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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레도를 잠시 둘러보기는 하였습니다만 스페인 여행 대장정의 마침표는 수도 마드리드..
안달루시아에서 시작한 스페인 대장정의 마지막을 마드리드에서 마감!!
4주 길다면 길고 전반적인 스페인의 이해을 위한 시간으로 짧다면 짧은 시간입니다..
마드리드도 바르셀로나와 마찬가지로 구경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은 지하철입니다!!
마드리드에서는 바르셀로나처럼 많은 시간을 체류하지 못하여
중심가인 솔광장을 중심으로 왕궁 그리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위주로 구경을 하였습니다..
스페인 마드리드의 최 중심가인 솔광장입니다!!
해발 635미터의 메세타 고원에 위치하였으며 도심으로는 여타의 스페인도시와 마찬가지로 강이 흐른다..
만사나레스강..
유럽의 수도중에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강수량이 연400미리 정도로 건조한 곳..
간략한 약사 소개..
마드리드는 10세기경 수도였던 톨레도를 방어하기 위해 무어인이 세운 성채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는 마헤리트라 불렀다.
이 성은 마드리드가 수도로 된 후에는 왕궁이 되었고, 동시에 이 도시의 중심이 되었다.
1083년 카스티야왕 알폰소 6세가 이를 탈환하였으나 이때는 국왕의 임시숙소에 지나지 않았다.
1561년 펠리프 2세가 당시의 강대한 왕국을 다스릴 중앙정부 청사를 건설하면서, 국토의 중앙에 위치한다는 이유로
톨레도에서 이곳으로 수도를 옮기고, 궁전도 바야돌리드에서 이곳으로 옮겼다.
17세기 초에 일시 궁전이 바야돌리드로 옮겨졌던 때를 제외하면, 마드리드는 그 후 일관해서 수도로서의 지위를 지켜왔다.
구(舊)시가는 17∼18세기에 건설되었다.
1808년에는 프랑스군에 점령되어, 고야의 그림 《1808년 5월 3일》로 유명한 5월 2일의 시민저항이 있었고,
다음날 프랑스군에 의한 보복이 있었다.
구시가의 중심은 라푸에르타델솔(태양의 문)이라 부르는 타원형 광장이며,
서쪽으로는 왕궁 및 부속 왕립 무기고와 통하고, 남서쪽으로는 17세기에 야외극장이었던 마요르 광장이 있다.
그 앞쪽의 세바타 광장에서는 아침에 채소와 식료품 시장이 열린다.
사람의 통행이 많은 광장답게 다양한 퍼포먼스가 하루종일 계속됩니다..
시가지 중심!!
숙소를 이곳에 잡았습니다..
축구 유니폼 판매하는 노점상..
어떻게 입수하였느지 오리지널 제품을 저렴한 값에 판매하고 있었습니다만 별 관심이 없어서 구경만!!
예수 수난을 퍼포먼스하고 있네요!!
몬스터 대학교인가요??
대부분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같이 사진을 찍으면 팁을 줘야 합니다!!
한국애들 열심히 사진을 찍더니 팁을 요구하니 쌩을 까고 갑니다..
그냥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고 타일렀더니 별 대꾸도 없이 가재미눈을 하더니 그냥갑니다!!
유럽의 젊은 양아치애들 같은 태도를 많이 보이는 한국 젊은애들..
예절 교육, 관광 교육이 조금 아쉽습니다!!
지하철에서 만나서 타이르니 돈이 없어서 팁을 못줬다고 하더니 레알 마드리드 구장에서 또 만납니다!!
기념품, 이벤트등에는 아낌없이 돈을 쓰고 있네요..ㅠㅠ
마드리드 다른 곳은 보지 못해도 이곳은 반드시 보려고 작정했습니다!!
13/14 시즌에서 라 데시마를 기록한 레알 마드리드의 홈구장 "산티아고 베르나베우" 참관..
지하철 역이름이 경기장 이름입니다!!
유명 선수가 아닌 레알 마드리드의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스"의 사진이 스타디움에!!
1995년 첫번째 회장에 취임을 하면서 스타플레이어의 영입으로 "로스 갈라티코스"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으며
2009년 두번째 회장에 취힘하면서 "갈라티코스 2기"를 천명..
호날두, 벤제마, 베일등의 선수를 대거 영입하더니 결국 챔스 "라 데시마"를 13/14에 달성하였으며
감독 "안첼로티"에게 "무리뉴", "하인케스"에 이어 3번째로 2클럽에서 챔스 우승을 달성한 감독 칭호를 가지게 했습니다!!
