요.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날도 늦은 일과를 마치고 지친 몸으로 자리에 누우려는데 여우가 급히 달려와 토끼를 깨우는 거였습니다.
"큰일났습니다, 토끼님. 저의 주인님이 길을 가다가 그만 큰 구덩이에 빠져버렸습니다. 떨어지면서 많이 다친 것 같은데 같이 가서 좀 돌봐 주실래요?"
토끼는 여우의 다급한 요청을 받고 밧줄과 약초를 챙겨 숲 속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날은 어두워져 주위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토끼는 여우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습니다.
한참을 가다보니 과연 큰 구덩이가 보였고 그 속에서 들릴락 말락하는 짐승의 신음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막상 여우를 따라 오긴 했지만 이 높은 구덩이에서 동물이 떨어졌다면 다쳐도 아주 크게 다쳤을 거라고 토끼는 생각했습니다.
여우와 토끼는 급히 밧줄을 타고 구덩이에 내려왔습니다. 어두운 중에서도 토끼가 가만히 살펴보니 바닥에 머리를 다쳐 정신을 잃은 호랑이가 눈에 띄었습니다.
순간 토끼는 구덩이에 빠진 호랑이를 꺼내주었다가 호랑이에게 먹힐 뻔한 나그네를 슬기롭게 구해준 할머니토끼의 옛이야기가 생각나 잠시 망설이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렇지만 토끼는 무서운 사자 입 속으로도 머리를 넣은 적이 있는 용감한 동물이었지요. 더구나 머리에서 피가 나고 허리를 돌릴 수 없을 만큼 많이 다쳐있는 호랑이 앞에 서자 토끼는 더 이상 딴 생각으로 주저할 수가 없었습니다.
토끼는 재빨리 약초로 머리를 감싸고 허리를 단단한 나무로 고정시킨 후 늘어뜨린 밧줄로 호랑이를 묶었습니다. 그리곤 다시 땅에 올라와 여우와 함께 줄을 당겼습니다.
우선 급하게 처치는 했지만 좀더 밝은 곳으로 옮겨 호랑이를 계속 돌보아야 했기 때문이지요. 무거운 호랑이를 잡아당기느라 토끼는 몹시 힘이 들었지만 흐린 달빛만 구름에 가린 채 비칠 뿐 숲 속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구덩이에 들어갔다 온 후부터 여우는 줄을 건성으로 당기며 딴전을 피우는 것이었습니다. 토끼는 매우 지치고 화가 나서 여우에게 소리쳤습니다.
"아니, 여우각시. 아까 그렇게 호들갑 떨 때는 언제고 지금 뒤로 쭉 엉덩이를 빼고 있으면 나 혼자 어떻게 하라는 말이에요. 빨리 줄을 잡고 나를 도와주세요."
"미안해요, 토끼님. 그렇지만 제 말도 좀 들어보세요."
여우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들고 흐느끼며 말하였습니다.
"사실 제가 호랑이를 주인으로 받든 것은 꼭 호랑이를 존경한다거나 좋아해서가 아니었어요. 이 숲 속에서 제 혼자 먹이를 구하기에는 너무 힘이 부쳐 호랑이의 부하가 된 것이었지요.
물론 호랑이의 부하 노릇하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눈치밥이나마 많이 먹을 수 있어 좋았거든요. 그리고 호랑이가 무서워 아무도 저를 함부러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세에 기대어 사실 제가 얻은 바 또한 컸지요.
그렇지만 지금은 어떠세요. 토끼님이 보기에는 어떠실 지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엔 호랑이는 너무 많이 다쳐 살 가망이 없을 것 같아요. 설혹 살아난다고 해도 더 이상 이 숲 속에서 힘센 동물로 지낼 수는 없을 것 같아요. 그러면 제가 더 이상 호랑이의 부하가 될 필요가 없는 게 아니겠어요?
아니, 잠깐만 요, 토끼님. 방금 제가 너무 야박하고 이기적이라고 말하려 하셨지요. 예. 그럴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호랑이는 평소에 저에겐 참 심했어요. 제대로 맛있는 음식을 나눠주지도 않으면서 화가 나면 아무렇게나 저를 마구 물어뜯고 할키었지요. 여기 한 번 보세요. 이 많은 상처를......"
