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대 이상이면 누구에게나 모두 6. 25의 기억이 생생하게 있을 줄 안다. 6. 25 전쟁이 휩쓸고 간 어느 날 명자와 둘이서 오래 만에 십리 길 되는 보은읍에 구경을 갔다 폭격에 폐허가 된 읍내 거리, 청주로 가는 도로변에 둘이 쪼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지나가는 그 시끄러운 탱크며, 트럭, 지프차, 그 안에 타고 있는 코 큰 깜둥이며 흰둥이 너무도 이색적인 낫선 구경거리였다.
6. 25 당시에는 계속 후퇴만 하던 우리 아군들이 연합군과 함께 이제는 계속 전진해 올려 밀었다. 이때 인민군 보병들은 미쳐 앞서 도망가지 못하고 인근 산으로 도망하여 숨어 있었고, 우리 아군 측은 밤이면 주민들을 나오지 못하게 하고 보은읍에서 10리가 넘는 산들을 향해 대포를 쏘아 댔다. 이때 인민군들은 거의 죽고 혹시 살아남은 인민군들이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 먹을 것을 훔쳐 가기도 하고 들키면 해치기도 하는 때였다. 그래서 내북면 지서에는 경찰 외에 한청(한국 청년)대원을 모아 공비토벌대를 만들고 산에 있는 공비들을 잡기 위해 마을에 잠복시켰는데 우리 동네에는 우리 집 행랑채 사랑방에 경찰 1명과 한청 대원 세 명이 와서 있었다 하나는 이북 평양에서 피난 온 청년이었는데 이름은 김형균 이라고 하며 성격이 맹수 같은 사나이였고 하나는 황해도가 고향인 이정찬 이라고 하는 평범한 청년이며 또 하나는 김병하 라는 귀공자 타입의 앳된 청소년이었다. 주일날이 되면 명자와 둘이서 교회에 가자고 잡아끌고 떼밀면서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해서 교회를 다니고, 노는 시간에는 대동강 노래며, 이수일 심순애 만담이며, 얼마나 들 재미있게 하는지 우리는 그 노래도 배우면서 잘 사귀고 있었다.
겨울이기 때문에 언니는 가마솥에 물을 데워 놓았다. 그 총각들이 언니와 한 또래의 연령이어서 내외하느라 부엌문을 닫아 놓고 쳐다보지도 못하는 때여서 나는 그들의 세숫물을 대야에 떠서 내 가려 하면 형균 이라는 청년은 언니를 보려고 벌써 뜰 안을 펄떡 뛰어 올라 왔다.
그러다가 다시 내북면 지서로 철수해 가고 부대장 김형균 한데서 만지장서 편지가 왔다. ‘자기들은 가족을 이북에 두고 온 외로운 고아들인데 우리 어머니께 어머니라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그들이 너무 불쌍하고 애처로워 허락을 하셨다. 아들이 없는 어머니에게는 갑자기 아들이 3형제가 생긴 것이었다. 종종 편지도 오고 체육 대회에서 상을 타면 우리 집으로 가져왔다.
부대장 인 형균 오빠는 보은 읍 근처에 있는 용운사로 공부하러 가고 부대장 그 자리에는 병하 오빠가 올라가게 되어 정찬이 오빠와 둘이 배급 타는 식량은 형균 오빠에게 보내고, 자기들은 지서에서 숙식을 한다고 했다. 그때는 외국에서 보내 온 안남미 쌀이었다.
명자와 나는 토요일 학교가 끝나면 20리 길 되는 내북면 지서를 종종 찾아갔다. 이렇게 고생을 하면서도 병하 오빠는 우리(명자와 나)에게 엿을 사 주곤 했다. 명자와 나는 그들이 그렇게 고생을 하는지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철부지 여중생이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용운사를 가신다고 ‘너희들은 학교 끝나고 그리로 오라’고 약속을 하셔서 명자와 나는 폴짝 뛰고 좋아하며 용운사를 찾아갔다. 용운사는 우리 집에서 6킬로쯤 되는 보은 읍 동 다리 건너편에 있는 숲 속 작은 암자였다. 어머니는 아직 안 오시고 형균 오빠는 조그마한 누각을 하나 빌려서 혼자 독학을 하는데 요즈음 학생들은 구경도 못한, 마분지라고 하는, 사료 부대 보다 몇 배나 더 흑갈색 인 16절지 종이 위에 영어를 필기체 스펠링으로 가로 쓰고 세로쓰고 그 다음엔 쓴 위에 또 써서 거의 빈칸이 없다시피 먹종이가 되어 있었다. 혼자서 아무리 해도 모르면 저녁에 체면 불구하고 중학교 영어 선생님을 찾아간다고 했다. 용운사 에서 보은 읍 장터를 내려다보면 마침 장날이라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보며 인생 철학자나 된 것처럼 많은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 개미떼들은 무엇을 얻으려고 저렇게 분주히 헤 메일까! 저러다 결국 종말은......?