전 세계에 있는 축구단중에 가장 많은 우승을 경험한 팀으로
별중의 별로 부를수가 있는 팀이나
팀의 이미지가 워낙 귀족적인 색깔이 강하다보니 맨유나 베르셀로나보다는 인기는 조금 떨어진다고
보아야 하나요!!
바르셀로나보다는 경기장 참관을 위하여 찾아오는 팬의 수도 많이 부족합니다..
바르셀로나가 마드리드보다 인기있는 관광지??
스페인을 대표하는 구장 2곳을 모두 방문합니다!!
매표소도 한산하네요!!
이번에는 입장권 구매..
아무래도 레알 마드리는는 "호날두"가 갑인 모양입니다!!
이번 브라질 월드컵에서 위신 많이 구겼죠..
축구는 11명이 하는 경기가 되다보니 스쿼드가 약한 팀은 강팀을 이기기가 힘듭니다!!
유럽에서 축구에 대한 우스개..
"축구는 11명이 90분동안 뛰는 경기이며 결국은 독일이 이기는 경기..ㅎㅎ"
포르투칼은 첫 경기 독일에게 논란의 여지가 없는 참패를 당하고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예선 탈락..
"호날두"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쬬!!
드디어 경기장으로 입장!!
먼저 스타디움 관람입니다!!
‘바르샤 vs. 레알’ 혹은 ‘레알 vs. 바르샤’는 스페인 리그, 그것을 넘어선 유럽 축구, 아니 세계 축구사를 살피는 데 있어
동전의 양면이며 왼손과 오른손과 같은 존재다.
가히 용쟁호투요 와호장룡의 관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둘의 경기는 스페인어로 "엘 클라스코" 즉 고전으로 불리우면 세계 축구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는 매치!!
레알은 간혹 프랑코의 독재와 같은 맥락으로 이야기되기도 하는 팀..
스페인 현대사의 어두웠던 시절과 축구의 상관 관계!!
“물론 이런 과거사에 대해 오늘날의 마드리드 시민들과 레알 팬들이 일일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고 미리 언급할 필요도!!
레알 마드리드는 단지 ‘독재자 프랑코의 소유물’이라고 폄하하기에는 그 역사가 길고도 넓다.
이른바 ‘스펙터클의 정치’, 즉 독재자가 문화ㆍ예술ㆍ스포츠 등을 미디어와 결합시켜 정교하고도 획일적이며
광범위한 통치의 전면전을 꾀하는 것은 20세기의 곳곳에서 벌어졌던 역사이고 특히 스페인의 프랑코는 축구를
추악한 소재로 삼았던 것이 분명하지만, 그러나 축구의 역사 혹은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는 프랑코 독재보다 유서 깊으며
더 강렬하다고 할 수 있다.
인증 샷!!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에 대한 고찰..
바르셀로나에 파블로 카잘스와 안토니오 가우디가 있다면 마드리드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은 누가 있을까?
바르셀로나에 피카소와 호안 미로가 있다면 마드리드에는?
바르셀로나에 캄프 누와 FC 바르셀로나가 있다면 마드리드에는? 정녕 마드리드는 ‘독재자 프랑코’만 있었던 것일까.
그럴 리 없다. 중세 이후 수백 년 동안 이베리아 반도의 중심 도시였던 마드리드에 절대군주와 독재자만 군림했을 리가 없다.
저 멀리 세르반테스에서 시작하여 엘 그레코,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시스코 고야 같은 화가들이 있었으며
20세기에도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영화감독 루이스 부뉴엘 등이 마드리드를 거점으로 활동하였다.
그들은 대체로 마드리드 출생이거나, 그렇지 않다 해도 이베리아 반도의 정치와 문화를 주름잡는 마드리드를 무대로
거침없이 활동했던 기린아들이다.
축구에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강팀 레알 마드리드(Real Madrid)가 있다.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는 1897년에 창단된 아마추어 학생 클럽 ‘풋볼 스카이’로 시작된다.
이 팀이 1900년에 ‘뉴 풋볼 데 마드리드’와 ‘클럽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로 분열되고, 그 중 ‘에스파뇰 데 마드리드’가
1902년 3월 6일에 ‘마드리드 FC’로 개칭하고 법인으로 새롭게 출범한 것이 공식적인 연대기의 시작이다.