여우가 내미는 손과 발에는 정말 너무나 흉측한 호랑이 이빨자국들이 보였습니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다시 여우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토끼님, 저는 지금 지난 일의 야속함 때문에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냉정히 생각해보세요. 이렇게 다 죽어가는 호랑이의 수발을 연약한 제가 앞으로 어떻게 다 들 수 있겠어요. 어디서 그 많은 먹이와 약초를 구한단 말입니까? 살아난다고 해도 제구실 못하는 호랑이는 제게 짐만 될 뿐이에요.
가슴 아프고 눈물이 나서 앞이 보이지 않네요. 여기까지 급히 오시라고 해놓고 제가 아무 것도 토끼님께 감사의 마음으로 드릴 것도 없어 죄송해요. 토끼님. 오늘밤 일은 없었던 일로 하고 이제 그만 호랑이를 내려놓고 그냥 갑시다.".
토끼는 한편으론 여우를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도저히 호랑이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찌 그런 말을 할 수 있소. 내가 이 험한 숲속길을 달려와서 호랑이를 보살피려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오. 신음소리와 상처부위를 보면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양심 때문에 이 밤길을 쫓아온 것이요.
보시오. 아직 숨쉬는 소리가 들리지 않소. 비록 가능성이 적을지 몰라도 이렇게 심장이 뛰고 있는데, 빨리 저 밝은 숲으로 옮겨서 내가 여름 내내 애쓰며 뜯어놓은 비약을 갈아붙이면 다시 예전처럼 기운을 차릴지도 모르지 않겠소?"
"토끼님은 지금 제가 듣기 좋으라고 자꾸 희망적인 말을 하지만 그럼 다시 물어볼게요. 토끼님, 호랑이가 확실히 살 가능성 있습니까? 토끼님이 호랑이를 온전히 살릴 자신이 있으세요? 토끼님 말을 듣고 호랑이에게만 매달려 있다가 호랑이가 죽으면 토끼님이 책임질 수 있나요. 그 동안 들인 나의 노력에 대한 보상은 요? 토끼님이 쓴 약초값도 주지 않아도 되나요?.....
보세요. 제대로 대답을 못하잖아요. 결론은 내려졌어요. 저는 호랑이에게 문제가 생겨도 토끼님을 원망하지 않을 테니 제발 제 하라는 대로 해주세요."
여우에게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한 번 달리 마음을 고쳐먹은 여우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뒤에서 당기던 줄을 놓고 여우는 어둠 속으로 달려가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토끼는 혼자 안간힘을 썼지만 구덩이 밑까지 떨어진 호랑이를 다시 꺼낼 수는 없었습니다. 여우도 사라진 어두운 숲속에서는 아무도 토끼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이튿날 아침이었습니다. 남쪽 양지바른 숲에서 볕을 쬐러 나왔던 잿빛늑대 한 마리는 염소와 함께 허둥대며 숲으로 들어가는 여우를 발견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어 가만가만 뒤를 쫓아갔습니다.
어떤 구덩이에 이르러 여우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염소와 함께 그곳에 들어가는 것을 보자 늑대는 재빨리 구덩이에 다가갔습니다. 두런두런 낮은 목소리로 염소와 여우가 하는 이야기가 그때 들려왔습니다.
"쯧쯧, 아마 떨어지면서 머리와 허리를 크게 다친 것 같구먼. 아니 그것보다도 누가 끌어올리려 하다가 떨어지면서 허리를 다치고 다시 머리를 부딪힌 것이 더 위험했는지도 몰라. 끌어올리려면 좀 제대로 할 것이지."
"아니에요, 염소아저씨. 제가 토끼와 함께 다친 곳을 치료하고 끌어올리려 했을 때에 호랑이는 거의 다 죽어있었어요. 힘이 부쳐서 다음날 다른 동물들의 도움을 빌리려고 했는데 그 사이 이미 죽어버렸던 거예요."
"글쎄다..... 떨어져 죽은 것으로 해두고 어디 끌어 묻을 자리나 찾자꾸나."
