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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육분의 륙> 유지태 장현성 |
시인 정현종이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에디터가 말한다. 마침표들 사이에 섬이 있다. 그 섬에 가고 싶다고.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미묘한 간극이 존재한다. 그 2밀리미터도 안 되는 좁은 틈 사이에 무한한 세계가 도사리고 있다. 착실한 에디터는 인터뷰이의 거친 숨 하나까지 약화질소로 냉동시켜 지면 위에 활자화시키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나 이 발칙한 에디터는 인터뷰이의 말을 보이스 레코더에 녹음하는 녹음기사이길 거부한다. 대신 단어와 단어 사이의 짧은 망설임에 귀 기울인다. 원망형 종결어미에서 욕망대신 결핍을 바라본다. 이제 에디터는 인터뷰이와 독자 사이에 끼어 '감히' 불온한 상상을 펼친다. 이제 말 줄임표로 끝나버린 그들의 미완의 문장에 대신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짧은 침묵이 담고 있는 오메가의 심연을 그릴 것이다. |
위악적인 몬스터가 된 순수한 영혼의 정민부, 유지태 |
<육분의 륙(戮)>은 유지태에게 중요한 작품이다. 물론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어디겠냐만, 세인이 기억하는 자신의 출연작이 몇 개에 불과하다 해도 자신이 출연한 13편의 영화 모두가 의미 있다는 유지태의 말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에게 중요하다. 왜? 이미 지난 해 연극 <해일>을 통해 대학로 무대에 선 경험이 있으니 첫 연극데뷔도 아닌데. 그렇다면 왜? 이미 <자전거 소년>과 <장님은 무슨 꿈을 꿀까요>를 통해 배우에서 감독으로의 변신까지 성공한 그인데. 아니, 도대체 왜? <육분의 륙>은 배우 유지태가, 영화감독 유지태가 연극제작자로 첫발을 내딛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는 ‘유무비(有無飛)’라는 영화?연극 제작사까지 차리며 제작자로의 변신을 꾀하는 것일까? 결론은 돈이다. |
'유지태'라는 이름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돈이 있을 거라 생각했어요 |
그렇다. 유지태에게는 돈이 중요했다. 그가 출연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티켓예매창구는 불이 났을 텐데. 그가 영화출연의 대가로 받은 개런티도 만만치 않을 텐데. 이런 편견으로 유지태를 돈 밝히는 자본주의사회 속물로, 스노브로 파악하면 곤란하다. 그가 말한 돈이란 개인의 사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입장수익이 아니며 공연으로 돈을 얼마 남기느냐는 관건이 아니다. 관건은 완성도 있는 작품제작을 위한 경비를 얼마나 마련하는가다. 그의 돈은 자본이었다. 제작비였다. 이를 제작자의 재욕(財慾)이라 폄하지는 것도 편견이다. 그것은 예술가의, 타협하지 않는 예술가의 당연한 바람이니까. 제작비는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다. 창작의 문제다. <육분의 륙> 이전에 여러 작업 과정을 거친 유지태는 누구하고도 싸우지 않고 온전히 작품 창작과 제작에만 열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자 했다. 게다가 <육분의 륙>은 그가 직접 시놉시스를 쓴 작품이니까. 그렇게 찾은 방편이 '돈으로부터의 자유',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이었다. 그가 제작한 단편영화들이 이미 증언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게 그는 배우에서 감독으로 제작자로 행보를 넓혀가고 있다. 허나 거기에 경외의 시선만 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메가폰을 잡고 감독을 할 때는 냉소적 비판을 들어야 했다. 