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풍속(風俗)과 형승(形勝) | | | 순흥지 |
| ||||
풍속(風俗) |
| ||||
형승(形勝) |
대평(大平) 퇴계(退溪) 선생의 시에,
하였다. 대산(臺山) : 사현정(四賢井) 남쪽 죽계(竹溪) 동쪽 가에 있다. 천연적으로 우뚝하게 이루어졌고, 마치 대(臺)와 같이 평평하여 위에 1백여 명은 앉을 수 있다. 그 속에 또 바위가 있는데 5~6명은 앉을 수 있다. 또한 괴정(槐亭)이 있다. 오산(梧山) : 고을 남쪽 율림(栗林) 북쪽에 있다. 일명 봉황대(鳳凰臺)라고도 한다. 관란대(觀瀾臺) : 사현정(四賢井) 남쪽 냇가에 있다. 바위가 기이하고 아랫쪽에 깊은 못이 있다. 사현정(四賢井) : 안씨(安氏) 현인 네 분이 사용했던 우물이다. 후손 안성연(安性淵)이 안동영장(安東營將)으로 재직할 때 비석을 세워 드러내었다. 개암(盖巖) : 율림(栗林) 아래 죽동 냇가에 있다. 돌의 모양이 석종(石鍾)과 같으면서 덮개가 있기 때문에 그와 같이 불렸다. 석공이 바위 면에 글자를 새기려고 하였으나 끌이 들어가지 않아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 내죽(內竹) 원적봉(圓寂峯) : 초암(草菴) 서쪽에 있다. 연적봉(硯滴峯) : 원적봉 서쪽에 있다. 월명봉(月明峯) : 초암 동쪽에 있다. 청운대(靑雲臺) : 초암사(草菴寺) 앞 시냇가에 있다. 기이하고 높은 돌이 맑은 냇물가에 서 있고, 그 위에 소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게 서 있는 모양이다. 옛날 이름은 백운대(白雲臺)였으나, 퇴계(退溪)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봉두암(鳳頭巖) : 석륜암(石崙菴) 북쪽에 있다. 바위가 매우 기이하여, 마치 큰 새가 머리를 들고 날아가려고 하는 형상을 하고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광풍대(光風臺) : 봉두암(鳳頭巖) 서쪽에 있다. 바위가 우뚝하게 서 있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한다. 신재(愼齋)가 명명하였다. 석름봉(石廩峯) : 산허리 위에 있다. 봉우리 전체가 다 돌로 되어 있다. 자개봉(紫盖峯) : 석름봉 동쪽에 있다. 국망봉(國望峯) : 자개봉 동쪽에 있다. 하늘 위로 우뚝 솟아 있어 그 위에 올라가면 서울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퇴계(退溪)의 시에,
하였다. 신재(愼齋)의 시에,
하였다. 제월봉(霽月峯) : 백운암(白雲菴) 앞에 있다. 환희봉(懽喜峯) : 석륜사(石崙寺) 위에 있다. 자하대(紫霞臺) : 환희봉(懽喜峯) 서쪽에 있다. 돌로 된 봉우리가 우뚝하게 솟아 있는데, 위에 수십 명이 앉을 수 있으며, 산 경치를 이곳에서 다 바라볼 수 있다. 옛날 이름은 산대암(山臺菴)이었으나 퇴계가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적성(赤城) :자하대(在紫霞) 동쪽에 있다. 옛날에 석성(石城)이 있었는데, 아직도 주춧돌과 우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퇴계가 자하대의 이름을 정하고 나서 성을 적성이라 이름하였다. 이는 대개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起而建標]”라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백학봉(白鶴峯) : 자하대(紫霞臺) 북쪽에 있다. 백련봉(白蓮峯) : 백학봉(白鶴峰) 서쪽에 있다. 두 봉우리가 대치하고 있으며, 색깔이 모두 희다. 