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하던 무라타 슈코는 다이도쿠지(大德寺) 신주안(眞珠庵)에서 수행 중이던 잇큐(一休) 선사를 만나 참선 수행을 배우게 되었지요. 수행이 깊어지자 잇큐 선사는 자신이 소장해 오던 송나라 원오(圓悟)선사가 쓴 묵적(墨跡)을 슈코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슈코는 차선일미(茶禪一味)의 높고 깊은 경지를 깨달았습니다. 이때 슈코는 61세였습니다.
슈코의 높은 차도 경지를 눈여겨 본 옛 스승 노아미는 자신이 모시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35~1490)에게 슈코를 소개하는 유명한 일이 생기기도 했을 만큼 슈코의 차도는 대단했습니다.
그런 슈코가 만년에 시도한 초암차는 차실의 변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귀족 위주의 화려한 서원조(書院造)라는 무가(武家)건축을 중심으로 행해지는 서원차와는 대조적인 소박한 초암차실로 바뀐 것이지요.
드넓은 차실 공간을 병풍으로 둘러 막고 다다미 4첩(疊) 반의 넓이로 대폭 좁힌 곳에서 차를 마시게 된 것입니다.
다다미 4첩 반은 사방 열자(尺) 넓이인데, 3.3㎡ 가량이지요. 1첩은 대략 74㎠ 정도여서 뒷날 센노리큐가 완성한 2첩 반 차실의 넓이는 겨우 1.64㎡에 불과하여 두 사람이 함께 차 마시기에도 비좁게 느껴지는 공간입니다.
차실의 폭 1.8m 되는 벽에는 매끄러운 고급 벽지를 바르고, 천장은 삼나무 널빤지를 붙였지요. 기와를 얹었던 지붕에는 기와를 벗겨내고 얇은 널빤지 조각을 얹었는데 마치 조선의 산간 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너와집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매월당도 한때 귀틀집에다 너와 지붕을 한 곳에서 살았었지요.
차실 안의 네모 진 큰 기둥도 대나무로 바꾸고, 청동 꽃병은 대나무로 만든 꽃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차실에서 사용하는 차 도구들, 특히 차그릇은 아직 카라모노(唐物)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무라타 슈코를 초암차의 원조라 하는 것은 종래 서원차의 무가(武家) 건축에서 목재와 대나무 중심의 훨씬 소박해진 작은 규모의 차실로 바꾸었기 때문이며, 이때부터 ‘스키야’ 즉 차실(茶室)이라는 말이 생겨났습니다.
중간 정리단계를 이룩한 다케노 쇼오 대에 와서는 한층 더 초암화에 가까워졌습니다.
다케노 쇼오(1502~1555)는 사카이의 피혁상 후예로서 젊은 시절에는 주로 피혁 장사를 하여 큰 돈을 모았지요. 장사를 하면서도 예능 방면에 취미를 가져 일본 전통 노래(歌道)에 심취했고, 무라타 슈코 유파를 잇는 차인들로부터 차도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그의 이같은 생활은 사카이에서 사업하는 사람들의 특징처럼 되어온 풍속과도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 사카이의 상인이라면 노래와 차도에 관한한 나름대로의 일가견을 지닌 사람들이었습니다.
정동주의 茶이야기 <29> 초암의 땅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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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케노 쇼오는 무라타 슈코가 지붕에 얹었던 얇은 널빤지 조각을 들어내고 조선의 농가를 모방한 짚 지붕으로 다시 고쳤지요. 본격적인 초암이 시작된 것입니다. 차실의 규모는 슈코와 같은 4첩 반을 유지했지만 방안에다 이로리(里爐裏)라 부르는 땅화로(地爐)를 끌어 들임으로써 조선의 암자(庵子)나 선비들의 초당(草堂)에 널리 설치되었던 땅화로 문화를 차실 안으로 끌어들였습니다. 짚 지붕과 땅화로의 등장으로 초암화는 점점 완성되고 있었습니다.
차 도구에 있어서도 슈코와는 달리 가라모노(唐物), 즉 중국에서 들여 온 회색, 감색의 유약 빛깔을 지닌 천목차완이나 소위 슈코청자(珠光靑磁) 차완 대신 시가라키(信樂)등에서 만드는 씨앗단지, 소금단지 등 일용품으로 구워 낸 잡기류 속에서 골라내어 차 그릇으로 사용했습니다.
슈코도 시가라키의 잡기류를 차 그릇으로 쓰기는 했지만, 주된 차 도구는 가라모노였던 데 비해 쇼오는 주된 차 도구를 잡기류에서 골라 쓴 것이 두 사람의 커다란 차이점이지요.
그의 이같은 잡기류 선호는 표면적으로 완성도가 높은 조형보다 내면적으로 무엇인가를 품고 있는 조형에 대한 모색과 갈구라는 차원 높은 미의식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지요.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눈에 안보이는 세계의 조화를 감지해 내고 조망하려는 미의식은 불교의 참선이 지향하는 세계와 일치하는 것이지요.
이같은 잡기류를 통한 미의식의 심화는 마침내 조선에서 만든 이도차완의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으로 보입니다.
다케노 쇼오가 최초로 발견한 것이 ‘다케노이도(武野井戶)’ 차완이라 이름 붙여진 것인데, 이는 이도차완 중에서 일본 초암차 역사상 가장 먼저 선을 보인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케노 쇼오는 1555년에 죽었습니다. 최소한 죽은 해를 기준으로 삼는다 하더라도 이도(井戶)라는 공식 이름이 붙여진 1578년보다 무려 23년이나 앞서서 초암차의 주요 차완으로 쓰여졌음이 사실로 입증되는 셈입니다.
따라서 쇼오가 31세 때 ‘쇼오’라는 호를 스스로 붙이면서 초암차에 전념했던 1532년을 기준 삼는다면 이도차완이 초암차의 주요한 도구로 등장한 시기는 더 위로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다케노 쇼오가 이도차완을 알았다는 사실은 그가 오래도록 추구해 온 초암차의 완성을 위한 또 하나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쇼오의 업적 중에서 거듭 강조되어야 될 것은 땅화로를 차실 안으로 들여 앉힌 사실입니다.
온돌 문화의 일종인 땅화로는 온돌이 널리 사용되기 전부터 조선 서민층에서 난방을 위해 방안 한쪽에 바닥을 파내고 설치했던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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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32> 작은집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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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노리큐가 설정한 초암차의 내용과 조건들을 계속 열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명품으로 통하는 일본 나가사키 이도차완. 사진에 드러난 것처럼 깨어진 그릇을 수리하여 사용하는 것은 이도차완의 특징이다.] 11. 차도구는 흠집이 있거나 깨어져 금이 간 것도 소중하게 사용합니다. 12. 차실 바닥으로는 풀잎으로 만든 자리를 이용합니다. 13. 차실 안에 앉아 있으면 정원의 돌로 만든 물통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은은하게 들리는데, 이는 차실 주위의 샘물에서 대나무를 통하여 끌어들인 물이지요. 14. 손님이 차실에 들어가기 전에 잠시 기다리는 대합실인 마치아이(待合)가 있고, 대합실과 차실을 연결하는 잘 정돈된 뜨락이 있는데 노지(露地)라 부르지요. 대합실에서나 차실에서 바라보면 싱싱하게 푸른 상록수나 활엽수들이 계절마다 다른 모습으로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이 작은 뜨락은 태고의 신비와 고요를 느낄 수 있도록 괴석(怪石), 이끼, 괴목 분재, 향기 짙은 꽃나무 등을 심습니다. 대나무를 이용하여 끌어들인 물이 계곡을 연상시키고, 물기 머금은 이끼와 괴석은 깊은 숲속을 떠올리게 하지요. 15. 화려한 중국의 청동 꽃병, 청자꽃병 대신에 투박하고 검은 빛깔이 나는 조선에서 들여온 씨앗을 넣어두거나 숙주를 키우는 질그릇 단지를 꽃병으로 쓰지요. 그러다가 굵은 대나무로 만든 꽃병이나, 칡넝쿨 등으로 엮어 만든 꽃병을 차실에 두었지요. 16. 꽃은 살아있는 느낌을 갖게하도록 세심한 배려를 해야하며 줄기를 길게 뽑아내어 꽃송이에서 흘러내리는 선을 감상하도록 하지요. 꽃은 한 송이만 꽂습니다. 17. 문에는 창호지를 바릅니다. 18. 땅화로를 만듭니다. 19. 숯을 담아두는 통은 박을 이용하거나 유약을 입히지 않은 초벌구이만 한 맨몸의 그릇을 사용합니다. 20. 차도에 와카(和歌)를 끌어들여 차와 차인의 마음가짐으로 삼았습니다. 21. 농차(濃茶)를 펼때는 반드시 이도차완을 사용합니다. 센노리큐가 설정한 이 초암차의 조건들은 모두 조선의 암자나 초가집 또는 초당에서 응용해 온 것들입니다. 먼저 2첩 넓이의 다이얀(待庵)부터 살펴보지요. 이 차실은 ‘주옥(珠玉)의 소우주(小宇宙)’ 또는 ‘일본미(日本美) 중의 일본미’로서 숭상하고 찬양되는 일본 초암차실의 상징입니다. 이 차실의 설계자로 알려진 센노리큐는 그의 스승 다케노 쇼오가 죽고 난 뒤부터 사카이와 교토에서 가장 유명한 차인으로 대우 받았지요. 그의 명성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알려져 센노리큐 나이 58세 때인 1578년 노부나가의 차 스승으로 추대받게 됩니다. 5년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차도 스승으로 추대받아 3천섬의 봉록을 받습니다. 차도를 정치에 이용한 최초의 일이었습니다. |
정동주의 茶이야기 <33> 독참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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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노리큐는 히데요시가 지휘하는 야마자끼(山崎) 전투, 큐슈(九州) 정벌, 오다하라(小田原) 전투 등 전쟁터까지 따라 다니면서 차도를 말하고 차회를 열어 사무라이들의 거칠어진 마음을 차로 다스렸습니다.
