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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손(李繼孫) 신도비명 병서(神道碑銘 碑銘) - 임사홍(任士弘)
성화(成化) 19년(1483년, 성종 14년) 9월 9일(己亥)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이공(李公)이 졸(卒)하였다. 장사를 지낸 이듬해 한 근신(近臣)이 영안도(永安道)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와서 그 도(道) 유생(儒生)들이 지은 사부(詞賦)를 올리고, 인하여 공이 그들과 화창(和唱)한 이유를 아뢰었다.
그러자 임금이 매우 기뻐하며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의논해서 공을 추장(推獎)하라 하니, 특별히 정헌 대부(正憲大夫)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 겸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을 추증(追贈)하고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니, 실로 세상에 드문 성대한 일이었다.
그 7년 후에 사자(嗣子) 이지임(李之任)이 공의 사장(事狀)을 갖추어 가지고 와서 나 임사홍(任士弘)에게 고하기를, “우리 아버지의 공명(功名)과 사업은 국승(國乘)에 실려있으나 그 출처(出處) 시종(始終)에 대한 기록은 더러 자세하지 못합니다.
더군다나 이번의 증작(贈爵)과 융성한 은혜를 천양(泉壤)에 미치게 하려고 묘도(墓道)에 비석을 세워 후세에 보는 자들의 법을 삼기를 원하니, 비문을 지어주시면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사장을 상고해 보건대 공의 휘(諱)는 계손(繼孫)이요. 자(字)는 인지(引之)로 이씨(李氏)의 계파(系派)는 여강(驪江)의 망족(望族)이다. 학사(學士) 이고(李皐)가 공의 비조(鼻祖)요,
증조 이진(李珍)과 할아버지 이유(李猷)는 모두 관직에 있었으며 아버지 이의인(李依仁)은 광흥창 부승(廣興倉副丞)으로 생을 마쳤는데 공의 귀(貴)함으로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되었다. 경시서 영(京市署令) 송구빈(宋九贇)의 딸에게 장가들어 공을 낳았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다. 힘써 배워 정통(正統) 정묘년(丁卯年, 1447년 세종 29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그해에 급제하여 교서관 교감(校書館校勘)에 보직되었다. 여러 관직을 역임하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이르러 의정부에서 의논하여 공을 검상(檢詳)으로 삼으니, 세조(世祖)께서 영의정 강맹경(姜孟卿)에게 말하기를, “이모(李某)는 나 역시 부리고 싶으니, 경은 천인(薦引)하지 말라.” 하였다.
경진년(庚辰年, 1460년 세조 6년)에 상당군(上黨君) 한명회(韓明澮)가 양계 순찰사(兩界巡察使)가 되어 공을 불러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았다. 공이 어머니가 병환 중임을 상당군에게 고하니, 사적인 일을 핑계대었다고 아뢰어 웅천(熊川)으로 유배되었다.
그때 대마도주(對馬島主)가 우리나라의 벼슬을 받기를 청하니, 임금이 사신을 보내어 명(命)을 선포하고자 했으나 마땅한 사람이 없어 어렵게 여기다가 특별히 공을 불러서 1급(級)을 진급시켜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로 삼았다. 해도(海島)에 이르자 갑자기 원하지 않는다고 알려와 그 사행(使行)이 정지되었다.
신사년(辛巳年, 1461년 세조 7년)에 세자 시강원 우보덕(世子侍講院右輔德)에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 하루는 임금이 술에 취하여 공을 놀리기를, “상당군(上黨君)에게 붙좇지 않은 것은 경의 잘못이었다.” 하였다.
갑신년(甲申年, 1464년 세조 10년)에 강원도에 흉년이 들자 공을 관찰사로 내보냈으니 황정(荒政)을 잘하기 때문이었다.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품계가 올라 1년 동안 그대로 유임(留任)하였다. 조정으로 들어와 중추부사(中樞府事)가 되었는데 임금이 공경(公卿)들을 내전(內殿)으로 불러보면서 공에게 이르기를, “경이 강원도민을 잘 진구(賑救)하여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그래서 강원도를 경에게 위임하고자 하니, 경은 그곳에 가서 다스리겠는가?” 하니, 공이 대답하기를, “오직 임금께서 명하신대로 하겠습니다.” 하였다. 그리고는 의정(議政) 황수신(黃守身)을 돌아보니, 공에게 이르기를, “황수신은 이미 정승(政丞)이 되었으니, 경은 어렵게 여길 것이 없다.” 하였으니, 그 기대함이 이와 같았다.