프랑코의 독재가 1930년 후반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더라도 레알은 그 전부터 시작된 마드리드의 팀!!
축구의 경기 역사가 시작되면서 마드리드 FC는 출범 초기부터 강팀이었다.
스페인의 중심 도시 마드리드. 그 마드리드의 중심 클럽으로 출범하였으니 처음부터 그들의 재정과 선수단과
팬층은 상당히 두터웠고 조화로웠다.
지역의 몇몇 클럽을 흡수 병합한 마드리드 FC는 1905년, 창단 3년 만에 코파 델 레이(스페인 국왕컵)에서의 우승을 시작으로
4년 연속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1920년 6월 29일, 국왕 알폰소 13세는 이 팀에게 '레알(Real, 왕립)'이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바로 이 명칭의 변천사가 스페인의 현대사를 압축하여 보여준다.
1931년, 스페인에 제2공화국이 출범한다.
왕정이 폐지된 것이다.
제2 공화정은 바스크, 카탈루냐, 갈리시아 등 자치를 요구하는 지역에게 자치권을 부여하였고,
노동자와 여성의 민주적 권리를 인정하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그 바람에 ‘레알 마드리드’는 다시 마드리드 FC라는 이름으로 돌아갔다.
왕정이 폐지된 상황에서 ‘레알’이라는 수식은 매우 불편한 겉옷이었던 셈이다.
앞의 스페인 근대사에서 설명하였듯 그러나 제2공화정은 불안한 토대 위에서 지은 집이었다.
왕당파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대지주들은 권토중래를 노렸다.
이 와중에 군부는 당시 스페인 사회를 통틀어 가장 체계적인 위계질서를 가진 조직으로 성장했다.
이런 혼란 속에서도 축구는 계속되었다.
이름이 바뀐 마드리드 FC는 31-32 시즌의 무패 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우승과 준우승의 계단에서만 왕복하였고,
34년과 36년에는 코파 델 레이의 우승자가 되었다. 이 시기의 맞수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지만,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였다.
지금의 발렌시아는 많이 약해진 상태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약진이 돋보이죠!!
1936년의 내전, 그리고 곧 불어닥친 대혼란기를 틈타 군부 쿠데타가 발생하고 이로써 프랑코 정권이 확립되었다.
이때 마드리드 FC는 어떠했는가. 군부를 열렬히 환영하며 파죽지세로 축구장을 휩쓸었을까.
그렇지는 않다. 내전과 쿠데타로 인한 끔찍한 사회적 혼란 가운데 사실상 1936년부터 1939년까지 각종 스포츠 대회와
리그 일정이 중단되었기 때문에, 마드리드 FC 선수들 역시 강요된 휴면에 들어갔다.
게다가 유럽 전역은 곧 2차 대전의 화염 속으로 빨려들어갔다. 추축국(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국과 싸웠던 나라들이 형성한
국제 동맹.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중심이 됨)의 지원국가이면서도 중립을 유지한 스페인의 군병들 중에는 얼마 전까지
축구화를 신었다가 어쩔 수 없이 군화를 신은 선수들도 있었다.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축구는 잠시 유보되었다.
공화정 시대의 축구 경기장 분위기를 소개하는 사진..
프랑코 시대의 경기장 사진..
전쟁이 끝난 후, 스페인의 축구장은 조금씩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발렌시아, FC 바르셀로나 등은 현역 멤버만으로 힘겹게 리그를 운영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타국 선수 임대,
유소년 클럽 시스템 안착 같은 노력을 기울였다.
마드리드 FC도 팀 재건에 나섰다. 유럽 전체가 전쟁 이후 재건기를 겪어야 했던 것처럼,
그들의 축구장과 라커룸과 선수단도 리빌딩이 필요했다. 무너졌거나 사망했거나…….
그런 대혼돈 이후의 상황이 된 것이다.
전쟁이 끝난 후 그들의 이름은 다시 ‘레알 마드리드’로 바뀌었다.
히틀러 나치즘의 일익으로 2차 대전에 어정쩡하게 참가했던 추축국의 스페인 왕정과 독재자 프랑코는 분위기 반전을
위한 ‘스펙터클 통치’에 돌입했다. 마드리드 FC가 ‘레알’을 회복한 것도 그런 맥락에 따른 것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디 스테파노"의 골 세러머니..
마드리드 FC, 아니 레알 마드리드의 팀 리빌딩은 1953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영입으로 절정을 이룬다.
