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헌집 제9권 / 묘지명(墓誌銘)
인천 채공 묘지(仁川蔡公墓誌)
죽와(竹窩) 채공(蔡公)의 맏손자 정식(廷植)은 내가 공의 문하에 출입한 지 30년이 되었기에 공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서, 자신이 찬술한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가장에 담긴 사적 가운데 중요한 것을 뽑아서 묘지명을 지어 후세에 남기어 불후하도록 해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듣고 가상하게 여기고, 그 가장을 살펴보니 다음과 같았다.
공은 어버이를 섬김에 지극히 효성스러워, 겨울에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에 시원하게 해드리며 또 맛있는 음식을 해드리는 것〔瀡滫〕을 몸소 스스로 적의(適宜)하게 하였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부터 어머니를 섬기는데 더욱 힘을 다하여 심지(心志)를 기르는 데 극진히 하였으며, 늙어서도 오히려 어린아이의 장난을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염하고 장례 지냄을 정례(情禮)에 맞게 하였으며, 소식(素食)하며 삼년상을 마쳤다. 제삿날에는 비통해하고 애달파하며 앉아서 닭이 울 때까지 기다렸다. 일을 잘 처리하는 국량이 있어서 세 번이나 천금을 모았다.
그러나 자기의 재산 수익에 쓰지 않고, 먼 조상을 위해 묘도(墓道)를 보위하는 것과 유문(遺文)을 간행하는 것, 그리고 소암서원(嘯巖書院)의 주방과 재사(齋舍)를 설치하는 것에 사용하였고, 또 두 동생과 사촌 동생을 위해 각각 재물로 도움을 주어서 백 명의 식구가 얼고 굶어죽는 일이 없게 하였다. 맏손자는 총명하고 비범하였는데, 공이 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성취시켜주고 시례(詩禮 가훈)의 유업(遺業)을 무너뜨리지 않게 하였다.
대대로 낙동강의 사통오달의 거리에 살았는데, 곳집의 양식을 내어 길 가는 사람들을 대접하여, 원근의 사람들로 하여금 공의 집이 건재해 있음을 알게 하였다. 또 한편으로 상수학에 통달하였는데, 전답 조세의 규칙에 대해 고을 사람들이 매양 의심나고 어려운 점을 공에게 나아가 해결하였다. 세금을 내어 나라에 바칠 때는 항상 다른 사람보다 앞서서 하였기에 대문 앞에는 세금을 징수하는 아전이 보이지 않았다.
아! 공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우며 강직하고 방정하며, 또 신중하고 치밀하며 활달하고 대담하였기에 업적에 나타남이 이와 같은 것이 있었으나 세상에서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았고 세상에서도 또한 참으로 공을 아는 사람이 없었으니, 애석하구나.
공의 휘는 국렬(國烈)이고 자는 경심(景深)이며 호는 죽와(竹窩)이며 본관은 인천(仁川)이다. 시조는 휘 무선(茂先)이니 고려 시대에 추밀원사(樞密院事)를 지냈으며 그분 뒤에 대대로 경상(卿相)의 벼슬을 이었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 휘 륜(倫)은 필선(弼善)을 지냈으며 예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6대 뒤 투암(投巖) 선생 휘 몽연(夢硯)은 한강(寒岡) 선생을 좇아 배웠는데 학문에 있어서의 지결(旨訣)을 전수받았으며, 이조 참의에 증직되었다.
이분이 병조 좌랑(佐郞) 휘 무(楙)를 낳았으니 증직이 참판이고 호는 백포(柏浦)이다. 투암과 백포 부자는 모두 소암서원에 제향 되었으니, 공에게 각각 7대조와 6대조가 된다. 조부의 휘는 두한(斗漢)으로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사함(師涵)이며, 어머니는 달성 서씨(達城徐氏)로 도복(道復)의 따님이다.
공은 정조 을사년(1785, 정조9)에 태어나 금상 갑자년(1864, 고종1)에 돌아가셨는데, 부(府)의 서쪽 죽전촌(竹田村) 왼쪽 정향(丁向) 언덕에 장례를 지냈다. 부인은 봉화 금씨(奉化琴氏)로 정리(廷鯉)의 따님인데, 공보다 6년 전에 죽었으며 묘소는 퇴곡(退谷) 모향(某向)에 있다.
자식이 없어 둘째 동생 국표(國標)의 맏아들 직(溭)을 양자로 들였다. 직은 1남 2녀를 두었으니, 아들은 정식(廷植)이고 딸은 손종옥(孫鍾玉)과 유규환(柳奎煥)에게 각각 시집을 갔다.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 송희준 (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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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仁川蔡公墓誌
竹窩蔡公之胄孫廷植。謂福樞客公門三十年。有所深知。持所撰家狀而示余曰。願最其蹟而銘于墓。以圖不朽。余聞而嘉之。按其狀。公事親至孝。溫凊𣺫瀡。躬自適宜。自喪先公。尤竭力於母夫人。志養備至。老猶嬰兒戱。及遭艱。殮肂稱情禮。喫素終制。遇忌悲哀。坐而待鷄。有幹局。三致千金。不修産利。爲遠祖衛墓道。刊遺文。設嘯院之厨庫齋舍。爲二弟若從父弟。各資財産。百口無凍餒。胄孫聦異。公勤心成就。勿墜詩禮緖業。世居洛江通衢。傾囷引接。使遠近知有某家。又傍通象數。田賦章程。州閭每就决疑難。奉公常先於人。門不見吏。噫。公仁孝而剛方。愼密而濶大。見於事行者有如是。而公不求知於世。世亦無眞知者。惜乎。公諱國烈。字景深。竹窩其號也。仁川人。初祖諱茂先。麗樞密院事。世襲卿宰。逮聖朝。有諱倫。官弼善 贈禮議。六傳至投巖先生諱夢硯。從寒岡先生學。得傳旨訣。贈吏議。生佐郞諱楙。贈參判。號柏浦。父子並享嘯巖院。爲公七六世祖也。祖諱斗漢。副護軍。考諱師涵。妣達城徐氏。道復女。公生正廟乙巳。卒當宁甲子。葬府西竹田村左丁向原。配奉化琴氏。廷鯉女。先公六年卒。墓退谷某向。無育。以仲弟國標長子溭爲后。有一男二女。男廷植。女孫鍾玉,柳奎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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