백설봉(白雪峯) : 백학봉과 백련봉 옆에 있다. 상원봉(上元峯) : 석름봉(石廩峰) 서쪽에 있는데, 봉우리 위에 옛날 길이 있다. 비로봉(毗盧峯) : 상원봉(上元峯) 서쪽에 있다. 경원봉(慶元峯) : 고려 충숙왕(忠肅王)의 태(胎)를 안치하였다. 윤암봉(輪岩峯) : 본조에서 소헌왕후(昭憲王后)의 태를 안치하였다. 옥녀봉(玉女峯) : 이점(梨店) 뒤에 있다. 폭두봉(幅頭峯) : 이점 앞에 있다. 용추(龍湫) : 초암(草菴) 남쪽 다리 아래 수십 보쯤에 있다. 아래위로 반석이 평평하게 깔리고, 좌우에 암각(岩角)이 기이하게 솟아 있으며, 가운데로 급한 여울이 성내 듯 달리다가 폭포가 되고, 밑에는 물굽이가 소용돌이치면서 깊은 못이 되었다. 큰 바위가 못 가운데 누워 마치 용이 살아 움직이면서 구름과 비를 뿜는 듯하여 용추라 불렸다. 가뭄에 빌면 곧 감응이 있었다. 죽계구곡(竹溪九曲) : 부사 신필하(申弼夏)가 일찍이 소백산을 유람할 때 초암사 금당(金堂) 앞에 큰 글씨로 ‘죽계제일수석(竹溪第一水石)’이라 써서 새겼다. 그리고 무이구곡(武夷九曲)을 본떠 처음으로 반석에 1곡(一曲)이라 새기고 시내를 따라 내려오면서 마지막으로 배점[梨店]에서 9곡(九曲)을 새겼다. 그 사이의 거리가 5리쯤 된다. 계곡이 길고 굽이가 많아서 가장 볼만한 데만 취한다 해도 이뿐이 아닐 텐데, 새겨져 있는 9곡은 거리가 너무 짧지 않나 여겨진다. 중국의 무이구곡은 동구(洞口)에서 시작하여 거슬러 올라가면서 계곡 마지막까지 가는데, 동구가 1곡이 되고 계곡 마직막이 9곡이 되었으니 이곳의 9곡과는 반대인 셈이다. 지금에 본다면, 마땅히 백운동(白雲洞) 취한대(翠寒臺)가 처음 1곡이 되고, 금성(金城) 반석이 2곡이 되고, 백자담(柏子潭)이 3곡이 되고, 이화동(梨花洞)이 4곡이 되고, 목욕담(沐浴潭)이 5곡이 되고, 청련동애(靑蓮東崖)가 6곡이 되고, 용추(龍湫)가 7곡이 되고, 금당(金堂) 반석이 8곡이 되고, 중봉의 합류되는 곳이 9곡이 되어야 한다. 우선 이 설을 기록하여 후인들의 평가를 기다린다. 금당반석(金堂盤石) : 초암(草菴) 금당(金堂) 앞에 있다. 평평한 반석이 상하 수십 보에 깔려 있고, 그 위로 물이 맑고 잔잔하게 흐른다. 좌우에 기이한 바위가 늘어선데다 층층 암벽이 깎아지르고, 앞에 큰 바위가 우뚝 서서 못 입구를 막아 그 으슥함이 세상과 동떨어져, 소요하면서 감상하노라면 속세의 생각이 한 점도 없게 한다. 일부석(一浮石) 단곡반석(丹谷盤石) : 단곡 상류에 있는 반석으로 시내 속에 연이어 펼쳐져 있는데, 그 위로 냇물이 흐르고 그 주위로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삼태봉(三台峯) : 단곡 수구(水口)에 있는 돌산으로 세 개의 작은 봉우리가 늘어선 모양이 태성(台星)과 같다 하여 예부터 ‘삼태봉’이라 하였다. 단곡거사(丹谷居士) 곽진(郭‘삼소봉(三蘇峰)’이라 하였다. 동원(東園) 입암대(立巖臺) : 파회(波回)마을 남쪽 산록에 있다. 기이한 바위가 우뚝하게 서 있는데, 대구부사를 지낸 김구정(金九鼎)이 축조했다. 관란대(觀瀾臺) : 입암대 남쪽에 있다. 선비 서숙(徐璹)이 그 곁에 살면서 이름 붙였다. 도강(道講) 침류석(枕流石) : 우계(愚溪) 상류에 있다. 평평한 바위가 시내 속에 깔려 있는데, 수십 명은 앉을 만하다. 대적벽(大赤壁) : 침류석(枕流石) 아래 10여 보(步)쯤 되는 냇가에 있다. 깎아지른 석벽 아래에 맑은 못이 있다. 낙화암(落花巖) : 대적벽 아래 수십 보쯤 되는 시냇가에 10여 길 되는 바위가 있다. 옛날에 태수(太守)가 기생을 데리고 놀았는데, 기생이 술에 취해 춤을 추다가 떨어졌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혹은 낙하암(落霞巖)이라고도 한다. 소적벽(小赤壁) : 낙화암 아래 30여 보쯤 되는 곳에 있다. 