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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는 기쁠 것 같지 않은 기쁜 소식에 관하여-
김정식(가수 겸 작곡가)
비오는 유월의 아침.
보이차 한 잔을 우려놓고 요요마가 타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들으며 여유를 누리고 있다. 떨어지는 가는 빗줄기를 바라보면서 도종환 시인의 시로 내가 만든 노래인 세우(細雨)가 떠오를 법도 한데 이수복 시인의 「봄비」가 가슴에 스며온다.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 오것다.
푸르른 보리밭길
맑은 하늘에
종달새만 무어라고 지껄이것다.
이 비 그치면
시새워 벙글어질 고운 꽃밭 속
처녀애들 짝하여 새로이 서고,
임 앞에 타오르는
향연(饗宴)과 같이
땅에선 또 아지랑이 타오르것다.
대학에 다닐 때 동생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린 이 시를 보는 순간, 내 마음에는 노래로 읽어졌다. 그러니까 그 시 안에 이미 노래가 있었다는 뜻이고, 나는 그것을 찾아낸 셈이다. 그 때 내가 안 찾아냈다면 뒤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찾아내었을 것이지만, 내가 찾아낸 기쁨이 너무 커서 친척인 동생의 국어수업 시간에 찾아가서 선생을 뵙고 이 기쁜 소식을 전해 드렸다. 맑은 웃음으로 답하는 선생께 악보를 드리고 다짜고짜 교실 앞 화단에 앉아 준비해 간 기타반주로 노래를 들려드렸다. 후에 이 노래를 후배들이 <전남대 대학가요제>에나가 불러서 입상하기도 했다. 지금까지도 가슴속에 아련한 봄비의 선율...
자꾸만 입안에서 맴도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손을 씻기 위해 세면장에 들어갔는데, 수도꼭지에서 나오는 물줄기가 가는 빗줄기처럼 유난히 보드랍게 느껴진다. 수도꼭지 밑 부분에 있는 수압조절꼭지를 조여 놓았기 때문인데, 이 간단한 노력으로 얻어내는 기쁨은 매우 크다. 우선 물줄기가 강하지 않아서 물방울이 튈 염려가 없고, UN에 의해 수 년 전부터 <물 부족국가>로 지정된 우리나라의 실정을 살펴볼 때 수돗물 절약은 덤으로 오게 된다. 그러나 ‘누가 이런 일을 하고 있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안타까움에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바로 어제 분당에 있는 어느 성당에 강의를 갔다가 손을 씻기 위해 세면장에 들어갔는데, 수도꼭지를 통해 전해오는 물줄기의 위력은 가히 위협적이었다. 오늘날 신도시 아파트촌에 궁성처럼 들어서서 그 위용을 과시하고 있는 성전건물들이 주는 가시적인 느낌을 피부를 통해 그대로 전해주고 있다.
강의 직전인 내 모습은 물벼락 맞은 생쥐 꼴이 되고 말았는데, 창피함에 앞서 안타까움에 또 다시 가슴이 아려온다. 아무리 시간이 촉박하지만 이런 일은 뒤로 미룰 수 없다 싶어서 비장의 무기인 「손 좀 보기」에 들어갔다. 우선 원터치 방식인 수도꼭지 손잡이를 온수쪽(보편적으로 왼쪽)으로 돌려놓고 물을 가장 세게 틀어놓은 다음에 꼭지 아래에 따로 마련된 수량 및 수압조절 손잡이(대개는 수압조절레버라 부름)를 돌려가면서 적당한 수량 및 수압을 조절하여 맞춘다. 다시 수도꼭지 손잡이를 냉수 쪽으로 돌려놓고 같은 일을 반복한다. 이 분야에서 다년간 쌓은 내 경험에 비추어 말하자면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의 단면 지름이 수도꼭지의 단면 지름과 거의 같을 때가 가장 적당하다고 본다.