얼마 후 형조 참판을 제배했다가 예조로 옮겨 도총부 부총관(都摠府副摠管)을 겸임하였다. 평안도민들이 유리(流離)하는 자가 많자 공을 순무사(巡撫使)로 명하고 가정 대부(嘉靖大夫)로 승진시켰다. 기축년(己丑年, 1469년 예종 원년)에 함경도 관찰사(咸鏡道觀察使)가 되었다.
함경도는 북쪽 오랑캐와 가까워서 그 풍속이 활 쏘고 말 타는 일만 좋아하고 학문을 하지 않아 공은 그들을 깨우치고자 하였다. 그래서 조정에 품신하여 학교(學校)를 일으켜 난신(亂臣) 노비(奴婢)로 호적에서 누락된 자를 쇄환(刷還)하여 소속시키고, 명민한 자제로 자격이 있는 자를 선발하여 모아서 가르치면서 공이 친히 수업을 하였다.
또 경적(經籍)을 군현(郡縣)에 반포해 주고, 문신(文臣)을 가려 교관(校官)으로 삼고 사시도회과시법(四時都會課試法)을 설치하여 권려(勸勵)해서 사람들이 기꺼이 학문하기를 청하니, 한 도내가 크게 교화되었다. 이를 말미암아 매 식년(式年)마다 영안도(永安道)는 생원(生員)과 진사(進士)가 된 자가 많았고, 과거에 급제하여 현달한 벼슬을 한 자까지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그곳 백성들이 부모처럼 떠받들며 사당(祠堂)을 세워 제사를 지내고 있으니, 문옹(文翁)이 촉(蜀)을 교화시킨 일1)에 비교해도 크게 뒤지지 않을 것이다. 신묘년(辛卯年, 1471년 성종 2년)에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병조로 옮겼다.
이듬해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자헌 대부(資憲大夫)로 품계가 올랐다. 공이 평양에 도착하여 귀후사(歸厚司)를 설치하여 관곽(棺槨)을 만들어 민간에 팔아 그 은혜를 입게 하였다. 갑오년(甲午年, 1474년 성종 5년)에 형조 판서에 임명되어 몇 달이 지나 옥이 텅 비게 되니, 임금이 가상히 여겨 상(賞)을 내렸다.
다음 해에 중추부사로 옮겨 회간왕(懷簡王)의 고명(誥命)을 청하는 일로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질(金礩)의 부사(副使)가 되어 경사(京師)에 가서 준허(準許)를 받고 돌아오니, (임금이) 장획(臧獲)과 전토를 하사하였다. 병신년(丙申年, 1476년 성종 7년)에 황해도 관찰사가 되고, 이듬해인 정유년(丁酉年, 1477년 성종 8년)에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다.
무술년(戊戌年, 1478년 성종 9년)에 경기 관찰사가 되었는데, 이해 겨울 가벼운 죄로 아산(牙山)에 유배되었다. 신축년(辛丑年, 1481년 성종 12년)에 다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임명되어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를 겸대하였다가 한성 판윤(漢城判尹)과 병조 판서(兵曹判書)로 옮겼다.
계묘년(癸卯年, 1483년 성종 14년)에 글을 올려 사직하고 중추부로 옮겼다. 갑진년(甲辰年, 1484년 성종 15년)에 또 병으로 사직하니, 임금이 의약(醫藥)을 내려 치료하게 했으나 효험이 없어 졸(卒)하니, 향년(享年) 62세이며, 시호(諡號)는 경헌(敬憲)이다.
공의 배위(配位) 정씨(鄭氏)는 문충공(文忠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손녀이며, 계배(繼配) 이씨(李氏)는 정랑(正郞) 이영서(李永瑞)의 딸이다. 아들 딸을 다 두었으니, 이지임(李之任)은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이요, 이지화(李之和)는 진사요,
이지시(李之時)는 사맹(司猛)이며, 딸 하나는 군자감 판관(軍資監判官) 최철중(崔鐵重)에게 출가하고, 하나는 지금의 승정원 좌승지 정경조(鄭敬祖)에게 시집갔다. 손자 손녀 약간 명이 있다.
공은 평생 동안 기우(氣宇)가 크고 넓었으며 마음씨가 평탄하였다. 이미 문의(文義)에 능숙하고 이도(吏道)에 능통하여 관직에 있으면서 경(敬)으로써 상관을 섬기고 성(誠)으로써 너무 세밀하게 따지는 일이 없었어도 사람들이 호도(糊塗)하지 않았다.