배우가 연기나 하지, 무슨 감독까지 하냐는. 연극에 처음 도전했을 때도 마찬가지. '영화나 하지 왜 다른 짓 하느냐'는 말도 들었다. '그래, 너가 연극을 한다구, 내 한 수 가르쳐주지' 하는 말도 들었다. 영화계에는 무대에 대한 공포심이, 연극계에는 스타에 대한 일말의 시기 어린 질투심이 내재해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소극장 무대에 다시 선다. "사람들에게는 자기 그릇이 있는 것 같아요. 제 그릇은 소극장에서 연기하는 거에요. 연극하는 게 유지태의 그릇이에요." 겸손한 그의 바람이다. 어쩌면 그의 그릇이 정말 소극장에 머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에게 영화배우와 연극배우, 연예인과 배우의 구분이 무의미하다. 따라서 극장의 규모도 무의미할 듯. 소극장 무대에서 연기하는 모습은 그의 바람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나아가 소극장의 지향, 그 뒤에는 관객과 더 가까이 만나고 싶은 배우로써의 욕심과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고 싶은 창작자의 욕심이 도사린 것은 아닌지. 의심하던 차 촬영은 시작되었다. 촬영 중 숨을 고르며 유지태는 폴 오스터의 <우연의 음악>에 대해 말한다. 최근에 읽었다면 찬찬히 그 줄거리를 읊는다. 유산으로 거액의 돈을 상속 받은 성실한 소방관이 드림카를 사고, 여행으로 돈과 시간을 탕진한다고. 돈의 대부분을 잃자, 그는 우연히 만난 도박꾼의 꼬임에 빠져 남은 돈을 도박에 걸게 된다고. 결국 돈도 잃고, 종이 되어버린 사내는 '드림카'를 타고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고. 그는 왜 뜬금없이 <우연의 음악> 이야기를 꺼냈을까. <육분의 륙>에 대한 힌트는 아닐까. 그가 몬스터가 되고자 하는 작품 <육분의 륙>에 모티브를 제공한 것은 아닐까. |
많은 돈을 쥔 사람들, 그들의 도박과 자살. <우연의 음악>은 <육분의 륙>과 닮아있다. 유지태와 장현성에 대해 이야기하며 작품에 대한 소개가 늦었다. 자, 독자들이여, 연상의 힘을 발휘하자. 제목 ‘육분의 륙’과 유지태, 장현성 두 배우가 세 손가락을 오므린 채 엄지를 위로 치켜들고 관자놀이에 검지를 대고 있는 포즈에서. 바로 러시안 룰렛이다. 한 번만 더 상상력을발휘하라 부추기겠다. 리벌버 권총, 펜트하우스, 트럼프, 칩, 위스키, 시가. 이 몇 개의 키워드가 조합되어 연상시키는 장면을. 그것이 <육분의 륙>이다. 더 이상 흥미로울 게 없는, 닳고 닳은 감정의 6명의 재벌가 남녀가 리벌버에 여섯 개의 탄환을 장전한다. 그리고 생의 마지막 카타르시스를 위한 게임을 벌인다. 그것이 바로 <육분의 륙>이다. 유지태와 장현성은 더블캐스트로 각각 몬스터 정민부와 인간 정민부를 그릴 예정이다. |
스스로 파멸하는 쓸쓸한 영혼의 정민부, 장현성 |
“확정된 건 아니지만, 두 작품이 나올 수도 있어요. 저는 쓸쓸한 정서를 좋아해요. 제가 원체 쓸쓸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인간이 원래 쓸쓸한 존재니까요. 등장인물들이 얼마나 쓸쓸하고 외로운 사람들이었으면 이런 선택을 했을까가 저에게는 중요했어요. 지태는 그것보다는 악마성에 관심이 가는 거고. 저는 그런 지태의 해석도 좋아요. 지태가 그리든 제가 그리든 어차피 정민부는 같은 인물이에요. 이를테면 하나의 컵을 위에서 보느냐 옆에서 보느냐의 차이지. 결국은 같은 컵을 표현하는 거니까요.” 몬스터 정민부와, 인간 정민부의 차이는 거기 있다. 몬스터와 인간, 서로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생명체지만 그들은 똑같이 외롭다. 고독하다. 해석은 작품에 다가서는 자세이기도 하나, 삶을 바라보는 자세이기도 하다. 외롭고 쓸쓸한 사내, 장현성. 미혼남 유지태가 아닌 안정된 기혼남 장현성의 쓸쓸함이라. 그가 자주 벌인다는 술판은 쓸쓸한 존재가 외롭지 않기 위해 벌이는 술판이 아닐까. |
관계의 갈증을 해갈하는 술, 그 이상의 것 |