이를테면 흘러나오는 물의 각이 부채꼴로 벌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 각이 많이 벌어질수록 사용하는 사람에게 튈 위험이 높고 많은 경우 위험을 넘어서서 벼락을 선사해 준다는 것이다. 이 노하우를 활용하여 내가 20년 동안 손 좀 보아준 수도꼭지의 숫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수도꼭지는 고속도로 휴게소 같은 공공장소이거나 성당이나 학교 등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는 곳이 대부분이기에 그것으로 비롯한 물 절약효과는 실로 엄청난 것이다. 그렇기에 어느 공중파 방송의『물은 생명이다』라는 프로그램에서는 너무 좁아 큰 카메라를 돌릴 수 없어 캠코더를 사용해 가면서 가난한 우리집의 거의 모든 곳에 앵글을 들이대어 이 마술같은 고행 사례를 소개했다.
오늘 강의는 가톨릭교회가 정한 예수성심성월(6월)을 맞아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려 보면서 그 안에 담긴 기쁜소식을 나누는 것이다. 요즘 들어 갑자기 더워진 날씨의 원인을 살펴보고, 21 세기로 건너오면서 우리나라의 충청이남 지역은 이미 온대가 아니라 아열대로 분류되는 상황을 짚어나간다. 강의에 참석한 분들 중 대다수가 그 이유를 환경보전의 실패라고 보고 있고 그 실패의 책임이 고스란히 우리 자신의 몫임을 인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무차별 벌목으로 산소량이 부족해지고, 무분별한 개발로 극심해진 대기 오염 탓에 오존층은 파괴되고 지구온난화는 가속화되어지자 그 더위를 참지 못해 다시 냉방시설을 서두르게 된다.
이 냉방시설이라는 것이 또 참으로 매정한 물건이다. 나를 위해서 앞으로 찬바람을 보내어 주는 동안 뒤로는 뜨거운 바람을 내어 놓음으로써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알면서도 애써 외면한다. 그리하여 청계천이나 동대문 상가 앞을 지날 때면, 창틀마다 비둘기 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냉방용 실외기에서 뿜어내는 뜨거운 열기 때문에 얼굴이 익어버릴 지경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참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릴 생각이 있다면 유월 한 달만이라도, 그리고 그렇게 정해놓고 있는 가톨릭교회 및 기관에서만이라도, 이웃사랑의 완성을 위한 거룩한 빠스카 잔치를 하기위해 오히려 이웃을 힘들게 하는 이런 안타까운 일을 멈출 수는 없는 것일까? 이런 답답한 이야기 보다는 가늘디 가늘고도 보드라운 봄비 같은 기쁨을 나누고 싶다. 세면장에서 만난 수도꼭지 얘기를 했고 물벼락 맞은 윗옷 자락을 보여드리며 개선방안을 소개했을 때, 사람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번져가고 있다. 강의가 끝난 후 모두는 발걸음을 재촉한다. 어서 가서 내 집 안에 있는 수도꼭지를 점검해 보고 싶고 또한 실제로 조절하고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들이 표정에 가득하다. 누군가 내게 와서 말을 건넨다.
“선생님. 너무 기뻐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요. 그런데 이쪽으로 오셔서 여자화장실도 좀 손 봐 주세요. 아까 들어가실 수가 없어서 남자 쪽만 줄여 놓으셨다고 하셨잖아요.”
“직접 한 번 해 보세요. 쇄신된 기쁨을 나만 누리고 싶지 않아요.”
함께 들어가서 손잡이를 조절하면서 연신 신기해하는 모습이 처음 글자를 알게 된 어린이의 표정과 다르지 않다. 세면장을 들고 날며 그리고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집으로 돌아가면서 모두가 싱글벙글 이다
“세상에 그렇게 간단한 걸 모르고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써 온 일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지 않아?”
“지금 안 것 만해도 다행이지. 몰랐으면 평생 그렇게 사는 거지 뭐.”
모두 그 얘기다. 학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린이들 같다.
‘나에게 오는 아이들을 그대로 두십시오.
