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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중학교 시절 도대체 몇 학년 때 그 책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영문과 국문이 같이 인쇄되어 영어 독해공부하기 딱 좋은 아주 얇은, 원문을 다소 축약한 영문대역 문고판으로 읽은 그 “월든’이 그토록 나를 물귀신처럼 휘어 잡을 줄 몰랐다. 정말 철 모르던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그 책을 아무런 필터 장치 없이 그냥 송두리째 들여 마셨던 것 같다. 조금의 비판의식도 없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책을 읽고 그 책 내용을 마구 수용했던 자세가 바로 어리석은 내 자신이었다. 나의 그 어리석은 중학생 시절이 없었다고 혹은 안 그랬다고 부정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그 시간을 내 인생에서 없앨 수도 없다. 그 시간이 그때 거기서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여기에 있을 수 있는 것 아닌가, 생각하면 참 아찔하다. 다른 책도 그 시절 많이 읽었겠지만 그 책만이 나를 그렇게 꽉 휘어잡고 흔들 줄 그때는 정말 몰랐다. 나의 끊임없는 가출(家出) 욕망과 허무 의식, 그리고 슬픔에 잠기는 습관은 그 책의 저자 이름이 슬픔 즉 소로우(Thoreau이지만 Sorrow로 발음해서)라서 그런 것 같다. (지금도 Thoreau와 Sorrow의 발음이 나에게는 똑같다.) 중학교 때 어느 선생님이 장래 희망을 차례차례로 물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나도 모르게 그만 ‘거지’라고 했다. 1960년대 우리 나라 사람들 전체가 일종의 ‘거지’였지만, 나의 그 ‘거지’는 바로 ‘월든’의 주제를 바로 요약한 것이고, 소로우가 스스로 그 ‘거지’ 실험을 월든 호숫가 숲 속에 들어가서 실행했었던 것이기에 그 책 내용대로 나도 그런 대답을 즉석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한 것 같다. 그래서 그 선생님을 어이없도록 웃기게 했고 다른 친구들을 많이 실망시켰던 것 같다. 그렇다고 선생님께 외람되게 월든을 읽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그만 꿀밤 한 대 맞고 그냥 고개 푹 수구리고 자리에 앉았던 것 같다. 그 이후 그 이야기는 아무한테도 하지 않았고 이 글을 읽는 독자 분들께만 지금에사 하고 있다. 정말 너무 어리석어서 지금도 죄송하다. 내가 중3때는 교지 “쌍백선” 잡지(27호)에 “조약돌의 변”(졸업생 전부 한마디씩 남기는 코너)에 “시험 따라 흘러간 세월 속에 한 송이 봉선화 처량하게 피었나니……”라는 허무한 글귀를 남겼다. 그 허무의식도 ‘월든’에서 온 것 같다. 소로우가 ‘월든’을 근 10년에 걸쳐서 일곱 번이나 고치고 또 고쳐서 출판(1854년)하고 난 후 아주 심하게 아팠던 것(결국 그는 45세에 폐병으로 죽는다)처럼 그때는 왜 그렇게 시험도 많이 쳤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소년기의 그 끊임없는 가출 욕망은 고3말에 대학 진학을 서울 쪽으로 택하면서 아주 합법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II
지난 달에 인터넷으로 구입한 월든 음반을 듣는다. 음반 CD 제목이 ‘월든’(walden)이다. 월드니언인 김진묵 씨가 그 CD자켓에 아주 읽을만한 좋은 해설을 써 놓았다. 월든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월드니언(waldenian)이라고 그분 자신이 이름 붙였다고 했다. 미국의 월드니언인 Ken Pedersen씨(Ken이니 O’Donnell, Ohara, Mac-, Ragan 등의 성씨는 거의 대부분 아일랜드 계통이다)가 작곡 편곡 피아노 연주한 일종의 월드 뮤직(world music), New Age, 미니멀, 혹은 불교적 선(禪), 명상 음악 즉 웰빙(well-being) 음악이다. 그 음반에는 아일랜드 민요도 한 곡(The Water is Wide) 편곡되어 들어 있고 바흐의 첼로 조곡1번(BWV846)의 prelude도 들어 있다. 김진묵씨는 음악 평론가로 유명한 분이다. 그분도 월든을 중학교 때부터 읽었고, 지금은 강원도 춘천 인근에서 전깃불도 없는 오두막 집에서 소로우처럼 단순하게 단촐하게 생활하고 있다고 했다. 