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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현대미술은 장르의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전통적인 조각이나 소조보다는 좀 더 확장된 의미에서의 조각분야의 활동이 다양해지고 있으며 재료에 있어서도 장르의 융합이 가능한 재료를 선호하며 조각예술의 지형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디지털 시대를 맞이하여 테크놀러지와 컴퓨터 사용으로 진정한 아날로그의 개념이 무색해지고 있는 오늘날의 바쁜 현대인들에게 과연 시간과 정성을 들인 노동으로 흘리는 땀과 손 맛의 정성은 어떤 의미로 다가설까. 돌이라는 재료가 갖는 물질적 특성인 묵직하면서도 단단하고 투박한 성질을 망치나 정으로 깨거나 쪼아낼 때 느껴지는 맛은 다른 어떤 재료보다 자신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작가들은 작품에 임하고 있다. 하나하나 깨고 수백 번 쪼아 정성을 들이는 돌 조각에 진한 예술정신이 녹아 들어 '돌'에 대한 애착은 이미 그들의 삶이 되었다. '돌 이야기- 돌 조각의 맛과 멋'展에서는 인류와 함께 해 온 돌의 의미를 되새겨 보며 돌이라는 재료를 통해 표현되는 돌 조각의 맛과 멋을 찾아보는데 의미를 둔다. 이번 전시는 한국의 돌 조각의 전통을 이어 온 작가들로 구성되며 화강암과 대리석, 오석 등 다양한 질감의 돌을 연마해 돌 속에 생명력을 불어 넣어 삶을 이야기하고 사랑하는 돌조각의 연금술을 통해 돌을 사랑하는 조각가들의 진정성을 만나게 될 것이다. ■
조각가의 손, 창조로 향한 출발점 ● "가장 훌륭한 예술가는 질료의 지나침에 의해 가두어진 것 같은, 그리고 이성에 순응하는 손만이 해방시킬 수 있는 그것, 돌 한 덩어리가 감추고 있는 형상을 제외하고는 아무런 아이디어도 가지고 있지 않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 잘 알려진 바대로 미켈란젤로는 돌덩어리에서 군더더기를 덜어냄으로써 그 속에 담겨있으나 갇혀있는 형태를 해방시키고자 했다. 조각에 대한 그의 이러한 생각은 그가 애초에 교황 율리우스2세의 무덤을 위해 계획했던 「노예」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아울러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작업을 하다 결국 미완성인 채 남아있는 「론다니니의 피에타」에서 미켈란젤로가 돌 속에 갇힌 형태를 발견하기 위해 투입한 고뇌의 흔적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가 망치로 쳐내었기 때문에 예수의 얼굴과 흉상은 사라져버렸으나 돌덩어리 속에서 불쑥 솟아오르고 있는 듯한 예수의 두 다리와 기이하게 달려있는 팔 하나는 나선형으로 올라가고 있는 예수의 신체와 그 위에 업혀있는 성모 마리아의 길게 표현된 신체와 함께 구원을 위한 희생이란 메시지를 전달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르네상스시대에 이탈리아를 풍미한 신플라톤주의의 영향과 함께 종교개혁운동의 격랑을 겪었던 노경의 미켈란젤로는 육체의 감옥을 상징하는 돌덩어리로부터 영혼이 해방되기를 갈망하는 심정으로 이러한 형태를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조각은 단지 끌과 망치로 단단한 돌을 깨고 쪼는 노동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 영생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작품을 경건하게 만드는 요인이다.
미켈란젤로의 이성에 '순응하는 손'은 로댕(Auguste Rodin)에 이르러 다시 한번 비약한다. 로댕의 작품 중에서 두 손을 모은 「성당(Cathedral)」, 대지의 알이라 할 수 있는 돌덩어리를 움켜쥔 「신의 손」, 몸을 웅크리고 있는 여체를 잡으려는 「악마의 손」에 이르면 조각가의 손은 이제 단지 돌을 깎는 장인이나 기술자의 손이 아니라 창조자의 손으로 신격화되고 있다. 대리석이 아무리 아름다운 질감과 색채를 지닌 것이라 하더라도 돌 자체로는 생명이 없다. 사람들이 조각가가 만든 조각작품을 통해 생명을 느끼는 순간 가공된 돌은 단순한 물질의 차원을 넘어선 의미 있는 형태가 된다. 비단 대리석뿐만 아니라 인류에게 돌은 가장 오래된 조각재료 중의 하나였다. 구석기시대를 살았던 인류의 조상들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 맥락에서 제작된 우상이지만 그들의 염원이 반영된 것이란 점에서 물질 속에 깃든 의미를 해석할 때 비로소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이는 추상조각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고 체적을 최소화하여 물 속을 유영하고 있는 물고기를 연상시키는 브랑쿠지(Constantin Brancusi)의 조각이 비록 대상을 구체적으로 재현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을 통해 단순하고 추상화된 형태 속에 생명으로 향한 그의 동경을 파악할 수 있다. 문제는 손이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기암괴석이 불러일으키는 경이는 모방될 때가 아니라 자연 속에 있을 때 빛을 발할 수 있다. 그러나 조각가가 만들어놓은 형태는 다른 차원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상상력을 자극하고 형태의 근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며, 양식적, 형태적 독창성과 유사성에 대한 관심을 논리적으로 서술하게 만드는 동기를 부여한다.
돌로 향한 정열 ● 일제시대 활동한 김복진(金復鎭) 이래 우리나라에서도 근대적인 조각이 시작하면서 신기원을 개척하였으나 초기에는 대부분 소조나 목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해방 이후 김종영(金鍾瑛)이 석조로 추상세계를 개척했으며 전뢰진(全礌鎭)은 한결같이 한국산 화강석을 재료로 꾸준하게 동심의 세계를 표현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한국의 석조를 대표하는 조각가라고 평가할만하다. 소조와 목조를 병행한 윤영자(尹英子)와 강태성(姜泰成) 또한 주로 석조에 매진하고 있으므로 이 원로조각가들은 한국 현대석조각의 산 증인이자 석조의 발전을 견인한 선배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재료에 비해 많은 시간과 노동을 필요로 하는 석조는 체력과 인내심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오로지 이것에 전념하기 위해 남다른 의지와 자부심을 요구한다. 요즘처럼 미디어가 대세가 돼버린 시대에 '돌 이야기 –돌 조각의 맛과 멋'에 참가하는 조각가가 80여명에 이른다니 석조를 구태의연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얼마나 경솔한지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돌도 다른 물질과 마찬가지로 재료의 하나이므로 돌을 다룬다는 것만으로 가치를 부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유구한 전통 속에서 동시대에 부응하는 미적 특질을 발견할 필요도 있고 미켈란젤로가 말했던 것처럼 돌 속에 갇혀있는 형태를 해방시킬 필요도 있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숙련된 손' 못지않은 자유로운 상상력과 사고의 유연성이 아닐까. 나로서는 이 전시에 참가하는 조각가들을 통해 풍부한 석조전통의 맥이 끊이지 않고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개념이 물질과 형태를 추월해버린 시대에 돌 조각만의 고유한 미적 특질을 구현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 최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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