하늘나라는 이 어린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 삶으로 돌아가서 매번 만나야 하는 불편은 이 한 번의 쇄신된 마음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다. 이 기쁜소식을 실제 삶으로 살아내도록 애를 쓰면서 누리는 싱싱한 기쁨을 노래에 담아 매일 이웃과 되 나누는 삶을 사는 나에게도 종종 고행으로 여겨질 때가 많다. 고행이야 어디 수도꼭지 단속하는 일 뿐인가? 길을 가다 버려졌지만 아직은 쓸 만한 물건을 주어 들고 수고롭게 다니는 일이며, 여유 있는 이웃들이 쓰다 나누는 물건을 고맙게 받아서 트럭을 몰고 다니며 꼭 필요한 이웃들에게 전달하는 일, 환경을 위해 신발이나 옷가지 혹은 가방들을 꿰매는 일에 이르기까지 일상 안에서 자잘한 고행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방으로 초청공연을 가는 무궁화 기차 안에서 바느질을 하다가 느껴지는 홍익회 판매원들이나 동료 승객들의 눈총은 그래도 고운 것이다. 온통 덧대어 꿰매 입은 바지를 보고 ‘그런 옷은 어디에서 살 수 있느냐?’고 묻는 이웃도 귀엽게 봐 줄 수 있다. 그러나 ‘왜 꼭 그렇게 천덕을 떨고 다녀야 하느냐?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그러는 것은 위악(僞惡-악을 가장하는 것)이다. 선만을 가장(위선僞善)하라는 법이 없지 않느냐?’라며 따지듯 묻는 친구나 지인들의 몰이해는 오히려 아픔에 가깝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실제 삶은 남들 사는 대로 웰빙바람에 편승하여 편리하게 살면서 가끔씩 보속하는 마음으로 진짜 고행을 한다. 터키나 이스라엘로 가서 사막바람 못지않은 서남아시아의 기후를 체험하고, 달러라는 세계 최고가치의 외화를 그야말로 물 쓰듯 사용하여 불편하기 짝이 없는 낙타 등에 앉아 시나이 산을 오르다가, 그것도 고행이 안 되면 타볼산을 맨발이나 맨 무릎으로 오르면서 예수의 고행을 흉내 내어 본다. 심지어 필리핀 어느 마을에서는 매년 사순절 끝에 마을 원로에 의해 엄선된 세 사람이 십자가에 실제 못 박혀 매달리는 고행을 재현하고 있다. 사전에 손바닥 엑스레이 투시를 통해 뼈나 중요한 혈관을 피할 수 있는 자리를 표시하여 못을 박는다는 이 고행 중에 대부분 의식을 잃고 까무러치는 데도 접수되는 신청자의 수는 줄지 않는다고 한다. 이런 고행 체험 후에 일상으로 돌아와 지친 몸과 마음을 냉방기에서 나오는 시원한 바람과 백화점에서 고급화 시키고 차별화 시켜놓은 값비싼 웰빙음식으로 달래는 소수의 사람들에 대해서는 거론을 말기로 하자. 또한 자기가 믿고 따르기로 신앙고백을 한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는 거룩한 마음을 과소평가하거나 폄하할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분명한 것은 삶의 영성이란 보상심리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으로 살아내려는 노력을 통해 향유되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노력의 과정 속에서 매번 우리에게 크고 작은 고행이 요구되기에 이른바 존재의 안녕이라는 웰빙(WellBeing)보다 행동의 안녕이라는 웰두잉(WellDoing)이 훨씬 삶의 영성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다. 때로 고행의 연속일 수밖에 없는 이 웰두잉을 통해 우리는 웰월드(WellWorld)를 얻을 수 있고(본래적으로는 지켜나갈 수 있고), 웰월드는 웰라이프(WellLife)를 약속해 준다.