‘주옥의 소우주’라는 찬사를 들어온 다이얀(待庵)은 야마자키 전투가 한창일 때 히데요시의 휴식 장소로서 센노리큐가 세운 것입니다.
방이 좁으면 정신이 산만해지지 않아서 격렬한 전투 중일때라도 잠시 이곳에 와 앉아서 차를 마시면 마음이 고요해지기 때문에 전투를 효과적으로 치를 수 있었다고 합니다.
좁고 단순한 초암차실의 위력이 현실로 입증된 셈이지요.
실제로 센노리큐는 히데요시로부터 차도를 가르쳐 달라는 소식을 듣고나서 보낸 편지에 쓰기를 “초옥(草屋)의 작은 차실이 아니라면 진실한 와비차의 마음은 지닐 수가 없습니다. 아침 저녁을 가리지 말고 귀하가 몸소 연구하여 터득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일본의 국보(國寶)로 지정되어 일명 국보차실(國寶茶室)로도 부르는 다이얀(待庵)의 그 2첩의 좁은 방 구조는 일본 건축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것입니다.
낮은 천장, 사방이 흙벽으로 둘러쳐진 폐쇄적인 이 차실은 분명 고온다습한 일본 기후와는 맞지 않은 구조인데도 히데요시는 중요한 전투의 승리를 위해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작전을 구상했습니다. 이 작은 차실에 앉아 명상에 잠기면 신선한 영감이 떠오르면서 정신력이 커지는 효과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센노리큐가 어떻게 이같은 작은 차실을 구상할 수 있었는지에 관한 연구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초암과 초암차의 기원을 조선시대 사찰과 서민들의 살림집, 선비들의 초당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면, 다이얀의 2첩 차실은 조선시대 사찰에 있던 ‘독참방(獨參房)’과 매우 닮은 구조입니다.
독참(獨參)이란 화두(話頭) 수행자가 어떤 깨달음의 경지나 수행중에 생긴 의심을 묻기 위해 방장과 조실 둘이서만 만나 선문답(禪問答)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때 두 사람은 사방이 벽으로 둘러 쳐지고 오직 출입문 하나만 달려 있는 독참방으로 들어가서 목숨을 건 선문답을 주고 받습니다. 작고 어두운 방 안에는 죽비, 몽둥이 등이 갖추어져 있는데 생사를 걸고 질문을 던지면 집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큰소리로 답을 하고, 또 묻고 답하는 마치 사생결단 결투를 벌이는 것 같습니다.
두 사람의 대결은 오래 끌기도 하고 간단하게 끝날 때도 있지요. 다이얀의 2첩 방과 조선 사찰의 독참방은 여러 가지로 많이 닮았습니다. 차실 안벽에 바른 흙, 흙에 짚을 썰어 넣어 벽이 갈라지는 것을 방지하고 있는 점, 집의 뼈대 부분이 드러나 보이도록 흙벽을 처리한 것, 낮은 천장 등은 조선 서민의 초가집이나 초당, 초암을 짓는 방법과 동일합니다.
조선의 초가집, 초당, 초암의 주요 건축 재료가 목재 중에서도 소나무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실이나 짚을 썰어 넣어서 짓이긴 흙, 짚지붕, 창문이 거의 없는 폐쇄적인 벽, 낮고 좁은 방문을 달게 된 것은 기후 조건과의 조화 때문이었지요. 추운 겨울과 무더운 여름을 보이는 온대 기후 조건 아래서 겨울철의 난방 효과를 높이고 여름철 무더위와 습기를 막기 위해 나무와 흙을 주요 건축 재료로 사용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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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34> 작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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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벽이 지닌 훌륭한 통기성(通氣性)은 초가만의 장점이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서민들은 대개 자식을 많이 두었지요. 그런데도 오막살이의 방은 작게 만들었습니다. 비좁은 방안에서 식구들은 맨살을 맞대고 비비며 살지요.
목욕시설도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빨래도 쉽지 않아서 비좁게 사는 방안에는 악취를 풍깁니다. 겨울철엔 식사도 방안에서 하기 때문에 협소한 공간은 온갖 냄새로 꽉 찰 수 밖에 없지요. 거기에다 어른들은 담뱃대에다 담배를 많이 피워서 담배 연기도 대단하지요.
그런데도 방안에는 그다지 악취가 심하게 나지는 않습니다. 흙벽이 악취를 흡수해버리기 때문이지요. 장마철에도 흙벽이 습기를 조절하기 때문에 방안은 항상 쾌적합니다. 흙벽이 지닌 이같은 특성을 차실에서 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차실을 지으면서 소나무를 주요 재료로 사용한 점도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것입니다. 일본 건축의 주요 목재는 곧게 자란 노송나무와 삼나무입니다.
차실 안 땅화로가 있는 구석과 꽃병을 얹어 두는 자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천장을 떠받치며 세워져 있는 구불구불하게 휜 소나무 기둥은 단연 이채롭습니다. 인위적 가공없이 생긴 그대로의 곡선을 살려서 사용하고 있는 점은 조선 서민들의 오막살이 집 기둥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조선 서민들이 초가를 지을 때 쓰는 소나무의 곡선은 곧 조선사람의 여유와 멋의 상징이기도 하지요. 자연 그대로의 꾸밈없는 여유, 꾸미지 않고서도 무언가 더 크고 심오한 것을 담을 수 있는 사고방식이기도 하지요.
조선솔이 지닌 곡선의 힘과 꾸미지 않은 소박미를 차실 안으로 끌어들여서 와비차의 세계를 심화시킨 것으로 보입니다.
차실 지붕을 짚이나 갈대로 인것도 일본의 전통적인 건축법과는 다릅니다. 특히 눈여겨 봐야할 것은 차실로 들어가는 입구에 달린 좁고 작은 문입니다.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몸을 잔뜩 구부려서 손으로 문턱을 짚어야만 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런 문의 형태도 일본 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두칸 짜리 조선 오막살이나 궁핍한 절의 귀틀집 또는 토굴 암자의 방문과 매우 닮았습니다.
이렇게 방문을 작게 한 이유는 추운 겨울철의 난방을 위해서였습니다. 이렇게 낮고 작은 방문을 드나들어보면 이마를 자주 문틀에 부딪히기도 하지요.
몹시 불편한 구조라고도 할 수 있는 이런 형태의 문을 초암차실의 출입문으로 응용한 것은 초암차 특유의 미학 세계를 창조해 내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센노리큐가 완성한 초암차 정신은 차 마시는 일을 통하여 이상적인 정신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 차를 내는 쪽은 차를 마시는 손님이 편안하도록 마음을 써야하고, 손님은 가벼운 마음으로 차에 담긴 정신을 느껴야 합니다.
센노리큐는 이 낮고 비좁은 문을 ‘린구’라 이름 붙였는데, 이 출입구를 기준으로 세속의 세계와 세속을 떠난 초암차실 와비의 세계로 나누는 절묘한 착안을 해냈습니다. 이는 마치 사찰의 일주문(一株門)이 지닌 종교적 의미와도 유사한 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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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35> 작은 문 안의 큰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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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35.
작은 문, 큰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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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실의 좁은 문(높이 90㎝정도)은 심오한 미학 세계를 지녔습니다. 손님은 묵묵히 거룩한 곳에 다가간다고 믿는 것입니다. 무사는 차고 있던 칼집을 벗어 처마 밑 칼을 걸어두는 자리에다 걸어 놓고 맨몸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차실은 지극한 평화가 깃든 곳이기 때문이지요. 손님은 천천히 몸을 낮추어 구부리고 높이 3피트쯤 되는 입구를 지나 차실로 들어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모든 손님에게 신분의 높고 낮음, 귀하고 천함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깨닫게 하며, 겸양의 미덕을 가르치기 위해서지요.
대합실과 차실을 잇는 정원인 노지(露地)의 풍경을 차실에 앉아서 그윽하게 바라보는 모습은, 매월당의 차시(茶詩)에서 확인되는 풍경과 퍽 닮았습니다. 매월당이 머물고 있는 암자의 방문이나 창을 열면 밖에 펼쳐진 사계절 밤낮의 자연 풍광을 방안으로 모셔 들이듯 감상했던 그 모습과 매우 흡사합니다.
작은 문을 초암차의 세계와 세속과의 단절을 상징하는 경계로 응용했듯이, 이 좁은 문과 차실 사이에 인위적으로 꾸민 정원 풍경을 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응용한 것이지요.
청동꽃병이나 청자 꽃병 대신에 잡기류 속에서 발견해 낸 무덤덤하고 소박한 질그릇이나 대나무, 칡덩굴 같은 식물 줄기로 엮은 바구니 등을 꽃병으로 대체했습니다. 흙, 나무로만 꾸며진 차실 분위기를 더욱 더 깊은 고요와 온화함을 살려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꽃 한송이를 꺾어다 꽂는 의식은 좀 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불교 의식에서 말하는 육법공양(六法供養)의 하나인 헌화의식을 차실의 미학을 위해 응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차도구는 겉으로 드러난 완전함, 화려함 보다는 드러나지 않은 세계의 아름다움을 지닌 것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부족해 보이거나 흠집이 난 것이라도 거리낌없이 썼습니다. 금이 가고 틈이 벌어지기도 한 그릇에서 불완전함의 아름다움을 추구했습니다.