술자리를 좋아하는 장현성이 이 작품에 출연하게 된 계기도 거기에 있다. 처음 공연에 참여해달라는 제의를 들었을 때만해도 출연을 결정하지 않았다. 2003년 <프루프>이후 무대로 돌아오기에는 영화와 방송이 놓아주지 않았다. 빽빽한 일정 속에서 무대로 돌아오는 건 요원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날의 술자리는 그를 참여하도록 만들었다. 이런 식으로 참여하게 된 작품이 비단 이 작품만은 아니다.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 없다는 항간의 뜬소문의 진실성 여부논란에 참여하고 싶진 않다. 허나 술자리의 법석함을 좋아하는 지인들은 모두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꽃피는 밤마다 단파수신기 앞에 앉아 타전을 친다. 외로운 서로에게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반가움의 술잔을 기울인다. 사람들 사이에 서있고 싶은 욕망, 그것은 그가 하는 배우와 연결된다. 대결구도에 있지 않고, 협력관계에 있는 사람, 배우. 그러나 술로도 동료 배우들과의 연기로도 해갈되지 않는 관계 맺기의 갈증은 남아있다. "죽도록 좋아하는 여자가 있었어요. 어느 날 그 여자가 '같이 자전거 타러 가요' 하는데, 마치 길가의 코스모스가 다 피고, 하늘이 열리면서 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언론에 공개됐다시피 그는 배우 양택조의 사위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으로서 원하는 작품만 할 수는 없는 상황이지만, 그는 이 쓸쓸한 세상을 건너는 방법으로 '가족의 울타리 속에서의 위안'을 찾았다. 가장 되고 싶은 자신의 모습으로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가 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이상한 일이다. 유지태도 그와 토씨 하나 다르지 않은 언어를 사용했다. 인생의 반쪽을 찾아 자신을 닮은 아이를 낳는 것은 인간의 원초적 종족보전의 욕망이나 '좋은 남편과 좋은 아빠'되기는 그와 다른 차원의 얘기다. 이는 채우기 쉽지 않은 욕망인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닌 접근해가는 과정 아니었던가. 나아가는가, 중도 포기하는가. 존재론적 고독자일 수 밖에 없는 인간 운명을 거역하며 성실히 관계의 탑을 쌓아가는 과정, 장현성이 그 과정에 있다. 한 여자의 남편으로, 아버지로, 그리고 또 배우로. |
epilogue |
영원한 가객 김광석. 유지태, 장현성과 거리가 있어도 한참 거리가 먼 인물이건만 두 사람과 대화하는 내내, 그리고 마지막 마침표를 찍어야 하는 이 순간까지 머리 속을 떠나지 않던 이는 가수 김광석이다. 나이 마흔엔 할리데이비슨을 타고 세계일주하고 싶다던 그가, 환갑엔 연애해보는 게 소원이라던 김광석. 중에서도 그가 가장 바랐던 모습은 '좋은 남편, 좋은 아빠'였다. 그러나 그는 환갑은 고사하고 마흔도 넘기지 못한 서른 셋의 일기로 요절했다. 행간을 파악한 독자라면 알아챘을 것이다. '좋은 남편, 좋은 아빠'는 쉽게 잡을 수 있는 종류의 욕망이 아니었음을. 에디터의 뻔한 질문, '꿈이 뭐죠? 목표는 뭔가요?'에 대해 돌아온 두 배우의 대답이 김광석의 그것과 똑같았으니, 유지태와 장현성의 대답을 듣고 기사를 작성하며 김광석을 떠올린 건 당연하다. 게다 몬스터 유지태건, 인간 장현성이건 그날 두 사람의 뒷모습은 유난히 쓸쓸했다. 해서, 에디터는 감히 그들의 말 뒤에 담겨진 쓸쓸함에 축배하기 위해 상상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쓸쓸하나 쓸쓸하지 않으려는 그들을 위해. editor_김일송 photography_공은석 cooperation_장광효 카루소(02.542.2314) S.T. Dupont(02.2106.3590) TSE(02.3446.1643) 한양안경점(02.543.1634) hair & make up_With Parkkitae(02.515.2322) |
첫댓글 스캔이 되었나보네요~ 감사합니다. 넘 궁금했는데...ㅎㅎ
스캔이 아니고 홈피서 퍼왔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