시간은 흘러 바하의 선율도 잦아들고 가는 봄비도 속절없이 잦아들었다. 별 생각 없이 TV를 켰는데 우연히 나의 관심분야인 생활성가 콘서트에 채널이 가 있다. 생활성가를 만들고 부르는 두 팀의 노래를 듣다가 또 하나의 안타까움을 만났다. 마치 소설 속에서 플롯(Plot)이 꼬이듯이 노래 안에 담긴 문화적 복음적 요소들이 꼬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우리나라 실정으로 채널TV라 불리는 종교방송도 잘만 제작하면 공중파방송과 크게 다를 것 없는 뛰어난 전달성을 갖는다. 그렇다면 개 종교의 신자들만은 시청해 줄 거라는 안일한 제작 태도를 과감히 청산하고 불특정 다수인 누구나가 볼 수 있다는 관점을 견지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개 종교 신자들만 통용되는 용어로 진행하기 보다는 좀 더 보편적인 언어사용이 요구되면서 실제로 전달하고 싶은 진리라는 기쁜소식은 각 문화 장르 안에 깊이 내재되어 있어야 한다. 이를테면 이런 프로그램 하나에도 좀 더 고심의 흔적, 더 나아가 WellDoing을 위한 고행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기독교회에서만 통용되는 용어인 「찬양」「사도」「봉헌」「십자가」「주님께 영광」「알렐루야」등이 불특정 다수 시청자들에게 평안함과 기쁨으로 다가갈 수 있을까? 이런 용어가 난무하는 데도 연주되는 생활성가의 형식은 가사내용만 빼고 들으면 세상에서 불리워지고 들려지는 노래들과 거의 흡사했고, 무엇보다도 연주에 임하는 연주자들의 태도나 풍기는 인상 또한 일반 상업가수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생활성가 가수라는 이름이 갖는 차별화된 신선함은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바꾸어 말하면 일반 상업가수들의 스타일에 맞추어 뒤 쫒아 가는 형식의 틀에다 단지 용어사용만 교회적이라는 이 코드가 과연 세상에 기쁜소식을 전하는 방법이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흐름을 원하는 대중의 층은 분명히 있고, 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해 주는 것이 말 그대로 찬양사도적 소명이라고 한다면 더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사도적소명은 교회 안으로 외치는 것이라기보다 교회 밖으로 향해야 하고 그렇다면 답은 더욱 분명해진다. 모든 장르를 구별 없이 차용하고 누구나 거부감 없이 들을 수 있게 좀 더 편안한 일상용어를 사용하여 노래되고 진행되어야 하며, 그것을 통해 전달되는 감흥이나 삶의 영성만은 세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거룩하고 성스러운 것이어야 되지 않을까?
이런 접근은 실제 삶은 때로 쾌락에 가까운 웰빙이라는 쾌적함으로 채우면서 가끔씩은 상품화된 형식의 고행을 체험해 보는 것과 신기하리만큼 닮아있다. 삶의 모든 존재양식은 풍요로운 이 시대가 제공하는 것들로 잔뜩 치장되어 있으면서 외치는 목소리는 지극히 고형화된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차별성을 향유하는 것. 그 외침의 방향 또한 바깥세상으로가 아닌
사회 구성원 전체에서 볼 때 특정 소수인 내부자를 향해 있다고 하는 사실이다.
바꾸어 가야 한다. 쇄신되어야 한다. 가던 길을 바로 멈추고 바꾸어서 되돌아가는 것이 메타노이아(회개)라면 우리 모두 메타노이아적인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회적 고행이 아닌 삶의 작은 부분에서의 일상적인 고행을 기쁜 마음으로 묵묵히 WellDoing해야 한다. 그리하여 간절한 예수마음이 담긴 본질적인 삶으로의 회귀, 바로 이 메타노이아를 경험하고 나서 누린 기쁨을 모든 문화적 일상적 코드와 장르를 활용하여 바깥세상을 향해 외치고 전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잘 느낄 수 있는 세상 사람들의 언어와 방식으로...
기도를 통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도만으로 참 기쁨을 얻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삶이 없는 믿음은 회칠 한 무덤이 될 수 있기에... (2006년 6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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