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 문헌으로 본 우리나라 향의 역사 5
조선의 문화 속에 담긴 향
선비들은 독서를 할 때나 시를 지을 때 으례 옷을 단정히 차려 입고 향을 향로에 지피곤 하였으며, 부부 침실에 사향을 사르고, 나향의 촛불을 켜서 분위기를 돋구었고, 남녀 구별 없이 향낭을 패용 하였으며, 단순히 의복에 향료를 뿌리는 것만이 아니라 향수에 머리 감고 목욕하는 훈목 관습도 있었다.
<1> 혼례시
유교식 전통혼례을 '삼서육례'라고 부르는데, 이는 전안청에 따로 차린 향로 앞에서 신랑 신부가 백년 해로를 서약했다. 제일 먼저 하늘에 절하고, 다음으로는 신랑 신부가 서로 절하며, 마지막으로는 어른들 앞에서 서약하였다. 불교식 혼례에서도 신랑 신부가 '오분향'을 사름으로써 의식이 시작되었다.
<2> 임금의 교지를 받을 때
임금의 교지를 받을 때 반드시 향을 사르고, 사약을 받을 때도, 춘하대제 등 국가행사 때도 전향사를 통해 향을 사르거나, 전향별감을 통해 지방에 향을 보내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궁중에서는 항상 침향을 사르고, 임금이 설날 아침에 벽온단 한 심지를 살라 일 년 내내 평안하기를 기원하였다.
<3> 회춘과 향
회춘을 목적으로 향을 복용하였다고 하는데, 특히 기생들은 향을 복용함으로써 인기가 높아졌으며, 궁중에서는 향낭 각시를 따로 두었다고 하며, 심지어는 사향노루를 궁중에서 직접 사육하였다고 한다. .(gandihikas님이 쓰신 글입니다) 우리나라 향 이야기
왜 우리나라는 향이 발달하지 못했는가 ?
우리나라 香道가 사라진 원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지만, 일단 오늘 이 자리에서는 옛 조선왕조를 질책하는 내용을 다루고자 합니다. 결론부터 말씀 드리자면 조선왕조에서는 향의 유통에 있어서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양성화시킬 수 있던 것을 독점거래와 암상인, 뇌물을 통해서 왜곡시켰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몇가지 향이 났습니다. 그런데 증보문헌비고에서 우리나라가 세금으로 걷는 공물 목록에는 울금과 雀舌만이 있고 다른 것은 온데간데 없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얘기이고... 여러 문집이라든가, 규합총서를 보면 사대부 집안 정도만 되어도 여러 종류의 향을 구입, 제작하여 사용한 기록이 있으니, 당연히 왕궁에서 향을 안 썼다고 한다면 말이 안되겠죠.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外貢으로 향을 걷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보다 상세한 기록은 아직도 발굴중이지만... 일단 조선왕조는 지금까지 추정되었던 것보다 상당히 많은 양의 향 거래에 관여한 것 같습니다.
왕조실록에도 문종 즉위 원년에 부마 안맹담이 香을 올리자, 며칠 내에 수양대군, 안평대군,...., 도지사 들까지 香을 바쳤다고 된 걸로 봐서 왕족과 양반은 평소 상당량의 향을 갖고 있었던 걸로 추정됩니다. 그 시절에 전문 향 가게가 있어서 갑자기 이 주문을 다 소화해낸 것도 아닐 터이고, 맘대로 해외에서 향을 사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결론적으론 평소 상인에게서 부정기적으로 산 것이 아닐까 싶은데, 향 재배/판매에는 이런 방식이 제일 안 좋습니다. 상인이 온갖 농간을 부릴 수 있고, 생산자인 향 재배 농민, 사냥꾼에게는 극히 적은 몫이, 소비자인 양반과 국가는 고액의 값을 치뤄야 되고, 무엇보다도 대량생산/무역이 불가능해집니다. 일단 수요가 부정기적이면... 농민이 香木/향초를 재배해서 먹고 산다는 것은 힘들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상인들도 정기적인 香 무역은 시도하지 않겠지요. 결국 급작스레 수요가 생기면 그제서야 부랴부랴 상인들이 香을 해외에 주문해야 되는데, 해외무역이 어려었던 당시에 이것이 가능할 리 없습니다. 결국 상인들이 틈틈이 사뒀던 향의 재고에 의존할 수 밖에 없습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갑작스레 필요해져서 향을 사러 나선다고 하여도, 수년만에.. 아니 때로는 수십년 만에 향을 사러 나서는 것인데 그걸 제대로 판별할 능력이 있을 리 만무합니다. 결국 잘 모르는 소비자를 상대로 얼마든지 농간을 부릴 수 있었을 겁니다. 만약 해마다 조금씩 소량을 사들였다면 지속적인 구매경험을 통해 나름대로 판별력을 기르고 지식의 축적도 가능했겠지만, 거기까지 신경을 써준 나라가 아니었으니... 일본 같은 경우, 영주(大名)가 직접 나서서 동남아와 중국/우리나라 사이에서 香무역을 해서 藩(지방정부)의 재원을 마련했습니다. (香 무역의 국유화를 통해 확실하게 국고를 튼튼히 한거죠) 물론 중앙의 큰 상인들은 독자적으로 선단을 편성하여 거래를 했지만, 이 경우 대량무역에다 상호 경쟁이 붙어서 값이 싸지는 장점이 있었습니다 (시장경제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어느 쪽도 아니면서 결과적으로 뇌물먹은 관리와 역관 때문에 가짜 香을 사서 정부가 돈을 떼이기나 하고... --;;; 이 점에 있어서는 일본보다 앞선 문화를 자부하던 조선도 반성해야 될 것입니다. 뭐... 지금 1998년에도 우리나라에서 제대로 된 香을 사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습니다만... (gandihikas님이 쓰신 글입니다)
우리나라 향 이야기
조선시대에도 가그린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 중종8년(1513) 3월 7일의 기록을 보면 조강(아침수업 ^^;)에서 남곤이 중종에게 아뢰는 말 중에'...漢나라 때 상서랑(장관)이 임금에게 아뢸 때 입에서 악취가 날까봐 염려되어 입에 鷄舌香을 머금었으니 이는 일을 친근히 아뢰기 때문입니다' 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또 정조 14년(1790) 11월 12일 기록에는 승지(비서) 신기가 전날 술을 먹고 경연(아침조례 ^^;;)에 참석했다나요. 상당히 입냄새가 심했던 모양인지 세종대왕이 꾸짖습니다. '면전에서 글을 받아쓰는 데 술 냄새가 코를 찌르니 너무도 조심성이 없다. 계설향을 구하여 입에 물기 어렵다해도 어찌 감히 이처럼 과음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봐서 동양에서는 漢나라 시절 부터 (와우.. 漢나라라면 고조선을 멸망시킨 그 漢나라니까 고조선 시절부터 !) 입냄새가 심하거나 입에서 술내음, 음식냄새가 날 때는 계설향을 썼던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가그린이죠 ^.^
다만 지금처럼 액체행태는 아니고 분말 형태 였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아마도 용각산을 입에 넣는 기분이 아니었을까요) 흠~ 鷄舌香이라고 하면 생소할 지도 모르겠군요.
