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음 글은 충남고 50년사에서 일부 발췌한 내용으로서 청운령이라는 용어가 어떻게 탄생했는지, 그 일부 단편적인 내용을 알려주고 있다(자세한 내용은 직접 충남고 50년사를 참조).
이 액자는, 카페에 공지 사항을 올릴 때나 이메일로 서신을 보낼 때 활용하는 한 가지 예를 보여준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보통 이메일로 편지를 보낼 때 바로 메일 편지쓰기란에서 원고를 작성하면, 볼품없이(?) 작성된다.
이럴 경우 세련된 편집 체제를 갖추지 못하므로 첨부 파일로 별도의 서류를 작성해 전송하는 분을 가끔 볼 수 있다. 그러나 필자의 경우 이처럼 액자를 미리 만들어 두고 한 벌 복사해 내용문만 바꿔서 이 견본처럼 사용하시면 좀더 자신이 원하는 편집 체제로 깔끔하고 읽기 편한 문서를 작성할 수 있다.
액자의 색깔과 형태는 다양하게 만들 수도 있겠으나 우선 손쉽고 무난한 형태를 제시해 활용성에 대한 가능성을 청취코자 한다. 특히 메일이나 카페를 열었을 때 전달코자 하는 내용이 직접 볼 수 있어야 할 터인데, 때로는 한 페이지짜리 문서도 첨부 파일로 보내면 수신자는 일일이 파일을 다운 받아야 하므로 매우 번거롭고 짜증(?)나는 일이다.
이 일에 대한 의견들을 댓글로 남겨 주시면 그에 따라 후속 작업을 검토코자 하오니 고견을 전해 주시고, 혹시 제가 독학으로만 컴퓨터를 익힌 탓에 잘못 알고 있거나,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다 같은 한식구 동문 선후배 사이니 기탄없는 의견 교환을 바랍니다.
제3절 충남고등학교의 설립 배경
1. 산실(産室)에 얽힌 설화(說話)
대전시 목동(牧洞) 132번지. 속칭 용머리 언덕이 충남고등학교가 탄생한 산실의 현주소다. 이곳은 조국 광복 이전인 1943년에 5년제 심상과(尋常科) 신입생 3학급과 1년제 특설강습과 3학급으로 출발하여 그 때까지 14회의 졸업생을 배출했고, 1년 뒤에는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함으로써 사실상 발전적(?)으로 문을 닫게 되는, 이 지역 초등 교육의 요람 국립 대전사범학교가 20년 가까이 누려온 터전이었다.
그러니까 충남고는 대전사범학교의 시설 일체를 1년 뒤에 인수받기로 약속되어진, 외형상 자못 화려하게(?) 출범을 한 것이다. 이곳에 대전사범학교가 터를 잡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 용머리 일대는 한밭 땅에서 가장 오래된 공동묘지 터였다.
이 공동묘지 중 특히 지금의 충남여고 강당이 들어선 자리 뒤편 일대(과거 침례교 신학대학이 자리했던)는“어린애의 시체를 매장하지 않고 그대로 나무 시렁 위에 얹어 놓는, 풍장(風葬)의 일종인 덕다리가 무수하여, 밤에는 도깨비불이 난무하고 귀신들의 울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는 이 지역 촌로들의 증언들로 미루어 보아, 풍수지리학적으로 따지자면 터가 자못 센 곳이었다.
이 공동묘지를 일제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소위 근로 봉사라는 명목으로 당시 중학생들을 동원하여 터를 닦고 대전사범학교를 세운 것이다. 그 학교 터를 닦을 때 해골들이 수없이 쏟아져 나왔음은, 아직도 생존하고 있는 그 때 근로 봉사에 동원된 사람들의 증언과, 1965년 지금의 충남여고 생활관인 청운료(靑雲寮)를 건립할 때 다섯 개의 해골이 한꺼번에 나온 것을 교직원들이 목격한 것으로도 입증되거니와, 그 해골들은 당시 충남고교의 생물실에 1960년대 말까지 표본으로 전시·보관되었었다.
이 용머리 공동묘지 가장 높은 지대인 대전사범학교(현재 충남여고와 충남여중) 정문 남쪽 산등성이인 말망산(현재는 이 일대에 고층 아파트가 건립되어 있다)과 현재 충남여고 강당이 서 있는 언덕 사이는 움푹 들어간 골짜기였다.
이 골짜기를 따라 고개가 닦여지고 난 뒤 처음에는 대사고개라 이름이 붙여지고 그 정상에다 교문을 세웠지만, 이 골짜기는 본래 지금의 대전세무서가 자리한 옛날 대전지방법원 앞에서 중앙초등학교(전 대전사범 부속국민학교) 앞을 거쳐 서대전초등학교로 넘나들던 고개로 이루어져 있어 고개의 동서 양쪽 마을 사람들은 이 고개를 지름길로 많이 이용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자연스럽게 일찍부터 이름이 붙여져, 서대전 방면에서 올라오는 고개를‘웃개터골 고개’라는 뜻이 변형된‘유개터골 고개,’그리고 법원 방면에서 올라오는 고개, 즉 현재 충남여고 정문이 서 있는 고개를‘새터고개’라고 이름 불렀던 것이다.
그 뒤 유개터골 고개 쪽인 용머리 언덕을 깎아서 대전사범학교 교사를 신축함으로써 유개터골 고개는 자연스럽게 없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대전사범학교가 개교한 뒤에도 학교에서는 서대전 방면에 후문을 만들어 주민들의 통행에 편의를 제공하더니 1963년 학교환경 정화라는 명목으로 주민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높은 담장을 쌓아 길을 폐쇄하고 말았다.
한편, 정문 쪽으로 올라오는‘새터고개’는 대전사범학교의 개교와 함께 정문이 세워졌기 때문에 자연히‘대사고개’로 개칭되었지만, 등교 시간에 지각하는 학생들에게는 숨이 헐떡거리도록 뛰어 넘어야 하는 까마득한 고개로 인식되어, 학생들 사이에는 속칭‘헐떡고개’라고 불리어지던 것을, 뒤에 항목을 달리하여 다시 언급하지만 충남고의 출범과 더불어 당시 국어 교사 송백헌 선생이‘청운령’이라고 이름을 붙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이렇듯 수많은 사연들이 깃들은 땅, 속되게 말하여 터가 너무 세기 때문에 그곳에 자리 잡은 학교들은 그처럼 많은 풍상과 변화를 겪어야만 했던가? 대전사범학교의 문 닫음, 충남고등학교의 남녀 분리 이전, 그리고 그 터를 다시 세 동강 내어 충남여고와 충남여중과 학생 도서관을 세운 일, 뿐만 아니라 도시 계획에 의하여 충남여중 정문 앞의 많은 땅을 도로와 택지로 빼앗겨, 처음의 115,000㎡(3만 2천여 평)의 넓었던 교지가 축소되는 변화를 맞는 일 등, 이 모두를 역사적 필연성으로 돌리기에는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시련이 연속된‘터’인 것이다.
2. 개교 전야(前夜)의 기상도
이하 생략 ; 『충남고 50년사』 참조, 위의 내용은 pp.39-40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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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다음에는 청운령과 얽힌 재미난 부분만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모두들 생업에 바쁘다 보면 책을 읽을 시간이 없지요.
이렇게 짤막짤막하게 읽다 보면 가랑비에 옷 젓듯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