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의 과잉과 폭력의 기원(1) / 조선의 명판결
1784년(정조 8)년 6월 진주에서 벌어진 사건이다. 사노 비였던 권복순은 자신의 여동생 복점이 시어머니 김 씨에게 꾸중을 듣고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하자, 사돈 김 씨를 결박하고 창 자루로 때려 8일 만에 죽게 하였다. 당시 경상감 사는 “권복순이 휘두른 막대기가 창 자루라느니 소나무 가지 라느니 흉기를 종잡을 수 없고, 어깨를 때렸다느니 허리 아래 를 때렸다느니 하는 의논이 분분하여 혼란스럽습니다. 실인 (實因)은 비록 결박 후 때려죽인 것으로 귀결되었으나, 김 씨 가 구타당한 이후 뜸을 뜬 일이나 복약의 정황을 헤아려보면 이미 병이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형사 사건의 진범이 의심스 럽다면 우선 가볍게 처벌하는 법을 따라야 할 듯합니다.”라는 계사(보고서)를 올렸다. 감사의 보고서를 받아든 형조 관리들 역시 권복점이 물에 몸을 던진 이유가 시어머니의 악행때문 이고, 여동생의 원한을 풀고자 오빠 권복순이 시어머니 김씨 를 결박한 후 구타한 일이니 저간의 사정을 헤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원정지법의 적용
사건 발생 이듬해인 1785년 7월 정조는 최종판결을 내렸다. 판결문에서 정조는 ‘동기간의 지극한 정’을 강조하고, 죽게 된 직접적인 이유보다는 근본적인 원인을 생각해야 한다고 보았다. “죽은 이유가 병 때문이었는지 혹은 구타당해서 그런 것인지, 때린 자가 이 사람이었 는지 저 사람이었는지는 분분하게 의논할 것 없다.
살인사건을 처결할 때 사정을 참작하여 용서해 주는 법(원정지법)이 없다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권복순을 살려야지 죽일 수는 없다. 지금 고발당한 권복순은 복점과 남매 사이로, 동기간의 지극한 정에서 누구인들 그렇게 하지 아니하였겠느냐. 두 남매는 나이가 두 살 터울인데 두 사람 모두 열 살 되기 전 에 부모님을 잃는 슬픔을 당하고 외롭게 서로 의지하며 목숨을 부지해 왔다.
어려움 속에 두 사람만 남았는데 이제 한 사람은 장가를 들고 한 사람은 시집을 가게 되었으니, 이들이 서로 기대하고 사랑으로 보살핌은 남들보다 열배는 더하여, 혹여 하루라도 시집에서 못 살지나 않을까 걱정했을 것이다.
그러나 없는 일을 꾸며 내 야단치는 시어머니의 고약함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며 뼈를 후벼 파는 악담 때문에 며느리의 탄식은 그치지 않았던 것이다. 낮에 점 심을 지어 들에 나갔다가 저녁 먹을 때가 되도록 귀가하지 않았으니,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돌아갔다가는 곧바로 책망을 듣게 될 터이고, 도망치고자 하였으나 딱히 도망칠 곳도 없었 다. 신세의 고달픔과 신산함을 슬퍼하고 운명이 기구한 것을 한탄하면서 해질녘의 아무도 없는 빈 강가를 서성이다가 마침내 쓸쓸하게 물에 몸을 던지는 혼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정경을 생각하면 비참하고 측은하며, 가슴에 맺힌 수없는 원통함은 길 가는 사람이라도 듣고서 눈물을 흘릴 법하다. 하물며 오빠로서 부모를 잃은 슬픔도 채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슬픔이 갑자기 생겼으니 이 때를 당하여 하늘과 땅만큼의 원한을 장차 어찌 풀 수 있었겠는가? 이에 매제를 결박하고 시어머니를 구타하여 누이동생의 한을 위로하고, 시어머니를 핍박하여 죽임으로써 조금이나마 여동생의 원수를 갚고 분통함을 씻을 방도로 삼았던 것이니, 천리나 인정으로 그만두려 해도 그만둘 수 없었던 것이다.
사정을 참작하여 용서하자는 논의(원정지론)를 권복순에게 적용하지 않는다면 누구에게 시행하겠느냐. 이에 권복순을 특별히 석방하도록 하라.”
오해하지 마라
정조는 동기간의 정을 강조하면서 여동생을 위한 오빠의 복수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다산 정약용은 정조의 결정이 남매 간의 정 때문에 살인자를 용서한 것처럼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정조가 본 사건을 살인사건으로 보지 않았기에 사면이 가능했다고 추론했다. 다산은 “살옥 사건의 원안을 보지 못해 정확한 사정의 내막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시어머니 김 씨의 죽음은 병사가 분명하다.