이 음반은 소로우 서거 15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음반으로 또 우리 나라에서는 소로우를 숭모하셨던 법정(法頂) 스님(2010년 입적, 스님도 만년 10여 년 동안 강원도 산중에서 오두막 생활을 하셨고 그때 가장 행복한 시간은 아무 방해 받지 않고 독서삼매에 몰입할 때였다고 한다) 스님 입적 2주기를 맞이하여 라이선스 제작한 뜻 깊은 음반이라고 했다. 스님은 차와 책과 음악 듣기(특히 바흐의 첼로 조곡)를 좋아하셨다고 한다. 김진묵 씨나 법정스님은 미국 매사추세츠, 보스턴(Massachusetts, Boston의 Cambridge에 Harvard 대학 위치) 인근 콩코드(Concord, Boston 에서 약 30 Km 떨어져 있는)에 있는 월든 호수를 직접 찾아가서 소로우가 실험적으로(의도적으로) 2년 2개월 2일 동안(1845년 7월 4일에서 1847년 9월 6일까지), 통나무로 한 칸짜리 오두막 집을 짓고 살았던, 그 자취를 마치 성지 순례하듯이 보고 오셨다고, 아주 섬세하고 아름다운 필치로 그 방문기를 남기고 있다. “내가 영향을 받은 것이 있다면 마하트마 간디와 소로우의 간소한 삶일 것이다. 간소하게 사는 것은 가장 본질적인 삶이다. 복잡한 것은 비본질적이다. 단순하고 간소해야 한다. 월든 호숫가의 그 오두막을 찾아갔던 기억이 새롭다. ‘월든’을 읽으면서 상상의 날개를 펼쳤던 현장에 다다르니 정든 집 문전에 섰을 때처럼 반가웠다. 늦가을 오후의 햇살을 받은 호수는 아주 평화로웠다. 호수의 북쪽에는 150여 년 전 소로우가 살았던 오두막 터가 있었다.” 요즘은 우리 나라 대학생이나 고등학교 학생들도 수학 여행으로 그 월든 호수를 찾아 본다. 이제는 소로우를 읽은 전세계 사람들(인도 및 러시아를 포함해서)이 꼭 한번 찾아보고 싶어 하는 일종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그 소로우 유적지에 있는 소로우 협회에서 운영하는 기념품 매장(Thoreau Society Shop)에서 이 음반을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전세계 대학의 영문학과에서 미국 문학을 언급할 때 꼭 짚고 넘어가는 ‘월든’(Walden, 1854)과 그 ‘월든’을 쓴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
얼마 전 서거하신 리얼리즘 사진가 최민식(1928-2013)의 사진에세이집, ‘더 나은 세상을 찾아서(2012)’에 소로우의 ‘월든’의 글귀, “꿈꾸는 삶을 살기 위해서 확신을 갖고 소망을 줄기차게 추구한다면 아주 뜻밖의 성공을 누리게 마련이다”가 서두에 인용되어 있다. 그분 역시 그 어렵고 가난했던 궁핍한 시대에 사신 분이지만 얼마나 당당하게 우리 현실의 어려움과 휴머니즘을 열심으로 사진 찍으셨는지 모른다. 그 분, 역시 소로우에게서 무한한 에너지를 얻으신 것 같다. 러시아의 톨스토이, 인도의 성인 마하트마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도 소로우에게서 배운 것이고, 마틴 루터 킹 목사의 흑인인권운동도 그 연유가 바로 소로우의 시민 불복종(시민 저항: Civil Disobedience))에게서 유래한 것이다. 소로우는 ‘정의롭지 못한 정부가 지배하는 나라에서 정의로운 사람이 있어야 할 곳은 감옥’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에머슨이 그에게 “당신이 왜 거기에 있느냐”고 물었을 때 “당신은 왜 여기에 있지 않느냐’’라고 반문했던 것이다(박홍규. 2008, 나의 헨리 데이빗 소로. 필맥.). 소로우는 생전에 가까운 친구 및 뉴잉글랜드 지방의 초월주의자 집단(5-6인 내외)을 벗어나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엄격하고 고집이 세며 까다롭고 괴팍한 성격으로 유명했고, 남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사실 소로우는 어느 것 하나 성공한 게 없다. 현실의 그는 누가 보더라도 실패자(Loser)였다. 거듭된 실패에도 불구하고 소로우는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실패를 할수록 오히려 더 큰 자유를 느꼈고, 자신이 성공자가 아닌 실패자라는데 만족했다. 자신이 대중적으로 유명한 존재가 되면 더욱 값 싼 존재, 천박한 인간이 될 것이라고 걱정했다. 돈에 구속되어 마음의 자유를 잃는 생활을 그는 철저히 거부했다. 또한 무슨 일이든 전문적으로 하기를 싫어했다. 그는 스스로 농부라고 했지만 농사일을 싫어했다. 그가 좋아한 것은 ‘소의 목에 달린 작은 방울이 딸랑거리는 소리’였을 뿐이다. ‘한 우물을 파라’는 자본주의 직업윤리를 그는 너무도 싫어했다(박홍규. 2008).
