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릉계를 ‘그랜드 캐년’이라 부르지 말라
- 배경구
동해 무릉계곡이 명승 제37호로 지정된 것은 2008년 2월 5일이다. 명승지 지정이 늦은 감이 있지만 늦게나마 자연적, 역사 문화적인 평가를 받게 되어 기쁘다. 동해 토박이인 필자는 11월 15일 답사하였는데 이곳에서의 감동과 비경에 얽힌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 유감, ‘한국의 그랜드 캐년’
‘이곳은 한국의 그랜드 캐년 무릉계곡입니다.’ 동해시 삼화동 초입에 걸린 대형 관광홍보 문구이다. 무릉계곡의 절경지마다 ‘한국의 그랜드 캐년’이라는 안내판이 있다. 무릉계가 굳이 그랜드 캐년의 아류일 필요가 있을까? 그랜드 캐년은 협곡의 웅장함은 있겠지만 건조지형이라서 항상 붉은 빛을 띠고 있고 과연 생명이 살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게 한다. 무릉계곡과는 산세 자체가 다르다. 하지만 어쩌랴. ‘한국의 그랜드 캐년’이라 운운하는 곳이 비단 여기만이 아닌 것을.
- 무릉계곡의 관문, ‘중대동문(中臺洞門)’을 모르고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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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호암소(虎巖沼)로 더 많이 알려졌다. 비취빛 물결에 빠져 250년 전의 글씨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감흥은 아직도 황홀하기만하다. '중대동문'은 영조 17년(1741) 삼척포진 영장인 오혁이 썼다. 여기에 이런 절경이 있는 줄을 아는 관광객은 많지 않다.
무릉계의 관문은 ‘중대동문’이다. 호암소(虎巖沼) 석벽에 석각으로 새겨져 있다. 호암소란, 도승을 잡아먹으려던 호랑이가 절벽아래 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비취빛 물결에 빠져 250년 전의 글씨를 처음 발견했을 때의 감흥은 아직도 황홀하기만하다. 하지만 여기에 이런 절경이 있는 줄을 모르는 관광객이 많다.
무릉계곡 관리사무소를 통과하면 표주박이 놓인 음수대가 있는데 멀리 있는 베틀바위에서 흘러내린 물이다. 명산의 정기는 물에 녹아 있다고 했던가. 표주박물을 들이키니 두타의 정기가 몸속에 들어선 느낌이다.
- 민화처럼 웃음이 번지는 금란정(金蘭亭)의 주의문
금란정(金蘭亭), ‘쇠와 같이 굳고 난향처럼 은은한 벗의 사귐’을 갖자는 의미로 지어진 정자다. 정자의 현판 글씨는 당당한 위엄이 있지만 정자 측면 기둥의 ‘주의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부지불식간에 ‘풋’하고 웃음이 터진다. 1958년 여기로 이건할 때 쓴 것 같다. 조심(操心)이라는 글자의 조(操)자의 획이 많아서인지 ‘조심(心)’이라 새겼다. ‘난잡한 글字’, ‘行동’, ‘各學교’, ‘以上行동’ 식의 표기가 있다. 나름대로 겁을 준다고 줬지만 웃음이 배어나오는 민화 속의 호랑이 같다.
- 무릉반석에서 ‘숨은 그림 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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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온 뒤라서 계곡의 물이 많아 위로 솟구치고 있다. 여기에 명필가인 양사언의 초서체 글씨와 절반가량 깨어져 나간 부사 박내정 글씨와 무수한 토포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또 난초 세 촉도 흩어진 상태로 그려져 있어 볼수록 재미있다.
무릉반석 바위에는 많은 글씨가 새겨져 있다. 혹자들은 이것을 낙서로 보고 혀를 차며 간다. 그러나 석각이 신분사회였던 조선 당대에 당연시 되던 금석문화라면 인정을 하고 살펴야 한다고 본다. 가야산의 홍류동, 속리산 화양구곡의 금사담, 울산의 반구대, 거창의 수승대, 단양의 사인암에 새겨진 무수한 석각은 오히려 명승의 가치를 더 하고 있지 않은가.
반석에는 눈여겨 볼 것이 많다. 먼저, ‘무릉선원(武陵仙源) 중대천석(中臺泉石) 두타동천(頭陀洞天)’이라는 글씨이다. 봉래 양사언이 썼다고 전하는 이 날렵한 초서체는 400여년의 풍상을 지켜왔으며 무릉계곡의 가치를 드높이고 있다. 또 절반가량 깨어져 나간 박내정이라는 대형석각은 치열한 붕당정치의 유물 같다는 생각을 준다. 이외에도 무릉계, 제일산천, 운집용고 등 빼어난 글씨가 많다. 또한 손톱만한 글씨로 보일 듯 말듯하게 새겨진 석수(石手)의 이름도 숨어있고, 반석에 난초 세 촉도 그려져 있어 볼수록 재미있다.
- 선녀의 천연욕조, 학소대(鶴巢臺)
화엄경의 태두 탄허 스님이 쓴 일주문을 통과하면 삼화사가 나온다. 이곳은 ‘제왕운기’를 쓴 동안거사 이승휴가 책을 빌려보기도 하였던 곳으로 그 역사가 깊다. 절을 뒤로하고 상수리나무가 늘어선 길을 20여분 걸어가면 학소대가 나온다. 학이 둥지를 틀었다는 이곳은 매끈한 화강암이 경사져 있어 관광객들이 다리품을 쉬는 곳이다. 사실 학소대의 진경을 맛보려면 안내판 옆 소로를 따라 4,5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위에 올라서면 황토 빛 석벽에 학소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는 조물주의 뜻인지 천연욕조가 옥빛 물을 담고 있다. 속세의 발길이 쉬 닿지 않은 이곳에서 아래를 굽어보면 우화등선(羽化登仙)의 묘를 맛보게 된다. 이곳을 내려가 다시 큰 길을 따라 오르면 물고기들의 천연 수족관인 옥류동(玉流洞)이 나온다.