불균형 속의 균형, 불완전 속의 완전을 보려고 한 센노리큐의 마음은 인위적인 형식미와 완전미가 지닌 허구를 꿰뚫어 본 것이지요. 그의 눈에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그릇은 바로 이도차완이었습니다. 이도차완은 그가 꿈꾸었던 초암차를 완성시켜주는 마지막 조건이었던 것이지요.
차를 마시는 일은 도를 추구하는 마음을 지니고 행하는 수행이므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다도를 행합니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깨달음과 일맥상통하는 길이라고 믿었지요. 그 믿음을 짧은 노래로 표현했습니다. 다도를 통한 깨달음을 노래한 대표적인 와카는 센노리큐가 늘 가까이 두고 차를 마실 때마다 향을 피우곤 했던 고요노(此世) 향로를 주제로 한 노래입니다.
고요노 향로에 헌정된 이 와카는 불교에서 말하는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가 있다’는 인연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와카를 차도의 세계로 끌어들인 것은 센노리큐 대에 와서 자리잡게 된 새로운 흐름이었습니다. 이런 새로운 흐름 또한 조선 차인들이 차를 주제로 하여 수없이 써서 남긴 차시에 근원을 두고 있는 듯 싶습니다. 선승(禪僧)들의 차시들이 지니고 있는 심오한 자연관은 그대로 깨달음의 노래인 오도송(悟道頌)이지요.
센노리큐가 완성한 일본 초암차의 차실 구조는 조선의 암자, 서민의 초가, 선비들의 초당 구조를 기원으로 삼아 일본 특유의 미학적 감성으로 응용하여 재구성한 것입니다.
정동주의 茶이야기 <36> 원효의 무애(無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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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일본다도의 근원은 초암차입니다. 초암차는 다시 정신적 원류와 생활화를 위한 실천 방법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차실과 차 도구, 차 달이는 법과 마시는 일에 내재된 역사와 변천사 등은 그 실천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부터는 초암차의 사상적 기원을 이루고 있는 원효와 매월당의 차정신(茶精神)에 관하여 살펴볼 작정입니다.
초암차 정신은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이는 단숨에 생사를 벗어난다”는 화엄경 한 구절에서 우주적 깨달음을 이룬 뒤 무애(無碍) 사상을 펼쳐 보인 원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무애란 지극히 공평하여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입니다. 이는 뭇삶들을 이롭게 함이며, 중생의 괴로움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건네주는 것이며, 자유의 실천이며 아무 거리낌 없음입니다. 참다운 깨달음은 반드시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납니다.
원효의 정신세계를 가장 상징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무애무(舞), 무애가(歌), 무애차(茶)지요.
권력이나 소임을 얻기 위해 온갖 권모술수를 쓰는 귀족불교의 폐해를 극복하고, 어떻게 하면 고통받는 현실 인간들의 짐을 덜어주고 즐거움을 줄 수 있을 지 고뇌하던 나머지 깨달은 것이 무애사상이지요.
원효의 무애사상은 깨달음과 나눔이라는 두 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깨달은 바를 세상에 나눠줄 수 없다면 팔만대장경도 고름 닦는 걸레요, 밑 닦는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는 강렬한 민중의식이 그속에는 충만해 있습니다.
참된 수행자란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모습을 통해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여겼지요. 그들이 기뻐할 때 더불어 기뻐해주고 그들이 아파할 때 함께 아픔을 나누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라 여긴 것이지요.
그러기 위해서는 벌거숭이 그대로의 인간 삶, 소박한 모습, 진실한 인간 이해 방식이 가장 급했지요. 그런 이해의 방식으로 원효가 만든 것이 무애춤, 무애노래, 무애차였습니다.
무애춤은 기쁨이나 슬픔을 아무런 격식이나 전제된 것 없이 속에서 우러나는 대로 팔과 다리를 흔들고 머리를 흔드는 춤입니다. 무애노래는 누구든 따라 부를 수 있는 ‘나무아미타불’을 큰소리로 외치면서 춤을 추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애차는 굳이 차나무 잎을 가공하여 우려낸 것이 아니라도 목마를 때 갈증을 달래주고 허기질 때 주린 창자를 달래주는 맑은 물이나 따뜻한 국물을 뜻합니다. 이때 무애차는 반드시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어 마시는 것을 말합니다. 여럿이 있을 때 마시는 순서나 격식도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오직 모두가 평등하게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이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원효의 무애사상은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으로 인하여 얼룩지고 피폐해진 인민들의 마음을 따뜻이 감싸주기 위한 것입니다만, 신라 사회에서는 원효를 파계승이라 하여 철저하게 소외시켰지요. 그때 일본에서는 이같은 원효의 차정신을 놀라운 마음으로 모셔가서 그들 사회의 혼돈과 무지를 일깨우는 데 활용했습니다. 그 증거가 ‘삼국사기’ 권 제46 열전 제6 설총(薛聰)조에 있습니다.
설총의 아들 중업(仲業)이 신라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 원효의 ‘금강삼매론’을 읽은 일본승려가 중업을 반기는 장면인데 서기 779년의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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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37> 일본의 원효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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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는 686년에 죽었지만 그의 무애행은 8세기부터 일본에 전해졌습니다.
원효 사상을 일본에 퍼뜨린 대표적인 인물은 일본의 승려인 구우야상인(空也上人·903~972), 법연상인(法然上人·1133~1212), 명혜상인(明慧上人·1173~1232) 등 입니다.
구우야상인은 무라카미천황(村上天皇·946~967)과 인연이 깊은 승려지요. 무라카미천황이 원인 모를 병이 들어 고생하던 중이었지요. 그때 구우야상인이 관세음보살 꿈을 꾸었는데, 꿈에 이르기를 관음상에 차를 바치면 천황의 병이 나으리라 했습니다. 구우야상인은 꿈대로 차를 바쳤지요. 천황은 쾌차해졌습니다. 그러자 천황은 이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하여 964년에 서대사(西大寺)를 짓고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차를 올리도록 했지요. 이때 동대사(東大寺)도 함께 지었습니다.
서대사의 차올리는 의식은 매우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불단에 차를 올린 뒤에는 절 주변 사람들을 초대하여 차를 함께 나눠 마셨거든요. 사람마다 차그릇을 따로 정하지 않고 큼직한 찻사발(일본에서는 오우부쿠라 했음)에다 차를 그득 담아서는 모인 사람들이 차례로 돌려가며 마셨습니다.
차를 한 그릇에 담아 여럿이서 돌려 마시는 풍습은 일본에 없던 낯선 것이었는데, 이는 원효의 무애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오우부쿠라는 찻사발을 일본의 어떤 전설에서는 무애 찻사발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법연상인은 일본 정토종 창시자인데, 원효의 ‘유심안락도’를 정토종의 종지로 삼았을 만큼 철저한 원효 숭배자였지요. 그런 연유로 원효는 일본 초암차의 비조일 뿐만 아니라 부처와 동격인 명신(明神)으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명혜상인은 원래 백제사람이었습니다. 저 유명한 ‘동대사요록(東大寺要錄)’을 쓴 사람으로도 알려진 분이지요. 화엄종 승려였는데 원효를 흠모하여 ‘화엄연기회권(華嚴緣起繪卷)’을 그려서 교토 고산사(高山寺)에 모셨습니다. 현재 교토박물관에 소장된 ‘화엄연기회권’ 6권 중에서 제2권에 원효의 행적이 들어 있습니다.
또한 명혜상인은 일본 초암차의 시조가 되기도 합니다. 일본 차의 역사에서는 송나라에 유학했던 에이사이(榮西) 선사가 중국 다예(茶藝)를 배워와서 일본에 보급하고, 차 종자를 가져와 도가노산(梅尾山)에 심어 차를 확산시켰다고 하지요.
에이사이 선사 이전인 헤이안 시대(744~1192) 말기에 이미 명혜상인이 교토를 중심으로 차문화를 가르쳤다는 옛일을 일본 차인들은 누구도 부정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원효의 무애사상을 실천하는 한 방법인 무애차는 일찍이 원효가 신라의 서민, 천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로부터 배운 음식 나눠먹는 형식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신라 서민, 천민들은 가난한데다 먹을 것이 부족하여 그들 특유의 공평한 분배 방식을 가지고 있었지요.
큼직한 바가지 하나에다 먹을 것을 구걸하여 담았지요. 음식을 얻어오면 바가지를 가운데 놓고 빙 둘러 앉습니다.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바가지에 손을 넣어 한 움큼씩 음식을 집어먹거나 숟가락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옆사람을 생각하여 늘 조금만 덜어내지요. 국물이나 숭늉물도 그렇게 돌려 마셨습니다. 원효는 그 모양을 보고 크게 깨달았지요. 그렇게 나눠먹고는 박을 두드리면서 춤을 추고 노래했습니다. 먹이를 준 분들에게 감사하는 뜻이지요. 여기서 농차가 비롯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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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38> 무애사상의 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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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무애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 그를 이끌어준 앞 시대 사상가들의 다양한 삶의 이력들 속에서 싹텄습니다. 원효에게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친 원광, 안함, 자장, 명랑, 의상 등은 지배층 중심의 불교를 지향했지요.