계설향의 영어 이름은 clove이고 (보통 clove oil 형태로 사용하죠) 丁香, 丁子香 이라고도 부릅니다. 사실 계설향 외에도 동양에서 쓰던 香과 서양 향료는 겹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gandihikas님이 쓰신 글입니다) 9 향으로 부리는 사치
이익의 성호사설에 따르면, 宋나라의 신하 張浚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갑자기 출세를 하자 집안 네 구석에 큰 화로를 설치하고, 하루에 수천 민(화폐단위 緡)씩 향을 태우며 연기를 香雲이라고 자랑하다가 급기야는 도독전에서 17만민, 격상고전 70만민, 집기 3000여점을 횡령한 혐의로 파직당했다죠... 하도 돈을 많이 거덜내서, 이걸 張浚亡國이라고 부른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차천로가 쓴 오산설림초고를 보면, 성종 때 자단으로 집의 마루를 깔았다는 사람이 있어 성종이 확인한 후, 곤장을 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실 香가지고 부티를 내려면은 한도 끝도 없습니다. 옛날 기록들을 보면 자단향보다 수십배 이상 비싼 沈香으로 베게를 만들고, 부채살도 침향으로 만들고, 부채끈에 다는 선추도 침향으로, 옷고름에 다는 노리개엔 사향을, 옷에는 한충향으로 향기가 배도록 하고, 놀러갈 때엔 가마 앞뒤에 부용향 피워놓고, 위에 나온 것처럼 집 마루는 자단향으로 깔고, 마루의 네 귀퉁이엔 향 피워놓고 구름나라 라고 놀고... 정말 무한정하게 사치할 수 있죠. ^^;;; 현재 세계 최대 갑부라는 빌 게이츠도 돈으로 담뱃불 붙이지 말고 용연향으로 온돌방 데우면 아마 하루 안에 확실히 거덜나지 않을까요..... ^^
즉 香을 가지고 부티를 내다가는 한도 끝도 없으며, 또 옛사람들은 그렇게 내버려두지도 않았다는 거죠. 오늘날에도 香이나 향수 자랑하시는 분은 주변의 눈총을 받기 쉬우니 향기를 사랑하는 일은 멀고도 험하여라. ^^;;; (gandihikas님이 쓰신 글입니다)
조선왕조 향 사다가 국고가 흔들리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9년 6월 15일을 보면 호조판서(재무부 장관) 정난종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지난 여름 석달 동안 일본 사람들이 바친 것(향)에 대해 답하여 내린 포목을 헤아려보니 무려 10만 필이고, 사섬시에 남은 것은 80여 만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단지 석 달 동안 비용이 이러하니, 감당하기 힘들것 같습니다. 속향, 정향, 백단향 등은 모두 긴요한 것이 아니니... 거래를 물리치시는 것이....."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일단 포목 재고 외의 다른 국가예산은 제외하고 보았을 때, 간단히 말해 향사는 데 국가예산의 3-4%정도를 사용한 것입니다.
참고로, 증보문헌비고 155권을 보면 영조 2년(1726) 기준으로, 조선의 일년 예산은 쌀 10만석, 면포7-8만필, 돈 16,7만냥이었습니다 가히 국고가 흔들렸다고 할 수 있죠....^^;; 지금 우리나라가 국가예산의 몇 %를 들여 향수 사는 걸 상상해 보세요. ^^
여하튼 이 건으로 다시 논쟁이 벌어집니다(성종 25년 7월 3일). 일본 사람들이 향을 또 팔러 왔는데, 이걸 사느냐 마느냐는 거죠. 지금 백단향, 호초 등의 재고가 많다고 안 샀다가 나중에 재고가 떨어지면 어떻게 하겠는가 라는 성종의 질문에, 신하들은 둘로 갈려서 다투게 됩니다. 노사신, 윤호, 이극돈, 성준 등은 향이 필요없다는 쪽에 권경희, 윤효손 등은 사자는 쪽이지요. 결국은 값을 깎아서 사자는 것으로 결론이 났습니다만... 애초에 문제의 배경은 가격이 너무 비싸다는 것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정향 8兩에 정포 1필, 백단 7兩에 정포 1필이었는데, 이제는 정향 5근에 정포 1필, 백단 8근에 정포 1필로 가격이 떨어졌는데, 일본애들은 예전의 비싼 가격대로 사주기를 바란 것이죠. 사실 그 시세차이를 노리고 온 것이라고도 할 수 있었습니다. 이 어전회의 결과로 가격이 떨어진 후 다시 안나타나는 걸 보면... (예나 지금이나 일본 사람들 약게 장사하는 건.... --;;)
이 당시 우리나라가 향을 입수하는 경로는 일본과 중국, 오키나와였습니다. 중국에는 조공무역형태로 가서 옷감과 종이, 인삼을 바치고 그 대신에 용뇌, 소합향 같이 약재로 쓰이는 향들을 구해왔습니다. 일본의 경우 영주(大名)들이 개인적으로 부하들을 보내서 향을 바치고는 그 댓가로 대장경이나 범종, 종이와 옷감, 쌀 등을 요구할 때가 많았습니다. 오키나와(당시는 유구국)는 주로 대장경과 범종을 요구하더군요. 조선정부는 원래 유교국가인지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다른 나라가 불경이나 종을 요구하면 어차피 전 왕조(고려)에서 만든 것이고, 필요도 없으니까...라면서 신나게 바꿔준 걸로 보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엔 우리나라에도 한, 두 개 밖에 안남으니까, 그제서야 이제는 바꿔먹기 곤란하다고 하지요.(바꾸기 곤란하다고 하니 대번에 거래를 끊는 오키나와와 일본! 너무 냉정해..... ^^;;)
여하튼 이런 사건 이후로 우리나라가 향을 구매한 기록은 급격히 줄고 나중에는 사라집니다...(그렇다고 사람들이 향을 안 쓴 것도 아닙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향을 밀매하다가 붙잡힌 사람들 기록도 있거든요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에선 향수와 향 보따리 장사가 설치는군요 ^^;;) 이 당시 향 가격은 변동 폭이 너무 커서 확실하게 얼마인지 알 수 없으나, 당시 포목값을 감안하면 장난이 아니었던 건 확실합니다.(사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이죠. ^^;;)
한가지 더! 점성향이라고 들어보셨나요? 우리나라가 高麗시절에 서역상인에게 수입했다는 占城香은 실은 백단입니다. 香書를 아무리 뒤져도 점성향이란 말이 안나오길래, 포기하고 있었는데, '청장관전서'에 占城 : 漢나라의 임읍으로 남천축(인도 남부)에 접하여 있다. 특산물은 백단, 코끼리. 맹화유(석유)... 라는 설명이 있더군요. 이에 미루어 보아 점성향은 백단으로 추정됩니다. 아마도 제가 알고 있기로는 현대에 들어와 점성향의 정체를 밝혀낸 것은 제가 처음이 아닐지.. ^^;; (gandihikas님이 쓰신 글입니다)조선왕조 향 생산작전과 매향비 1
앞서 말씀드린 대로 향은 상당히 비쌉니다. 최고급이 아니더라도 중상품 정도의 진품 향은 현대에도 상당한 가격입니다. 당연히 향을 사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왕조는 유교국가였습니다. 종묘사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제사를 중히 여겼습니다. 제사지낼 때면, 향을 넣는 함 또는 봉투에 임금이 친히 밀봉 싸인을 하고 향을 들고가는 관리를 따로 보낼 정도였습니다. 제사 때 쓸 향을 보관할 香室을 따로 두고, 그 건물에 숙직당번까지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 향실별감들이 숙직하다가 졸아서 벌받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 종묘의 제사 외에도 지진이 나거나 전쟁, 혜성, 가뭄 등 일이 있으면, 영험하다고 소문난 전국 명산대천에 제사를 지내고, 거기 쓸 향을 내려보냅니다. 이렇게 향을 써대니, 왕족들이 취미용으로 향을 쓰기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향에 대한 욕구는 컸던 것같습니다. 향악정재에 사용되었던 沈香山, 봄을 기리는 향악정재 沈香春, 그리고 여러 노래의 가사를 보면 침향이라는 이름이 종종 등장합니다.