유럽에서는 여러 가지 이유(문학적 취향, 페비안 주의 혹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무저항주의 등)로 소로우의 책을 읽었지만, 미국에서 소로우는 20세기에 접어들 때까지도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단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자 순식간에 혜성처럼 밝은 빛을 발했으니, 소로우는 19세기의 괴팍한 자연주의자에서 1960년대 반문화(反文化)의 상징적 인물로 바뀌게 되었다(앤드류 커크, 유강은 옮김 2005, 시민불복종. 그린비.). 55세의 에드워드 애비(신소희 번역, 2004. 소로와 함께 강을 따라서. 문예출판사)가 다시 또 ‘월든’을 읽으면서 쓴 글에 의하면, 권위를 항상 부정한 소로우가 ‘뉴스만큼 진부한 것이 있을까? 우리는 가능하면 무지의 기쁨을 보존할 것이다.”라고 말했으며, 아주 오만하고 건방진 기인으로서의 소로우는 ‘가장 좋은 정부는 아무 것도 통치하지 않는(간섭하지 않는) 정부’라고 했다. 미국 문학 고유의 장르인 자연-모험 산문 계열의 작가로는 소로우와 마크 트웨인을 거론하는데, 그의 개인주의는 웰빙(well-being)으로 대표되는 소시민적 이기주의(요즘의 우리 나라 추세인 것 같다)와 완전히 다른 궤도에 서 있다고 하였다. 예이츠(W.B. Yeats, 1865-1939)는 자서전(1926년간)에서 ‘이니스프리 섬’의 작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내가 10대에 호수 속에 있는 작은 섬 이니스프리에서 소로우를 모방해 살고 싶다는 야심을 가졌었다. 그러던 날, 향수(鄕愁; 노스탤지어; 그리움)에 젖어 런던 탬즈 강가의 플리트가(街)를 걷고 있을 때, 나는 작은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니스프리 호도(湖島)
이제 나는 일어나 가야겠다 이니스프리로 가야겠다
거기 나뭇가지 엮어 진흙 바른 작은 오두막 한 칸 짓고
아홉 이랑 강남콩밭과 꿀벌 한 통 쳐야지
그리고 나서 벌 소리 요란한 그 숲 속에 나 혼자 살려고 한다
그러면 거기에 평화가 있겠지 평화는 천천히 다가오는 것
아침의 베일에서부터 귀뚜라미 우는 곳에 이르기까지
한 밤중은 온통 희미하게 빛나고 대낮은 자줏 빛으로 타오르며
저녁은 홍방울새 날개 소리로 가득한 그 곳
이제 나는 일어나 가야겠다 밤이나 낮이나 항상
호수 물이 낮게 기슭에 철썩이는 소리 들리니
한길 위에 섰을 때나 회색 포도(鋪道) 위에 서 있을 때면
내 마음 깊숙이 그 물결 소리 들린다
III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1882)이 바로 그 옆에서 한 사람의 멘토로서 그리고 정신적 및 물질적 후원자로서 그리고 이웃의 친구로서 존재하지 않았다면 과연 소로우라는 존재가 있을 수 있었을까. 에머슨이라는 스승, 선생, 조언자, 후원자가 없었다면 소로우는 결코 월든을 쓸 수 없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당시 뉴잉글랜드의 지성인 그룹(초월주의 클럽; Transcendentalism Club, Ralph Waldo Emerson, Margaret Fuller, Henry David Thoreau, 엘러리 채닝, Amos Bronson Alcott, George Ripley, Jones Very, Theodore Parker, Nathaniel Hawthorne 등)에는 초월주의 사상(사회보다는 개인을, 이성보다는 직관을, 지식보다는 행동을 강조, 초월주의 운동은 그 형식과 신조에 억눌린 채 표출하지 못하고 있던 청교도의 프로테스탄트 정신이 새로운 탈출구와 비상구를 찾아 나온 것이라고 함)이 팽배해 있었다. 에머슨 자신의 철학과 사상을 몸소 실천하고 전파한 사람이 바로 소로우라고도 할 수 있다. 젊은 시절의 에머슨은 전통과 체면을 용납하지 않는 반항의 정신 바로 그것이며, 선배들의 확신에 도전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탐색하였다(윤삼하 1977. 에머슨 수상록 범우사). “나는 내가 반드시 해야 할 일들만 생각할 뿐,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다. 이러한 규칙은 실생활과 지적인 삶에서 똑같이 어려운 일이지만, 위대함과 평범함을 나누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그는 “세상의 중심에서 너 홀로 서라(Self-Reliance; “위대한 사람은 군중 속에서도 완벽한 온화함을 유지하며 고독하게 홀로 서는 사람이 아니겠는가!”)”고 설파했다. 자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 자신의 일을 하라! 그러면 당신 자신을 더욱 강화하게 될 것이다. 스물 다섯 나이의 청년 소로우와 사십(불혹; 不惑)에 이른 철학자 에머슨의 만남, 그들은 인습에서 자연으로의 복귀, 인위적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의 복귀를 주창하였다. ‘집단주의적 자연(농업) 복귀가 아니라 ‘개인주의’ 방식으로 자연으로의 복귀를 주장했고 소로우가 바로 실천하였다(1845년 봄, 28세의 청년 소로우는 월든 호숫가에 들어가기로 결심한다). 헨리 제임스는 에머슨과 소로우 등이 살았던 그 ‘콩코드’를 “미국에서 (정신적으로) 가장 큰, 작은 장소(아주 작은 시골마을)”라고 하였다.
