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세상 끝 날까지...
가톨릭교회는 유대교로부터 독립하여 로마제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습니다.
로마제국을 토대로 가톨릭신앙은 세계로 전파되었습니다.
기묘한 방법으로 전해진 신앙은 놀라운 연으로 우리 각자에까지 전해졌고,
지금도 계속 전파되면서 고단한 삶에 용기와 희망을 주고 있습니다.
1) 로마제국과 유럽선교
300년 동안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초대교회 신자들은 놀라운 열정으로 신앙을 지켰고
마침내 313년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380년 가톨릭은 로마의 국교가 됨으로써 로마제국이 모두 가톨릭이 되었습니다.
476년 게르만민족이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키고 유럽의 패자가 되었는데,
게르만민족도 가톨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렇게 되어 가톨릭은 온 유럽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이후 1500년대까지를 중세라고 하는데 중세 천년동안 가톨릭은 유럽전체의 유일한 종교가 되었습니다.
1500년대에 들어오면서 유럽 내에 머물러 있던 가톨릭은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 중남미선교
1400년대 중엽이래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막강한 해군력으로 세계로 진출하기 시작했습니다.
‘무적함대 스페인’이라는 말이 이때 생겨난 말입니다.
포르투갈의 마젤란은 1519-1522년에 최초로 세계일주 항해를 성공하였습니다.
포르투갈은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하거나 무역을 통해 국가의 부를 쌓았습니다.
동인도,
아프리카,
브라질 등 도처에 포르투갈 식민지가 건설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는 마카오에 거점을 쌓고, 중국과 일본 등과는 무역을 통해 국력을 증진시켰습니다.
일본은 이 시기에 서양과 교류하는 개방정책을 폈고 국력을 쌓아
우리나라를 추월하기 시작한 것으로 평가됩니다.
그런 힘으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양반들의 기득권싸움과 쇄국정책으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되고 말았던 것이지요...
스페인도 포르투갈 못지않은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컬럼부스는 1492년 아메리카를 발견하였는데, 중남미의 섬들을 인도인줄 착각하고 서인도로 명명하였습니다.
페르난도 코르테스는 1519-1521년 멕시코를 정복하였습니다.
1520년에는 칠레가,
1525년에는 아르헨티나가,
1532년에는 페루가 정복되었습니다.
당시 난폭한 정복자들은 식민지에 가톨릭을 전파하는 것을 거룩한 의무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정복과 동시에 토속종교를 금지시키고 가톨릭신앙을 강제로 부여하였습니다.
당시 가톨릭교회의 선교는 ‘식민지마인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 바탕에는 유럽사람들의 ‘오만함’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유럽이 세상의 중심이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야만인,
다른 종교는 모두 미신이니 다른 종교나 문화는
모조리 파괴하고 가톨릭교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강제적인 선교와 식민지정책은
마야문명과 잉카문명과 같은 식민지의 종교와 문화를 파괴하였습니다.
강제적인 개종정책은 원주민들에게 가톨릭을 압제자의 종교로 보게 하여 반감을 샀고,
오늘날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3) 인도와 중국선교
하지만 예수회는 달랐습니다.
놀랍게도 예수회는 당시 이민족종교와 문화를 금지하던 사고를 버리고,
현지에 적응하는 ‘적응주의’를 선교에 도입해서 비상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예수회창설자 중의 한사람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1506-1552)는
1542년 인도의 고아에서 아주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1545-1547).
이후 일본으로 진출하여 복음을 전하고 중국으로 가던 중 1552년, 마카오 인근 삼주도에서
열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사람들은 그를 동방의 사도로 불렀습니다.
예수회 로베르트 데 노빌리 신부(de Novilli, 1577-1656)는
이민족종교와 문화를 금지하던 사고를 버리고,
현지에 적응하는 ‘적응주의’를 주창하고,
참된 선교는 원주민의 생활양식과
사고방식에 적응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로베르트신부는 현지의 문화와 사상을 배척하는 것이 선교에 방해가 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적응주의는 인도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중국선교에 도입되어 크게 성공을 거두게 됩니다.