복순을 정범이 아닌 피고로 기록한 것도 그러하며, 정조 임금의 판결문에 ‘병 때문인지 아니면 구타 때문인지’라고 말한 것으로도 죄가 의심스러운데다 사정이 매우 가여워 이처럼 용서한 것이다. 만일 구타하여 죽인 게 분명하다면 완전히 석방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다산은 권복순의 석방은 단지 남매 간의 우애를 고려한 게 아니라 시어머니의 죽음이 구타살해가 아닌 병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해석했다. 인정의 도리만을 이유로 정조 임금이 살인죄를 용서하지는 않았으리라는 게 다산의 진의였다. 사실 다산의 이러한 해석은 약간 억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확실히 정조는 형제, 자매 혹은 남매의 우애를 강조하기 위해 본 사건을 가볍게 처리했기 때문이다. 다산은 ‘인정과 도리’만을 참작하여 살인자를 용서하다가는 사회의 무질서를 초래할 수 있다고 염려했다. 따라서 정조의 석방 명령이 살인이 아닌 ‘병사’였기 때문이었음을 누누이 강조한 것이다.
모든 죽음을 정당화할 수 없다
다산은 편협한 성질의 부녀들이 한순간에 자살한 일을 모두 핍박당한 사건(모욕을 이기지 못하거나 위협을 받아 자살한 경우)으로 인정하여 가해자를 처벌하거나 가해자에 대한 복수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다산은 당시 조선의 부녀자들이 말 한마디 서로 다투었을 뿐인데도 이를 철석같이 원통하게 생각하여 연못에 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 편협한 성격으로 작은 일에도 너무 쉽게 원한을 품고 자진하는 부녀자들 때문에 시어머니가 모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고 보았다.
다산은 적어도 모욕이나 핍박 등의 수치심이 ‘죽을 만한 경우’는 간음 등으로 무고를 당하거나 도둑질을 했다고 죄를 덮어 씌워 이 세상에 몸을 용납할 수 없도록 했을 때로 제한했다. 이 정도라면 피해자가 자진(살)할 수 있고 혹 친인척이 ‘복수’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본 사건은 권복순이 때리기는 했지만 이 때문에 시어머니가 사망하였는지 확실치 않으므로 사건에 의문이 있었던 것이요, 따라서 정조가 이전의 판례들을 참작하여 살려주었을 뿐이라고 다산은 결론지었다.
보통 사람들은 정조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시어머니의 가벼운 꾸중에 며느리 권복점이 편협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을지도 모를 일을, 단지 고부 간의 갈등이라면 시어머니를 고약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상식에 의거하여 여동생을 위한 오빠의 복수가 정당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기본적으로 다산은 인정과 정상을 참작한 도덕정치를 인정하였지만 도덕의 과잉이 초래할 무질서를 우려하였다.
특히 다산은 도덕적이지 못한 자들이━편협한 부녀자와 상당수의 일반민들━마치 스스로를 도덕적이라고 착각하거나 혹은 편협한 울분을 정의의 분노로 착각함으로써 엄연한 사회 질서를 위협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다산은 법의 심판관들이 지혜와 정의를 충분히 단련하여 단순한 원한과 의로운 분노를 구분함으로써 개인적 원한이나 분노가 정의의 폭력으로 둔갑하지 못하도록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사로운 분노와 원한이 도덕에 기댄 채 너무 쉽게 의로운 행위로 변모하는 당시 상황에서 다산은 19세기 이후 조선 사회에 넘쳐났던 사적 폭력의 기원을 발견했던 것이다.
도덕의 과잉과 폭력의 기원(2) / 조선의 명판결
다산은 친척의 아내가 남편을 따라 순절했을 때조차 의로운 죽음이 아니라면 정려(旌閭)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1801년 다산이 장기로 귀양 갔을 때의 일이다. 다산의 재종제 정상여가 모친상을 당해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병이 들어 죽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 최 씨가 음식을 끊고 남편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그만 목을 매 자살한 것이다.
친인척이라도 안 된다
동네 선비들은 최 씨를 남편과 합장한 후 ‘최 씨의 정절과 효행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들의 수치’라고 결정하고 관아에 최 씨의 정려를 신청하려고 했다. 정상여의 동생 정규건이 다산에게 관아에 올릴 글을 요청하였다. 다산은 이 부탁을 거절했다. 남인계 대학자인 우담 정시한이 이유 없이 남편을 따라 죽는 행위는 바른 의리가 아니므로 이를 장려하여 집안의 복을 기를 수는 없다고 한 일화를 인용하여 다산은 정중하게 청탁을 물리쳤다.