소로우의 하버드 대학 동기이자 에머슨의 사촌인 데이비드 해스킨은 1838년(소로우 21세, 에머슨 35세) 여름 에머슨의 서재에서 만난 소로우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작은 키와 얼굴은 변함이 없었으나, 말투, 억양, 표현방식, 말할 때의 망설이는 것, 숨을 쉬는 것까지 에머슨과 비슷하게 했다.” 대학시절 소로우의 말투는 상당히 거칠고 무뚝뚝했었지만 에머슨과 알게 되면서부터 그 말투와 억양까지 에머슨처럼 흉내 내려고 했던 것이다. 1841년, 에머슨 집에서 정원 손질하는 일이 끝나면 남은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써 나갔다. 그는 에머슨의 서재에서 동양의 고전들을 발견하고 너무 기뻤다. 그는 습관대로 여름 내내 그 분야의 서적들을 탐독하고 공책에 기록해 두었는데, 그 때 한 공부가 훗날 글쓰기(‘월든’ 원고 작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하몬 스미스, 서보명 옮김. 2005. 소로우와 에머슨의 대화: 미국 정신의 르네상스를 이끈 우정. 이레) 소로우가 ‘나의 친구가 진정한 형제다’ 라고 말했을 때의 그 친구는 바로 에머슨을 말하는 것이다.
그 후 두 사람은 만난 지 15년이 지난 1850년대가 되어서 “우리는 서로 다른 신을 믿는다”고 일기장에 쓰면서 정신적인 결별을 한다. 그렇지만 서로 이웃에 거주 혹은 한 집(주로 에머슨 저택)에 같이 살면서 겉으로의 우정은 계속 유지한다. 에머슨은 “자연은 십계명을 메아리 울리고 있다(자연에서 영원한 진리를 읽을 수 있다”라고 했지만), 소로우는 1851년 여름, “자연을 비자연적인 것으로 보는 이들이여, 작별을!”이라고 선언한다. 어떤 논자는 자연에서 인간존재를 설명하는 법칙을 찾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에머슨을 18세기의 인간형이라고 하고, 추상적인 것에 반감을 품고, 삶의 깊이와 열정을 실재적인 것에 특별히 집착하는 소로우를 19세기적인 사고(思考)라고 했다. 소로우가 ‘고독한 황야의 무법자’, ‘고독한 혼자 살기주의’라고 하면 에머슨은 차가운 지성인 특유의 먹물냄새가 난다. 흙 냄새 물씬 풍기는 소로우가 지금 우리 시대에 와서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고 김욱동(2008. 소로의 속삭임. 사이언스 북스.)은 말한다. 1854년 출판된 ‘월든’은 월든 호수로 이주한 1845년을 기점으로 한다면 9년이 걸린 작품이다. 이기간 동안 소로우는 적어도 7번은 고쳐 쓴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 긴 퇴고의 과정에서 소로우는 에머슨으로부터 물려받은 초월주의의 옷을 벗어 던지고 자연에 보다 가까이 다가 가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달밤에 배를 띄우고 플루트를 부는 소로우의 모습은 자연을 매개로 결국 내면의 신성(神性)을 탐구하고자 한 초월주의자의 태도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신문수 2010). 훗날 나다니엘 호돈은 “둘의 우정이 작가로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고 말했다. 에머슨은 1862년 소로우의 장례식장에서 “가장 숭고한 사귐으로 자신의 영혼을 만들고, 짧은 생을 통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습니다. 지식이 있는 그 곳, 덕(德)이 있는 그 곳, 아름다움이 있는 그 곳이 바로 그의 영혼의 집입니다.”라고 연설했다.