여하튼 향 살돈이 없는 정부는 향을 만들려는 생각을 합니다. 소위 말하는 埋香碑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원래 침향이나 자단향 같은 나무향은 나무를 그대로 태우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의 樹脂, 즉 기름을 태우는 것입니다. (서양 향수의 원료인 精油(엣센스 오일)도 간단히 말해 나무나 꽃의 향기나는 기름기 부분만을 녹인 물질입니다. ^^) 나무에서 목질부분을 없애고 기름기 있는 부분만을 남기려면 어떻게 했을까요? 땅에 묻어서 목질부분만이 썩기를 기다렸습니다. 황당하게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이 방법이 쓰였습니다.
나무에 상처를 내면 나오는 진(예를 들어 송진)도 기름기 부분이지만, 그리 호평받지 못했습니다. 썩히는 방법이 훨씬 질이 좋다는 거죠... 그런데 잘 썩게 만들려면 어디에, 어떤 깊이로 묻는가가 문제가 됩니다. 또 묻는 나무는 기름기가 어느 정도에, 몇년생 짜리인지도 중요합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많은 설이 있으며, 옛날 묻었던 사람들 본인들도 잘 모르고 묻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튼 향을 땅에다 묻었고, 그 위치를 표시한 것이 埋香碑입니다. 매향비에 관해서는 여러 의견이 분분하며 정확하다고 공인된 주장은 아직 없습니다. 심지어는 매향비 밑에는 향이 묻혀있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으며, 국내의 '향기를 찾는 사람들'의 박희준씨는 조수가 만나는 곳에 30년 이상된 나무를 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gandihikas님이 쓰신 글입니다)
조선왕조 향 생산작전과 매향비 2
조선왕조실록 세종24년 1월 17일을 보면, 세종대왕이 평안도 관찰사에게' 우참찬 이승지가 아뢰기를 의주 야일포 남쪽 성아래 바위에 경인년 11월 22일에 이 바위 남쪽 60척에 향을 묻었다고 적혀있다 하니 경은 그곳을 파보라' 라고 지시를 내립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9일에 보고가 올라오기를 '의주 야일포 장성 아래 바위산에 묻은 나무는 향목이 아니라 소나무와 참나무이니, 아직 향이 되지 못한 까닭에 다시 이를 묻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관찰사에게 標를 세워 후일의 빙고(참고)로 삼게 하였다고 합니다. 주목할 것은 침향나무가 아닌 엉뚱한 나무들을 묻어놓고는, 향이 되기를 기대했다는 대목입니다... ^^;;;
원래 香중의 香, 진짜 향으로 취급되는 침향은 인도네시아나 수마트라 섬 근처의 열대지방에서 발견되는 나무화석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화석화 되어가는 나무이죠... 나무가 묻힌 지 오래되어 목질부분은 다 썩고, 기름기 부분만이 남아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沈香이라고 부르는 것은 목질부분이 다 썩고 돌같은 樹脂 부분만 남아 있어서 물에 가라앉기 때문이죠. 그런데 보통 잎이나 줄기는 다 썩어서 없고, 몸통 안쪽의 갈색부분(深材)이나 뿌리 윗부분만이 남아 있습니다. 그게 화석화된 걸 갖고, 원래 나무가 어떤 것이었는지 추정하는 데 당연히 쉽게 알 수 있을 리가 없죠.... 그러니 침향을 만들기 위해 무슨 나무를 묻어야 하는지 불확실했습니다. 급기야는 아무 나무나 묻고서 시간이 지나면 침향이 된다는 주장이 퍼졌죠. ^^;; (이런 황당한 주장은 침향이 안나고,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우리나라와 중국에 널리 퍼졌습니다. 침향 무역을 했던 일본이나 원산지에서는 안 통했죠.^^;; )
이익의 성호사설을 보면 "사람들이 전하기를 상수리나무가 물에 들어가 천년을 지나면 향이 된다고 했기 때문에, 옛 사람들이 후세를 위해 나무를 많이 베어 물에 넣고 비석을 세웠다. 고성 삼일포의 매향비는 원나라 지대2년(1310)에 김천호가 묻은 것이다... 하지만 침향은 그냥 나무가 물에 들어가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향목이 물에 들어가서 이뤄지는 것이다. 우리나라엔 밀향수(침향나무)가 없는데 어떻게 사람의 힘으로 침향을 만들겠는가? 라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식으로 엉뚱한 나무가 묻혀서 오래 시간이 지나 화석화된 것도, 침향 버금가는 약효와 향기가 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지금도 있다는 겁니다. 이게 假沈香이라고 불리는 건데, 말 그대로 가짜 침향이라는 거죠. 향기를 찾는 사람들의 박희준씨는 의외로 이걸 믿으시더군요. 한의학에서는 假沈香을 사용한다고 말씀하시더라구요...(하지만 이 주장 역시 우리나라와 중국에 있지, 진짜 침향을 구할 수 있는 일본과 원산지에서는 논의거리로도 취급 안해주고 있습니다) ^^;; (gandihikas님이 쓰신 글입니다)
중종임금 가짜 향을 사다 1
얼마 전에도 가짜 향수업자가 걸려서 화제가 되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짜 香에 속은 역사는 뿌리가 깊습니다. ^^;; 어숙권의 패관잡기 2권에 보면, 우리나라에 없는 약재가 많아서, 사신이 중국갈 때마다 의사 2명을 붙여 사오는데, 거간꾼(중간상인)이 속여 팔아, 소합향, 유향, 사향 등이 번번이 진품이 아니었다는군요. 나중에는 중종 임금이 직접 나서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 중국정부가 상인과 합의 계약을 맺고 사주기를 부탁했으므로, 중국측 상서(장관)인 夏言이 태의원(국립병원)의 의사를 보내 진품을 판별케 했는데, 이 의사가 또 상인과 한통속이 되어 진짜를 팔지 않았다는군요....--;; 한 마디로 황당한 일이지요... 부끄럽기도 하고요... 이렇게까지 사기를 당한다는 것도 우습고, 또 향을 사기 위해 파견된 한의사들이 향을 사면서도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판별할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부끄럽죠. (그나마 이건 나은 편입니다.. 