숲의 질서를 보호한다는 사명감을 내세워 나서기 좋아하는 이 단순한 늑대가 그 말을 놓칠 리가 없었지요. 호랑이의 몸에 밧줄이 묶여져 있는 것을 확인한 늑대는 즉시 무리를 모아 여우와 토끼를 다짜고짜 끈으로 묶고서 검독수리 둥지가 있는 숲속 공터로 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는 토끼와 여우를 꿇어앉힌 후 모여든 여러 숲속 동물들 앞에서 소리쳤습니다.
"너희가 저 호랑이를 죽였어. 제대로 끌어당겼으면 살 호랑이를 높은 구덩이에서 다시 밀어 넣었기 때문에 호랑이는 죽은 거야. 평소에 호랑이가 여우 너를 무시하고 괴롭혔다기로서니 거기에 앙심을 품고 찬 이슬 속에 내버려둠으로써 호랑이를 죽게 만들었으니 너는 호랑이를 죽이려는 마음을 먹었음이 틀림없어.
그리고 비록 여우가 끌어당기는 것을 포기했더라도 토끼 네가 힘껏 당겼으면 그 호랑이는 살아나지 않았겠어? 네가 좀더 적극적으로 여우의 마음을 돌리지 않고 여우가 밧줄을 놓아버렸다고 해서 덩달아 호랑이를 다시 구덩이에 떨어뜨린 너도 호랑이를 죽게 한 죄를 지었어.
정신을 잃어 스스로 살려달라고 말하지 못한다고 존귀한 생명을 너희들 마음대로 판단하여 죽게 내버려뒀으니 너희들은 큰 벌을 받아야 해"
토끼는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입만 벙긋댈 뿐 한마디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아니, 우, 우리가 도, 도착했을때는 호랑이는 거의 다 죽어가고 있었어. 어두운 밤중에 깊은 구덩이에 들어가 그나마 흐르는 피를 멎게 하고 숨을 쉬도록 고개를 돌리고 여름 내내 고생하며 뜯어놓은 약초를 발라주며 호랑이를 살리려 한 내가 죄를 지었다고?
아니 모두가 잠든 한밤중에 달려나와 응급처치를 하고 갖은 애를 써서 호랑이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려 한 내가 호랑이를 죽였다는 말이야? 여우마저 가버린 아무도 없는 숲속에서 나 혼자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늑대가 다시 목을 쳐들고 주위에 모인 동물들이 들으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처음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중요한 게 아냐. 너는 염소의 이야기도 못 들었어? 너희들이 끌어올리려다 다시 떨어지며 다친 상처로 인해 호랑이가 죽었다는 말을?"
그러자 멈칫 놀라며 염소가 발뺌을 했습니다.
"아니, 그, 그게 아니라 나, 나는......"
염소를 째려보면서 늑대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이럴 게 아니라 여기 모인 동물들에게 물어보자. 토끼와 여우가 호랑이를 죽인 게 맞는지 아닌지를 말이야."
"그래. 우리 숲속가족들에게 물어보자. 내가 얼마나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는지를."
토끼는 모인 동물들이 평소 자신이 돌봐준 적이 있는 동물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적이 안심하며 말했습니다.
"토끼가 나빠!"
소나무가 기다렸다는 듯이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토끼는 약을 만든다는 구실로 내 껍질을 벗기거나 약을 끓인다는 핑계로 나를 마구 꺾어 불을 때기만 할 뿐이야."
"말도 안돼, 소나무야. 그리고 지금 네 이야기는 이번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잖아?"
토끼가 소리쳤지만, 소나무는 거친 잔가지를 마구 흔들며 다시 말했습니다.
"나는 그런 복잡한 것은 몰라. 그렇지만 네가 약을 뿌리고 흙을 북돋아주고 송충이를 잡아준다고 내가 너를 좋아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마. 다 네가 나를 이용하기 위해 나를 위하는 척 했을 뿐이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구, 흥!"
"아니, 네가 그렇게 말할 줄....."
"자, 자. 또 다른 이야기할 숲속 가족 없어?"
늑대는 토끼의 말허리를 자르고 스윽 좌중을 돌아보았습니다.
"맞아, 토끼는 나빠."
얼마 전 토끼에게 가시가 박힌 발바닥을 치료한 적 있는 고슴도치였습니다.