콜롬비아의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이적해 온 디 스테파노는 엇비슷한 시기에 동료가 된 푸슈카시 페렌츠, 프란시스코 헨토,
헥토르 리알, 레이몽 코파 등과 함께 스페인 각지의 경기장을 즈려밟기 시작했다.
54-55시즌, 56-57 시즌의 우승은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디 스테파노는 8번의 리그 우승과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유러피언컵 5연패의 주역이었고, 그가 이끌던 레알 마드리드는
무적이었다. 그들의 전성기는 1970년대까지 지속된다.
이 시기는 프랑코 독재 치하와 맞물린다.
그 때문에 ‘레알 마드리드 = 프랑코 독재자’라는 등식이 곧잘 성립된다. 표면적으로는 그러하다.
아니, 독재자 프랑코는 ‘스펙터클 통치’의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레알 마드리드 팀을 이용했다.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고, 때로는 비밀경찰까지 암약하여 선수들을 ‘보호 관찰’했다.
레알 마드리드로서는 ‘어두운 시절’이었다.
지금도 레알마드리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적에도 불구하고 관치 그리고 독재자의 추종세력이었다는 꼬리표가 붙어다닌다!!
레알의 성적표에 대한 안내입니다!!
가장 빛나는 성적은 전신인 유러피언컵을 비롯하여 챔스 10회 우승으로 "라 데시마" 달성..
2번째의 기록은 "바이에른 뮌헨"의 5회 우승입니다!!
최초의 연속 우승에 대한 트로피!!
프랑코는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느지막이 모습을 드러내는 걸 좋아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마이크를 잡는 것을 즐겼다.
그의 ‘스펙터클 통치’ 방식은 곧장 제3세계의 수많은 독재자나 권위적인 인사들에게 벤치 마킹 대상이 되었다.
그 순간 축구를 좋아하는 시민들은 일거에 충용스런 신민으로 변해버렸다.
정부와 권력, 그들의 통치 방식에 ‘동의’를 했느냐 ‘저항’했느냐는 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어떤 의미에서든 수만 명이 환호성을 지르는 가운데 강력한 통치자가 홀로 그 함성을 독점했다는 점이 중요하다.
레알 마드리드의 전성기도 그러한 복합성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레알 마드리드의 역사에서, 아니 스페인의 역사에서 그 때의 일을 모두 ‘압수’하는 것이 올바른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같은 ‘스펙터클 통치’의 아래로 흐르는 역사의 다른 물줄기를 확인하고, 그것을 전면적으로 재해석하는 게
중요하다.
스포츠를 통치의 수단으로 이용한 것은 프랑코 이전의 히틀러도 있었고, 우리의 전두환 대통령이 5공 시절에도 즐겨
사용한 메뉴.. 역사는 돌아가는 것이며 군중의 심리를 잘 이용하는 것이 위대한 독재자인가요??
초창기 시절의 기념품들!!
프랑코의 이런 스포츠를 이용한 통치는 많은 국가에서 통용되기도 했습니다..
제3세계의 여러 나라 권력자들은 그러한 대회를 창설하여 ‘스펙터클 통치’의 일환으로 사용했다.
이를테면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박스컵이 있었다.
1958년 말레이시아에서는 당시 말레이시아의 수상이자 아시아축구협회(AFC) 회장 겸 자국 축구협회 회장이었던 압둘 라만의 주도 아래 메르데카컵 아시아축구대회가 창설되었다.
‘메르데카’는 말레이어로 ‘독립’이라는 뜻이다.
1968년 태국에서는 입헌군주 국왕을 기념하는 킹스컵이 창설되었다.
지금은 대부분 유명무실하여지거나 없어진 대회들!!
레알의 "라데시마"를 축하하면 연출된 화면입니다..
"투란도트"의 아리아 "네숨 도라마"와 함께 화면이 흘러가는데 마지막 "빈세라(만세!!)" 대목에 컵 세러모니가!!
감동입니다!!
챔스 리그 전신인 유러피언컵입니다!!
레알 역사 계속하여..
이러한 대회의 정치적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과 그때 뛰었던 선수들의 땀방울과 열렬히 응원했던 팬들의 함성을
이해하는 것은 충분히 다른 차원의 일이 될 수 있다.
물론 ‘3S 정책’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답답하고 어둡고 가난했던 시절, 축구공 하나가 시민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이었는가를 헤아리는 일이 중요하다.