하딩(Walter Harding)은 ‘월든’을, 1) 자연에 대한 박물학적 기록, 2) 소박한 삶을 권면하는 삶의 지침서, 3) 물질주의에 지배되는 현대적 삶에 대한 비판과 풍자, 4)탁월한 언어 예술 작품, 5) 정신적 삶의 안내서라고 했다(신문수. 2002). “처음 읽을 때는 명백한 상식이, 다시 읽을 때는 엄정한 진실이, 세 번째로 읽을 때는 아름다움이 드러나는 글이 예술의 정점일 것입니다. 깊이 있고 진실한 글을 쓸 수 있을 때, 우리는 아름다움을 영원토록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1843년 7월8일, 소로우가 에머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책 중에는 우리가 처한 오늘의 상황에 곧바로 해당되는 말들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고, 우리가 진정으로 이 말들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아침이나 봄보다 더 큰 활력을 우리의 삶에 줄 것이고, 우리에게 사물의 새로운 면모를 인식하게 해 줄 것이다”(‘월든’, 독서 부분). 인간 존재의 근원적 부름에 응하는 책, 그럼으로써 인간의 삶을 아침처럼 봄처럼 새롭게 탈바꿈시키는 책, 바로 ‘월든’이 이런 책이라면, 그것을 길어낸 월든 호수가 깊으면서도 맑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신문수. 2010).
미국 불교의 첫 장은 소로우에 의해 열린다. 그는 가장 반기독교적이었다. 소로우는 교회의 종소리보다는 소의 방울소리가 훨씬 낫다고 했고,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추한 건물이라고 공격했다. 소로우는 1844년 1월 The Dial(초월주의자 기관지)지에 부처의 설법(The Preaching of Buddha)을 프랑스 동양학자 유진 번아우프(Eugene Burnouf)의 연화경 일부를 번역한 것으로 게재했다. 19세기 내내 뉴잉글랜드의 지성인들에게 동양은 기독교의 굴레를 벗어나 더 넓은 종교 철학의 세계를 제공해주는 아주 매력적인 읽을거리였었다(류황태 2005). ‘월든’에는 인도 힌두교의 고전 비슈누 프라나, 바가바드 기타 및 페르샤의 시인의 시들을 인용하고 있다. 소로우는 물론 당시에 출판된 찰스 다윈의 ‘비글호의 탐험’(1839년)도 읽었고, 독일의 유기화학자 유스투스 폰 리비히(Justus von Liebig; 1803-1873)의 생체 에너지 개념도 알고 있었다. ‘월든’에 나오는 자발적인 가난(voluntarily poverty)이나 “철학자가 되는 것은 단지 심오한 사색을 하거나 어떤 학파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지혜를 사랑하고 그것의 가르침에 따라 소박하고 독립적인 삶, 너그럽고 신뢰하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의미한다(강승영 번역 2004)” [To be a philosopher is not merely to have subtle thoughts, nor even to found a school, but so to love wisdom as to live according to its dictates, a life of simplicity, independence, magnanimity, and trust. It is to solve some of the problems of life, not only theoretically, but practically.]와 같은 귀절은 어딘가 유교적인 가르침(비순응주의와 독립적 모험 정신)인 것 같다.
프랑스 동양학자 장 피에르 기욤 포티에(Jean Pierre-Guillaume Buthier, 1801-1878)가 프랑스어로 번역 저술한 ‘공자와 맹자; 중국의 도덕철학과 정치(Confucius et Mencius; Les Quartre Livres de Philosophie Moral et Politique de la Chine, Paris. 1841)라는 책을 소로우가 읽었고 ‘월든’에 많이 인용하였다. 소로우는 특히 공자의 논어를 좋아한 것 같다. 공자는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곧 진실로 아는 것이라고 말했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 是知也“ 즉 아는 것이 있으면 그대로 적용하고 모르면 모른다고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다” 중국 탕왕의 욕조에 새겨져 있었다는 ‘荀日新 日日新 又日新’(진실로 날로 새로워지려면 나날이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은 대학(大學)에 있는 글귀로 새롭게 거듭날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인데 ‘월든’에서도 인용하고 있다. “누구나 자기 세계의 영주이다. 짜르 황제의 제국도 그것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나라일 뿐이다.” “나는 나의 실험적 삶을 통해 이런 것을 배웠다. 곧 사람이 자기가 꿈꾸던 그 방향으로 자신 있게 나아가며, 자기가 꿈꾸어오던 바의 생활을 하려고 노력한다면, 그는 통상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두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때 그는 과거를 뒤로 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을 넘는 것이다. “삼군(三軍)으로 된 큰 군대라도 그 우두머리를 사로 잡으면 무너뜨릴 수 있으나, 필부(匹夫)일지라도 그의 지조(志操)를 빼앗을 수는 없다(三軍可奪帥也 匹夫不可奪志也)”. 이 유명한 논어 귀절을 ‘월든’을 통하여 다시 읽는다. 대학 교양 과정부 시절, 한 학기 내내 논어만 해석해야 했던 그 국어 시간(강사 선생님이 한국한문학 전공이라서)을 얼마나 지겨워했었던지 모른다. 그런데 ‘월든’을 다시 읽으며 그 논어 원문을 다시 재미있다고 되짚어 읽고 있는 나는 또 얼마나 모순 많은 인간인지 모르겠다.