너그러운 도량이 있어 신망(信望)이 조정에 미덥게 되었으며 평소 혹 불평스러운 일을 당하면 한번 웃어넘기고 말았으니, 공이야말로 군자(君子)라고 하겠다. 아! 공의 성대한 덕을 관원이면 그 누가 모르겠는가? 영안도에서 시행한 일들은 풍속을 교화하는 데 큰 공을 부담하였고, 나라의 원기(元氣)를 부축하여 도왔으며 그 나머지 공명(功名)과 사업은 생략하고 쓰지 않아도 될 것이다. 내가 표(表)하여 드러내고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성인의 도(道)는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해가 중천(中天)에 운영되는 것과 같고, 사람은 현명하고 어리석음이 없어 지혜로운 자가 가르치면 밝게 되네. 북쪽 풍속이 태어나면서부터 굳세어 궁마술(弓馬術)을 익혀 성격을 이루었고, 시서(詩書)는 눈으로 본 적이 없어 예의(禮義)를 도리어 가볍게 여겼네.
공이 가르침 펴기를 좋아하여 마음속으로 불쌍하게 여기어 여러 방법으로 권면하고 장려하여 오경(五經)을 연구하도록 강론하고 가르쳤네. 상도(常道)를 굳게 지키면 저절로 덕(德)을 좋아하게 되니 옮겨져 공에게서 듣게 되었네. 책을 지고 다투어 배우러 오고 사책(射策)을 명정(明庭)에 바쳤네.
무기를 버리고 글공부하고 갑옷을 잠영(簪纓)으로 바꿨네. 촉군(蜀郡)이 문옹(文翁)에게 교화되어 새북(塞北)이 영원히 편안하니, 여러 백성들이 아버지처럼 떠받들며 지은 사당(祠堂)이 높네. 임금이 그 치적 가상하게 여겨 벼슬을 내리고 총애하였네.
큰 은혜가 많은 사람들 눈에 가득하니 구천(九泉)의 영혼도 놀랐으리. 공의 도량은 바다와 같고 공의 재주는 가을에 나는 송골매 같았네. 여러 조(曹)와 대(臺)의 벼슬 두루 거쳐 명위(名位)가 높아져 구경(九卿)이 되었네. 그 청렴한 풍도와 고상한 의리는 조정의 모범이 되었네.
어찌하여 임진년(壬辰年, 1472년 성종 3년)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제경(帝京)에 조회(朝會)했나. 구포(仇浦)는 동쪽을 향해 흐르는데 그 중간에 8척 되는 무덤이 있네. 산천에는 초목이 매우 무성하고 영기(靈氣)는 광채와 연결지어져 있네. 자손이 이어져 가성(家聲)이 천년까지 전해지기를 빈다네.
[각주]
1) 문옹(文翁)이 촉(蜀)을 교화시킨 일:한(漢)나라 문옹(文翁)이 경제(景帝) 때 촉군(蜀郡)을 다스리면서 성도(成都)에다 학궁(學宮)을
지어 속현(屬縣)의 자제들을 입학시켜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성적이 우수한 자는 군현(郡縣)의 관리로 임명하니 문교가 크게 일어났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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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李繼孫 碑銘[任士弘]