"내가 그렇게 아파서 빨리 치료해달라고 해도 그 쓰잘데 없는 개구리를 위한답시고 나를 홀대했어. 내가 눈물이 나고 소리 좀 질렀기로서니 그렇게 나를 무시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호랑이를 죽인 것은 토끼가 한 일이 맞아."
"그건 오해야. 그땐 개구리가 너보다 더 급한 상태이고 또......"
"토끼는 혼이 나야해"
누가 다시 토끼의 말을 끊으며 말했습니다.
"어, 너는 우리 집에서 일한 적이 있는 말이잖아?"
"토끼는 틈만 나면 내 옆구리를 걷어찼어. 응급을 요한다나 어쩐다나 하는 구실로 피곤한 나의 등허리에 올라타서 가뜩이나 아픈 허리를 마구 누르고 회초리로 엉덩이를 때렸어. 그깟 좀 늦으면 어떻다고 그래? 나를 괴롭힌 토끼를 이 기회에 그냥 둬서는 안돼."
"그래 맞아, 토끼가 호랑이를 죽였을 거야."
머리에 큰 뿔을 달고 있는 사슴이 말했습니다.
"앗, 얼마 전에 나뭇가지에 뿔이 걸려 고생하는 너를 내가 빼준 적이 있는데...."
"흥, 그때는 너무나 정신이 없어서 네게 수없이 고맙다고 했지만 알고 보니 그 나뭇가지들은 네 집으로 가는 길을 넓히려고 치워놓았던 나무덤불이었어. 네가 없었더라면 내가 그 곤욕을 당하지 않았을 거잖아. 그런데도 너는 나에게 미안한 줄도 모르고 오히려 이 멋진 뿔가지를 잘라버리라고 훈계를 해?
아름다운 이 뿔 하나로 오롯히 살아가는데, 거추장스러워도 내 멋인데 네가 왜 간섭을 하니? 오라, 너는 내가 뿔을 자르면 녹각을 그 잘난 치료약에 쓰려는 모양이지? 그래, 이제 알겠다. 내가 네 속셈을 모를 줄 알아?
"호랑이를 죽인 토끼는 혼줄이 나야 해"
굵은 소리를 지르며 절룩거리며 곰이 나서며 한 말이었습니다. 곰은 얼마 전에 물고기를 잡으려고 바위를 들다가 발을 찧은 적이 있었습니다.
"비록 내가 실수를 해서 발을 다쳤지만 네가 나를 잘 치료해줬으면 이렇게 발을 절지 않았을 거야. 자신이 없으면 없다고 할 것이지 왜 쥐뿔도 모르는 것이 나서서 말끔하게 나을 수 있는 내 발을 병신으로 만드는 거야, 이 돌팔이 녀석아! 나를 이렇게 만든 것도 저 녀석이 한 짓이고 호랑이를 죽인 것도 저 녀석이 한 짓이야."
씩씩거리며 곰은 토끼를 칠 듯이 달려들었습니다.
토끼는 숲속 동물들의 이야기에 더 이상의 할말도 잊고 멍하니 하늘만 쳐다봤습니다. 눈물조차 나지 않는 눈앞은 캄캄하기만 하고 답답한 가슴속에서는 심장도 뛰기를 멈춘 적 같았습니다.
"토끼는 나빠."
또 누군가 나서며 말하였습니다. 반들반들한 눈빛을 가진 들쥐였습니다.
"우리가 밤낮으로 일하며 땀을 흘리는 중에도 저 토끼는 시원한 숲그늘 아래에서 편히 앉아 지내. 우리가 고맙다고 주는 먹을거리를 먹고 저렇게 기름 번지르르한 것 좀 봐. 아마 모르긴 해도 집 뒤 나무 밑을 파보면 숨겨둔 열매와 고기가 그득할 거야. 저 혼자 먹겠다고 썩을 때까지도 남 줄줄 모르는 저 토끼는 혼이 나야해.
"아니야, 토끼는 죄가 없어."
웬 소리인가 반가워서 토끼가 돌아보니 건너편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였습니다.
"죄를 묻는 것은 뭔가 생각하고 판단할 줄 아는 자에게 묻는 거야. 토끼는 아픈 동물 가족들에게 상처를 싸매고 약초나 줄줄은 알아도 숲 속의 어떠한 일에도 관심을 둔 적이 없어.