거기에 비해 혜숙, 혜공, 대안 등은 서민을 중심으로 불교를 펼쳤지요.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귀족불교를 전개한 사람들이 모두 유학파들이라면, 서민들을 중심으로 불교를 전개한 이들은 모두 국내파였던 점도 분명한 경계를 이루고 있었지요.
원효가 열정적으로 살았던 시대는 이러한 두 입장이 맞물려 있던 때였지요. 그들 모두는 치열한 문제의식을 전제하여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며 고뇌하고 깊은 사색에 잠겨 살았던 구도자들이었지요. 원효는 이같은 스승과 선배들의 진지한 수행 분위기 속에서 수행의 첫 길을 시작했습니다.
한 세대 위에 있으면서 원효와 당대를 같이 살며 수행했던 혜숙, 혜공, 대안화상 등은 참으로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준 분들이지요.
혜숙, 혜공, 대안화상은 허위와 가식의 포장 속에 갇혀버린 그 시대 귀족들과 승려들에게 참다운 삶의 모습, 즉 그들이 상실해버린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을 거침없이 보여주었지요.
혜공은 조그만 절에 살면서 날마다 미치광이처럼 술에 취해서 등에 삼태기를 진 채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습니다. 그는 우물 속에서 잠을 자도 옷이 젖지 않았지요. 나무꾼과 소치는 아이들, 농부들이 쓰는 삼태기를 등에 지고 술에 취해 춤추고 노래한 것은 이 티끌세상에서 함께 어우러져 살자는 것이었습니다.
대안화상은 언제나 장터거리에 살면서 서민들과 애환을 함께 했습니다. 호화롭게 생활하는 귀족사회의 궁전을 마다하고 장터거리에 살면서 허위와 가식에 가득찬 귀족 승려들에게 수행자의 참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민중들의 삶의 모습을 올바로 전해줌으로써 사치에 젖어 있는 귀족들이 그들 삶을 뒤돌아보게 하기 위해서였지요.
시골의 혜숙, 골목거리의 혜공, 장터거리의 대안이 보여준 것은 왕실이나 귀족들이 사는 성 안의 큰 절에서 귀족생활하는 승려들에 대한 무서운 질책이었지요. 원효는 이들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비로소 무애의 실천행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원효는 삼국통일 전쟁이 남긴 비극의 얼룩을 지워내면서 인간의 고통이 얼마나 깊고 크며, 인간에 대한 불쌍함과 애처러움은 또 얼마나 큰 힘을 지녔는지를 알고 싶었습니다.
원효가 깨달은 것은 살아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따뜻한 마음을 낼 수 있는 것이 대비심(大悲心)이며 보살의 존재 이유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지붕 밑에서 한 그릇에 담긴 밥을 함께 먹는 것과 같은 삶을 실천했습니다. 민중속으로 들어가 함께 지내면서 그들을 즐겁게 해주는 삶을 추구했지요.
바가지 하나에 담겨 있는 밥이나 국물을 골고루 나눠 먹으면서 해맑게 웃고, 먹고난 뒤에는 춤추고 노래하여 세상 근심을 덜어내는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밥이나 국물을 담는 바가지였습니다. 마치 석가모니 시대의 흙발우가 지닌 의미와도 닮았지요.
이같은 원효의 무애사상이 일본에 전파되어 무애차가 되고, 다시 농차라는 이름의 초암차 형식이 생겨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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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39> 매월당과 일본 초암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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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차 살림은 세 갈래 정신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맨 먼저 챙겨야 할 것이 풍류(風流) 정신입니다. 상고사(上古史)로 일컫는 신정(神政) 시대의 제천의식에서 비롯된 선교(仙敎) 정신이지요. 선도(仙道)를 수련하여 도달하는 선인(仙人), 신선(神仙), 신인(神人)의 경지는 우리 옛 사람들이 꿈꾸었던 이상향이었습니다. 신인은 흔히 무당이라고도 부르지요.
고구려에서는 선도 수련을 선인도랑(仙人徒郞)이라 했고, 신라에서는 풍류도(風流道), 풍월도(風月道), 화랑(花郞)이라 불렀습니다.
이렇듯 제천의식을 바탕하여 성립된 선도를 수련하는 데 있어 술(酒)이 아닌 차(茶)가 중요한 수련 방법으로 쓰여졌습니다.
차의 정신사를 이루고 있는 두 번째는 선차일여(禪茶一如) 정신입니다. 흔히 말하는 북방불교를 중심 삼을 때는 중국 불교에서 수행방법으로 삼아 온 선차를 들 수 있겠고, 남방불교를 중심 삼을 때는 가야의 건국과 관련된 차 살림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북방불교의 선차와 남방불교의 차법은 약 400년이란 시간의 차이가 있어서 우리나라 차 살림 역사를 살피는 데 여간 신중하지 않으면 안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세 번째는 유가(儒家) 철학과 관련된 선비들의 좌망(坐忘), 망형(忘形) 정신입니다.
고요히 앉아서 잡념을 버리고 현실 세계를 잊어, 절대 무차별의 경지에 들어가는 정신세계를 좌망(坐忘)이라 했습니다.
망형(忘形)이란 겉으로 드러난 형상, 즉 얼굴 생김새, 옷차림새, 직위, 재력, 소리, 빛깔, 냄새 등에 이끌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잊어버린 채 상대와 하나가 되는 마음을 말합니다.
선비들이 추구했던 좌망, 망형 정신과 차선일여 정신을 동시에 구가했던 대표적 인물이 매월당 김시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김시습은 한국 선차(禪茶)와 일본 초암차(草庵茶)를 연결하는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 그의 차 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일본 초암차의 미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길잡이가 됩니다.
김시습과 일본 초암차 사이에서 생겨난 비밀스런 인연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조선통신사와 이에 상응한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 관계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통신사(通信使)란 명칭이 처음 사용된 것은 조선 태종 13년이던 1413년부터 였습니다. 조선의 사절단이 아시카가(足利) 막부장군(幕府將軍)에게 파견되면 일본은 이에 상응하는 일본국왕사(日本國王使)를 조선으로 보냈습니다. 이때 조선으로 왔던 일본국왕사 일행들이 조선에서 어떤 일을 하고 돌아갔는지를 알아보면 김시습과 일본 초암차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흔적이 나타납니다.
임진왜란 이전 조선으로 파견되었던 일본국왕사 일행들의 이름과 그들의 구체적인 행동에 대한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습니다.
일본국왕사로 오는 일행의 인적 구성은 매우 특이했습니다. 아시카가 정권이 무사집단으로 핵심을 이루고 있었는데도 일본국왕사를 대표하는 인물은 물론 중요한 직책에 임명된 많은 이들이 승려였다는 점이 그렇습니다. 칼을 차고 군복을 입은 무사는 거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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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40> 일본의 승려 외교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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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 신분 외의 사람들은 지방 세도가 가문에서 선발된 자들이었는데 하인이나 심부름하는 직책을 맡고 있던 자들이 주류를 이루었습니다. 지방분권이 철저하게 이루어져 있던 당시 일본은 지방 세도가의 영향이 매우 컸기 때문에 국왕사의 일정 비율이 지방 정권 몫으로 배정되었지요. 지방 정권 역시 무사 집단이 장악하고 있었지만 사무라이 복장을 한 자가 국왕사 일원으로 파견되는 예는 매우 드물었습니다.
이렇듯 일본이 파견하는 사절단원 중에 무사 계급이 없었던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조선왕조를 건국한 이성계는 군인 출신이었고, 그가 고려 말 국내외적인 혼란을 군사적으로 극복해 낸 뒤 조선왕조를 세웠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즉 이성계는 고려를 빈번하게 침략한 왜구들을 토벌하는데 눈부신 활약을 보였지요. 왜구들은 이성계의 이름을 잘 알고 있어서 그가 조선을 건국하자 일본 무사들은 조선 침략을 극도로 자제하면서 조선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희망했습니다.
그러나 이성계는 거절했지요.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일본과의 국교는 조선의 완강한 거절로 열리지 못했습니다.
간신히 태종 13년에 외교 사절 파견이 시작되었지만 일본의 무사들은 국왕사 일행으로 선발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조선에 가면 지난날 왜구 침략의 죄를 물어 위해당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지요. 무사들의 이같은 조선에 대한 공포는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처럼 조선으로 파견되는 사절단이 승려를 주축으로 삼게 되자 일본의 조선 외교 중심이 승려 세력들에게 집중되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조선 정부에서도 통신사를 구성할 때 승려를 포함시키게 되었는데 그때부터 일본 불교와 조선 불교의 빈번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이같은 일본 승려들의 외교적인 진출은 자연스럽게 일본 안에서의 불교세력 확장으로 이어졌고 1560년 이후부터는 막부 정권의 존립자체를 좌우하려드는 일본 최대 권력 집단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불교세력이 소유한 재산에 대해서는 세금이 면제되었지요. 그러자 지방의 재력가들이 불교세력과 유착했습니다. 재산(토지)의 명의를 사찰에 기탁하여 세금을 면제받기 위해서였지요. 그 과정에서 사찰은 상당한 이득을 챙기는 등 부와 권력의 확장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마침내 아시카가 정권을 넘겨받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하여 불교 세력이 일본 통일의 최대 장애물로 지목되어 무자비한 탄압의 대상이 되었고 끝내는 참담하게 무너졌습니다.