패관잡기 4권을 보면, 우리나라 의사들이 腦子(비상)과 龍腦香을 헷갈렸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사람 잡을 일이죠. --;; )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의문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토록 향에 대해 무지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기획연재 10 - 조선왕조 향 사다가 국고가 흔들리다 편에서 밝혔듯이 조선왕조는 국가예산의 3~4% 가까이를 들여가면서까지 향을 샀던 나라입니다. 따라서 막대한 양의 香 재고가 있었으며 이를 관리하는 '향실'이라는 기관, 향실별감이라는 관리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香匠이라하여 향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궁중 내의 장인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라 안에서 침향, 용뇌도 제대로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外貢으로 香도 걷었었고, 비록 부정기적이기는 했지만 향을 샀었던 나라에서... 아마도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400년간 지속되었던 조선왕조의 향기문화가 어떻게 그렇게 쉬이 사라져 버렸는가 하는 것과도 맥이 닿아 있을 것입니다. (gandihikas님이 쓰신 글입니다)중종임금 가짜 향을 사다 2
본론으로 돌아와, 억울하게도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가짜 향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향수는 그래도 꽤 많이 유통되어 진품 여부는 가려낼 수 있고, 향유도 회사 brand를 보고 믿고 살 수 있다지만, 전통香은 아직 안 그렇습니다. 우리나라에서 沈香같은 것은 사는 사람도 실제론 구경을 못 해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가짜 향이 횡행합니다. (국내에서 沈香의 항알레르기 효과를 가지고 박사논문이 나왔었는데, 논문을 쓰신 분도 침향 구별에 자신이 없어서 경동시장에서 산 후에 원광대 의대(불교계열이니까요. ^^)의 원로교수님에게 확인 받은 후 성분분석을 했다고 적혀있습니다. ^^;;)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沈香을 확실하게 판정내릴 수 있는 분은 많지 않을 겁니다. 전에 향기를 찾는 사람들의 박희준씨와 얘기를 나눌 때 물어보았더니 그분도 자신이 없다더군요... --;; 저의 경우는 그동안 침향을 사서 피워 본 경험에 근거하여 침향인지 아닌지는 어느 정도 구별이 가능하지만 아직 등급을 판별할 수 있는 수준에는 못 미칩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original 향을 사는 주 통로는 경동시장인데, 저는 원광대 의대나 경희대 한의대에 아는 분도 없으니 진품인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는 까닭에,^^;;, 일본의 2~300여년 된 전통있는 향가게에 주문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일본 향가게는 믿을 수 있느냐고 반문하시는데... 일본에는 茶道와 함께 香道라는 것이 있고, 香道에서는 500여년 가까이 내려오며 침향만을 聞香하고 있습니다. (간간히 침향 외에 백단도 애용합니다만 다른 향목은 향으로 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다른 향은 몰라도 沈香에 관한 한 대단히 정확하고 세세한 분류를 하고 있으며, 이들을 상대하는 전문 향가게 역시 수백년 동안 내려온 노하우와 나름대로의 信用이란 것이 있습니다.
잠깐 부연설명을 드리자면... 일본 천황가에는 宮내의 香을 담당하는 公卿가문이 있는데, 三條西 가문이 그것입니다. 한 500여년 전의 三條西가문의 한 명이 香道라는 것을 만들었고, 현재도 三條西가문에서 御家流 香道의 당주직을 맡고 있습니다. 일본 향도에는 志野流 香道라는 것도 있습니다만, 이쪽은 三條西가문의 일을 돕던 상인인 志野씨로부터 갈라져온 향도 유파입니다. 여하튼 일본천황가에서 500년 넘게 침향을 전담해온 가문이 香道를 이끌고 있는 이상, 香道하는 사람들이 침향을 사는 가게보다 안전하고 확실한 가게는 없습니다. (gandihikas님이 쓰신 글입니다)
박희준(향기를 찾는 사람들 대표)
건국신화와 함께 하는 향 불교의 유입과 향문화의 전래
향기로운 나라, 향기로운 사람들 향기로운 마음을 이땅에 묻는 향도
생활속의 향 문화
1. 향 한 자루를 피우면서
향을 피우면 사람들은 먼저 코로 맡으려고 한다. 그러나 좀더 섬세한 사람은 눈을 감는다. 눈으로 보이는 세계를 차단하여 향기를 맡는 기능을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이를 향기를 맡는다고 하지 않고 문향(聞香) 즉 향을 듣는다고 한다. 마치 천상을 소리를 들으려는 듯, 눈을 감고 향기에 취한 듯 깊은 명상에 들고 있는 모습은 향을 피우는 그 자리가 바로 신선의 자리라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뜬다. 푸르게 피어나는 연기는 우리를 무한한 상상의 세계로 끌어간다. 안으로 어리었던 향기로운 생각이 무한대의 세계로 확장된다. 향은 이렇듯 물질이 형상화된 정신문화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는 이렇듯 우리의 숨결을 고르게 하는 향이 있었다. 책을 읽을 때나, 차를 마실 때, 거문고를 탈 때 등 맑고 운치 있는 일에는 이 향이 피워졌다. 그 뿐인가? 우리가 여름철에 벌레를 쫓기 위해 피우는 모깃불도 이 향문화의 한 갈래이고, 우리가 추석에 먹는 솔잎 향기가 밴 송편과 이른봄의 쑥과 한증막 속의 쑥냄새, 그리고 단오날 머리를 감는 창포물도 또한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만드는 향기의 하나였다. 또한 장롱 안에 향을 피워 향냄새를 옷에 배이게 하는 훈의(薰衣)를 하여 늘 옷에서 스며나오는 향기를 즐기기도 하고, 옷을 손질하는 풀에 향료를 넣어 옷에서 절로 향기가 스며나오게 하였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향기를 잠자리에 끌여들이기도 하였는데, 국화로 베개를 만들어 사용하면 머리와 눈을 맑게 할 수 있고 탁한 기운을 제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런 우리의 향문화는 외국의 향과 향수에 밀려 촌스러운 것 또는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제 여기에 우리향 문화에 관한 작은 길잡이로 향에 관한 여러 이야기들을 엮어 보려고 한다.
