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의 민낯 그리고 그 허구적 실체를 까발린 도발적인 책으로, 결국 신은 망상일 뿐이며, 그것도 유해한 망상이라는 것이다."
" 종교사가들은 원시 부족의 애니미즘에서 그리스, 로마, 북구의 신들 같은 다신교를 거쳐 유대교와 그 파생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로 진행되는 흐름이 있다고 본다. "
나는 무신론자다. 그래서 내 주변의 기독교 신자들은 나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회에 나갈 것을 권한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내가 무신론자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저 적당히 웃어넘기며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것은 자칫 심각한 말다툼으로 이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종교 문제는 예민하다. 그런데도 리처드 도킨스는 『만들어진 신』을 통해 그런 예민한 문제를 정면으로 거론하고 나섰다. 그는 금기의 영역 같은 신의 존재를 철저히 부정하는 논리는 다소 과격해 보일 정도다.
도킨스의 논리는 신이 인간을 창조했는지는 의문이 생기지만 인간이 신을 창조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거침없는 문제제기와 논증을 통해 창조론에 맞서 신이 없음을 역설한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신의 허구성을 낱낱이 까발린다.
리처드 도킨스
그런 만큼 창조론자 또는 유신론자들로부터 제기될 수 있는 격렬한 반대나 비난이 상당했을 것이나 그는 끄덕도 않는 듯했다. 무신론자가 창조론자들을 앞에 두고 창조론을 부정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다. 창조론자들은 사유의 출발부터 신을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창조론자들은 논증은 없고 과학의 틈새를 찾아내기만 하면 그것이 곧 신에 의해 창조(지적 설계론)되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이다. 그런 창조론자들에게 정면으로 맞선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와 함께 논리적 뒷받침이 충분해야할 것이다.
도킨스는 진화론자다. 다윈의 진화론은 창조론과 대척점에 있다. 그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광범위한 자료를 바탕으로 집요하게 신의 허구성을 파헤친다. ‘만들어진 신’은 제목 그대로 신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책은 아이슈타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아인슈타인 역시 무신론자였으며 그 때문에 그는 미국 내의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물리학자들의 비유적 또는 범신론적 신은 성서에 나오는 인간사에 간섭하고, 기적을 일으키는 그런 신과는 거리가 멀다.
따라서 저자는 신(God)가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우주와 우리를 포함하여 그 안의 모든 것을, 의도를 갖고 설계하고 창조한 초인적, 초자연적인 지성이 있다” 이 책은 그 가설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견해를 옹호한다.
즉 “무엇인가를 설계할 정도로 충분한 복잡성을 지닌 창조적 지성은 오직 확장되는 점진적 진화 과정의 최종 산물로 출현한 것이다”라는 견해다. 진화된 존재인 창조적 지성은 우주에서 나중에 출현할 수밖에 없으므로, 우주를 설계하는 일을 맡을 수 없다.
결국 신은 망상일 뿐이며, 그것도 유해한 망상이라는 것이다. 종교사가들은 원시 부족의 애니미즘에서 그리스, 로마, 북구의 신들 같은 다신교를 거쳐 유대교와 그 파생 종교인 기독교와 이슬람교 같은 일신교로 진행되는 흐름이 있다고 본다.
저자는 그의 해박한 지식을 토대로 성서에 나오는 허구성 또는 비도덕성을 조목조목 분석하고 비판한다. 무신론자이자 성경에 대해 잘 모르는 내게는 그런 사례들에 대한 분석은 거의 삼국지를 읽는 것처럼 흥미로웠다.
구약성서에는 노아의 방주 같은 이야기는 황당해 보이고, 롯과 소돔의 이야기는 소름이 끼칠 정도이며, 일신교의 창시자인 아브라함과 그 부인 사라, 그리고 그의 아들인 이삭의 이야기는 끔찍하다. 그런가 하면 신은 모세를 통해 끊임없이 경쟁 신들에 대한 배타적 성향을 보인다.
다른 신을 믿는 자들을 모두 효시하라는 주문도 끔찍하다. “너희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나의 이름은 질투하는 야훼, 곧 질투하는 신이다.” 여호수아는 이들에 대해 ”남녀노소, 소와 양, 나귀 등 도시의 모든 것을 칼로 철저히 몰살시킬“ 때까지 쉬지 않았다.
이런 성경이 우리의 도덕적 원천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 놀라운 일이다. 이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면 히틀러의 폴란드 침략, 사담 후세인의 쿠르드족과 습지 아랍인 대량 학살과 도덕적으로 구별할 수 없다. 이렇게 보면 도덕의 근원이 종교라는 말은 터무니없어 보인다.
한편, 저자는 예수가 실존 인물인지도 의심을 품고 있으며, 성경 역시 필사가 거듭되는 동안 수많은 수정이 이루어졌을 거라고 본다. 예를 들면, 요셉이 목수라는 것도 번역 오기일 가능성이 크며, 마리아가 처녀라는 것도 그렇다.