飯疏食 飮水 曲肱而枕之 樂在其中矣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나물먹고 물 마시고 팔을 베고 누웠어도 즐거움이 또한 그 가운데 있는 것이니 옳지 않는 부귀는 나에게는 뜬 구름과 같다)라는 논어 귀절을 ‘월든’에서 만난다. 이 말은 검소하게 살 것을 권한 말로서, 나의 선배 한 분(홍종운, 2013)은 ‘비록 거친 먹을 거리라도 먹지 않고서는 좋은 베개를 베고 눕더라도 낙이 있을 수 없음(거친 먹을 거리라도 먹고서야 팔을 베고 눕더라도 낙이 있다)을 뜻한다고 식량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농학자답게 해석한다. 一簞食 一瓢飮 在陋巷 人不堪其憂 回也不改其樂 賢哉回也(한 그릇 밥을 먹고, 한 쪽박 물을 마시며, 누추한 거리에 산다면 남들은 그 괴로움을 감당치 못할 터인데, 회(回)는 그의 즐거움이 변하지 않는다. 현명하도다 회여, 김학주 역). “나의 가장 뛰어난 재주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기쁘게 땅을 껴안을 수 있었다. 그 안에 묻히더라도 역시 즐거운 것이다. 그곳에서 나는 그 동안 한번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가난하고 소박한 그 생활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월든 호숫가 그 오두막 있는 장소에 있는 돌무덤 하나를 보고 쓴 글)”을 보면 공자가 경탄한 회(回)와 소로우는 그 마음이 거의 같은 수준이다. 진실로 논어의 그 글귀를 소로우는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고 받아들인 것 같다.
“부모란 자식이 남자인지 여자인지 결정해 줄 수는 없지만, 자식이 인류라는 가족에게 가치를 더해 주는 존재로 성장하느냐 않느냐는 것을 결정해 줄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다(소로우 일기, 1852년 11월23일)”이 말은 ‘월든’에는 나오지 않는 귀절이고 비록 결혼을 하지 않은 소로우가 한 말이지만 상당히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되어 인용하였다.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집을 짓고 충분히 소박하고 정직한 방식으로 자신과 가족에게 먹을 것을 조달한다면 그들에게는 새들이 집 지을 때 노래하는 것과 같이 모두에게 ‘시적 재능’이 피어날 것이라고 소로우는 말했다. 그러나 남들이 지은 집에 사는 우리는 다른 새의 둥지에 자기의 알을 몰래 낳은 얌체 같은 새이며, 노래 소리도 아름답지 않은 찌르레기나 뻐꾸기와 같다고 소로우는 비유적으로 비판한다(박연옥, 2011). 그리고 소로우가 쓴 The Inward Morning(속의 아침 )과 같은 시(詩)는 숲 속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도저히 쓸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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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in the twilight of the dawn 새벽 여명(黎明) 속에
When the first birds awake, 가장 먼저 깨어난 새들이
Are heard within some silent wood, 잔 가지 꺾는 소리가
Where they the small twigs break 어느 조용한 숲에 들리듯이
Or in the eastern skies are seen, 혹은 해 뜨기 전
Before the sun appears, 동녁 하늘에 보이는 것처럼
The harbingers of summer heats 멀리로부터 여름더위의 첫 시작이
Which from after he bears 다가 오는 것을
그의 시 ‘Rumors from an Aeolian Harp’에서 그가 찾고자 했던 것은 결코 유토피아(utopia; 미래 지향의 이상향)가 아니었다. 아득히 그 먼 계곡, 생활에 지친 속물들은 결코 아무도 가볼 수 없는 그곳, 아득한 골짜기는 아카디아(arcadia; 과거 지향의 이상향)인 것 같다. 대개 문필가나 인문학자들은 거의 아카디언이고 자연 과학자들은 대개 유토피언이다. 그런 면에서 에머슨이나 소로우도 아카디언이다. 마크 트웨인의 주인공 하클베리 핀이 바로 소로우와 비슷하다고 느껴진다. ‘월든’에 나오는 귀절, “내가 아카디아에 갔을 때 한 조각 양식(良識)은 달까지 솟아오른 기념비보다 더 기릴만한 것이 아닌가(강승영 번역).” 어수룩한 나는 이런 식으로 ‘월든’을 읽으면서 생각을 이어간다. 장삿속은 모든 것을 망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장삿속에 따르는 저주를 소로우에게서 본다. “나는 산 정상에 서 있으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들어가서 느끼는 것과 같은 경외감을 느낀다. 만약 당신이 워싱턴 산의 정상에 오른 적이 있다면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거기서 무엇을 발견했는지 묻게 해다오. 거기에 올라가서 세찬 바람을 맞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그 산을 진정으로 되새기는 것은 집에 도착한 후의 일이다. 산이 무엇을 말했는가? 산이 무엇을 했는가?” 소로우보다 더 훌륭하게 산을 기록한 사람은 거의 찾기 어렵다고 한다.