그것이 본류다.
이를테면 1983년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박종환 감독과 선수들은 ‘멕시코 4강 신화’를 일궈냈다.
그들은 김포공항에서 시내까지 카퍼레이드를 했고 전두환 대통령을 ‘알현’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4강 신화에 들뜬 나머지 그 당시 사람들이 ‘독재자’를 마냥 찬양하며 한 시절을 흘려 보냈던가.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우리에게 말해준다. 아닌 것이 확실하죠..ㅎㅎ
어떤 면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뮤지움보다 더 화려하고 또 잘 꾸며져 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의 전성기가 프랑코 독재와 겹쳐지는 것은 역사의 서글픈 우연이다.
그 빛나는 선수들과 상당한 역사를 자랑하는 팀이 독재자의 어릿광대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이러한 맥락이 있다.
그러나 마드리드가 어떤 도시인가. 세르반테스와 고야와 달리의 도시다.
그들은 왕정 시대 풍자와 비판, 은유의 작가였으며 나폴레옹 참사의 증언자였고 내란을 예감했던 예술가였다.
그들의 시민들, 즉 마드리드 사람들이 레알 마드리드를 열렬히 성원했던 것 역시 VIP석에 프랑코가 앉아 있었기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 이름을 열렬히 외쳤다.
카시야스의 세러모니와 함께 울려퍼지는 "빈세라~~~~~~"
80년대 프랑코 사후 레알 마드리드는 몇 차례 부침을 거듭한다. 8
0년대에는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를 정점으로 하여 미첼, 우고 산체스 같은 스타가 팀을 이끌었다.
그들은 1985년부터 1990년까지 리그 5연패를 기록했다.
90년대는 유소년 클럽에서 성장한 스타들의 무대였다. 라울 곤잘레스, 페르난도 모리엔테스, 구티 등이
유러피언컵이 유럽챔피언스리그로 전환된 97-98 시즌의 우승을 일궈냈으며 그들 곁에 프레드릭 미야토비치,
페르난도 레돈도, 호베르투 카를루스 같은 화려한 멤버가 합류했다.
그 이후의 역사는 우리 모두가 눈으로 목격한 역사다. 2000년 여름 신임 회장 플로렌티노 페레즈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들을 한 팀으로 불러모으는 전대미문의 전략, 곧 갈락티코(은하수)라고 불리는 과감한 정책을 밀어붙였다.
축구 팬이라면 한밤중에 사뭇 진지하게 공상하며 구성해 보던 팀을 실제로 만들어냈던 것이다.
트로피와 유니폼 전시실..
갈라티코의 시작은 2000년 7월 25일, 루이스 피구의 영입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브라질), 데이비드 베컴, 안토니오 카사노, 왈터 사무엘, 마이클 오언,
에스테반 캄비아소, 조너선 우드게이트 등이 마드리드행 비행기를 탔다.
그러나 가장 ‘화려한 멤버’를 갖춘 팀이건만 ‘은하영웅전설’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중계권과 입장권을 비롯하여 기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마케팅 방식을 동원한 결과 팀 수익은 늘어났지만,
02-03 시즌 우승 및 그에 따라 치러진 2003년 시즌 개막전 슈퍼컵 우승을 끝으로 무려 4년 동안이나 레알 마드리드는
방향을 잃은 은하계의 비행물체가 되고 말았다.
역시 중요한 것은 그라운드 안의 11명이 아니라 그라운드 바깥의 단 1명, 곧 감독이었다.
수미일관된 축구 철학의 관철을 위하여 그 1명은 최소 2년 이상의 임기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은하계의 영웅들이 다 모였으니 자연스레 전설이 작성될 것으로 믿었던 인식이 문제였다.
최정점의 감독이 3년 동안 5번이나 교체되었으니 레알 마드리드는 결국 선장 없이 떠도는 비행선이 되고 말았다.
카를로스 퀘이로스, 호세 안토니아 카마초, 반델레이 룩셈부르고, 거스 히딩크, 존 토샥 등은 마치 ‘임시직’처럼 왔다가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팬과 주주들의 비난에 의해 페레즈 회장이 물러나고 라몬 칼데론 회장이 2006년에 부임하면서
은하비행체가 조금은 수습되기 시작했다.
그는 파비오 카펠로 감독에게 전권을 맡겼다. 카펠로 시대가 개막되면서 기존의 선수들은 뿔뿔히 흩어졌다.