작년 여름, 숲에서 난 큰 산불로 어린 새끼동물들도 다 나서서 거들었을 때 토끼는 어디 불끄려고 나와나 봤니. 뭐? 다친 동물을 돌봐주기 바빴다고?
그렇다면 작년 가을 녘에 많은 비가 와서 숲 어귀에 산사태가 났을 때 같이 소매 걷어붙이고 흙더미를 나르려 해봤니. 이웃 숲에서 삵쾡이 떼들이 쳐들어왔을 때도 같이 나서서 어깨를 마주 대어본 적도 없잖아.
어디 그것 뿐이야. 몇 년 전 못된 하이에나가 사자를 쫓아내어 숲의 높은 곳을 차지하고서, 거기에 맞서 싸웠던 동물가족을 잡아 마구 죽일 때 너는 오히려 그러다가 다친 하이에나 상처를 핥아주느라 더 바빴지.
또 네 집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약초 싸매는 방법을 배운 뱀이 숲 가장자리에서 자리를 깔고 우리를 돌봐주려 했을 때 네가 마구 화를 내며 뱀을 멀리 쫓아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 있어. 그건 네 자리가 위협받기 때문에 그렇게 한 일 아니니? 어줍잖은 손재주로 상처를 잘못 건드리면 덧나기 때문에 네가 그렇게 했다지만 우리야 그저 피 안 나게 다친 곳만 잘 닦아주는 동물이 하나 더 있는 게 좋거든. 네 집 앞에서 여름땡볕에 오랫동안 기다리다보면 더 병이 날 것 같다 말이야.
또......, 에이, 너무 많아 입에 올리려하니 목만 아프구나. 하여튼 숲속 생활에 대해 그런 저런 판단도 제대로 못하는 토끼에게는 죄를 물을 가치조차 없어."
"자, 자. 여러 동물가족 여러분. 오늘 이 자리는 토끼의 행동으로 인해 호랑이가 죽었느냐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지 여러분들 개인적인 분풀이나 사적인 감정으로 이야기해서는 안되며 또 잘못한 지난 일과 연관하여 유추해서도 안됩니다. 비록 토끼가 나쁜 녀석이지만 말입니다....."
교묘하게 말을 돌리며 숲속동물들의 의견을 휘어잡았다고 생각한 늑대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들은 감정적으로 이 토끼를 범인으로 지목하지만 저는 오랫동안 쌓아놓은 논리적인 경험이 많지요. 자, 전문적인 판단이야 여러분들이 어찌 내리겠습니까? 그저 여러분들이 분위기만 잡아주시면 이 녀석 엮어내는 것은 저기 점잖게 앉아 계시는 검독수리 영감님과 제 몫이지요. 하하하."
대중을 씩 돌아보며 한창 흥이 돋구어졌다고 판단한 늑대는 헛기침을 크게 하고 다시 말을 했습니다..
"지금 토끼는 우리가 밤낮으로 눈을 두리번거리며 먹을 것을 찾느라고 힘이 들 때 편히 그늘에 앉아 찾아오는 동물들이나 상대하다가, 밤에 숲속을 좀 걷고 구덩이 속에 들어가 피를 닦아주고 풀을 얹어주느라 힘들었다고 우리에게 생색내지만, 그거야 토끼가 평소 하는 바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렇게 하라고 지난여름 우리들이 땀을 흘려가며 토끼집으로 가는 길을 넓히고 문도 고치고 또 밤에 찾아온 동물 잘 보라고 달빛이 잘 비치는 창문도 다시 달아준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이 숲을 지키려고 고생하며 일을 하다가 다친 상처를 돌봐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지 않아요? 그늘에 앉아 시원한 바람쐬며 토끼가 숲속에서 나뭇가지를 벗기고 풀을 캐어낸다고 누구하나 숲이 망가진다고 이야기한 적도 없지 않습니까?"
잿빛늑대는 침을 삼키며 새로 말을 이었습니다.