탄금대(彈琴臺) : 소적벽 아래 10여 보쯤 되는 곳에 있다. 시내 속에 바위가 우뚝 솟아 있는데, 위가 평평하고 넓어서 수십 명이 앉을 만하다. 운제(雲梯) : 탄금대 아래에 있다. 반타석(盤陀石) : 탄금대 아래 10여 보쯤 되는 거리에 있다. 용추(龍湫) : 반타석 아래 10여 보쯤 되는 곳에 있다. 석벽이 머리를 들어 1백여 척이나 깎아지르고,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조어기(釣魚磯) : 용추 아래쪽에 있다. 삼부석(三浮石) 완폭대(玩瀑臺) : 사문단(沙文丹)마을 북쪽에 있다. 자개봉(紫蓋峰) 아래에서 발원한 물이 동쪽으로 흘러서 골짜기 어귀에 이르면 층암 절벽을 만나 폭포가 되어 남쪽으로 떨어지는데, 아래에 높이가 두세 길 되는 못이 이루어져 있다. 서쪽 편으로 깎아지른 절벽에는 묵은 등넝쿨이 울창하고, 동쪽 편은 층층 바위가 대(臺)를 이루어 면면이 앉을 만하다. 동부(洞府)가 깊숙하고 절경이다. 바위에 ‘玩瀑臺’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석문폭(石門瀑) : 완폭대 하류 1백 보 쯤 되는 곳에 있다. 다시 작은 폭포가 되고 암석이 더욱 기이하다. 폭포 아래에 터진 바위가 문이 되었는데, 나무를 걸쳐 놓고 건너다닌다. 소요동(逍遙洞) : 마아령(馬兒嶺) 아래에 있다. 대율계(大栗溪) 상류에 맑은 못이 있고 못 앞에 석벽이 있다. 못 위 토대(土臺)에 옛날 동네 사람들이 지은 ‘소요정사(逍遙精舍)’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졌다. 이부석(二浮石) 명정암(酩酊巖) : 국무당(國武堂) 서쪽 기슭에 있다. 취사(炊沙) 이여빈(李汝馪)의 기문(記文)이 있는데, 대략 보면, “넓은 반석이 있는데, 바둑판같이 평평하여 10여 명이 앉을 만하다. 호사가(好事家)를 만나면 몇 칸 누각을 지을 만하다.” 라고 하였다. 수식(水息) 회로대(會老臺) : 가구(可丘) 동쪽 냇가에 있다. 물가에 서너 길 높이의 바위가 아래위로 마주 서 있고, 두 바위 사이로 절벽이 이루어져 있다. 물가가 모두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 맑은 못이 있으며, 안계가 시원하게 트여 있다. 문수산(文殊山)과 백병산(白屛山)을 마주 대하고 넓은 평야를 내려다보고 있다.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가 가구(可丘)에 숨어 살 때 늘 그 위에서 소요(逍遙)했기에 그 후손이 터를 닦고 대(臺)를 지었다. 옛날엔 이름이 없었으나, 경종 계묘년에 인근 노인들이 이곳에서 모임을 베풀었다하여 ‘회로대’라고 이름 붙였다. 창설(蒼雪) 권두경(權斗經)의 기(記)가 있다. 진의대(振衣臺) : 산운(山雲) 동쪽 기슭에 있다. 깎아지른 절벽이 냇가에 우뚝 서 있고 절로 층대(層臺)를 이루어 올라가서 조망할 만하다. 훈도(訓導) 안응규(安應奎)가 산운(山雲)에 살 때 당시 명사들과 여기에서 놀았다. 유암(楡巖) : 천곡(泉谷) 뒤 동쪽 기슭에 있다. 바위 주변에 느릅나무가 심어져 있다. 숭정처사(崇禎處士) 배유장(裵幼章)이 이곳에 집을 지어서 ‘유암’이라 하였다. 거래암(去來巖) : 두문(斗文) 수구(水口)에 있다. 흰 반석이 두 산 사이에 가로 펼쳐져 있는데, 그 가운데로 냇물이 맑게 흐른다. 물가 좌우에 앉을 만한 평평한 돌이 수십 보 연이어 있다. 시내를 따라서 내려가면 삐죽삐죽한 돌이 빽빽이 서 있어 여울 소리가 세차게 들린다. 참으로 수석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암(楡巖) 배 처사(裵處士)가 영천(榮川)에 왕래할 때 항상 이곳에서 쉬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행계폭포(杏溪瀑布) : 서당(書堂) 서쪽에 있다. 