2. 향문화의 원류 속에서 우리의 향문화
향문화의 원류를 찾아가면 크게 다른 2개의 전통에서 그 기원을 알게된다. 그 하나는 기독교문화 속의 향문화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대 동북아시아의 제천의식의 전통 속에서의 향문화이다.
향문화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 <성경>이라고 하면 많은 분들은 의아해 할 것이지만, 아담과 이브의 자손인 카인과 아벨이 여호와에게 경배를 올릴 때 불을 피우고 희생물을 태워서 올렸다는 사실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 서양의 향문화는 출발한다. 향료를 영어로 perfume이라 한다. 이 말은 프랑스어의 parfum에서 연유하는데, 어원은 라틴어로 '향기에 의해'를 뜻하는 perfumun이라 한다. 어원을 통해 볼 때 나무나 풀을 태웠음을 알 수 있다. 연기를 통해 하늘에 있는 신과 서로 교통을 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천주교에서는 지금도 제사를 모실 때는 이 향을 피우고 있다.
향연구가들은 동양의 향의 기원은 제천행사에서 장작을 태우는 시(柴)라는 의식에서 비롯하였다고 한다. 흔히 태평성대의 대명사로 일컬어지는 요순시대(B.C 2300년경)의 순임금이 태산에 올라 장작을 태워 연기를 피워올려 하늘에게 이 땅에서 좋은 정치가 펼쳐지고 있는 것을 알리는 의식을 올렸는데, 이를 봉선(封禪)의식이라고 한다. 이 봉선의식에서 치루어진 장작을 태워 연기를 피워 하늘에 알린 일을 향문화의 한 원형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 우리 역사의 뒤편에 가려져 있는 <한단고기>에 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향을 피웠다는 것이 아주 이른 시기부터 존재한다. 색부루 단군 병진 원년(B. C. 1285)에 날을 택해 7일 동안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후에 향과 축문을 여원홍에게 내리고, 3월 16일의 이른 아침 삼한 대백두산의 천단에서 제사를 행하고, 색부루 단군이 몸소 백악산 아사달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기록은 비록 순임금의 기록보다는 뒤지지만 현재 우리 민족이 천제나 제사를 모실 때 향을 피웠다는 첫 번째 기록이다. 그러나 순임금의 봉선의식도 우리 선조들의 제천의식에서 비롯하였다고 <한단고기>는 서술하며 우리의 제천의식은 일찌기 한웅천황보다 더 빠른 10,000여년 전 시작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단지 자료적 미흡함으로 하여 그 역사를 다 꿰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3. 건국신화와 함께 하는 향
향(香)이란 글자는 벼 화(禾)자에 날 일(日)자를 하고 있다. 벼가 익어가는 냄새를 향의 뜻이라고 하지만, 옛 고문을 보면 기장 서(黍)자 아래 달 감(甘)자를 하고 있다. 기장에 단 맛이 나게 하려면 발효를 시킬 때 가능한 일이다. 이 기장으로 빗은 술을 울창주라고 한다. 울창주는 신을 내리게 하는 강신주(降神酒)로서 오늘날에도 천제(天祭)나 종묘제례(宗廟祭禮)와 같이 나라 규모의 큰 행사에서 쓰이는 술이다. 이는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이 하나가 되게하는 역할을 한다. 즉 향은 술과 함께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어울림을 이루는 매개체였다.
우리 향의 역사는 오늘날 신화로 치부되는 우리의 고대사와 직결된다. 웅녀가 먹었다는 쑥과 마늘이 바로 강한 방향제이자 향신료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이른바 '아로마' 또는 '허브'라고 하는 오랜 인류의 향 역사와 같이 하고 있다. 그 많은 나무들 중에 왜 하필이면 신단수(神檀樹)를 타고 우리의 할아버지인 환웅은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 여기서 신단수의 단은 이른바 백단(白檀), 자단(紫檀), 전단의 단(檀)이라는 점을 다시 생각하여야 한다. 단은 밝은 나무인 박달나무라는 뜻으로도 새기지만, 향기로운 나무라는 뜻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환웅이 이 세상으로 내려왔다는 산의 이름이 묘향산(妙香山)이라고 변하는 것은 우리 한민족이 향기로운 나무를 신단수로 삼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한 예이다. 물론 묘향산의 위치에 관련된 많은 이견이 있지만, 신단수가 향기로운 나무였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다. 향기롭다는 말이 우리말에서 '단 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향기로운 나무인 신단수는 단내가 나는 나무의 한자식 표기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향나무와 우리가 이어지는 또 다른 예의 하나로, 우리의 장례의식에서 시신을 깨끗이 하고 수의를 입히는 과정인 염(殮)하는 풍속이 있다. 이 때 향나무를 삶은 물로 머리를 닦고 쑥을 삶은 물로 몸을 닦는다. 이는 우리가 신화라고 하는 환웅의 신단수와 웅녀의 쑥이 그대로 우리의 생활 속에서 되살아나는 부분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는 신화라고 부정하는 역사 속으로 죽어서야 비로소 돌아간다. 향나무와 쑥은 바로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상징하는 향기이기 때문이다. 제사에서 향을 피운다는 것은 옛날 신단수를 타고 내려온 환웅이 내려오듯 향을 태워 하늘과 땅이 하나 되게 한 모습을 재현하는 강신의 풍속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죽은 자의 넋을 천도하는 씻김굿을 씻김굿이라고 하는 이유도 강신한 넋의 상징물인 솥뚜껑을 향물, 쑥물, 그리고 맹물의 순서로 씻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나라 향은 이렇듯 신화가 아닌 역사와 생활 속에서 함께 하고 있다.
4. 향기로운 나라, 향기로운 사람들
역사 속에서 향문화는 불교의 전래에서 비롯한 것으로 나타난다. 아직 불교가 신라의 국교가 되기 전인, 19대 눌지왕(訥祗王) 때 중국의 양(梁)나라에서 의복과 함께 향을 보내왔는데, 이 향으로 묵호자(墨胡子)가 공주의 병을 고침으로 질병치료에도 향이 널리 이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묵호자는 향을 보고 '이를 태우면 향기가 피어나고, 그 정성이 신성한 곳에 이른다'고 하며 '향을 피우면서 원하는 바를 기원하면 반드시 영험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기록에서 향이 질병치료 뿐만 아니라 소망을 비는 매개체로 쓰였다는 것을 아울러, 불교의 유입을 통하여 향문화의 전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를 낯설게 하는 말은 아무도 향의 쓰임새와 이름을 몰랐다는 기록이다. 이때 향은 제천의식에서 피웠던 나무토막향도 아니고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자루향도 아닌, 가루향이거나 알 모양으로 빚은 환향이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김유신의 기록이나 주변 이웃의 기록을 보면 더욱 그간의 정황이 분명해진다.