연락도 없이 우리가 갑자기 찾아갔기 때문에 당황한 듯 어디로 나가 한참동안 보이지를 않는다. 명자와 나는 철없이 행여 엿을 사러 간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저 밑에 옹달샘에 가서 세수를 하고 올라왔다. 드디어 어머니께서는 그렇게 더운 여름날 10리가 넘는 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찾아오셔서 보따리를 풀어 놓으시는데 빵을 주먹만 하게 만들어 쪄 오셨다. 그 속에는 감자를 푹 쪄서 사카린을 넣고 으깨어 앙꼬를 만들어 넣은, 아주 탐스러운 따끈따끈한 집에서 농사지어 만든 밀가루 빵이었다. 그 오빠는 어머니의 사랑에 너무 너무 고마워하며 우리와 함께 맛있게 먹고 대동강 노래도 다시 또 확인해 보고 놀다가 돌아왔다.
병하 오빠는 6. 25 때 평북 순천에서 살았으며 친척들이 거의 병원 의사였고 아버지도 의사였다고 했다. 시골에 피난 갔다가 어머니와 함께 잠깐 집에 들렀을 때 갑자기 피할 새도 없이 비행기가 폭격을 해서 비행기가 지나간 다음에 엄마를 찾아보니 엄마는 안 보이고 자기네 집은 폭삭 쓸어져 있었다고 했다. 혼자서 기왓장을 하나 둘 재끼면서 찾아보니 엄마가 그 밑에 깔려 숨져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 오빠는 항상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를 부르며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느 날 빨간 가방을 멘 배달부 아저씨가 편지를 주기에 열어보니 병하 오빠의 편지였다. 내용인즉 ‘이 세상에 태어난 후 이렇게 기쁜 일은 처음이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신문에 이산가족을 찾아 준다고 주소를 써내라고 하기에 써냈더니 자기 아버지는 마포구 공덕동에서 소아과 병원을 차리고 있고, 형균 오빠는 자기 아버지만 나오셔서 부산에 살고 있고, 정찬이 오빠는 자기 숙부만 오셔서 서울에서 용산 극장을 운영하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오빠들은 가정을 찾아간다고 인사를 하러왔다. 형균 오빠는 ‘자기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 어머님의 은혜를 있지 않겠노라’며 통일이 되면 대동강 구경을 시켜 주겠다고 했다. 병하 오빠는 통일이 되면 순천에 영변 약산 진달래꽃이며 동굴도 보여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떠났다. 얼마 있다가 편지가 왔다. 형균 오빠는 부산에 아버지를 찾아 가 보니 새엄마를 얻어 살고 있고, 병하 오빠는 새 엄마를 얻어서 남동생을 둘이나 낳고 살고 있다고 했다. 그 후 형균 오빠는 중앙대를 갔고. 병하 오빠는 마포 고등학교 3학년으로 들어가 성균관대를 갔고, 정찬 오빠는 군대를 갔다. 여름 방학이 되면 정찬 오빠는 때 맞춰 휴가를 나오고 셋이서 만나 20여일 같이 있으면서 여름 방학을 풀벌레, 보리매미 울어대는 시골 풍경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재미있게 보내고 갔다.
얼마 후 병하 오빠는 입영 영장이 나왔다. 지서에서 경찰이 나와 나에게 주소를 대라는 것이었다. 나는 편지를 다 소화시키고 없다고 하니 가택 수색을 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이곳 사정 이야기를 편지로 써서 병하 오빠에게 보내면서 ‘주소를 안 대줄 수가 없을 것 같으니 어떻게 조치를 취하라고 써 보냈다. 그랬더니 주소를 알아 가지고 경찰이 심심하면 찾아갔다고 한다. 병하 오빠는 졸업을 하고 군대를 갔고 정찬 오빠는 제대를 하고 갈대가 없으니 우리 집으로 왔다. 곽기봉 목사님은 우리 집에서 한 가족처럼 숙식을 함께 하고 있을 때 정찬 오빠는 곽기봉 목사님과 고향이 같은 황해도였고 목사님의 토끼와 양봉업을 도우며 날마다 토끼풀을 뜯었다.
이때 신경성 위염이 생겨서 심하게 아플 때는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있으나 나는 마음으로 불쌍하기만 할 뿐 행동으로는 어떻게 간호 할 방법이 없었다. 그 후 정찬 오빠는 서울로 가서 숙부가 경영하는 용산 극장에 기도를 서고 있었고, 병하 오빠는 제대를 하고 천안에 모 회사에 다니고 있을 즈음이다.
청주 언니네 집에서 어머니의 회갑 감사 예배가 있었다. 연락을 했더니 병하 오빠 혼자만 참석을 했다 그 동안의 안부를 물었더니 형균 오빠는 행방불명이 됐는데 아무리 수소문해 봐도 남한 땅에는 없는 것 같고, 정찬 오빠는 연락이 안 되고, 자기는 장로님 딸과 결혼하여 아들 형제를 두었다고 했다.
6. 25때 만나 어려운 환경 속에서 어머니와 모자(母子)의 인연을 맺은 세 청년은 그 후 소식이 두절되고 병하 오빠는 천안에서 모 회사 부사장이었는데 저 아래 어디로 갔다는 소식만 인편에 들었을 뿐 지금까지 소식이 없다. 6. 25의 기억도 잊히지 않지만 이 세 오빠의 약속과 추억은 더욱 그리움으로 남아 세월이 갈수록 새록새록 보고 싶은 얼굴들이다. 젊고 늠름하기만 하던 얼굴들이 얼마나 변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