처마 모양의 깎아지른 바위가 서너 길쯤 우뚝 서 있다. 바위 위로 작은 냇물이 흘러 떨어져 조그마한 못을 이루었는데, 그 위에 대(臺)를 쌓고 은행나무를 심어서 자못 그윽한 분위기가 난다. 화천(花川) 동애(東崖) : 화천(花川) 동쪽에 있다. 100척이나 깎아지른 절벽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으며, 그 아래에 맑은 못이 있다. 선비 김성제(金聖濟)는 생원 김강(金鋼)의 아들인데, 효성과 우애가 두텁고 행실이 단아하고 맑았다. 일찍이 동애의 경관을 사랑하여, 거처하는 곳의 편액을 ‘동애’라 하고 그곳에서 소요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의 시에,
하였다. 구만(龜灣) : 화천(花川) 남쪽에 있다. 옥봉(玉峯) 층층 절벽이 빙 둘러 서 있는 것이 마치 거북 모양인데 냇물도 에워 돌아 맑은 못이 되었다. 혹 ‘구담(九潭)’이라고도 하며, 대개 9곡의 뜻을 취하였다. 서당이 서쪽에 있다. 동산대(東山臺) : 도촌(桃村) 북쪽에 있다. 들 가운데 솟은 절벽을 시냇물이 휘감아 돌며, 층층의 바위와 푸른 소나무가 물속에 거꾸로 비춘다. 고 서령(署令) 이수형(李秀亨)의 집으로, 후손이 그 위에 대(臺)를 쌓고 아래에서 대대로 살고 있다.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시에,
하였다. 모정(茅亭) : 도촌(桃村) 동쪽에 있다. 냇가에 토봉(土峰)이 우뚝 솟아 사천(沙川)을 굽어보고 있다. 동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와란(臥丹) 옥류암(玉溜菴) : 두곡(杜谷)에 있다. 바로 고 숭정처사(崇禎處士) 홍우정(洪宇定)이 살던 곳으로 동부(洞府)가 깊숙하고 아홉 봉우리가 둘러 있다. 옥류암 왼쪽에 석천(石泉)이 있고, 석천 아래 작은 연못이 있다. 옥류암은 중년에 없어졌던 것을 그 후손이 중수하여 수호하고 있다. 공의 친구 재상 주D-010 text="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叟)ㆍ탄옹(灘翁).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이다. 인조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원두표(元斗杓)가 시를 지어 주기를,
하였다. 문암(門巖) : 우곡(愚谷) 동네 입구에 있다. 시내 바닥에 반석이 넓게 깔려 수십 보 연이어져 있다. 그 가운데가 우묵하게 패여 냇물이 그 위로 흐른다. 층층이 대(臺)를 이루고, 이따금 격류가 쏟아져 두 군데 폭포가 되며, 아래에 깊은 못을 이루었다. 좌우편에 푸른 절벽이 깎아지르고 흰 돌이 옹기종기 수놓이고, 조용하고 시원하여 산중의 아름다운 경계이다. 두곡(杜谷) 주D-012 text="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본관은 남양. 봉화 출신. 한성서윤 영(榮)의 아들이다. 광해군 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인조 때 경학(經學)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병자호란 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문수산(文殊山)에 숨어살았다. 효종 3년 모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자 사재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황간현감(黃澗縣監)에 임명되었다. 