마태오 릿치(1552-1610)와 아담 샬(1592-1666) 같은 예수회 신부들은
중국선교에서 적응주의를 도입하였습니다.
이들은 중국인들이 경건하게 살아왔고,
여러 신들을 경배해왔음을 인정하여
그들 고유의 문화와 신인식을 존중했습니다.
그리하여 유교의 상제(上帝)개념을 하느님개념으로 환원시켰고,
조상숭배인 제사나 여러 의식들도 전통으로 존중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모든 신인식은 가톨릭 신앙에서 완성될 수 있음을 제시하여 거부감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서양문화를 중국황제에게 전하면서 황제의 신임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황제의 친구요, 조언자로 활동하면서 선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주실의와 같은 교리서를 저술하여 이후 조선선교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예수회의 적응주의로 중국에서 가톨릭은 빠르게 성장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황청은 예수회의 적응주의를 못마땅하게 보았습니다.
급기야 1645년, 교황 인노첸시오 10세는 적응주의를 금지시켰습니다.
중국의 모든 종교나 문화는 미신에 불과하며 모두 없애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리하여 제사를 비롯하여 전통적인 유교의식도 미신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중국에서 예수회신부들의 활동이 중지되었고,
급기야 교황청은 예수회를 해산하기에 이르렀습니다.(1770년).
예수회가 빠진 자리에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꼬회가 채웠습니다.
이러한 교황청의 처사에 중국황제는 격노했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중국, 나라이름도 세계의 중심이라고 중국이라고 지었던 중국에서
결국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철저한 박해로 가톨릭은 지하로 숨어들거나 거의 박멸되었습니다.
이러한 교황청의 선교정책은 우리나라에도 박해의 빌미를 주었고(제사거부와 진산사건),
이후 혹독한 박해로 조선교회는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1939년에 와서야 교황청은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적응주의는 괜찮은 것이다. 제사도 괜찮은 것이다...’ 하지만 너무 늦었습니다.
이미 죽을 사람은 다 죽은 뒤였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리더의 판단미스는 늘 큰 고통과 수많은 손실을 가져오는 것 같습니다.
4) 일본선교
1549년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일본으로 건너와 복음을 전했습니다.
3년 동안 일본에서 선교하던 프란치스코는 중국을 향하여 떠나고
그 후계자들의 활약으로 일본에서 가톨릭은 비약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1592년-1598년 임진왜란 기간동안에는
포로로 잡혀온 조선인들 가운데 일부도 가톨릭신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꾸가와 이에야스가 막부시대를 열면서
가톨릭교회를 박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도꾸가와는 가톨릭교회를 방치할 경우 정권에 심각한 도전세력이 될 것으로 보았습니다.
일본 가톨릭은 1868년 명치유신으로 막부시대가 끝날 때까지 250년간 집요하고 철저한 박해를 받았고
신자들은 모두 지하로 숨어들었습니다.
수많은 순교자가 배출되었고, 그 기간도 길었습니다.
일본의 박해는 조선의 박해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기간도 길었습니다.
사제없는 신앙생활 기간이 길어지면서 신자들의 신앙은 정통교리를 벗어나게 되었고
토속종교와 섞이게 되면서 밀교의 형태를 띠게 되었습니다.
1868년 명치유신으로 일본이 근대화의 길을 걸으면서 사제가 다시 오게 되어 흩어진 신자들을 찾았는데,
일부는 돌아오게 되었지만 일부는 사제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일본 가톨릭은 명치유신 이후에 선교한 신자들이 대부분이고,
그 이전의 신자들은 가톨릭신앙에서 많이 이탈된 신앙으로 규모는 적지만
독자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이들을 은신자(隱信者)라고 하고, 이들이 신봉하는 신을 납호신(納戶神)이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은신자들은 토속종교와 합쳐져 가톨릭에서 변질된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본 가톨릭신자는 40만 여명으로 극히 적습니다.
선교를 위해 몸바친 모든 선교사들의 안식을 빕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선교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영육간에 건강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아멘!
- 대구대교구 전광진 엘마노신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