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랑 밭에 갔다. 우리에게 땅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 그건 우리 밭이 아니다 일년 짓는 댓가로 돈을 내는 주말 농장이다.
말이 근사해서 주말 농장이고 직장인에게나 아이들 데리고 주말에 찾는 주말 농장이지 어머니에게는 하루 일과의 시작이요 생각의 전부요 어머니의 생활 그 자체다.
하루에도 두서너번씩 거름을 주네. 비료를 주네,고추를 묶네, 호박넝쿨을 올리네, 길이 닿도록 다니신다.
내가 퇴근해서 돌아 오면 고추는 몇개 달렸네, 호박은 달려서 크지 않고 다 떨어져 속이 상해 죽겠네, 남의 고구마는 넝쿨을 뻗는데 우리 고구마는 뿌리 발이도 안했네,내가 밭에 나가지 않고서도 밭 구석구석을 다 알도록 온통 밭 얘기뿐이다.
이렇게 많은 작물을 심어 놓으니 얼마나 큰 밭 같지만 가까스로 물 떠 나르는 길만 뻔한, 사래도 짫고 넓지도 않은 아주 작은 밭이다. 땅은 작고 심어 보고 싶은 것은 너무나 많아 이것 저것 다 심어서 그렇다.
쉬는 날이거나 일찍 끝나는 날이면 나도 밭에 나간다. 내색은 않지만 나도 밭을 좋아한다.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싹을 솎고 있으면 항상 말씀하신다.
"니는 애기적부터 그런 거를 잘했니라",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다 띁어 먹고 몇잎 남지 않은 상추와 쑥갓을 뽑으러 갔다. 상추도 이젠 맛 없고 해서 열무씨라도 뿌리려고..., 두어송이 핀 쑥갓꽃이 보기 좋아 몇 뿌리 남기고 상추를 뽑는데 흙 속에 굼벵이 같은 벌레가 나왔다.
"엄마 이리 와봐 벌레야 벌레"
나 혼자 있었으면 채소를 위해 죽여 버렸겠지만 어머니가 있으니까 또 못 죽이겠는건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다.
"엄마 이걸 어째?"
"뭣이냐 이놈 어심이 아닌가베?"
호미로 가운데를 두 동강 내면서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니 이름 좋다. 어심이? 썩을 것 뭣 묵을라고 나왔냐?"
"엄마 굼벵이 아니여?"
"아니여 이것이 이 몹쓸 것이 어심이여 뿌리면 뿌리 줄기면 줄기 다 뜯어 묵어 분당께. 이름 한번 좋제 어심이"
"응 아진 어진 벌레 같구먼" 하고 맞장구를 쳤더니 어머니께서 웃으셨다.
밭일(?)을 마치고 언덕으로 올라 왔는데 어느 부잣집 묘터로 정해진 제법 너른 벌에 개망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드러 누워 있으면 꽃 수 곱게 놔진 꽃 이불 덮은 그런 느낌일 것 같았다.
"엄마 개망초 많이 피었다."
"아따 진짜 이뿌네이 근디 이름이 개망초가 뭐여? 해필이면 왜 개망초여?
"엄마 죽은 망자들 넋 위로하는 꽃이래."
그래서 망초꽃이라고 한다는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 같아서 알려드렸다.
그래도 어머니께서는 이쁜 꽃에 개망초가 웬말이냐는 식으로 속상해하시더니 갑자기
'아까 그 썩을 것 하고 이름을 바꿔부러야 쓰겄다."하셨다.
"그럼 엄마 개망초를 어심초라 부르고 어심이를 개망이라고 부를까?"
"그게 딱이네 망자들 넋 위로 하는 어진 꽃인게 어심초, 개망나니짓 항게 개망이 딱이여 딱."
어심초와 개망이 덕분에 한참을 웃었다.
"니 맹충이라고 아냐?"
"맹충이? 송충이 아니고 맹충이?"
"아이고 송충이한테 비하냐? 그 이쁜 맹충이한테"
"맹충이는 벌거진데 곡식에는 한나도 피해안주고 지심만 먹고 살어.짐 매가다가 그 놈이 개물것 먹고 있으면 얼마나 이쁜지 아냐? 난 잡아서 입도 맞추고 그랬어야. 색깔도 알록달록 색동저고리 입은 것 같어 맹충아 젖 좀 보여주라 그라고 뒤집어 놓으면 부끄러워서 얼른 뒤집어분당께.얼마나 귀엽다고.
곡식에 해 돼는 벌레는 이름까지도 바꿔 버릴 정도로 싫어하더니 해 안돼는 벌레는 이름이 맹충이인데도 색동 저고리 입은 손녀쯤으로 생각하고 입맟추었다는 어머니가 하도 웃겨 웃다가 어릴적 생각이 나서 웃음을 멈췄다. 어머니랑 같이 김을 매다가 해 안 돼는 벌레가 나오면 밭 둔덕으로 올려 놓으며 "산 좋고 물 좋은 곳으로 가거라" 놓아 주시던 어머니가 너무 좋았다.
"근데 엄마 그 벌레는 암 수도 없어? 무조건 젖 좀 보자 그래?"
"나도 몰라 그냥 맹충아 젖좀 보자 하면 부끄러워서 얼른 감춘당께."
색동옷 입고 잡초 뜯어 먹는 맹충이와 그 맹충이가 이뻐 입 맞추는 어머니와 젖 보자는 짖궂은 어머니와 부끄러워 감추려고만 하는 맹충이가 떠 올라 나는 웃고 또 웃었다.
우리 어머니는 색동저고리 입은 맹충이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난 웃다가 조금씩 얼굴이 굳어졌다. 아파트 그림자가 우리 모녀를 조금씩 삼켜 들고 있었다.
첫댓글 오랫만이구나. 근데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니? 작은 일이지만 밭도 갈고 채소 일구며 소일하는 어머님도 즐거우실 것 같다. 그래서인지 글이 전체적으로 밝고 깔끔하다.
예! 선생님! 어머니를 모신다기 보다는 도움을 받고 있어요. 잘 지내시죠? 이 카페에 들어 오면 선생님 소식을 알 수 있어서 좋아요. 장마철이예요. 남도에는 비가 많이 내렸다는데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