영조 22년 이조참의로 증직되고, 순조 16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순조 20년에 개절(介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홍우정(洪宇定)이 일찍이 이곳에서 소요하였다. 초연대(超然臺) : 한수정(寒水亭) 뒤에 있다. 곡담(曲潭) : 거연헌(居然軒) 아래 1리쯤 되는 곳에 있다. 낭떠러지 절벽이 수십 길 서 있고, 그 아래에 깊은 못이 있다. 절경이 볼만하다. 천석암(川石岩) : 한수정 북쪽 3리쯤 되는 곳에 있다. 수석의 경관이 매우 아름답다. 옛날 사람이 유람한 자취가 있다. 수민단(壽民丹) 요산(腰山) 동애(東崖) : 요산촌((腰山村) 앞에 있다. 허리는 낮고 머리는 높으며, 냇가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는데, 바위가 고색창연한 빛깔을 띠고 있다. 그 위에 쌍계당(雙溪堂)이 있다. 고산(孤山) : 사암 동구에 있다. 일명 ‘답청대(踏靑臺)’이다. 중구봉(重九峯) : 단계(丹溪) 동쪽 기슭에 있다. 봉우리 머리에 상하대를 쌓았다. 마을 사람들이 매년 중구절에 모임을 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대룡산(大龍山) 용담(龍潭) : 용암산(龍岩山)에서 근원하여, 용산(龍山)마을을 지나 동문(洞門)에 이르러 맑은 못을 이루었는데, 흰 돌이 평평하게 깔려 있고, 기이한 바위가 굽이굽이마다 늘어서 있어 경치가 볼만하다. 산당(山堂) : 용담(龍潭) 위 수십 보쯤에 있다. 동부(洞府)가 깊숙하고 경계가 한적하여 공부하기에 좋은 자리이다. 처사(處士) 황세후(黃世㷞)가 지었으나 지금은 없다. 창락(昌樂) 촉령대(矗泠臺) : 죽령(竹嶺) 중간에 있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있을 때 충청도관찰사로 있던 그의 중형 대헌공(大憲公) 주D-013 text="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진사 식(埴)의 아들이며, 황(滉)의 형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 우(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ㆍ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ㆍ좌승지ㆍ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ㆍ대사헌ㆍ대사간ㆍ예조참판을 지내고, 이 해에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여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 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고,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면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 가는 도중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이해(李瀣)를 이곳에서 맞이한 후 대를 쌓고 이름 붙였다. 그 기문에서,
하였다. 퇴계의 시에,
하였고, 또,
하였다. 또 대헌공의 시에,
하였고, 또
하였다. 용추(龍湫) : 희방사(喜方寺) 아래에 있는데, 연화봉(蓮花峯) 아래에서 발원하였다. 골짜기가 문처럼 좁고 바위 낭떠러지가 깎아지르며, 내리쏟는 물줄기가 수십여 길은 된다. 그 아래 깊은 못을 이루어 ‘용추’라고 불렀는데, 가뭄을 만나 비가 내리기를 빌면 감응이 많았다.