먼저 자루향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자루향의 기원을 우리나라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이웃 일본에서는 자루향을 만드는 기술을 조선에서 약 400여년전에 왔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말이다. 여기서 자루향은 2가지로 나뉘어 지는데, 우리가 흔히 쓰는 자루향과 동남아에서 흔히 쓰는 대나무심지가 있는 자루향, 죽심향(竹心香)으로 나뉘어 진다.
동남아에서는 우리가 쓰는 자루향을 재위에 뉘어서 피운다고 하여 와향(臥香)이라고 구분한다. 나무토막향도 아니었을 것이라는 것은 우리의 향문화의 전통에 이미 향나무에 불을 붙혀서 향을 피우는 전통이 전하여 졌을 것이라는 추측에서 비롯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은 그에게 흔연히 복종하고 용화향도라고 불렀다고 한다.(公年十五歲爲花郞 時人洽然服從 號龍華香徒 <삼국사기>) 여기서 나오는 용화향도는 신라의 불교가 토착신앙과 결합한 미륵신앙의 형태로 결성된 신앙결사단체이다.
이 향도가 고려시대의 향도로 이어지고 그 향도의 전통이 다시 조선시대의 두레로 계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그 흔 적을 찾을 수 있는 보기 드문 전통문화이다. 이 용화향도는 다시 고려시대의 향을 땅 속에 묻었던 향도로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탄압을 받으면서 항두 상두로 변모하여 오늘날의 장례식장에서 만나는 상두꾼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는 신라시대의 화랑이 조선시대의 재인집단인 화랭이패로 이어졌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파악하여야 한다.
오늘날 전통 유교의식에서 망자를 목욕시키고 염을 하는 과정에서, 쑥으로는 몸을 씻고 머리는 향나무를 삶은 물로 목욕을 시킨다. 여기서 앞서 살펴보았던 한웅과 웅녀의 신단수의 단과 웅녀의 쑥이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그리고 단군이 신선이 되었다는 산의 이름이 묘향산(妙香山)이고 보면, 우리의 향 역사를 묵호자 시대로 보는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한다. 더욱이 김유신이 불교적 의식이 아닌 심신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보여주는 향문화는 불교나 유교에 습합되기 전의 우리의 고선도 문화형 속에서의 향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홀로 보검을 차고 인박산의 깊은 계곡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하늘에 고하기를 중악에서 하였던 서원을 빌었다. 獨携寶劒 入咽薄山深壑之中 燒香告天 祈祝若在中嶽誓辭 <삼국사기>
여기서 <소향고천>하는 의식은, 오늘날 목욕제계를 하고 향을 피우는 청정 한 몸과 마음을 위한 바탕으로 보인다. 여기서 부처님께 향한 예불이 아니고 하늘과 명산대천에서 올리는 고선도의 독특한 문화양식을 찾아볼 수 있다. 고구려 고분벽화인 무용총에 등장하는 향로 또한 예사롭지 않다. 흔히 <예불도>라고 소개되는데, 그 부처님의 모습이 신수 훤한 우리 할아버지 모습을 그대로 닮고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유입되었어도 여전하였던 우리 고대 신앙의 한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신라시대의 향문화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흔히 에밀레 종이라고 하 는 성덕대왕(聖德大王)의 신종(神鐘)에는 연꽃형태의 향로를 들고 있는 비천상(飛天像)이 남아있고, 경주 단석산(斷石山) 마애불상군에서 나타나는 향공양상은 신라시대의 향로 가운데 청동으로 제작된 향로가 적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안압지(雁鴨池)에서 반견된 납석(臘石)으로 된 향로 뚜껑은 신라에는 다양한 재질과 형태의 향로가 존재하였다는 것을 잘 증명해 준다.
그리고 불국사의 석가탑(釋迦塔)에서 발견된 유향(儒香), 향목편(香木片), 심향편(心香片) 또한 신라의 향문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자료이다. 또한 신라인들이 불사에 쓰일 종이를 만들 때 향수를 뿌려 종이를 향기롭게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향기문화이다.
그리고 이슬람 문화권으로 수출한 품목으로 이 향이 있었다는 것 또한 신라의 향문화가 무척 높은 수준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를 방문한 여러 아랍인들이 남긴 기록을 전하는 까즈위니(1203-1283)의 <제국유적기>에서 신라가 향기로운 나라였다는 것을 다음과 표현하고 있다.
신라 : 중국의 저쪽에 있는 매우 아름다운 나라. 맑은 공기와 물, 비옥한 토양 때문에 그곳 백성은 병들지 않는다. 주민들의 모습도 매우 아름답고 건강하다. 환자는 아주 드물게 발견된다. 알려진 바에 의하면 집안에 물을 뿌리면 호박(琥珀)향내가 퍼진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호박은 우리가 식용하는 채소의 호박이 아니라, 소나무 송진이 굳어서 만들어지는 소나무향기가 나는 호박을 말한다. 라인들의 소나무를 좋아한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신라의 화랑들은 수련을 하는 명산대천에 소나무를 심어서, 오늘날 우리는 동해안에 월송정, 한송정 등과 같은 송자계열의 이름을 가진 정자를 만나게 된다. 신라인들은 이미 이 나라를 향기롭게 만드는 가장 근본이 나무를 심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신라를 방문한 아랍인들은 소나무의 향기인 호박향에 취했을 것이고, 급기야 신라를 방문한 아랍인들이 유토피아로 흠모되던 영원과 행운의 섬인 아틀란티스에 필적시키게 된다. 바로 단국(檀國), 향기로운 나라의 전통을 이은 신라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신라의 향문화를 알 수 있는 자료는 미미하다. 오히려 일본에는 통일신라시대의 다양한 향문화의 흔적인 금과 은 백동 청동 돌로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향로가 정창원에 그대로 남아 있다. 또한 호암 미술관에 소장된 초두(焦斗)는 일본의 정창원에 소장된 향두(香斗)와 쌍둥이와 같이 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의 향문화의 원류를 알려면 이웃나라에 전해진 향문화도 함께 살펴야 함을 알 수 있다.
그 한 예로 일본의 미소로 유명한 목조반가사유상도 우리의 소나무인 적송으로 만들어졌다는 것은 신라인들이 향기로운 소나무를 단순한 건축자재로 뿐만 아니라 앞서 살펴보았듯이 하나의 종교적 대상으로도 여겼음을 알 수 있겠다.
