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3월 7일 성 콜롬방 병원에서 성은 김이요, 이름은 경화라는 천진난만한 첫 울음 소리와 함께 이 땅에 첫 숨을 들이 쉬게 되었습니다.
엄마의 배 안에서 무식할 정도로 뻥뻥 배를 차대는 나를 건강한 사내아이가 태어날 것이라며 온 동네방네 소문을 내시며 돌아 다녔건만, 김씨 가문의 장남인 아빠의 첫 아이가 숨 쉬는 것조차 힘이 겨울만 한 난쟁이만 한 아이가 엄마와 아빠의 품에 안길 때 한 동안 말이 없었다가 엄만 내 첫 얼굴과 몸을 보며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남들보다 길게 병원에서 지냈던 엄마와 내가 퇴원을 한 후 모든 사건은 나로 인해 발생 되었다고 합니다.
입 안에 대형 스피커를 단 것처럼 어찌나 목소리가 큰지 하루에도 수 십번 위, 아래 층에서 손님들이 왔다 갔다 하는 바람에 맹자 못지 않게 이사를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아빠의 한계점이 도달해 눈이 왈칵 뒤집혔을 때 나는 세 시간 동안 장롱에 갖쳐 지냈다고 합니다. 그 후 우리 집에 자주 오셨던 손님들이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언젠가 부모님이 크게 다투셨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때 아버지의 손에서 냄비 하나가 마당으로 굴러 들어오는 걸 본 나는 싸늘한 분위기에 울지도 않고 냄비를 주워서 가르키며 “엄마, 이 냄비가 찌그러졌어”라는 말에 엄마랑 아빠의 큰 부부싸움은 그 후 지금까지 없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아, 나는 운이 억세게 무척이나 좋은 사람 같습니다.
내가 살던 그 마을에는 슈퍼를 가려면 횡단 보도가 없는 건너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입안에서 사탕이나 과자를 한 번도 놓지 못하는 나는 그 유혹을 견디다 못해 길을 건너다 대형 트럭에 깔릴 뻔한 사건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차의 가운데 쪽에서 누워 있어서 약간의 타박상을 입고 안전하게 살아 돌아왔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목포에 큰 백화점이 생겼었을 때 우리 가족은 화니 백화점이라는 곳을 다녀 간 적이 있었습니다. 동네 슈퍼나 시장을 다녔던 나에게 백화점이라는 곳은 없는게 없는 꿈속의 나라 였습니다.
한참을 구경하다 엄마를 우러러 보았을 때 엄마가 아닌 무서운 얼굴을 한 아줌마가 나를 톡 쏘아 보는 것 이었습니다. 어찌나 무서웠는지 나는 무엇엔가 쫒긴 듯이 막 달리다가 펑펑 울었습니다. 그 때 엄마와 아빤 백화점과 그 근처를 3번이나 왔다 갔다 했다고 합니다. 홀로 백화점에 나왔을 때 한 구세주가 나타나셨고 그 근방 지리는 엄마랑 같이 돌아 다녀서 눈 감고도 다닐 수 있었던 곳이었는지라, 아무 두려움 없이 손을 잡고 내가 집 방향을 지시해주자 그 구세주는 나를 집 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그렇게 구세주와 함께 집에 도착했습니다. 저녁 늦게 부모님이 지친 얼굴로 돌아 왔을 때 엄마는 나를 보시며 내가 태어난 이래로 또 한번 울었습니다.
엄만 나의 모험담을 들으시며 “넌 꼭 크게 될 사람이야”라며 내게 여러 번 말씀하셨고 친척과 더불어 온 동네 사람들에게 나의 모험담을 말하며 모두가 경화는 크게 될 거 라며 한 동안 그 말이 끊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엄마에게 아주 큰 타격을 입힐 만한 소식이 엄마의 귀에 전해 졌습니다. 옆집 누구는 가나다라 랑 알파벳도 띄고 구구단도 띄었다 라는 소식을 들은 엄마는 그 즉시 나를 교육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순조롭게 교육이 되던 어느 날, 숫자 교육을 시키다 1이라는 발음이 되지 않자 엄마는 그 순간 엄마는 사랑의 매를 드셨습니다. 그런 날 외할머니는 날 안쓰럽게 여기며 엄마를 말리셨고 감을 깎아 나에게 주었습니다. 그 다음날 난 바로 1이라는 발음을 쉽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시계를 보는 방법도 스스로 터득하였습니다.
1~2년이 지나고 어느 날 초등학교 입학 통지서가 엄마의 품에 들어왔습니다. 입학하기 하루 전, 뭐 빠진게 없나 하며 잠자리에 들다가도 가방을 풀어 헤쳤다가 다시 넣었다가 수 십번을 해 대었습니다.