成化十九年九月己亥, 知中樞府事李公卒。 旣葬之踰年, 有近臣奉使永安還, 上其道儒生所述詞賦, 仍言公興和之由。 上嘉甚, 命有司議所以奬公, 特贈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藝文館大提學, 遣官賜祭, 實稀世之盛事也。 後七年, 嗣子之任具其事狀, 告于士弘曰: “惟先考之功名事業, 雖有國乘, 其出處終始, 記或不詳。 況今贈爵隆恩, 覃于泉壤? 願樹石墓道, 用武後之觀者, 幸爲之文。” 按狀, 公諱繼孫, 字引之。 李系驪江望族, 有學士諱臯, 是公鼻祖, 而曾祖珍, 祖猷, 皆有官。 考依仁, 終廣興倉副承, 以公貴贈兵曹判書, 娶京市署令宋九贇女生公。 幼聰慧力學。 正統丁卯, 中司馬試, 其年登第, 補校書校堪。 歷官至禮曹正郞, 議政府議公爲檢詳, 世祖謂領議政姜孟卿曰: “李某, 予亦欲使, 卿勿薦引,” 歲庚辰, 上黨君諱明澮兩界巡察使, 辟公爲從事, 公以母病告, 上黨啓以私託, 謫于熊川。 時對馬島主請受職于我, 上欲遣价宣命, 而難其人。 特召公還, 進階一級, 副知通禮門事。 旣到海島, 旋報不願, 停其行。 辛巳, 以世子右輔德, 拜承政院同副承旨, 陞左副。 一日上酒酣, 戲公曰: “不附上黨, 卿之過也。” 甲申, 江原道歲侵, 出公爲觀察使, 以能荒。 進階嘉善, 仍留一期。 入爲中樞副使, 上召見公卿於內殿, 謂公曰: “卿能救江原民, 予甚嘉之。 欲以江原一道委卿, 卿其往彼而治耶?” 公對曰: “惟上所命。” 顧視議政, 黃守身謂公曰: “守身旣爲政承, 卿勿以爲難也。” 其期待若是。 尋拜刑曹參判, 轉禮曹、兼都摠府副摠管。 平安道民多流移, 命公巡撫, 進階嘉靖。 己丑, 咸鏡道觀察使, 道近北狄, 其俗喜弓馬, 不事學問。 公欲誘進之, 乃申于朝, 修起學校, 刷亂臣奴婢之漏籍者以屬, 選子弟開敏有資者, 聚而學之, 公親自講授。 又請頒經籍於郡縣, 擇文臣爲校官, 設四時都會課試法以勸勵之, 人樂爲學, 一道大化。 由是每式年, 永安爲生員、進士者多, 至擢巍科, 躋顯仕者亦有之。 至今其人民戴如父母, 爲立祠堂以祭之, 比之文翁化蜀, 亦未多讓。 辛卯, 拜吏曹參判, 轉兵曹。 壬辰, 平安道觀察使, 進階資憲。 公到平壤, 設歸厚司, 造棺槨許買, 民蒙其惠。 甲午, 拜刑曹判書, 居數月囹圄空虛, 上嘉賞之。 乙未, 移中樞府事, 以請懷簡王誥命, 副上洛府院君金礩朝京, 蒙准以還, 賜臧獲土田。 丙申, 黃海道觀察使。 丁酉, 拜大司憲。 戊戌, 爲京畿觀察使。 是年冬, 以微罪謫牙山。 辛丑, 復拜知中樞府事、兼知義禁府事, 轉漢城判尹、兵曹判書。 癸卯, 上書辭職, 移中樞。 甲辰, 又以病辭, 上賜醫藥, 治療不效, 享年六旬有二。 諡曰敬憲。 公配鄭氏, 文忠公圃隱孫女也: 繼李氏, 正郞永瑞女也。 具有男女: 曰之任, 司憲監察; 曰之和, 進士: 曰之時, 司猛。 女一適軍資判官崔鐵重, 一適今承政院左承旨鄭敬祖。 孫男女若干。 蓋公平生氣宇寬弘, 心地坦夷。 旣熟於文, 兼通乎吏, 居官以敬, 事上以誠, 無察察之明, 而人不以爲糊塗。 有休休之量, 而望已孚於廊廟, 居常或遇不平之來, 但見一笑而已, 公可謂大度君子也。 嗚呼! 惟公之德之盛, 搢紳孰不知? 而所設施於永安者, 實何功於風和 而扶翊乎國之元氣, 則其餘功名事業, 略而不書可也。 吾表而出之爲銘。 銘曰
聖道亘古今, 如日中天行。 人惟無賢愚, 智者敎以明。 北俗生來梗, 弓馬習與成。 詩書目不睹, 禮義還爲輕。 惟公好敷敎, 憫惻由中情。 勸礪以多方, 講授窮《五經》。 秉彝自好德, 轉移惟公聽。 負笈爭升堂, 射策獻明庭。 鉛槧謝戈戟, 兜鍪換簪纓。 蜀郡化文翁, 塞北其永寧。 群氓戴如父, 祠宇高崢嶸。 宸心嘉乃績, 賜爵頒寵榮。 汪恩溢衆目, 九泉魂應驚。 公量滄海洪, 公才秋鶻橫。 歷揚遍臺、曹, 名位崇九卿。 淸風與高義, 朝著爲儀形。 胡爲歲在辰, 騎箕朝帝京 仇浦向東流, 中有八尺塋。 山川儘蔥鬱, 靈氣結華英。 有子仍有孫, 千祈垂家聲。<끝>
國朝人物考十四 / 卿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