- 기암괴석과 선녀탕, 그리고 쌍폭(雙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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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골짜기에서 합수되는 곳에 이루어진 폭포이다. 명산의 장엄함은 바로 여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비류직하(飛流直下)! 이 폭포수가 흘러 동해시민의 생명수인 전천강(箭川江)을 이룬다. 필자가 김수영 시인의 시 ‘폭포’를 공부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른 폭포가 바로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지는' 쌍폭이다.
두타, 청옥에는 천태만상의 기암괴석이 열을 지어 있다. 베틀바위, 비석바위, 사랑바위, 병풍바위, 장군바위, 발바닥바위. 그중 장군바위는 마치 입을 굳게 다문 남성의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이 지역의 박걸남 장군 모습이 저렇게 생기지 않았을까? 병풍바위는 석벽의 절리현상으로 만들어졌는데 장군바위와 나란히 서 있다.
여기서 용추폭포 쪽을 향해 조금 더 올라가면 나타나는 것이 선녀탕. 인공의 철제다리가 바로 위로 놓여 있어 이곳을 지나며 발아래 선녀탕을 볼 때마다 선녀의 살결을 훔쳐보려하는 것 같아 송구스런 마음마저 든다.
쌍폭포는 두 골짜기에서 합수되는 곳에 이루어진 폭포이다. 명산의 장엄함은 바로 여기에 이르러 절정에 이른다. 폭포의 한 갈래는 두타산과 박달령에서, 다른 갈래는 연칠성령과 고적대에서 흘러온다.
폭포 주변에 홀연 광풍이 불어대니 낙엽들이 물과 함께 내리꽂힌다. 비류직하(飛流直下)! 순간,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임진왜란 당시 왜인들에 맞서 화살을 쏘며 항쟁하던 민초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이 폭포수가 흘러 동해시민의 생명수인 전천강(箭川江)을 이룬다. 전천이라는 이름은 그래서 화살 전(箭), 내 천(川)인 것이다!
- 최완수 선생님과 용추폭포(龍湫瀑布)에서
용추라는 석각이 새겨진 아랫 용추폭포보다 더 아름답다. 사진 작가들은 이곳을 많이 찍는다. 조선전기 신광한이 지은 단편 소설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최생우진기’란 최생이라는 사람이 진인(眞人), 즉 신선을 만났다는 뜻이다. 즉 이곳 용추는 선경(仙境)의 영역이다.
쌍폭과 지호지간에 용추폭포가 있다. 폭염인 날, 이 폭포 앞에 1분만 서있어도 몸은 이내 서늘해진다. 이곳은 조선전기 신광한이 지은 단편 소설 ‘최생우진기(崔生遇眞記)’의 배경지이기도 하다. ‘최생우진기’란 최생이라는 사람이 진인(眞人), 즉 신선을 만났다는 뜻이다. 즉 이곳 용추는 선경(仙境)의 영역이다. 폭포 주변 바위에 초서체로 날아갈 듯한 글씨가 새겨져 있으니 바로 별유천지(別有天地)! ‘광릉귀객(廣陵歸客)’이라는 자가 썼다고는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이곳에서 진경을 만나고자 함인가. 겸재 정선도 지기(知己)인 삼척부사 이병연과 함께 이곳 용추에 와 글씨를 남겼다. 폭포를 향해 섰을 때 좌측 석벽에 그들의 함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이곳을 지난여름 간송미술관의 연구실장인 최완수 선생님과 함께 찾았다. 선생님은 항상 웃는 얼굴이셨다.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 주셨다는 모시 한복차림은 마치 선학의 풍모가 어린다. 석벽에서 탁본을 마치고 술을 서너 순배 마신 후 떠나시며 선생님은 “겸재, 사천 선생님, 덕분에 잘 쉬다 갑니다.”라며 폭포를 향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시는 게 아닌가. 학문 하는 분의 자세는 저러하구나하는 생각을 했다.
한편 폭포 석벽에는 ‘용추’와 함께 유한준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유한준, 저 유명한 문구인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를 남긴 바로 그분이다. 삼척부사로 왔던 그는 삼척과 동해 일대 네 군데나 자신의 이름과 시문을 남겼다. 이곳이 그토록 사랑스러웠나 보다.
- 아픈 역사의 기억, ‘검은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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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류동은 물고기들의 천연 수족관이다. 지난 여름 나는 가족들과 여기서 손수건으로 피라미를 잡았다. 손수건을 물속에 펼친 채 네 귀를 잡고 있으면 물고기들이 그 위에서 유영한다. 바로 그 때 손수건을 급히 들어 올리면 두어 마리 잡을 수 있다. 놀이가 지치면 물에 들어가 물고기들과 헤엄을 쳤다.
무릉계곡이 아름다움만을 간직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시인이었던 김지하 시인은 80년대 초반 그의 시집 ‘검은 산 하얀 방’에서 이곳 무릉계에 대한 시를 10수 넘게 썼다. 시는 현대사의 아픔인 6.25 전쟁 때 이곳에서 무참히 죽은 원혼에 대한 진혼곡이다. 수륙대제라는 거창한 의식도 좋지만 남과 북이 하나 되어 ‘검은 산’의 원혼들을 위무하는 그날이 바로 진정한 무릉세계의 참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첫댓글 와아![~](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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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함 가봤으면 좋으련만.....권사님.. 우선 울 목장이라도 어떻게...![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ㅎㅎ](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70.gif)
여름을 즐기러 ~~ 참 좋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