더구나 예수가 정말로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면 요셉의 족보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메시아가 다윗의 후손이어야 한다는 구약성서의 예언을 예수에게 맞추기 위해 그 족보를 동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논리는 새삼 고개가 끄덕여진다.
예수 탄생을 다룬 복음서에 나오는 동쪽의 별, 처녀 출산, 왕들의 아기 숭배, 기적, 처형, 부활과 승천 등 전설을 구성하는 내용들이 모두 지중해와 근동 지역에 이미 존재했던 다른 종교들로부터 빌려온 것임을 보여준다는 점도 지적하고 있다.
저자는 또한 종교가 주장하는 도덕성 문제도 논의한다. 즉, 실험 결과 도덕적 판단에는 무신론자와 종교인의 판단에 통계적으로 의미 있는 차이가 없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가 선하거나 악하기 위해서 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이 없을 때 자신이 ’강도, 강간, 살인‘을 저지를 것이라는 말에 동의한다면, 스스로가 부도덕한 사람임을 자인하는 것이다. 반면에 신의 감시를 받지 않을 때에도 자신이 선한 사람으로 남아 있을 것임을 인정한다면 선하려면 신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저자는 종교가 점차 세속화하고 있음을 우려하며 미국을 사례를 들고 있다. 미국은 기독교 국가로 수립된 국가가 아님에도 오늘날에는 점차 광신도가 날뛰는 신정국가가 되어가고 있다고 한다. 사례로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신으로부터 이라크를 침공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저자는 이에 대해 “딱하게도 신은 그곳에 대량 살상 무기가 없다는 계시를 내려주지는 않았다”고 조롱한다. 조지 워싱턴이 초안을 작성한 트리폴리 조약에는, 미합중국 정부는 그 어떤 의미에서도 기독교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슬람의 법이나 종교나 평화를 결코 적대시하지 않으며, 앞서 말한 주들은 이슬람 국가에 대해 어떤 전쟁도, 적대 행위도 한 적이 없으므로, 종교적 견해에서 비롯되는 어떤 구실도 결코 두 나라의 화합을 헤치지 못할 것임을 선언하고 있다.
아마도 미국의 정치인들이 그들 국부들의 말을 잘 들었더라면 뉴욕의 무역센터가 붕괴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지난 봄 직접 911 현장을 찾아보고 가슴이 미어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한편, 저자는 창조론자들의 지적 설계에 대해서도 비판한다. 창조론자의 주장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설계에 의해 등장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연선택이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는다.
다만 신은 전지전능하기 때문에 우주의 모든 것을 그 능력으로 창조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주장을 가볍게 일축한다. 전능과 전지는 양립할 수 없는 말장난이라는 것이다.
신이 전지하다면, 그는 자신이 전능을 발휘하여 역사의 경로에 개입하여 어떻게 바꿀지를 이미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개입하겠다고 이미 마음먹은 것을 바꿀 수 있다는 의미며, 따라서 그가 전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저자는 종교에 적대적이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그 이유로 절대론의 어두운 이면, 신앙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 등 몇 가지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먼저, 절대론의 어두운 이면과 관련해서 종교적 배교행위에 대한 처벌를 거론하고 있다.
이슬람법에 배교행위는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배교가 사람이나 재산에 실제로 피해를 입히는 것도 아니다. 그런가 하면, 1954년 컴퓨터의 아버지라 불릴 만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이 동성애자라는 혐의로 유죄 선고를 받은 뒤 자살했다.
신앙과 인간 생명의 존엄성 관계는 인간 배아 이야기를 사례로 들었다. 인간 배아는 인간 생명의 한 유형이므로 절대론적 종교관에 따르면 낙태는 살인이다. 배아를 죽이는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과 배교행위를 사형에 처하는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아이러니하다.
종교 신앙은 신앙이기 때문에 존중을 받아야 한다는 원칙을 우리가 받아들이는 한, 빈 라덴과 자살 테러범들의 신앙에 대한 존중을 유보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진정으로 유해한 것은 신앙 자체가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행위라는 저자의 주장은 명확하다.
신앙은 그 어떤 정당화도 요구하지 않고 어떤 논증에도 견디지 못한다. 의문을 품지 않는 신앙이 미덕이라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아이들을 미래의 성전이나 십자군 전쟁을 위한 치명적인 무기로 자라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 종교가 미치는 진정으로 나쁜 효과 중 하나는 “몰이해에 만족하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친다는 점이다. 창조론자들은 A이론이 어떤 특정한 사례를 해명하지 못하면, B이론이 옳은 것이 분명하다고 단정한다.
“그것 봐, 그래서 대안이론인 지적 설계가 이기게 되어 있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논증이 반대로는 적용되지는 않는다고 본다. 그야말로 독선적이 아닐 수 없다. 어떻든 지식 수준이 높을수록 무신론자가 많다는 저자의 통계적 근거가 크게 와 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