“영국에서는 지금 감자역병의 치료법을 알아내려고 애쓴다고 하는데,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치명적으로 퍼져있는 머리가 썩는 병을 치료하려는 노력은 어디에 있는가?”(강주헌 옮김 ‘주석 달린 월든’: While England endeavors to cure the potato-rot, will not any endeavor to cure the brain-rot, which prevails so much more widely and fatally.) 나는 월든의 마지막 장 Conclusion(결론)에 나오는 이 글귀를 읽고 소스라치게 놀란다. 1845년부터 1850년에 이르기까지 아일랜드 지역에 대발생한 감자 역병(Phytophthora infestans de Bary 1862)에 의한 기근(famine)으로 아일랜드 인구가 800만에서 그 100년 전과 같이 400만으로 줄어들었다. 200만은 먹을 것을 찾아서 신대륙(주로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으로 이민을 갔었고 나머지 200만은 이민(좁은 배 밑창에서) 도중 사망했거나 아사한 것으로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최근세의 가장 발달된 서구 문명 사회에서 일어난 가장 참혹한 비극이었고 그로 인해 내가 전공하는 식물병리학이라는 학문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런 감자 역병을 연구했던 영국인들(Rev. M.J. Berkeley에 의한 최초 병원균 관찰 기재는 특히 유명한 것이고, 그 후 독일의 Anton de Bary에 의해 병원균 분리 접종 및 병징 재현, 그리고 그 재현 병징에서 병원균을 재분리(Koch’s Postulates)하여 그 병원균을 Phytophthora infestans이라고 명명하였다. 그 균을 새로 명명한 1862년을 식물병리학의 출발시점으로 보고 있으며 안톤 드 바리를 근대 균학 및 식물병리학의 아버지로 보고 있다(Large, E.C. 1940. The Advance of the Fungi). 그런데 소로우 씨는 감자 역병을 너무 무시하고 사람 머리 썩는 데만 신경 써야 한다고 했는데 이건 정말 너무 비현실적 인문주의 같다. ‘월든’에 숱하게 나오는 그 아일랜드인들, 막노동이나 기차 철로 공사 하는 그 아일랜드 인들, 가난하고 배고픈 그 아일랜드 사람들에 의해서 제2의 미국이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다시 태어나게 된다. 사람의 머리가 썩는 병은 바로 그 시대, 산업 혁명으로 더욱 더 한창 기승을 부리는 자본주의화된 근 현대 세계의 인간성 바로 그 모습인 것이다. 모두가 취직과 출세에 연연하고 무슨 무슨 전문가가 되려고 안달하며, 배금주의에 물든 기심(機心)으로 가득 찬 자본주의 사회의 현대인, 바로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IV
“Boys be Ambitious!” 이 말은 일본, 한국에서만 쓰는 말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이 말을 “청년이여 큰 뜻(大志)을 품어라”라고 번역한다. 일본 명치유신 직후 곧바로 북해도 개발(북해도는 땅이 매우 넓기 때문에 농토가 좁은 한국 일본처럼 토지 집약형 농업이 아닌 미국식 조방(粗放) 농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이 시작되었고, 1876년 미국의 주립대학 방식(U.S. land-grant model)의 삽보로농업학교(Sapporo Agricultural College; SAC, 북해도대학 전신)가 설립되면서 일본 각지에서 모여든 사무라이 자제들인 우수한 학생들과 그 첫 교장으로 미국 매사츄세츠에서 초빙되어 채 1년도 안 있었던(8개월), William Smith Clark박사(1826-1886; 당시 그는 매사츄세츠 농업시험장 장장이면서 매사츄세츠 농과대학(MAC) 학장이었다. 남북전쟁의 영웅이었다. 독일 괴팅겐 대학에서 학위를 취득했다. 식물학뿐만 아니라 자연과학 일반을 강의하였다)가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면서(1877년 4월 16일, 이임식장에서) 그 학생들에게 한 말, “Boys be ambitious”, 바로 그 말에서 일본(그리고 한국)의 근대화가 시작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2,000여년 전 백제의 왕인(王仁) 박사가 일본에 한자와 논어를 처음 전해 주었듯(그래서 일본 각지에 왕인 박사의 기념물이 많이 있다), 서구 근대문물들과 그 생각(물질과 정신은 절대로 따로 놀지 않는다)을 그때 처음 수입해서 배웠던 일본으로서는 그 말을 한 클라크 박사를 마치 왕인 박사처럼 숭모한다. 클라크 박사의 동상을 중심으로 그 지역 주변 동산은 북해도 관광의 가장 큰 명소의 하나로 되어 있으며, 일본인들은 지금도 결코 그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초 중등학교 교과서에 지금도 버젓이 그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클라크 박사는 그 말 뿐만 아니라 “Be Gentleman”(신사가 되라)이라는 말도 남기고 있다(미국에서는 클라크 박사가 일본에 비해 상대적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동아시아 전통의 유교적인 일본과는 다른 선진 문명권에서 온 서양인 학장에게서 당시의 일본 사무라이 자제들인 최우수 어린 학생들은 큰 감명을 받았던 것 같다.