1571년부터 10년 동안 대대적으로 감행된 오다 노부나가의 일본 불교 숙청이 있기 전에는 일본의 정신적, 경제적 핵심 세력의 하나로서 승려들과 사찰 조직의 위력은 매우 컸습니다. 특히 1423년 무렵부터 조선 남해안 지역에 설치된 왜관(倭館)은 일본 불교가 조선 불교 문화를 받아들이는 본격적인 전진 기지 역할을 하게 되었지요. 왜관 설치때부터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까지 무려 169년이라는 긴 시간이 일본 승려들에게 주어졌던 셈입니다.
그 169년 동안 일본은 줄곧 조선의 우수한 문화를 배우고 경제적 이익을 가져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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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41> 웅천왜관의 日승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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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관이 설치된 부산, 웅천(내이포), 울산(염포) 세 곳에는 일본 사찰이 속속 들어 섰지요. 사찰에는 일본 불교를 대표하는 다이도쿠샤(大德寺), 엔랴쿠지(延歷寺), 네고로지(根來寺), 일향종(一向宗)외 혼간지(本願寺)에서 경쟁적으로 승려를 파견하여 조선의 문물을 일본으로 빼내 오도록 했습니다.
[김시습이 일본승려 준을 만났던 경주 남산 용장사지의 삼륜대여래좌상.] 이 사찰들은 삼포 안의 사찰을 장악하기 위한 암투를 벌였지요. 가장 절이 많았던 웅천(내이포)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막부 정권의 세력을 이용하기도 했습니다. 웅천에는 항상 열 개 이상의 사찰에 50명 정도의 일본 승려가 상주했을 만큼 일본 정부와 불교 세력들이 눈독을 들였던 곳이었습니다. 1423년부터 임진왜란까지 169년 동안 웅천 일대는 왜관의 일본인들의 땅이었습니다. 웅천은 매우 낙후된 곳이어서 사람이 많이 살지 않았습니다. 조선정부가 일본에게 왜관을 허락하면서 웅천을 지정해 준 것도 그곳이 별로 알려진 곳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웅천이 역사적으로 중요성을 갖게된 것은 웅천왜관이 들어선 이후 일본인들의 활약 때문이었지요. 조선의 눈길이 그다지 미치지 않는 곳임을 간파한 일본 승려들이 웅천에다 경쟁적으로 절을 짓게 되면서부터 웅천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선과의 무역상들도 자연히 웅천을 선호했고, 임시 체류자와 일본 국왕사들도 웅천을 주로 이용했습니다. 웅천은 가히 일본인의 땅처럼 변해갔지요. 숫적으로 절대열세인 조선인들은 왜관의 일본인들에게 경제적인 종속과 함께 머슴같은 처지로 전락했지요. 이같은 사실은 1455년 7월 경상도 관찰사 황수신이 세조에게 보고한 기록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일본 국왕사의 주축을 이루는 승려들은 조선에 설치되어 있는 삼포의 왜관에 미리 와서 생활하는 승려들로부터 여러 가지 정보를 얻었습니다. 초기에는 조선에서 쌀, 콩, 면포를 그들이 가져온 구리와 바꿔서 가져갔지만, 1450년 이후 일본에서 선종(禪宗)이 크게 유행하자 조선의 대장경과 범종을 구해가는 것으로 양상이 바뀌었지요. 일본 불교에서 선종이 유행하게 된 이유도 일본국왕사로 왔던 승려들에 의하여 조선의 선불교 문화가 전파되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웅천에 있는 왜관의 사찰에 사는 승려들 중에는 조선말을 배워서 유창하게 구사하는 것은 물론 조선의 풍속과 지리에도 밝아서 조선인 복장을 하고 조선 전역을 누비고 돌아다닌 자들이 더러 있었다는 기록이 조선의 여러 개인 문집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들 중에는 조선으로 귀화하여 조선 여자와 혼인한 자도 생겼지요. 그런 자들이 수집한 정보는 일본국왕사로 온 승려들에게 고스란히 넘겨졌습니다. 김시습이 경주 금오산 용장사(茸長寺)에 칩거하며 ‘금오신화’를 집필하고 있을 때 김시습을 찾아왔던 일본 승려 준(俊)을 주제로 한 시가 있습니다. ‘고향을 멀리 떠나니 뜻이 쓸쓸도 하여 옛 부처 산 꽃 속에서 고적함을 보내누나. 쇠 차관에 차를 달여 손님 앞에 내놓고 질화로에 불을 더해 향을 사루네. 봄 깊으니 해월이 쑥대 문에 비치고 비 멎은 산 사슴이 약초 싹을 밟는구나. 선의 경지나 나그네 정 모두 아담하나니 밤새 오순도순 이야기할만 하여라.’ |
정동주의 茶이야기 <42> 매월당 시의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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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당집(梅月堂集)에 들어있는 그의 시집 제12권 ‘유금오록(遊金 鰲錄)’에 수록된 ‘일동승 준 장로와 이야기하며(與日東僧俊長老話)’ 라는 시편이 있습니다. 그가 1460년대에 걸쳐 금오산 용장사에 살면서 쓴 시지요.
앞에 든 ‘일동승 준 장로와 이야기하며’에서 보듯이 ‘일동승(日東僧)’이란 말과 ‘준(俊)’이라는 이름, ‘장로(長老)’라는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보기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이 시의 제목에는 몇 가지 풀리지 않은 의문이 들어 있습니다.
‘일동승’의 ‘일동’은 어떤 장소를 뜻하고, ‘승’은 그 어떤 곳에서 왔거나 살고있는 승려를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곳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요? 혹 일동이라는 지명이 있었을까요? 준(俊)이라는 이름 다음에 나오는 장로(長老)는 또 무슨 뜻인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같은 의문에 대하여 양은용 교수는 1990년 5월 월간 ‘다담(茶談)’에 발표한 ‘김시습의 신선사상’에서, 이 시를 김시습과 한 일본 승려의 교류를 말해 주는 역사 자료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새롭고 놀라운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양은용 교수의 이 글은 ‘일동승’ ‘준’ ‘장로’라는 말들이 일본과 관련된 것으로 보고 쓰여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김시습이 경주 지방에서 지낸 것은 1460년대를 거쳐 1470년대 초반까지 였습니다. 15세기 후반 무렵 일본의 옛 이름은 왜(倭)였습니다. 따라서 ‘일동’이 왜(倭)를 뜻하는 말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울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일동은 어디였을까요? 혹 해가 뜨는 동쪽 쯤으로 보면 어떨까요? 동쪽에서 온 스님이라고 말입니다.
용장사에서 동쪽이 되는 어떤 곳을 ‘일동’이라 부르고, 그곳에서 온 승려 이름이 준(俊)이었다고 보면 어떨까요? 그 준이라는 승려의 직함이나 위상에 해당되는 말이 장로(長老)가 아니었을까요?
이와같은 의문을 풀어보기 위해 김시습이 남긴 15권의 시집을 읽어 볼 필요가 있겠습니다. 시집에서 그는 몇 가지 특별한 말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큰 깨달음을 이루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스님을 지칭하는 높임말에 대한 것과 그런 분들의 이름을 모두 외자로만 적고 있다는 점입니다.
높임말은 상인(上人), 사(師), 선로(禪老), 도인(道人), 노(老), 장로(長老)등 6가지입니다.
이름은 선(禪), 산(山), 열(悅), 미(微), 우(牛), 매(梅), 민(敏), 인(仁), 정(正), 희(熙)라는 외자를 쓰고 이름 뒤에 상인(上人)이란 말을 썼습니다. 선상인(禪上人), 우상인(牛上人) 등으로 말입니다. 상인은 대사(大師)라는 뜻입니다. 선로(禪老), 도인(道人), 노(老) 등도 대사와 같은 뜻으로 사용된 조선시대의 존경받는 승려에 대한 칭호였지요.
그런데 그의 시집 제 12권인 ‘유금오록(遊金鰲錄)’에 수록되어 있는 ‘일동승 준 장로와 이야기하며’라는 시에서만 장로(長老)라는 매우 이채로운 칭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꼭 한 번 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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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43> 日 승려들의 조선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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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의 외교를 담당했던 일본 승려들의 활약상은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423년에서 1560년까지 일본의 승려가 외교 사절의 책임자가 되어 조선을 방문한 횟수는 140여 차례였습니다. 승려가 책임자로 올 경우 수행원 대부분도 승려였는데 많을 때는 40여명을 넘었고 적을 때는 10여명 정도였지요.
137년 동안에 조선을 방문한 일본 승려들은 2천5백여명이 넘어 보입니다. 그들 중에는 여러 해 또는 여러 달씩 조선에 머물면서 조선 곳곳을 방문했는데, 그들의 임무도 매우 다양해서 대장경과 범종을 구해 가는 일에 그치지 않았지요. 조선 정부의 관리 외에 조선의 서민들이나 승려들을 만나거나 지방에 은거하고 있는 학자와 소문난 사람들도 찾아갔습니다.
그 승려들 중에 ‘준초(俊超)’라는 이름을 가진 승려도 있었습니다.
‘세조실록’ 세조 10년 2월 17일 경자 조에 기록된 인물인데, 1464년의 일입니다.
실록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습니다.