입학 당일, 엄마의 손을 꼭 쥐고 입학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으로 배정 된 반 아이들과 줄을 섰고 교장 선생님의 말씀으로 입학식은 끝을 맺었습니다. 들뜬 나의 모습과는 달리 엄마는 집에 가는 동안 계속 말이 없으셨습니다. 집에 도착한 후 엄마는 다짜고짜 나를 때리셨습니다.
운동장에서 고개를 숙인 채 발로 흙을 판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어딜 갔다 하면 엄마한테 “나 집에 가서 때릴거야?” 라며 엄마에게 묻곤 했습니다.
초등학교 땐 남자 아이들이랑 싸웠던 경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툭하면 시비 걸고 툭하면 때리고 정말 생각하기 싫은 생각들 뿐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또 한가지 일이 생각 납니다.
어찌나 남들보다 무서움을 많이 탔던지 학교 전설 100가지를 알면 죽는다라는 친구의 말 한마디에 전설에 대한 지식이 풍부 했던 터라 난 죽을거야 라며 엄마에게 말했다가 진짜로 죽을 뻔 한게 한 두 번이 아닙니다.
그 뿐만 아니었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행운의 편지가 내 책상 위에 올려진 후 몇 십장을 복사해 반 아이들은 물론이고 옆 반까지 몰래 돌렸던 일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왜 그런 일을 했는지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황금 같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를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때는 실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땐 나름대로나 부모님에겐 부끄러운 성적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이번 만은 달랐습니다. 그래 열심히 하면 될거야 라는 용기를 가지고 4번을 도전하였지만 역시나 그 성적은 오를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알파벳 이후로 영어의 영자도 모르는 무식이 중학교 영어는 힘들었습니다.
그 때 성적에 대한 부끄러움을 배운 나는 tv에서나 친구들이 한다는 성적표 위조나, 성적표를 감췄던 일이 있었습니다. 항상 엄마가 방을 청소하다가 들켰지만 그 일이 끊이지 않았고 중학교 마지막 시험 후, 나는 집이 떠나가랴 울었습니다. 그 다음 날 처음이자 마지막인 영어 과외라는 것을 하고 난 후 짧은 문장도 못 읽던 내가 긴 문장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학교 땐 공부가 전부라고 생각했었던 일도 여러 번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인지 중학교 땐 공부와의 인연의 끈이 잠시 동안이나마 묶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수학 여행 때 나는 새로운 경험을 하였습니다.
일년이면 꼭 한 두 번씩 제주도를 갔던 내가 또 다시 제주도를 가게 되었을때 긴장 반 시시함 반이 었습니다. 그런데 학교에서 여행하는 코스가 제주도의 시골 풍경만 보여 주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놀랐던지 제주도가 갑자기 시골로 변했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밤에 고모가 오셔서 친구들이 볼 수 없었던 장면들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소는 작은 등대들이 불을 밝히는 곳에서 돌들이 예쁜 색깔로 총총총 눈에 띠는데 어찌나 예쁜지 카메라에 담지 못한게 아쉬웠습니다.
내가 그 예쁜 돌들을 보고 있을 때 내 친구들은 통닭을 시켜 먹다가 tv에 나올 정도로 배탈났더라구요.
그러고 보니 중학교 졸업식을 빠뜨릴 뻔 했네요.
졸업식 날 친구들이 어찌나 잘 해주던지 머릿 속에서 지난 날들이 하나 하나 지나가자 왈칵 눈물을 쏟아 버릴 것 같았습니다. 또한 날 가르켜 주시는 언제나 내게 말이 많았고 위로도 잘해 주셨던 선생님들의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어찌나 가슴이 아프던지 그 날 또한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작은 행사에는 오시지 않지만 큰 행사 만큼은 항상 오시던 엄마가 오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 전날부터 못 올거라면서 고모가 오실거야 라고 말씀 하셨지만 고모 또한 오시지 않았습니다. 졸업식이 끊날 무렵, 고모의 딸의 졸업이 늦게 끝나 오지 못했다며 미안해 하셨지만 나는 집에 오자마자 펑펑 울어 댔습니다. 책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밀어 버리다 지쳐서 잠들었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엄마와의 냉전이 시작되었지만 먹을 것에 유혹되고 말았습니다.
지금의 전 고등학생입니다.
약 한달 동안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아직 철부지에 응석 부리기를 좋아하는 나지만 이제 몇 년 만 있으면 저도 사회인이 됩니다. 갑작스런 일이라 여러 가지 고민거리가 있지만 고민거리 하나하나 사라지고 좋은 일들만 생길 것이라고 믿습니다. 마지막으로 내가 바라는 모든 일들이 다 실천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