다산은 너무도 쉽게 목숨을 끊는 당시 부녀자들의 세태, 그리고 이를 의리에 합당하다고 무조건 장려하는 국가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위태로운 순간의 남편을 구하려다 함께 목숨을 잃은 경우도 아니고, 치한의 위협에 정절을 지키고자 죽음으로 항거한 것도 아닌데, 단지 남편이 죽자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자살하였다고 이를 표창할 수는 없다는 게 다산의 주장이었다. 헛된 죽음을 명분 없이 미화한다면 아무나 ‘의로운 자살’이니 ‘의로운 복수’니 하면서 너무 쉽게 자살이나 살인 같은 극단적 폭력을 휘두를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다산의 ‘열부론’
그렇다면 어떤 경우를 의로운 자살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다산은 ‘열부론’을 지어 진정 의로운 죽음이 무엇인지 상세하게 밝혔다. 다산은 아버지가 죽는다고 그저 따라죽는 아들을 효자라 할 수 없고, 임금이 죽었다고 신하가 따라 죽는다면 충신이라 부를 수 없듯이, 남편이 죽었다고 목숨을 끊는 행위는 진정한 열부의 태도가 아니라 편협한 성격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그러자 일부에서 다산의 이러한 비판을 너무 심하다고 반박했다. 남편을 따라 죽은 부인의 행동이 명예를 얻으려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으로 남편을 따라 죽었는데 이를 열부가 아니라 한다면 지나치지 않는가라는 비판이었다. 이에 대해 다산은 ‘천하의 일 가운데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없다. 목숨을 버리는데 무엇을 얻을게 있겠는가? 따라서 오직 그 죽음이 의에 합당한 경우라야 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다산은 절대 목숨을 버려서는 안 되는 일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버려야 한다면 진정 의로워야 할 뿐이라고 강조했다.
다산은 열부의 조건을 다음으로 제한했다. 첫째, 남편이 호랑이나 도적에 핍박당했을 때 아내도 남편을 따라 막으려다가 죽었다면 이러한 경우는 열부라 할 수 있다. 둘째, 자신이 도적이나 치한의 핍박으로 강제로 욕보이게 되었을 때 굴하지 않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이는 열부이다. 셋째, 일찍 과부가 되었는데 부모나 형제들이 자신의 뜻을 꺾고 남에게 재가시키려 할 경우, 이를 거부하다가 역부족이자 스스로 자진했다면 열부라 할 만하다. 마지막으로 남편이 원통함을 품고 죽자 아내가 남편을 위하여 울부짖으면서 진실을 밝히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함께 형벌에 빠져 죽었다면 이는 열부라 할 수 있다. 다산은 이상의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면 절대로 의로운 죽음이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현실은 어떠한가?
현실은 어떠한가? 다산은 조선후기에 열부의 조건에 합당하지 않은 경우들을 열부라고 포장하는 사례가 너무 많다고 보았다. 가령 남편이 편안히 천수를 누리고 안방에서 운명하였는데 아내가 이내 따라 죽는다. 이는 스스로 제 목숨을 끊었을 뿐이다. 이 죽음이 의로움에 합당한가 생각해보면 절대 그렇지 않다.
다산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나쁜 일로 규정하고, 이미 의롭지 않은 죽음이라면 이는 천하의 가장 나쁜 일인데, 천하의 가장 나쁜 일을 가지고 지도자가 마을에 정표하고 부역을 면제해 주는가 하면 자손들의 노역도 감해 준다면, 이는 천하에서 가장 나쁜 일을 서로 좋아라고 백성들에게 권하는 꼴이니 과연 옳다고 할 수 있겠느냐고 비판했다. 다산은 정부가 헛된 죽음을 권장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진정한 의열
다산이 헛된 죽음(의롭지 않은 죽음)을 맹렬히 비난하는 속 깊은 이유는 더 있다. 그는 진정한 분노(의로운 죽음)가 헛된 죽음들과 뒤섞임으로써 의로운 죽음의 진정성마저 훼손될까 걱정했다. 따라서 그는 사사로운 원한과 불의와 부당에 대한 진정한 저항을 혼동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했다. 사실 불의와 부당에 공분할 줄 아는 인민들의 도덕적 각성이야말로 조선사회가 추구한 주자학적 통치의 궁극의 목표였다. ‘공분’이 중요한 이유는 나홀로 도덕적인 데 머물지 않고 다른 이들의 도덕성 계발에도 개입하기 때문이다. 주자학자들이 으뜸으로 친 ‘대학’의 가르침은 명명덕(明明德)과 신민(新民)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덕목에는 개인의 도덕적 자각과 더불어 타인의 도덕성을 계발하려는 주자학적 이상공동체의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주자학의 기획은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판단된 분노(폭력)를 용인할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사회질서를 뒤흔들 만한 수위의 정당한 폭력, 가령 복수살인마저 가능하다는 당위성과 이를 적절히 통제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 사이의 끊임없는 긴장을 야기하게 된다. 결국 최선의 방법은 사회질서를 위협하지만 용인될 수도 있는 정당한 분노와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 되는 부적절한 분노를 정확하게 구별하는 일이다. 만일 양자 사이가 정확하게구별되지 않는다면 사적인 폭력이 공적 정의로 둔갑하여 폭력이 난무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산의 문제제기는 바로 이 지점에 대한 우려에서 비롯했다. 그는 사적인 원망과 의로운 분노를 정확하게 구별함으로써 사적인 폭력을 엄격하게 통제하고자 했다.
근본적으로 정의로운 살인을 부정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정의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너무나도 분명한 살인 행위를 모두 용납할 수 없는 모순적 상황에서 다산의 해법은 바로 양자의 엄격한 구분에 있었다. ‘정의로운 폭력’에 대한 엄밀한 제한을 통해 그렇지 않은 폭력들이 정의라는 명예를 훔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