"염소의 말을 빌면 만일 토끼가 제대로 끝까지 호랑이를 돌보았더라면 죽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습니다. 비록 여우가 마음을 바꿔 어쩔 수 없었다고 했지만 가장 그 호랑이의 상태를 잘 아는 토끼가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계속 끈을 끌어당기도록 해야지, 그대로 두면 죽는다는 것을 뻔히 알고서도 여우의 꾐에 빠져 다시 호랑이를 구덩이에 빠뜨린 것은 양심을 저버린 행위임에 틀림없습니다. 혼자 힘이 부치면 크게 소리를 질러 이웃의 도움을 청할 수도 있지 않았겠습니까.
또한 토끼는 '적극적으로 돌보더라도 호랑이는 다시 살아날 가능성이 별로 없는 상태였다'라고 이야기하지만 그때 여우에게는 '잘 돌본다면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아. 그것은 여우가 희망을 가지고 좀더 적극적으로 밧줄을 당기라고 한 말이었다고 변명을 하고 있군요.
자, 보십시오. 그렇다면 만약에 토끼가 제대로 돌보았더라도 살지 못했을 거라는 증거가 있으면 제시해보십시오. 자, 없지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대로만 돌보면 살릴 수 있을 호랑이를 다시 구덩이 속에 밀어 넣음으로써 호랑이를 죽게 한 토끼는 결국 호랑이를 죽게 한 결정적인 책임이 있다고 판단되므로 여우와 더불어 토끼는 유죄임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토끼는 억장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지금껏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지 지난 일이 한심스러워졌습니다. 아픈 동물이 회복되어 가는 모습에 기뻐하고 죽어 가는 동물의 모습에 한없이 슬퍼했던 지난날의 모습이 너무나 바보같이 생각되었습니다. 호랑이를 죽였다는 누명을 덮어쓴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해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금씩 정신이 들면서 토끼가 가만히 살펴보니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원래 야행성 동물인 늑대는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무리 지어 다니며 이곳저곳 훔쳐보기를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동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포박한 저 늑대는 낮에도 따로 떨어져서 잘 다닐 뿐 아니라 모습도 꼭 개를 닮은 모습이었지요. 혹시 잘 길들여진 개를 누가 늑대의 무리 속에 슬쩍 섞어놓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전 사자를 쫓아내고 숲에 불을 질러 많은 동물을 죽게 한 하이에나 무리에 대해서 숲속 동물들이 죄를 묻고자 했을 때, 마치 불이 자연적으로 난 것인 양 떠들다가 오히려 한술 더 떠서 타고남은 재로 인해 전보다 숲이 더 무성해졌다고 소리치던 자들이 저 늑대들이었지요.
그러다가 새로이 숲의 가장 높은 나무에 올랐던 원숭이로부터 넌지시 충동질을 받고서야 하이에나를 잡는다고 온통 숲을 시끄럽게 했던 무리가 아닙니까. 그러고 보니 토끼는 언뜻 떠오르는 느낌이 있었습니다. 혹시 이번에 새로 숲의 양지를 차지한 노회한 사자가족으로부터 어떤 언질을 받았던 걸까요.
지난번 원숭이가 경박하고 어설픈 재주를 피우다가 숲으로 흘러 들어오는 강물이 메말라버려서, 많은 나무줄기가 시들고 뿌리가 썩어 가는 요사이 흉흉한 숲속의 분위기를 바꿔보려 던지는 어떤 암시가 있는 걸까요. 그렇지 않다면야 이 오래된 숲속에서 자연의 섭리대로 되어온 동물들의 죽음을 지금껏 모르는 척 지내다가 느닷없이 동물들을 새로 모아놓고 때아니게 울부짖을 이유가 없지 않겠어요.
늑대들은 어차피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위세를 과시하고 나름대로의 서열을 중시하는 동물이어서 으르렁거리는 한 마리 늑대 뒤에는 반드시 다른 늑대 떼들과 그들을 비호하는 어떤 세력들이 도사리고 있기 마련 아니겠어요.
숲속에 서서히 눈이 익숙해졌을 때 토끼는 멀리 공터 가장자리에 서있는 할머니토끼를 보았습니다. 나그네의 위험을 구해줬던 지혜로운 할머니토끼는 그러나 눈에 눈물만 글썽인 채 발밑만 쳐다보는 것이었지요. 그때처럼 상황을 재현하려고 죽은 호랑이를 살려낼 수도 없을뿐더러 멀리서 무심한 척 발톱만 다듬는 사자의 눈초리가 예와 같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주위가 다소 조용해지자 토끼가 나직하게 말했습니다.