이 신라인들 가운데 우리 향문화의 조금은 거친 듯 하지만 선종의 문화와 결합을 보여주는 향기로운 선배로 진감국사를 꼽을 수 있겠다. 최치원이 직접 짓고 글씨를 쓴 진감국사비문에 의하면 진감국사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풍모를 지녔던 것을 알 수 있다. '진감국사는 태어나면서 울지 않았는데, 곧 일찍부터 소리가 작고 말이 없는 거룩한 싹을 타고 났던 것이다. 이를 갈 무렵이 되자 , 아이들과 놀 때에는 반드시 나뭇잎을 태워 향이라 하고, 꽃을 따서 공양으로 삼았으며, 간혹 서쪽을 향해 바르게 앉아 해가 기울지도록 움직이지 않았다'는 기록이나 '어쩌다 호향을 선물하는 이가 있으면 질그릇에 잿불을 담아 환을 짓지 않은 채로 사르면서 말하기를 '나는 냄새가 어떠한지 분별하지 못한다. 마음만 경건하게 할 따름이다'라고 하였다'는 기록에는 진감선사가 우리에게 말없이 우리 허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경건한 향기가 있다.
무엇보다도 삼국시대 우리 향문화의 수준을 짐작하게 하는 것은 1992년에 출토된 백제대향로이다. 용과 봉황이 인간세계와 신선세계를 감싸 안고있는 이 향로의 당당하면서도 수려한 자태는 백제문화의 진수이자, 우리 향문화 역사의 위상을 단숨에 정상으로 끌어올린다. 인간과 신선 세계를 떠받치고 있는 용과, 그 세상을 끌어안는 봉황의 모습은 우리의 오랜 정서인 하늘과 땅 그리고 사람의 조화로운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향로에 새겨진 산 봉우리 사이로 향 연기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생각해보면, 바로 우리가 꿈꾸던 신선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모습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향을 피우는 그 자리가 우리가 꿈꾸는 세상이 아닐까?
5. 향기로운 마음을 이 땅에 묻는 ---향도(香徒)
우리나라를 이해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이 계(契)라는 풍속이 있다. 우물을 청소한다든가 조림사업을 한다든가 하며, 구성원들이 금전이나 그에 상응하는 피륙이나 곡물을 추렴하여 공동의 목적으로 일을 같이 하는 것이 계의 원형이라고 하면,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계는 은행이 아직 자리를 잡기 전에는 구성원들이 서로 신용을 믿고 몫돈을 만드는 방법으로 만들어진 신용금고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계는 혈연이나 지연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고,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만든 일종의 지역사회의 공동경제적 핵심역할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이 계의 뿌리를 찾아가다 보면 향도(香徒)라는 독특한 집단을 만나게 된다.
향도의 본래의 뜻은 '향기로운 무리', '향을 피우는 것을 유지하기 위한 무리' 또는 '향기로운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무리'로 해석되는데, 이는 자발적인 구성되었기 때문에 행정편제나 생산공동체와는 거리가 멀고 사회의 변동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변하지만 향기롭게 살자는 본래의 의미는 변화가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주 이른 시기에 결성된 사회 봉사단체라고 할 수 있다.
향도의 구성원은 승려와 일반신도가 주류를 이루었는데, 앞서 살펴보았던 신라의 김유신의 화랑도 조직인 용화향도(龍華香徒)가 기록에 나타나는 최초의 향도이다. 이 용화는 미륵신앙과 밀접하다. 미륵신앙은 새로운 세상을 맞이하고 그 새로운 세상을 만든다는 불교적 내세신앙이다. 그런 세상을 만들기 이들은 탑을 세우고 절을 짓고 불화를 만들고 음식과 의복을 희사하고 향을 땅속에 묻는 매향(埋香)의식을 치루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는 것을 향을 땅에 묻는 매향의식이다. 향을 땅 속에 묻는다는 것은 일종의 향나무를 숙성시키는 과정으로 보이는데, 조선시대의 생활백과 사전인 <규합총서(閨閤叢書)>에서도 향을 단지에 담아 땅 속에 묻어두면 기이한 향기가 난다고 한 것을 보면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향나무가 변하는 오랜 관찰을 통해 향을 숙성시키는 방법을 알아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향도의 매향의식은 특이하게도 민물과 짠물이 만나는 바닷가에서 주로 치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때 ane히는 나무는 향나무는 물론이고 소나무 참나무 등이었다. 이를 흔히 침향(沈香)이라고도 하는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매향으로 만들어진 향은 침향이 아니다. 침향은 본래 물에 가라앉는 무거운 나무라는 뜻인데 매향으로 만들어진 향이 침향으로 통용되는 것은 무겁기도 하지만 침향과 같이 가장 좋은 향으로 바뀌라는 염원이 배어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땅 속에 묻어두었던 향이 세상에 다시 떠오르면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는 믿음이 탄생했다. 그리고 500년 1000년 뒤에 새로운 세상에서 이 침향이 피워지기를 꿈꾸면서 고려인들은 향을 땅속에 묻었다. 고려인들은 팔만대장경이라는 유형적 문화유산과 함께 매향이라는 독특한 정신문화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 주었다.
팔만대장경이 귀족불교문화의 대표라면, 이 매향은 민중불교의 대표적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6. 생활 속의 향문화
향을 싼 종이에서는 향내가 난다고 한다. 삶이 무엇을 끌어안는가는 그 만큼 중요하다는 말이다. 우리 선조들은 선비가 사는 집을 난형지실(蘭馨之室)이라고 하여 '난 향기가 나는 집'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그 선비는 난을 가슴에 품고 산다는 뜻이다. 이슬을 먹고 맑은 바람을 마시는 난을 닮아 가며, 스스로를 지켜 가는 삶을 산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 선비들은 예로부터 운치 있는 4가지 일을 들었는데, 향을 피우고 차를 마시고 그림을 걸고 꽃을 꽂는다는 이른바 4예(四藝)다.
향은 제사 뿐만 아니라 우리가 마음을 맑게 하는 자리에 피웠다. 책을 읽을 때면, 책을 지은 성인을 대하듯이 책을 읽는다고 하였다. 그렇듯 정성스럽게 향을 피우고 정신을 집중하여 책을 읽는 것이 선비들의 독서생활이였다. 이를 '분향독서(焚香讀書)'라 하여 향을 피우고 책을 읽는다고 하는데, 최초의 문헌적 기록으로는 송(宋)의 홍추(洪鄒)가 지은 <향보(香譜)>에 다음과 같이 기록을 들 수 있겠다.