‘왜국 사자(使者) 중(僧) 준초(俊超) 등이 전년(前年)에 하직하고 돌아갔는데, 영등포에 이르러 바람에 막히어 머물러 있었다. 임금이 이를 듣고 예빈 소윤 정침을 보내어 선위하게 하고 이르기를, “듣건대 너희들이 여러 달 머물러 있었다고 하는데 간고(艱苦)가 반드시 많았을 것이다. 지대(支待)하는 모든 일이 소우했을 것이므로 지금 사람을 보내어 위로하니, 나의 뜻을 알도록 하라” 하였다.’
‘준초’라는 승려가 조선에 왔던 때는, 저 ‘일동승(日東僧) 준(俊) 장로(長老)’가 매월당 김시습을 찾아가 차를 대접받고 밤새워 이야기를 나누던 시기와 일치합니다.
준초 일행은 1463년 여름에 조선으로 왔다가 태풍 때문에 이듬해까지 조선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온 승려들은 남해안 지방의 삼포왜관 안에 거처하는 승려들을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는데 주로 제포 왜관에 사는 승려를 이용했습니다.
제포 왜관에는 수십 년씩 조선에 거주해 온 승려들이 많았고 그들의 조선 말 솜씨나 조선 풍속을 아는 정도는 무지한 조선 서민들보다 앞서 있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월등한 경제력으로 왜관 가까이에 사는 웅천의 조선인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아무튼 외교사절이라는 신분은 예나 지금이나 방문국으로부터 특별한 예우와 보호를 받기 때문에 준초는 통역을 데리고 당시 조선에서 기이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 매월당을 방문했던 것입니다.
‘일본인명사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준(俊)’은 사람 이름이 아니고 특별한 역사를 지닌 성씨입니다. 그리고 매월당집에 수록된 시편들 가운데서 조선 스님들의 이름을 적을 때 매월당은 모두 외자로만 표기하고 있어 ‘준’이 일본인의 성씨라는 일본 기록과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준’씨는 매우 특별한 가문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말로 ‘토시’ 또는 ‘쥰’으로 발음하는 준씨(俊氏) 가문은 승려 집안으로 판단되는데, 세속인들처럼 혼인하여 가족을 두고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살았던 집안이라기보다는 어느 불교 종파를 주도하는 사찰의 법통을 상징하는 성씨로 자리 잡은 것이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승문(僧門)의 성씨라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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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44> 매월당의 차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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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초(俊超)라는 이름 위로 준식(俊識), 준혜(俊慧), 준관(俊寬)이 나오는데, 준씨 승문의 대통을 잇는 계보라고 해석 됩니다.
[무라타 슈코가 사용한 일명 슈코 청자차완의 뒷 모습(높이 5~6㎝, 입넓이 13㎝).] 준씨는 11세기 초부터 등장합니다. 일본 역사에서 11세기는 매우 탁월한 능력을 지닌 극소수의 승려들이 송나라로 유학을 가서 중국의 선불교를 배우고 돌아와 일본에다 중국 차(茶)문화를 처음 소개한 시기였습니다. 중국과의 교류는 무엇보다 먼 거리 때문에 빈번하기 어려웠지요. 그 대신 중국과 진배없는 조선의 불교와 차 문화를 배우는 것이 훨씬 쉽고 부담도 적어서 일본 승려들의 조선 여행이 잦았던 것이지요. 오랜 기간에 걸쳐 많은 승려들이 조선의 불교와 차 문화를 체험하고 돌아갔지만 그들의 체험이 일본 차도에 좋은 영향을 미치는 데는 그들의 기존 인식을 변화시킬만한 강렬한 특징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미 그들은 원효의 무애차에서 비롯된 농차문화를 만든 뒤였고, 무애차에서 느껴지는 소탈하고 질박하며 자유분방한 멋을 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볼때 매월당은 외국인의 눈에 매우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인물이었겠지요. 더욱이 그가 울산, 웅천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경주 지방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은 일본 승려들에게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겠지요. ‘준초’가 매월당을 찾아갔을 때 매월당은 스스럼없이 낯선 나그네를 맞아 주었고, 마치 오랜 친교를 가져온 사이처럼 매월당풍의 차를 대접했을 것입니다. 그때 준초나 통역으로 따라간 왜승, 혹은 동행한 승려들 모두의 눈에 비친 매월당의 차법(茶法)과 방안의 모습은 퍽 인상 깊은 이국의 풍물이었겠지요. 일본 승려인 준초가 김시습을 찾아왔을 당시의 일본은 지나치게 엄숙하고 사치스러운 서원차(書院茶)가 유행하고 있었는데, 무로마치(室町)막부의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1435~1490) 때에 최고조에 달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 앞 시대였던 가마쿠라(鎌倉)막부 때는 선승(禪僧) 중심의 차 문화였지요. 그러다가 무로마치 막부 시대가 열리면서부터 차 문화를 이끌게 된 것은 무가(武家)와 상업자본가들이었습니다. 사무라이들의 근엄하고 권위적인 취향과 상업자본가들의 과시욕이 경쟁적으로 작용하여 서원차가 풍미하게 된 것입니다. 화려하고 귀족적인 호화판 차회(茶會)가 빈번해지면서 소비풍조가 만연하고 폐해가 쌓여 갔습니다. 서로의 차와 차완을 자랑하고, 품격과 값을 경쟁하던 나머지 도박으로까지 번졌으니까요. 집권자 요시마사는 병폐가 깊어져 가는 서원차 문화를 바꾸고 싶어했지만 그럴만한 계기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간소하고 조용하며 서민풍이 느껴지기도 하는 이색적인 차법을 선보인 것이 무라타 슈코(1422~1502) 였습니다. 그는 대덕사에서 차와 선(禪)을 일치시키는 수행으로 당대의 이목을 받는 승려였습니다. 나이 예순 살을 넘기면서 더욱 더 고요하고 깊은 선열(禪悅)을 느끼게 하는 그의 독특한 차 세계는 서원차의 폐해를 치유시킬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게 되었지요. 요시마사의 서원차와 관련된 정치적 고뇌를 곁에서 지켜보던 노아미(能阿彌)는 요시마사에게 차를 가르친 사람이었는데, 슈코 선사의 차법이 지닌 여러 가지 특징과 무라타 슈코를 요시마사에게 직접 소개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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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45> 향기로운 혁명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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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45
<향기로운 혁명의 시작>
무라타 슈코는 서원차의 넓고 화려한 차실 안에다 병풍을 둘러 쳐 놓고 그 안에서 차를 마셨는데, 병풍 안은 겨우 다다미 넉장 반 넓이였습니다. 서원차에 비교하면 엄청나게 협소한 공간입니다. 크고 넓은 방안을 일부러 작게 고쳐서 혼자 아니면 둘 혹은 세 명이 고요하게 앉아서 차를 즐기는 모습은 매우 이채로웠지요.
장식도 그다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수묵화 한 두 점과 꽃 한 송이를 꽂은 꽃병 외에 차도를 위한 약간의 도구들 정도였거든요. 이때는 아직 꽃과 꽃병이 차실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노아미라는 요시마사의 차도 스승이 슈코를 소개시켜 준 이유는 단순히 슈코의 차법이 단순 소박하다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외형보다는 초암차의 정신세계를 깊히 들여다 보기를 원했던 것 같습니다. 화경청적(和敬淸寂)으로 요약할 수 있는 정신세계는 외형의 소박성, 단순미를 통하여 가장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특별한 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차원이라고 꿰뚫어 보았던 것 같습니다.
노아미의 권유를 받은 요시마사는 슈코를 만나 초암차에 대해 물었습니다. 슈코는 차에서 참으로 소중한 것은 일미청정(一味淸淨)과 법희선열(法喜禪悅)이며 이 경지는 이미 조주선사(趙州禪師)께서 설파하신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화경청적 또한 송나라 때 수단(守端)선사께서 남긴 깨달음의 흔적입니다. 그후 송나라 유학을 다녀온 에이사이(榮西)선사를 비롯한 여러 승려들에 의하여 일본으로 담겨들어 온 고귀한 정신이지요.
이렇듯 슈코를 원조로 삼는 차선일미(茶禪一味)정신과 차실의 작고 소박함, 차 마시는 법의 고요함과 자연스러움이 미묘한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차법은 뒷날 초암차(草庵茶)라는 차도(茶道)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훗날 초암(草庵)이라는 이채로운 건축물이 등장하게 된 동기였으며, 피를 흘리지 않고 일본 역사의 방향을 바꿔 놓은 향기로운 혁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이같은 혁명의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일본의 차인들이었지만 그 필요성을 충족시켜 준 조건들은 전적으로 조선과의 오랜 교류를 통하여 마련된 것이었습니다. 이 조건들을 발견하기 위해 무라타 슈코 자신이 직접 조선 곳곳을 여행하면서 초암의 원형이 될만한 건축물들을 본 것은 아니었습니다. 또한 그런 집들과 함께 살아가는 조선 서민들의 가난한 생활이 자연 풍광과 한 몸이어서 인간의 삶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또 하나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체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느 한 시기에, 몇 몇 소수에 의하여 조선의 아름다움이 집중적으로 받아들여져서 이룩된 것도 물론 아닙니다. 긴 시간을 두고, 여러 사람의 다양한 체험에 의하여 조금씩 조금씩 묻어 들어와서 일본인의 차 생활 속에 녹아 스며들었던 것이지요. 소리도, 몸짓도 안보인 채 느리고 자연스럽게 일본 서원차의 병폐를 치유시켜 새로운 차도의 몸으로 변화시켜 낸 것이지요.