1980년 간행된 일본식물병리학사(日本植物病理學史)의 인물사 부분(미야베 긴코(宮部金吾; 1860-1951부분)에 그 후속 이야기가 나온다. 북해도제국대학 개교50주년(1926) 기념식장에 그 대학교 학부 학생으로 참석했던, 훗날 식물 녹병 연구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히라츠카 나오히데(平塚直秀; 1903-2000, 5대에 걸쳐 식물의 녹병(銹病) 연구를 한 균학자, 후에 일본균학회장, 일본 국내 및 국제식물병리학회장 역임)박사가 쓴 그 글에 의하면, “캠퍼스내 중앙강당에서 개최된 기념강연회에서 학생으로 참석하여 나는 아주 큰 감명을 받았다. Boy be Ambitious라는 말을 직접 클라크 박사한테서 들었던 그 학생들 중에서 3명이 기념 강연에 연사로 초청되었는데, 학계에서는 미야베 긴코(宮部金吾; 1860-1951, 식물병리학자로 하버드대학의 Farlow교수(식물병리학의 아버지인 독일의 Anton de Bary의 제자)에게서 균학-식물병리학으로 학위 취득하고 돌아와 북해도 대학 농생물학과 교수로 재직, 바로 히라츠카 박사의 지도 교수였음), 종교계에서는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무교회주의로 유명하며 우리나라 김교신 선생, 함석헌 선생의 스승), 문단에서는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助: 유명한 소설가로서 지금도 일본에서는 신인문학상을 그의 이름을 붙여 시상한다), 그 세 분이 그 대학 선배로서 그리고 특별 연사로 모교에 오셨다”는 것이다. 큰 뜻, 야망, 꿈이 정치 권력자나 돈 많은 재력가 아닌, 바로 그런 학자, 종교가, 소설가인 것으로 생각되면서 그 작은 회고의 글을 읽은 나도 큰 감명을 받았다.
중학교 다닐 때 나와 함께 미술반에서 그림을 그렸던, K군은 키 크고, 정말 잘 생기고 똑똑해서, 늘상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다. 그런 그가 법대나 의대에 가지 않고 서울대 국문과에 진학해서 자기 하고 싶은 한국 한문학을 전공하였다. 지금은 서울의 모 사립대학에 교수로 있으면서 열심히 저술 활동하는 것을 먼 발치에서 풍문으로 듣고 있다. 그 친구를 생각하면 내 마음 항상 뿌듯하다. 에머슨이나 소로우의 책을 읽었거나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이 틀림없는 뉴잉글랜드 매사츄세츠 사람인 바로 그 클라크 박사가 먼 동아시아 삽포로에 8개월간 와서 젊은이들 가슴에 남겼던 그 말, ambition이 바로 자기 실현, 자기의 꿈을 실현한다는 포부, 바로 그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어떤 대세나 추세에 수동적으로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의 뜻과 희망, 소망을 순수하게 자기가 만들어서 간직하고 그 길로 한결같이 매진할 경우에만 이루어지는 것, 마치 연어 물고기가 강 물결을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듯이, 자기 연원지(고향)에 대한 ‘노스탤지어(향수鄕愁:그리움)’를 가지고 줄기차게 끊임없이 찾아 올라가는 자세를 가지라는 그 메시지가 바로 에머슨이나 소로우의 ‘월든’이 치는 먼 북소리가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