<진서(陳書)>에 이르기를 잠지경(岑之敬)은 자가 사례(思禮)인데, 그 성품이 순후하고 근면하며 효행이 있었다. 다섯 살 때 <효경(孝經)>을 읽을 때면 반드시 향을 피우고 반듯하게 앉았다.(陳書 岑之敬字思禮淳謹有孝行五歲讀孝經必焚香正坐)'
이 풍속은 아름다운 일로 기록되어 무릇 글읽기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책을 읽을 때면 즐겨 이 잠지경처럼 향을 피웠다. 이는 향이 사악한 기운이나 잡벌레를 물리치기 때문에, 책을 읽을 때 날아드는 벌레를 쫓고 향의 정유성분이 정신집중을 도와준다는 것을 독서생활에 적응시킨 것으로 보인다.
실제 침향과 백단과 같은 향재료는 오늘날 아로마 요법에서도 정신집중을 도와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한 까닭인지 우리선비들의 독서생활에 이 향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되었다. <조선왕조실록>의 세조 5년의 기록에 보면 강희안(姜希顔)과 강희맹(姜希孟) 형제의 아버지인 강석덕(姜碩德)의 생활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관직에 있으면서 일을 생각할 적엔 다스리는 방법이 주밀했으며, 집에 거처할 적엔 좌우에 도서를 비치하고는 향불을 피우고 단정히 앉았으니, 고요하고 평안하여 영예를 구함 없다'
는 기록은 우리의 선비문화 속에 향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이 전통은 실학시대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문자향(文字香)의 세계로 발전한다. 사람이 쓰는 글씨에 그 사람의 교양과 인격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문자향의 세계는 조선시대 유학의 세계 속에서 핀 독특한 향기를 가진 꽃이라고 할 것이다. 맡을 수 없는 무형의 정신세계도 하나의 향기로 맡게되는 새로운 세계로 나아간 것이다. 향을 피우고 차를 달이는 화로가 있는 뜻의 <일로향실 一爐香室>이란 대흥사에 소장된 귀한 향문화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외에 책을 보관하는 서고의 이름에 이 향자가 많이 보인다. 창덕궁의 문향재(文香齋), 선향재(善香齋)가 그 대표적 예라고 할 것인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향이 바로 책 속에 담긴 선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의 향기라는 생각을 이렇듯 서재의 이름 속에 남겨놓은 것이다.
조선의 실학자인 오주 이규경(五洲 李圭景)은 일년 사시절 정취있는 향생활을 한 선비들 가운데 한 분이다. 특히 그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아침에는 맑은 기운이 감도는 옥유향(玉油香)을 피우고 저녁에는 달과 짝을 하는 정겨운 반월향(伴月香)을 피웠다. 그리고 차를 마실 때는 선향(線香)을 피운다고 하여 온 하루 향과 함께 한 삶을 살았다.
7. 다시 향 한 자루를 피우며
그런데 그 향기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아직 향이라고 하면 의례 제사나 차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사실 제사나 차례를 모실 때는 아무리 여러 제수를 갖추지 못하여도 향은 피웠다. 그래서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쓴 <격몽요결(擊夢要訣)> 제의초(祭儀抄)에는 다른 것을 갖추지 못하여도 설, 동지, 초하루, 보름에 올리는 차례에는 향을 피운다고 하였다.
우리와 조상님이 만나는 자리에 늘 향이 있었고, 우리 마음을 말게 하는 자리에 푸른 향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런데 도대체 그 향기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지금 우리나라의 향은 지난 왜정시대와 6.25와 같은 격동기를 지나고 정신보다는 물질의 시대에 살면서, 끝없는 추락을 하였다. 향을 수출하고 천년 뒤의 후손에게 물려줄 향을 묻던 고려인들의 마음이 이미 사라지고, 향을 피우면 우리가 먼저 머리가 아파 향을 꺼버리는 무례를 범하고 있다. 그 자리에 어떻게 조상님이 강신하겠는가? 그 자리에 무슨 하늘과 땅과 사람의 어울림이 있겠는가? 살림살이가 제법 넉넉해지면서, 제 입에 들어가는 제수는 최고의 것을 갖추면서도 차례나 제사에서 빠질 수 없는 향은 인조화학을 올리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플라스틱으로 된 제수를 올리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가 자랑하는 문화유산의 현장에 가면, 향로가 쓰레기통으로 전락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서울의 고궁, 수원성, 민속촌, 경주 할 것 없이 쓰레기통이 된 향로를 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을 본 한 외국인은 한국사람들은 쓰레기통에 절을 한다고 하였다. 5,000년 문화유산을 아무리 설명한들, 정신문화의 상징인 향로를 쓰레기통으로 만드는 현실은 우리가 아직 문화를 가꾸는 안목이 성숙하지 못하여 우리 전통문화를 쓰레기로 보는 눈높이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였다는 것을 극단적으로 증명한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탕을 지키는 일, 바로 문화를 바르게 세우는 일이다.
우리 향문화의 현실은 울릉도 향나무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울릉도 향나무는 심이 붉은 향나무로 여느 향나무보다 달고 부드러운 향기를 자랑한다.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자라기 때문에 더욱 향기로와 돌의 향 즉 석향(石香)을 지녔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우리의 대표적인 향나무이다. 옛 동해안 사람들은 바다에서 뱃길을 잃었다가도 향기로운 바람을 따라 가면 울릉도에 가 닿을 수가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향나무는 울릉도를 대표하는 나무였다.
그러나 우리가 개항을 하면서 울릉도 향나무는 수난을 겪게 된다. 일본인들에게 수없이 잘려나간 울릉도 향나무. 그래도 울릉도는 향나무로 향기로왔다. 그러나 해방과 6.25의 격동기에 울릉도 향나무는 소금을 굽는 장작으로나 쓰였다. 그때 울릉도는 무척 향기로웠다고 한다. 그러고 곧 울릉도를 대표하는 관광상품으로 바둑판, 연필, 필통, 수저통, 효자손으로 울릉도 향나무는 울릉도에서 뿐만 아니라 각지의 명승지에서 팔려나갔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철저히 외부로 유출되는 것을 방지하고 있다.
오늘날 울릉도를 방문하여 보면 울릉도는 사람 손이 닿지 않는 외진 곳이나 높은 곳에서 아직도 그 향기를 자랑하고 있다. 지금 울릉도에 향나무를 심으면 적어도 300년 이상 지나야 옛날의 울릉도의 향나무의 본래 모습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우리 향문화는 이런 무관심 속에 버려지고, 쓰레기통이 된 향로처럼 우리가 외면하는 의식의 밑바닥에 서있다.
향 한 자루를 피우며 차를 마신다. 먹을 갈고 흰 종이에 글씨를 쓴다. 그 마음에도 차의 향기와 먹의 내음 그리고 글씨에 담기는 향기로운 뜻이 말없이 어울릴 것이다. 향을 피우는 사람 또한 스스로 태워 주위를 맑게 하는 향을 닮아 이 세상을 향기롭게 하기를 꿈꾼다. 향이 피워진 자리에서 잠시 그 마음에 닿아보자. 향기 있는 삶, 이렇듯 이웃과 함께 늘 향기롭게 깨어있는 삶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