서원차의 유행이 강렬한 힘을 지니고 있었을 때에는 조선에서 묻어 들어온 여러 가지 아름다움의 조건들이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겠지요. 서원차의 요란스러운 차풍이 사회악으로까지 변질되자 그때부터 조선에서 온 소박하고 단순하며 고요하고 자연스런 조건들에 눈길을 주는 차인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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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46> 다도가 생겨난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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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살펴본대로 ‘다도(茶道)’는 12세기 이후부터 진행되어온 일본 역사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창안해낸 일본인의 종교의식이었습니다.
[이도차완이 등장하기 이전 농차를 마시는데 주로 이용된 천목차완.] 다도의 핵심에는 도교(道敎)와 도가사상의 특징인 현실세계에 대한 신비주의적 형이상학적 이론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히 도교의 상징인 무위(無爲)사상을 일본 무사들의 폭력성, 잔혹성, 강압성을 누그러뜨리고 제압하기 위한 정치의 한 방법으로 여성적 유약함이나 소극성을 찬양하는 문화로 변형시켰지요. 이처럼 다도의 정신적 내면 세계는 중국의 도가사상에서 취사선택하고, 내면 세계를 담는 그릇은 조선의 불교문화와 서민행활을 응용하여 창안한 것이지요. 적어도 500년 정도 끊임없이 계속된 다도 형성의 역사는 곧 일본 미학체계의 역사이자 일본인의 정신구조가 확립된 역사여서, 오늘날 한국의 차인들이 아무 생각없이 ‘다도’를 말하고 닮으려고 애쓰는 것은 매우 불행하며 위험한 일입니다. 차문화는 군대와 무기를 사용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문화를 지닌 민족과 국가를 소리없이 점령하는 무서운 전쟁으로 변질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차문화의 특성이 매우 다양하고 은밀한 도구와 정신의 복합체여서 한 번 손을 대면 자신도 모르게 계속 이끌려 들어가게 되지요. 마치 중독성 강한 마약과도 같습니다. 다도의 내면이 담겨 있는 그릇으로서의 조선 불교문화와 서민 생활을 주축으로 삼아 초암차 문화가 일어났고, 농차법이 만들어져 마침내 다도가 완성되었지요. 결국 다도는 일본 정신의 혁명적 진화를 가능하게 한 종교였는데, 그 혁명의 한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그릇이 다름아닌 이도차완이었습니다. 중국과 고려, 조선의 수많은 그릇들 중에서 유독 ‘이도(井戶)’라 이름 붙여진 이 그릇이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인 특유의 미적 감각 때문이었지요. ‘초암차 문화>농차법>다도’의 완성이 절체절명으로 필요했던 이유는 일본의 정치적 혼돈을 극복하고 일본 통일을 달성해야 했기 때문이겠지요. 정치적 혼돈의 주역은 칼 숭배자들인 무사들이지요. 이들은 권력 장악을 위한 편가르기와 불신, 탐욕과 사치풍조를 주도한 상업자본가들의 차문화를 변혁시키면 정치적 통일이 가능하다고 보았지요. 그때까지 일본 차인들이 써온 차그릇들은 모두 크기가 작은 것들 뿐이었는데, 여러 명이 한 그릇에 담긴 차를 돌려 마시는 농차법이 정착하기 위해서는 용량이 큰 그릇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농차법은 전혀 새로운 차법인데다 모두가 공감하고 있는 시대적 병폐를 보다 쉽게 극복할 수 있겠다는 희망을 예감하게 해주었거든요. 그같은 시대적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 낸 사람이 타케노 쇼오 였지요. 그는 놀랍게도 상류계급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사무라이도, 승려도, 귀족도 아닌 일본의 최하층민인 ‘부락민(部落民)’ 출신의 피혁상인이었지요. 그는 신분의 슬픔을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피혁상인으로 모은 자본을 이용하여 비교적 차별이 덜한 쪽으로 눈길을 돌려 차그릇 감정사가 된 것이지요. 그런 그의 눈에 발견된 것이 이도차완입니다. 큰 것은 한꺼번에 20명 이상이 차를 돌려마실 수 있을 만큼 용량이 크고 투박하게 생긴 것이었지요. |
정동주의 茶이야기 <47> 日人들의 이도차완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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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茶千年 47.
<왜, 이도차완인가>
이도차완은 일본의 정치적 고뇌와 시대적 소망을 한꺼번에 해결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조선 승려들의 흙발우였습니다. 1530년 이전에는 그런 그릇이 존재했는지 일본 차인들로서는 누구도 몰랐던 뜻밖의 출현으로 일본 차인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그릇은 일본 통일에 일정한 역할을 해냈고, 그때부터 차인들이 경쟁적으로 소유하고 싶어하는 또 다른 목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었던 일본과 조선의 국교가 다시 열린 1607년부터 일본 차인들은 조선에다 차그릇을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통일되자 안정과 평화의 시대가 열렸지요. 차인들의 다도는 더욱 자유분방해지고 조선 차그릇을 향한 그들의 욕구는 억누를 수 없이 팽창했습니다.
차그릇의 주문은 부산지방으로 집중되었지요. 부산, 동래, 기장, 김해, 양산, 진해 등이 포함되었는데 1640년 이후부터는 진주, 하동, 사천까지도 주문품을 확보하기 위한 일본 상인, 차두(茶頭·권위있는 차 사범)들이 조선을 드나들었지요.
이들은 주로 일본의 유명한 차인이나 명망가가 소장하고 있는 이도차완과 똑같은 것을 갖기 위하여 그림을 그리거나 실제 견본물을 조선으로 가져와서 주문을 했지요.
하지만 조선에서 만들어진 것은 그림이나 견본과는 사뭇 다른 그릇들 뿐이었지요. 견본으로 가져온 그릇을 만들었던 사기장들은 거의 모두 일본으로 납치되어 버렸고, 조선에 남은 사람은 하급 기술자였거나 가마에서 허드렛일을 하던 사람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기술과 경험부족으로 인한 당연한 결과였지요.
대표적인 것이 ‘이라보’라는 이름의 차그릇입니다. 그릇 표면이 까칠까칠하다는 일본어 표현(이라이라)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한 그릇이지요. 그릇의 생김새와 감촉, 색깔의 다양성 등 이도차완을 흉내내기 위한 증거로 충분합니다만 전혀 다른 그릇이지요.
그 후 1717년 부산 초량의 왜관이 폐쇄될 때까지 계속 주문 생산된 차그릇은 미시마, 하게메, 와리고다이, 긴카이, 고쇼마루, 운가쿠, 고히키, 이라보, 고키, 한시, 힛센 등으로 부르는 차그릇들을 주문하여 가져갔습니다.
이같은 차그릇 주문이 백년 넘도록 일본 차인들에게 유행했던 이유는 전적으로 이도차완을 향한 집념 때문으로 봐도 크게 틀리지는 않습니다.
특히 진주, 하동 쪽에까지 눈길을 돌린 것은 임진왜란 때 이쪽 지방을 집중 유린했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그의 군대가 이 지역에서 수탈해간 독특한 그릇들 때문인 것으로 분석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20~30년대 일본의 유명한 차그릇 수집상이자 전문가였던 이토 마키오가 진주에서 이도차완 몇 점을 발견한 뒤 이도차완의 주된 생산지로 진주 부근을 지적했던 점과도 무관하지 않습니다.
아무튼 이도차완은 일본 차문화에서 단연코 이채로운 존재였으며, 400여년을 두고 여전한 관심거리가 되고 있지요.
그 이도차완이 196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도 흥미거리가 되었는데, 차인들이 아닌 도굴꾼, 도자기 상인들 사이에서 비밀스럽게 논의되다가 1970년대 들어서 극소수 도공에 의해 실험되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 차인들과 도공들의 관심을 모으기 시작했지요. 비싼 가격과 함께 명성과 권위의 상징처럼 되면서 ‘막사발’이란 엉뚱한 이름이 생겨났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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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茶이야기 <48> 명칭의 배경과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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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차인들의 지극한 존경을 받아온 이도차완을 막사발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은 한국의 도자기 관련자들 중 몇 사람의 과오로 인한 것입니다.