[주D-001]적성의 …… 뜻 : 적성은 중국 절강성(浙江省)에 있는 천태산(天台山) 남쪽에 있는 산 이름으로, 토석의 색깔이 붉고 모양이 성첩과 같이 생겼다. 손작(孫綽)의 〈유천태산부(遊天台山賦)〉에 “적성의 노을을 들어서 표지를 세운다.[赤城霞擧而建標]” 하였다. 《文選》
[주D-002]무이구곡가(武夷九曲) : 남송의 유학자 주희(朱熹)가 중국 복건성(福建省) 무이산(武夷山) 계곡을 나누어 명명한 것. 주희가 이에 대하여 〈무이구곡가(武夷九曲歌)〉를 지었다
[주D-003]곽진(郭 1568~1633)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정보(靜甫), 호는 단곡(丹谷). 아버지는 생원 한(瀚)이며, 어머니는 평해황씨(平海黃氏)로 참봉 언량(彦良)의 딸이다. 권우(權宇)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5세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성일(金誠一)의 초유문(招諭文)을 읽고 둘째 형과 함께 의병을 모집,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왜적과 싸웠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그 뒤 과거에 나아가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면서 단공산(丹公山)에 작은 암자를 짓고 《심경(心經)》ㆍ《근사록(近思錄)》ㆍ《주서절요(朱書節要)》 등을 취하여 위기지학(爲己之學)에 전심하였다. 1605년 광릉참봉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곧 시세에 어긋나 물러났다. 1618년(광해군 10) 아들 영(瓔)이 권신 이이첨(李爾瞻)을 주참하자고 상소하였다가 투옥되어 죽자, 1621년에는 그 자신이 영남 유생을 대표하여 이이첨을 탄핵하는 상소문을 써서 올렸다. 시문에 능했으며, 장현광(張顯光)ㆍ이준(李埈)ㆍ정경세(鄭經世) 등과 사우 관계를 맺었다. 백고리사(白皐里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단곡문집》 3책이 있다.
[주D-004]삼소봉(三蘇峰) : 삼소는 송(宋)나라 때의 미주(眉州) 미산(眉山) 사람 노천(老泉) 소순(蘇洵)과 그의 아들 소식(蘇軾)ㆍ소철(蘇轍)을 이른다. 모두 문장에 뛰어나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에 들었다.
[주D-005]이여빈(李汝馪 1556~1631) :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우계(羽溪). 자는 덕훈(德薰), 호는 취사(炊沙) 또는 감곡(鑑谷). 아버지는 참봉 효신(孝信)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효령대군(孝寧大君)의 4대손인 귀윤(貴胤)의 딸이다. 한우(韓佑)의 문인으로, 1591년(선조 24) 사마시에 합격, 1605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이듬해 벽사도찰방(碧沙道察訪)을 역임하고, 1610년(광해군 2) 성균관전적으로 등용되었으나 정인홍(鄭仁弘)과 이이첨(李爾瞻)이 국정을 문란하게 하므로 나아가지 않았다. 1715년(숙종 41)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주D-006]배유장(裵幼章 1618~1687) : 자는 장은(章隱), 호는 유암(楡巖),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상익(尙益)의 아들로 영주(榮州)에서 살았다. 그의 집안은 충의(忠義)로 명성이 있었는데, 조부는 군수(郡守)로서 임진란에 성(城)을 지켜 난을 막았고, 부친은 광해군(光海君) 때 의를 주장하다가 벼슬을 박탈당했다. 그는 인조(仁祖) 때 문교(文敎)를 숭상하는 시절을 만나 일찍이 좋은 포부로써 높은 벼슬길에도 오를 수 있었으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의 기별을 듣고 비분하여 산장을 짓고 후진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만년에 명성이 높아져 천거로 내시교관(內侍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서 여생을 마쳤다.
[주D-007]기수(沂水)에서 …… 분 : 공자의 제자 증점(曾點)을 이름. 공자가 일찍이 제자들에게 각기 포부를 물었는데, 모두들 정치에 관심을 두었으나 증점(曾點)만은 “봄옷이 이루어지면 어른 대여섯 명, 동자 예닐곱 명과 더불어 기수(沂水)에 목욕하고 무우(舞雩)에 바람 쏘이고 시를 읊으며 돌아오겠다.” 하였다. 공자가 그 말의 기상을 높이 평가하였다. 《論語 先進》
[주D-008]이수형(李秀亨) : 자는 영보(英甫), 본관은 우계(羽溪). 도평의(都評議) 이억(李薿)의 현손이다. 선대에 서울에서 살았는데, 공이 문절공(文節公) 김담(金淡)의 딸에게 장가들어 비로소 도촌(桃村)에서 살게 되었다. 벼슬은 전생서령(典牲署令)에 이르렀다.