사실 지단이나 호나우두는 은퇴 직전의 스타들이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는 뤼트 판 니스텔로이, 파비오 칸나바로, 에메르손, 호비뉴 등이 채웠다.
카펠로는 4년 만에 리그 우승에 성공했다.
그러나 숙적 FC 바르셀로나가 과르디올라 감독 아래 푸욜, 메시, 사비, 이니에스타 등을 앞세우며 최강 전성기를 구가하는 것에
비하면 만족스럽지 못한 경기 내용이었다.
그들이 스페인 클럽 사상 최초로 트레블(리그, 국왕컵, 챔스 리그 등)을 달성하는 동안 레알 마드리드는 베른트 슈스터가
왔다가 가고 후안 데 라모스가 또한 왔다가 갔다.
그 와중에 페레즈 전임 회장이 칼데론을 끌어내리고 권토중래하여 ‘제2차 갈락티코’ 전술을 밀어붙였다.
카카,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사비 알론소, 카림 벤제마 등 은하계의 별들이 다시 집결하였고 마침낸 2010년 5월 28일,
그 최상위 자리에 주제 무리뉴 감독이 앉았다.
팀 수뇌부가 그의 이력서에서 가장 눈여겨본 것은 09-00 시즌에 FC 바르셀로나를 물리쳤다는 사실이었다.
인터 밀란에서 트레블을 달성한, 그것도 FC 바르셀로나를 물리치며 유럽의 패권자로 등극한 주제 무리뉴는
레알 마드리드가 찾던 바로 그 사람, 즉 FC 바르셀로나에게 치욕을 안겨줄 수 있는 감독이었다.
레알 구단 엠블럼의 변천 역사입니다..
어떤 면으로는 스페인 근대사와 변천 역사를 같이 하기도 하네요!!
또 다른 욕심이 있던 무리뉴는 레알로 부임하였으며 ‘전권’을 요구했다.
구단은 ‘선수단’ 운영에 있어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러나 무리뉴가 요구한 것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무리뉴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80년대 빅 스타이자 소설가이며 레알 마드리드의 정신 세계를 총괄해왔던 호르헤 발다노를 밀어냈다. 호르헤 발다노 밑에서 감독을 맡는다는 것은 기존의 여러 감독들이 겪었던 일들,
그러니까 발다노와 마찰을 빚다가 결국 팀을 떠나는 운명을 반복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리뉴는 발다노 축출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네딘 지단이 채웠다.
그렇게 하여 주제 무리뉴는 레알 마드리드를 자신의 팀으로 바꿔 버렸다.
1958년 레알의 전성시대 멤버들..
전체적인 모습이 지금의 스타들에 비하면 조금 촌스럽나요?? ㅎㅎ
심지어 ‘마드리드의 영혼’이었던 라울 곤잘레스도 북유럽행 기차를 타고 떠났다.
그는 ‘돈’이 지배하는 클럽 문화를 떠나 탄광 노동자들을 열렬한 서포터스로 가진 독일의 살케 04로 이적했다.
크리스티아누 호나우두, 카림 벤제마, 카카 등 갈락티코 2기 시절에 라울이 차지할 곳은 벤치밖에 없었다.
무리뉴는 모든 것을 원점에서 새로 시작하고자 했다.
라울은 북유럽으로 떠나 그곳에서 개인 통산 400골을 터트렸고, 모리엔테스는 축구화를 벗었다.
무리뉴의 실험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2011년 10월 14일, 프랑코 독재 체제 이후 첫 번째 전성기 시절인 1980년대의 레알 마드리드를 이끌었던
에밀리오 부트라게뇨는 “레알 마드리드는 환상적인 스쿼드를 갖고 있다. 클럽 역사상 최강팀 중 하나다.
주제 무리뉴 감독은 모든 포지션에서 훌륭한 선수들을 보유하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는 모든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현 주전 멤버들의 유니폼..
무리뉴는 일방적으로 밀리던 바르셀로나와 경기에서 시행착오끝에 균형을 유지시키고 승부의 추에 균형을 맞추었다..
그러나 3년의 감독 재임기간동안 팬들이 바라던 "라 데시마"를 달성하지 못하고 만다..
결국 그는 "첼시"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그의 맞수였던 바르셀로나의 "펩"도 또 다른 동기를 위하여 "뮌헨"으로 옮겼다..
그 자리를 "안첼로티"가 채우면서 레알의 염원이던 "라 데시마"를 달성하고 금년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