[조선시대 생활잡기들의 미학을 다룬 야나기 무네요시가 창간한 잡지 '민예'] 물론 여기에는 일본의 저명한 도자기 및 한국 고미술품에 관한 전문비평가들의 결코 전문적이지 못한 경솔한 기록과 발언이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야나기 무네요시인데, 그는 이도차완을 16세기 조선 서민들의 생활잡기, 그것도 하층민의 밥사발이라고 단언했지요. 뒤이어 하야시야 세이죠도 이 견해를 지지하면서 잡기류 중에서도 제기(祭器)의 한 종류로 추정하고 있지요. 하지만 조선 16세기 하층민은 도자기로 만든 밥그릇을 사용하지도 못했거니와 그런 그릇이 존재할 수도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오지그릇이나 박바가지였을 뿐이라는 16세기 조선 민중사 특히 생활사를 전혀 몰랐으면서도 그렇게 단언해버린 데는, 한국인과 한국 역사에 대한 우려할 만한 폄훼의식과 인간의 마음을 도외시하는 극단적 탐미주의에 함몰되었기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조선시대 서민들의 생활 잡기들에 대하여 탁월한 미학적 분석을 내놓아 칭송받아온 야나기 무네요시지만, 정작 한국인의 마음이 진하게 묻어있는 명품들을 그의 개인 소장품으로 가져가버린 행위는 그의 속마음이 어떠했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명백한 증거지요. 그의 후학이라 볼 수 있는 이른바 한국의 고미술품과 도자기에 대한 감식과 비평으로 한국의 관련 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이들 중에서도 여전히 한국 고고미술사를 얕잡아 보거나 한국 연구자들을 우습게 보는 경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같은 분통 터지는 결과는 먼저 한국 학자들의 무지와 무소신, 비굴한 굽신거림, 일본 문헌에의 지나친 의존도 등이 복합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지요. 특히 이도차완에 관해서는 더욱 더 그러합니다. 어쩌면 이 문제는 한국 차인들의 일본 다도에의 지나친 함몰이 가져온 당연한 능욕이자 주체성 상실일지도 모릅니다. ‘다도(茶道)’는 엄연한 일본인의 생활 종교나 진배없는 철저한 일본의 역사 문화임에도 한국 차인들은 다도의 정서와 실제를 배우는데 많은 시간과 경제력을 들이고 있습니다. 한국 차인들에게도 이제 이도차완의 존재는 다른 차완 종류와는 다른 품격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17세기 이후 일본 차인들이 수량이 희소한 이도차완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흉내낸 그릇을 조선에서 주문하여 가져 갔듯이, 오늘날 한국 차인들도 이도차완을 흉내낸 이른바 막사발을 비교적 비싼 가격에 구입하여 사용하지요. 이도차완에 대한 한국 차인들의 뒤늦은 선호는 90년대 들어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이런 경향은 전통 차법의 맥이 문란해져 300여개의 차법(茶法)과 유파가 난립하면서 더욱 심해졌지요. 여기에 그릇의 제작보다는 판매를 위한 상술과 조직적 거래에 더 치중하는 도자업자와 거래상의 농간이 보태어져서 그야말로 막나가는 저질 그릇인 막사발을 이도차완의 역사에 끼워서 팔게 되었지요. 이런 광경을 지켜보던 일본인 장사들도 가세하여 막사발은 이제 추태라는 인상까지 줍니다. 속고 속이는 차그릇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 다름 아닌 ‘막사발 문화’ 입니다. 최근에는 일본인 학자들까지 한국에 초청되어 함부로 말하면서 혼란을 가중시키고 있습니다. |
정동주의 茶이야기 <49> 한국 차의 병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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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차(茶)는 몇 가지 큰 병폐를 지니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문제를 거론하여 근본 치유가 필요한 것은 아픔을 참으면서 치유하고, 보완할 것과 고쳐야 할 것들은 고쳐야 합니다.
[흑도찻종. 찻잔을 엎어 놓으면 종 모양같이 생겼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원전 1~2세기 유물이며 경남 김해에서 출토됐다.] 모든 것은 적절함과 시간이 있듯이 시기를 놓치지 말고 정도를 넘지 않도록 차인(茶人)들의 지혜를 모아야만 합니다. 첫 번째 병폐는 우리나라 차살림 역사를 제대로 정리해보지도 않고 손쉬운 중국 차역사에 의존하며 일본 다도사(茶道史)에 흥미를 보이는 우매함입니다. 두 번째는 한국 차잎으로 만드는 차 제조법의 오랜 맥을 놓쳐버리고 덖음차 일색의 조악하고 획일적인 상품만을 생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차살림하는데 부자의 위세와 권력 가진자의 권위주의를 너무 앞세우고 있는 점입니다. 가난한 민중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것으로 왜곡시키는 오늘날 한국의 차살림은 큰 비극을 가져올 수 있는 근심거리입니다. 네 번째는 중국과 일본 차의 범람을 한국 차인들이 자초해 놓고 한국 차의 위기 앞에서는 차농사 짓는 이들과 정부의 농산물 정책을 비난하는 식의 정체성을 의심하게 하는 태도입니다. 다섯 번째는 차그릇 만드는 이들의 태도입니다. 좋은 차그릇 만드는 일에 몰두하지 않고 명망있는 차인들이나 영향력이 큰 사회 인사들과의 적절치 못한 인간관계를 이용하여 차그릇의 품격과 가격을 매겨 유통시키는 일입니다. 여섯 번째는 차인들이 정녕 차를 모르는 점입니다. 기기묘묘한 손놀림과 화려한 옷차림새, 근거없는 해괴한 차법 이름과 공허하고 애매한 이론, 패거리식 위세의 과시로 보일 수 있는 차모임도 큰 걱정거리지요. 일곱 번째는 차인이면서도 차그릇의 아름다움을 읽어내지 못하는 미학적 문맹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오직 차선생이나 지도자가 좋은 차그릇이라고 말하면 그대로 좋은줄 알아버리는 주입식 미학 교육은 마치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입시 교육이 지닌 비극과 너무 닮았습니다. 여덟 번째는 크고 화려한 차실 문화의 유행을 들 수 있습니다. 14~16세기 일본을 위기로 몰아 넣었던 일본 서원차(書院茶)의 병폐를 그대로 닮은 문화가 한국 차인들에게 유행하고 있습니다. 아홉 번째는 차와 관련된 상인들의 농간이 극에 닿아 있는 점입니다. 특정 국가의 차 제품을 이용한 지나친 농간과 협잡은 사법당국에 의해 처벌되고 국세청 조사를 통하여 적절한 제재가 가해져 문란해진 외국차 상품의 유통질서를 바로 잡아야 합니다. 열 번째는 이상의 아홉가지 병폐가 특정 종교단체나 그 종교에 속해 있는 성직자들의 행동과도 상당한 관련이 있다는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와같은 열 가지 한국 차살림의 병폐를 하나 하나씩 구체적으로 살피면서 적절한 개선 방법과 개선된 사례를 들어 보임으로써 한국 차살림이 한국인의 생활에 좋은 길동무가 되기를 바랍니다. 먼저 우리나라 차살림의 바른 역사를 짚어 보는 일부터 시작하겠습니다. 한국 차살림의 기원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차례(茶禮)’라는 말입니다. 천지신명과 조상의 제례 때 차를 올렸다는 불후의 증거지요. 차례를 올린 사례들이 한국 고대사와 민속 곳곳에 그대로 남아 전해지고 있습니다. |
정동주의 茶이야기 <50> 차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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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차살림 내력을 짚어보는 것은 우리 전통문화의 한 원류라 할 수 있는 차례의식이 과연 존재했는지, 존재했다면 구체적으로 언제부터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입니다.
차례는 차를 달여서 천지신명께 올린 뒤 차례에 참석한 사람들이 신명께서 내리신 복을 함께 누리며 마시는 의례(儀禮)이며 차를 큰 그릇에 담아 돌아가며 마시는 회음례(回飮禮)였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고구려에서 해마다 10월에 행하던 동맹(東盟) 혹은 동명(東明)과 부여의 영고(迎鼓), 예맥의 무천(舞天)을 증거로 들 수 있지요.
고구려시대 옛 무덤에서 전차(錢茶)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차가 부장품으로까지 쓰여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다국(句茶國)이란 고구려의 지방 이름을 적어 전하고 있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평안북도 용호동에서 출토된 굴뚝이 달린 이동식 화덕의 존재는 곧 고구려의 차문화가 성행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신라의 차문화는 어떤 이유로도 부정할 수가 없지요.
경주 창림사 옛 절터에서 출토된 기와조각에 새겨진 다연원(茶淵院)이란 글자가 신라시대의 전문화된 찻집을 뜻한다는 해석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안압지에서 출토된 언정영(言貞榮)이라 새겨진 토기 찻사발이나 용왕 찻그릇, 신라 화랑들이 명상 수행했던 한송정의 차화덕 기록들은 신라 사회 전반에 걸쳐 차마시는 것이 일반화 되어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이같은 차문화의 일반화를 결정적인 증거로 삼을 수 있는 것이 고구려, 신라, 백제의 인민들이 설과 추석 때 조상께 올리는 차례입니다.
국가가 천지신명께 차를 올려 제례의식을 행하고, 인민들은 자기 조상과 농사신, 용왕이나 농사와 관련된 신들께 차로써 의례를 치렀지요.
가야시대의 차문화 또한 선명한 증거를 남기고 있지요.
가야지방에서 출토된 토기 찻그릇들의 제작 연대가 기원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나 김수로왕의 시제(時祭)에 차를 올렸다는 기록, 김해와 언양, 사천지방에 전해오는 인도 아셈지방이 원산지인 차나무의 존재가 그 증거입니다.
고려시대에는 차문화의 화려한 전성기였지요.
‘고려도경’에 나타나는 차 관련 제도와 문화는 일반 인민들에게 일반화된 것이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신라의 충담선사가 경주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께 해마다 3월3일과 9월9일에 차를 올린 것입니다.
또한 신라 왕실에서 태어난 왕자였던 김교각(金喬覺·696~794년)이 성덕왕 27년이던 728년에 신라에서 흰개, 볍씨, 차의 종자를 가지고 중국 안휘성 청양현 구화산으로 가서 오늘날 저 유명한 금지차의 원류가 되었지요.
이같은 역사적 사실은 삼국사기에 적혀 있는 매우 수상한 기록인 흥덕왕 3년(828년)에 당나라에 갔던 사신 대렴이 차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것이 우리나라 차의 기원이라고 한 기록의 진실성을 부정하게 해줍니다.
삼국사기라는 것이 고려의 신라에 대한 열등의식을 감추기 위해 중국에의 정치적 의존과 사대주의 목적이 들어있는 역사책임을 알고보면 이 기록은 이제라도 부정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 기록을 주장하면서 오늘날 중국 차 문화에 경도된 이들에게 묻고 싶습니다.
한국 차문화의 근원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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