[주D-009]이준(李埈 1560~1635) :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 본관은 흥양(興陽). 수인(壽人)의 아들이다. 유성룡(柳成龍)의 문인으로 1591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가 되었다. 임진왜란에는 정경세(鄭經世)와 함께 의병활동을 하였다. 벼슬은 사간ㆍ승지ㆍ대사간ㆍ부제학 등을 지냈다. 특히 1613년(광해군 5)부터 1614년(광해군 6) 풍기군수 재임 기간 소수서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락재(至樂齋)를 세우고 앙고대(仰高臺)와 탁청지(濯淸池)를 조성하였다. 상주의 옥성서원(玉城書院)과 풍기의 우곡서원(愚谷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창석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주D-010]원두표(元斗杓 1593~1664)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원주(原州). 자는 자건(子建), 호는 탄수(灘叟)ㆍ탄옹(灘翁). 박지계(朴知誡)의 문인이다. 인조반정의 공으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록되고 원평부원군(原平府院君)에 봉하여졌다. 벼슬은 좌의정에 이르렀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주D-011]도연명(陶淵明)의 삼경(三逕) : 도연명이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삼경은 황폐되었으나 소나무와 국화는 그대로 있구나.” 하였다. 삼경은 본래 한나라의 은사 장허(蔣詡)가 집 안에 대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 세 갈래 길을 만들었으며, 오직 구중(求仲)ㆍ양중(羊仲)이 따라다니며 놀았다고 하여 일컬어진 말이다.
[주D-012]홍우정(洪宇定 1595~1656) : 자는 정이(靜而), 호는 두곡(杜谷), 본관은 남양. 봉화 출신. 한성서윤 영(榮)의 아들이다. 광해군 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며, 인조 때 경학(經學)으로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병자호란 때는 어머니를 모시고 문수산(文殊山)에 숨어살았다. 효종 3년 모친상을 당하여 복을 마치자 사재감주부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듬해 황간현감(黃澗縣監)에 임명되었다. 영조 22년 이조참의로 증직되고, 순조 16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순조 20년에 개절(介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주D-013]이해(李瀣 1496∼1550)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경명(景明), 호는 온계(溫溪). 진사 식(埴)의 아들이며, 황(滉)의 형이다. 어려서 작은아버지 우(堣)에게 글을 배워 1525년(중종 20)에 진사가 되고, 152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33년에 사간ㆍ정언 등을 거쳐 1541년 직제학에 올랐으며, 이어 경상도진휼경차관(慶尙道賑恤敬差官)ㆍ좌승지ㆍ도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544년에 첨지중추부사ㆍ대사헌ㆍ대사간ㆍ예조참판을 지내고, 이 해에 또다시 대사헌이 되었다. 인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권신 이기(李芑)를 우의정에 탁용(擢用)하려는 것을 반대하고 탄핵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이기의 원한을 사게 되었다. 1545년(명종 즉위년) 강원도관찰사에 이어 1547년에 황해도관찰사, 1549년에 청홍도관찰사를 거쳐 1550년에는 한성부우윤이 되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소윤이 득세하여 이기의 심복인 사간 이무강(李無彊)의 탄핵을 받아 무고 사건에 연좌된 구수담(具壽聃)의 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이 권세에 거짓으로 굴복하면 모면할 수 있다고 권하였으나 거절하였고, 김안로(金安老)가 인근에 살면서 권세로 이끌려 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명종이 그의 결백함을 알고 특별히 갑산에 귀양 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나, 귀양 가는 도중 양주에서 병사하였다. 예서(隷書)에 뛰어났으며 선조 때 벼슬이 환급되었다. 예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영주의 삼봉서원(三峰書院),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민(貞敏)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