"나는 지금껏 정말 성실히 숲속 가족들을 돌봐왔어. 내가 아니면 할 수 없다는 믿음으로 어려운 이 일을 쓰다 달다 않고 해왔어. 우리 동물가족들에게 섭섭한 마음도 들고 하고 싶은 말도 또 많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아프게 새겨듣겠어. 그 동안 바깥의 다친 데만 돌보았지 그 마음속은 잘 못 헤아렸던 것 같구나.
어젯밤 이 일도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한 거야. 지금껏 우리 숲속에서는 늘 그랬었잖아. 나는 정성을 다했어. 당신들의 요청 없이 내가 잘 뛰어들 수 없듯이 당신들이 포기하면 나는 손을 뗄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어. 여우를 대신해 여기 누가 호랑이를 맡아줄 자 있겠어? 누가 대신 돌봐줄 만큼 아직 우리 숲속이 풍족하진 않잖아? 지금까지 다 그런걸 감수하고 이해해온 바 아니니? 물론 그 동안 이런 일에 내가 깊이 생각해서 미리 대비하지 않았던 게 안타깝기도 하지만 말이야....."
길게 한숨을 내쉬며 토끼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이제 섣부른 늑대의 위세로 인해 내가 죄지은 자가 되면 숲은 더 이상 평화롭지 못할 꺼야. 아무도 죽어 가는 동물에게 적극적으로 나서려 하지 않을 것이고 죽어 가는 동물의 가까운 보호자는 모두다 죄값을 치르게 될지 몰라.
제대로 모두가 도와줄 수 있는 숲의 여건도 갖추지 않고서 이상적인 행동만을 요구하는 저 늑대의 발톱 속에 숨겨진 칼날을 바로 우리는 알아차려야 해. 비록 오늘은 이 자리에 내가 섰지만 내일은 또 선량한 누가 이 자리에 설 지 몰라. 바로 여러분들을 모두 죄지은 자로 몰아 새로운 권위를 세우려는 음모일지도 모르잖아?"
점차 어두워오는 저녁 하늘엔 이제 핏빛노을도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들어봐. 내가 벌을 받게 되면 당장 현실적으로 지금 이 숲엔 나의 역할을 할 동물은 없어져. 뱀이 있지 않냐고? 그 녀석은 오직 상처를 닦아주는 기술자지 우리 같은 윤리의식은 없는 자야. 저들무리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뱀같은 녀석에게 이 일을 맡기고 싶어하겠지만 말이야.
아아, 이제 누가 나의 일을 대신할까? 살리려한 나를 두고 죽이려한 자라고 매도하는 이 숲에서 말이야....."
토끼는 눈물이 나서 더 이상 말을 이을 수 없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숲속 공터에 어둠이 깊어지고 하늘엔 소름 돋듯 별들이 하나씩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말없이 앉아있던 검독수리가 천천히 말을 꺼냈습니다.
"이제 날도 저물었으니 더 이상의 이야기는 내일 다시 하기로 합시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는 대충 늑대의 이야기와 여러 동물들의 이야기가 타당성이 있는 것 같군요. 비록 여우와 호랑이를 도와주는 우리네 숲속 환경이 미비하다 하나 잘만 했으면 살릴 수 있는 호랑이를 죽게끔 한 책임은 여우와 토끼에게 있는 것 같소.
그 죄는 엄히 물어야겠으나 그 동안 이 숲을 위하여 성실히 노력해온 정을 보아 몸을 묶은 저 끈은 풀어주는 게 어떻겠소. 대신 멀리 숲밖으로 도망가지는 못하도록 우리 동물가족들이 잘 감시는 해야겠지요."
이때였습니다. 숲 바깥이 밝아지면서 갑자기 어떤 소리가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멀리서 소식을 듣고 토끼를 찾아 나선 친구들의 함성이었습니다. 친구들은 횃불을 앞세우고 어둠을 몰아내며 숲으로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과연 그들이 토끼를 구할 수 있을까요. 근육이 불끈거리듯 어둠을 끌고 바람은 숲으로 몰려드는데 말이에요.
첫댓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글이네요 조팝 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